-쏴아아아아!!!
안개가 걷히고 드러나는 커다란 범선 한 척.
비록 선두에 자리 잡은 선수상의 목이 부러져 그 위엄은 한풀 꺾였지만 부러진 단면을 짓밟고 피레아를 치켜든 레지나의 노기 가득한 얼굴은 제 부하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기 충분했다.
“림피아의 딸이 명령한다!!!”
쿠우우우우…
여지껏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진중한 목소리.
파도가 흔들리고 갈라진 파도가 부딪히며 현악기를 켠 듯한 웅장한 바다소리를 자아냈고 갈라진 파도 한가운데 굳건히 서 있던 레지나는 파도 소리만이 가득한 바다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파도를 몰아라, 바다를 울려라-!!!”
품격을 업고 바다를 뒤흔든 목소리가 흩어졌다.
필리아의 배 위에 올라탄 모두가 숨죽여 바다를 바라보던 그때 쏴아아-! 요동치는 파도가 그 몸집을 불리고 불리더니 파도 한가운데 선 레지나의 돛대 그 이상으로 높아졌다.
물결치는 파도가 뒤엉키고 산처럼 높아지기 시작하자 갑판 위의 선원들은 하나같이 숨죽이며 파도를 바라봤다. 점점 높아져 하늘을 찌르는 게 아닐까 싶던 그때 파도 하나가 흩어지며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어, 인어다!”
“인어가 파도를 몰고 있다-!!!”
“이미 늦었어.”
확신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철썩, 산처럼 높아진 파도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갈고리처럼 굽은 파도 끝이 배를 집어삼키려고 아가리를 벌린 상황, 파도를 등에 업은 레지나가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고 모두가 절망하던 그때 나는 저 멀리 파도에 흔들리는 갑판 위, 아르실과 눈이 마주쳤고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척!
“레지나!”
“이제 와서 살려달라 애원해봤자 느저써!!! 필리아, 카사노!!! 개 같은 연놈들아, 바다의 품에 안겨서!”
“항복!”
“…”
들고 있던 검을 허리에 차고 두 손바닥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철썩, 철썩, 파도가 부딪히고 바닷물이 튀어 올랐지만, 번쩍 든 두 손을 내리지 않은 나는 멍한 얼굴의 아르실을 지긋이 응시했다.
대형 파도에 얻어맞지도 않았는데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 배. 거기다 작은 파도들에 휩쓸려 젖어든 필리아의 배까지.
레지나와 적대하는 두 배가 제 기능을 못하기 전 지금이라도 항복해야 했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한 번 더 레지나에게 소리쳤다.
“내가 넘어갈 테니 나머진 그냥 보내줘!”
“네깟놈 목숨 하나가 여기 있는 새끼들 목숨보다 크다고 생각해?”
진심이냐는 듯, 어이없는 목소리로 되묻는 레지나. 하지만 이 단순한 문답만으로 레지나의 마음을 읽은 나는 눈알을 굴리며 고민했다.
품속에 넣어둔 아공간주머니에 공간이동 주문서는 충분했다. 하지만 필리아의 배에 탄 모두를 옮기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 그렇다고 이 배 위에서 나 홀로 살자고 사용한다? 분노한 레지나가 파도로 배들을 뒤엎을 테고 만약 거기서 필리아와 아르실이 산다면 더더더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지나칠걸.
좆밥처럼 당해주던 레지나의 허당 같은 모습에 별다른 방비도 안하고 덤벼들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과거의 내가 한심스러웠지만 여기서는 최선의 수를 선택해야 했다.
“필리아 아가씨.”
“으, 응?”
“아르실, 그러니까 제 배에 있는 선원들의 인도를 부탁드립니다. 레지나는 저를 데려갈게 분명합니다.”
“카사노…”
분노와 치욕스러움에 물들어가는 필리아의 작은 얼굴, 하지만 여기서 최선의 수는 내가 넘어간다는 가정하에 필리아에게 빚을 지고 아르실까지 살려 보내는 게 맞았다. 이후는? 어떻게든 혼자 탈출해야지.
“흥, 저 개새끼가 이제와서 목숨이 귀한 줄 알았나 보네. 그래도 늦고도 한참 늦었어 이 씹새야! 안 그래요. 선장님? 사지를 뜯을까요, 아니면 바다에 빠트릴까요?”
