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달달달
얌전히 의자에 앉은 필리아가 다리를 떨 수록 옆에 얹혀진 내 발도 뒤따라 흔들렸지만 나는 아무 말 않고 지그시 필리아를 바라봤고 그럴 수록 필리아의 다리는 미친 듯이 떨어댔다.
E컵, 아니 F컵은 돼 보이는 풍만한 가슴이 덜덜 흔들리고 다리를 떨어대며 엉덩이를 의자에 문질거릴 때마다 말려올라간 드레스에 숨겨진 말캉한 엉덩이가 살풋 모습을 드러냈다 감춰졌다.
핑보니 핑챙이니 필리아를 지칭하는 말은 많았지만 외모도 그러고 몸매도 무척이 끝내주다니, 이런 영애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뭘까 궁금해져 입을 열려 했지만 필리아가 먼저 얼굴 절반을 덮은 검은 안대를 쓰다듬으며 홀로 중얼거리기 시작해 선수를 빼앗겼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병신아…! 강하게, 강하게 나가야 해.”
꾸욱, 붉은 입술을 앞니로 짓이기고 몇 번이나 무어라 중얼거린 필리아는 홰액, 바람을 가르며 나를 향해 돌아봤지만 나는 선원들이 보지 못 하는 각도에서 한 번 더 텁, 필리아의 강인한 손을 움켜쥐고 쪽, 그 손등에 짧게 입맞췄다.
“흐에…!”
뭔데 그 비명은, 짧게 웃음이 터질뻔했지만 억누른 나는 엄지로 살짝 묻은 침자국을 지워내고 따뜻한 목소리를 가장해 필리아에게 물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 먼저 여쭤봐도 될까요?”
우욱, 내가 말하고 역겨운 목소리에 말투였지만 효과는 있었다.
데굴, 데굴, 하나 남은 분홍빛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춤을 췄고 뻐금, 뻐끔, 필리아의 작은 입은 붕어처럼 뻐끔이며 제대로 된 말도 내뱉지 못했다.
필리아에게서 주도권을 가져오기에 적합한 말투라 판단한 나는 계속 이 컨셉으로 밀고가기로 하고 스윽, 움켜쥔 손등을 엄지로 쓰다듬으며 필리아를 다정히 지켜봤고 결국 조금 진정한 필리아가 높은 목소리로 음이탈까지 저지르며 내게 부탁해 왔다.
“카사노호! 아웃, 다, 당신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차차차찾아왔는데…”
꾸욱, 움켜쥔 손을 주무르고 엄지로 손등을 쓰다듬으며 눈을 피하지 않는다.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고 지그시 바라볼 수록 필리아는 제대로 된 대화도 못 나누고 결국 푸욱, 고개 숙여 붉어진 얼굴을 가리기 급급했다.
갓 성인이 된 아가씨보다 수줍은 반응을 보이는 귀여운 모습에 풋, 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이야기를 꺼냈으니 제대로 듣기로 한 나는 혹시 몰라 몸을 돌려 선원들에게 말했다.
“다들 잠깐만 자리 좀 비워주시겠어요?”
끄덕끄덕,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인 선원들과 전에 만났던 주점 아저씨는 조용히 주점 안에서 빠져나갔다. 그렇게 홀에 남은 건 나와 필리아, 그리고 그녀가 데려온 중년 기사. 그렇게 셋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려던 그때 돌연 필리아 또한 들뜨면서도 굳은 목소리로 기사에