“…”
쿠웅, 목이 부러진 인어가 사자와 입 맞추고 파도가 흩어진다. 나를 조롱하던 메파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레지나를 바라봤지만, 눈알을 굴리며 계산하던 레지나는 텅, 널빤지 하나를 배에 얹고 피레아로 가리키며 내게 명령했다.
“넘어와 씹새야. 얘들아! 너흰 물러나 있어. 이새낄 태우고 필리아부터 보낸다.”
“서, 선장님?”
“물러나 있으래도!”
우다다다- 레지나의 서슬 퍼런 명령에 갑판에서 물러나는 푸른 파도 해적단. 갑판에 홀로 남은 레지나는 여전히 푸르게 빛나는 피레아를 내게 겨눴고 나는 슬쩍 뒤돌아 필리아와 눈 맞춘 후 천천히 널빤지 위를 건너 레지나의 배로 건너갔다.
“얘들아! 배를 돌려라!”
파악, 접혔던 돛이 펼쳐지고 배가 기운다. 붙어있던 필리아의 배를 살짝 밀어내고 방향을 튼 레지나의 배는 잠잠해진 파도를 타고 천천히 바다를 누비기 시작했고 가까이 있었던 두 배들은 어느새 점이 되어 사라졌다.
-움찔, 움찔
여전히 피레아로 나를 겨눈 채 노려보는 레지나, 하지만 수상하게도 어깨를 움찔거리며 주변을 둘러본 레지나는 선원들이 전부 물러났다고 확신했는지 척, 피레아를 집어넣고 슬쩍 고개를 숙여 바다를 향해 소리쳤다.
“언니들, 고마워요!”
“아니야-! 다음에 부를 일 있으면 또 부르고! 어머니가 찾으시더라! 언제 한번 집에 오고!”
“아, 알았어요…!”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보냈구나. 산처럼 높이솟구친 파도를 몰던 인어들이 바다에서 튀어나와 인사를 나누는 광경을 구경하게 된 나는 턱을 긁으며 레지나를 바라봤고 언니들에게 작별 인사를 마친 레지나는 흠칫흠칫 어깨를 떨며 나를 노려봤다.
***
‘뭐, 뭘 저렇게 보는 거야!’
퐁당, 헤엄치며 떠나는 언니들에게서 눈을 뗀 레지나는 게슴츠레 눈뜬 카사노에게 괜한 부끄러움을 느껴 코끝을 긁었다.
하지만 부끄러움도 잠시, 대박을 건졌다는 생각에 들뜬 레지나는 덤덤히 두손을 든 카사노를 보며 크게 소리쳤다.
“메파!!! 마나 억제 구속구 들고 와! 빨리!”
“네에-!”
‘이 새끼를 인질로 잡을 수 있다니, 흠, 인질로 잡으면 좋은 점이 뭘까?’
일단 무작정 태워야 한다는 직감에 직접 널빤지까지 얹어주며 건너오게 했지만 딱히 생각해둔 이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나중에 따지고들 부하들에게 인질로 잡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카사노가 인질로서 좋은 이점을 떠올려야 했다.
‘일단 황자와 협상하기 좋아.’
황자의 수하로 쐐기 이빨 항구에 찾아온 카사노, 몸값이나 자유를 대가로 황자에게 협상한다면 황자도 마지못해 협상하겠지. 레지나는 자신의 뛰어난 머리에 감탄했다.
물론 오베론의 성정상 협상이야 해주겠다만 일반적인 황자였다면 협상자리에서 카사노와 레지나, 둘은 동시에 목이 잘렸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레지나는 자신이 뛰어나다며 킬킬거릴 뿐이었다.
‘거기다 싸움도 잘하니 전투 노예로 팔 수도 있고 이 녀석이 항해하면서 모은 정보도 많을 거야. 거기다 스칼의 배를 한 방에 터뜨린 주문서! 그 정도 주문서를 어디서 구했는지, 아니면 더 가졌는지 캐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득이지. 거기다가 황자의 동향과 황자에 대한 정보, 그것도 값어치가 꽤 나갈 테고…’
뭐야, 카사노 이 새끼 인질이 되니까 좋은 점이 넘쳐나잖아?
얼빠진 생각을 하며 히히덕 웃은 레지나는 매사에 부정적인 메파가 딴지 걸 경우를 대비해 카사노를 인질로 배에 태웠을 경우 단점을 떠올렸다.
‘굳이 꼽자면 존나 세서 탈출할 수도 있다, 인데…’
꿈뻑, 뻐근한 두 눈을 깜빡인 레지나는 코웃음과 함께 결론을 내렸다.
‘에이, 마나 구속구 채우고 내가 직접 감시하면 그만이잖아.’
부하들로 버거우면 선장실에 가둬둬 24시간 밀착감시만 해도 충분했다. 마나구속구를 차고 족쇄를 찬 놈이 자신을 쓰러트리고 탈출할 리가 없지. 방심한 레지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실실 웃으며 욱신거리는 가슴을 톡, 쓰다듬었다가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 그래. 밀착감시 하는 김에 남창처럼 써먹는 수도 있겠어, 응, 이건 단순한 복수니까…! 욕심이 아니야, 정당한 복수라구…’
욱신거리는 젖꼭지와 찌르르, 아려오는 분홍빛 혀. 혀끝으로 앞니를 핥으며 잠시 후 있을 복수전을 상상한 레지나는 터벅터벅, 불만 가득한 걸음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다.
“선장님, 여기 구속구요.”
“아, 메파!”
“근데 마나 억제용 마법이 새겨진 구속구밖에 없었어요.”
“싸구려잖아.”
“그렇죠?”
힐끔- 카사노의 얼빠진 낯짝을 본 레지나는 잠깐 고민했다가 휙, 머릿속에 떠오른 마지막 동아줄을 직접 지웠다.
‘마나 흡수용 마석이 박힌 구속구든 마법이 새겨진 구속구든 상관없지 뭐! 제깟 게 마나 없이 구속구를 부술 수나 있겠어?’
-찰칵!
“하하하! 카사노 붙잡힌 꼴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오네. 응?”
빠악,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카사노의 머리통을 후려치는 레지나. 손바닥을 지잉 울리는 맛있는 감촉에 빠악! 한 대 더 후려친 레지나는 카사노의 얼굴이 점점 흉흉해지는 것도 모르고 체통까지 내려놓은 채 부하 앞에서 그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붙잡히니까 어때, 응? 거만한 새끼, 이럴 줄 몰랐지? 좆 세우고 까불 때부터 이럴 줄 알았다고 흐흐.”
“…”
“서, 선장님. 너무 자극하지 마요. 아직…”
“에이! 메파, 이딴 비실이한테 내가 지겠어? 응?”
짤짤짤- 볼을 움켜쥐고 흔들어대는 레지나, 카사노는 미친 듯이 까불어대는 레지나를 쥐어박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지만, 그녀가 신나 할수록 빈틈이 많아질 게 뻔했기에 어떻게든 참았다.
“헤헤, 바보, 병신, 카사노! 감히 나한테 덤비니까 이 꼴이지, 후헤헤!”
“…선장님…”
‘왜 이렇게 애새끼처럼 구는 거야?!’
메파야 카사노에게 붙잡힌 레지나가 매번 돌아올 때마다 그에 대한 분통을 터뜨리는 걸 보고 피의 복수를 펼치리라 생각했지만 이건 그녀가 생각한 복수가 아니었다.
왕의 품격이 아니라 좋아하는 여자아이 놀리는 꼬맹이처럼 구는 레지나의 모습은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충신인 메파는 홀로 속으로만 의문을 삼키고 찰칵, 얌전히 포박된 카사노를 보다가 떠오른 일 얘기를 자기 선장에게 물었다.
“선장님, 그 남자한테 들어온 제안은 어떻게 할 거예요?”
“남자? 아, 그 이교도?”
힐끔, 눈알을 굴리는 카사노와 눈이 마주친 레지나는 제깟 게 들어봤자 어쩌겠어- 라는 생각에 툭, 움켜쥐고 있던 볼을 내려놓고 슬쩍 거리를 벌려 메파와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그 행동에 정보의 냄새를 맡은 카사노는 최대한 모든 감각을 끌어모아 귀에 집중했고 그 덕에 대부분의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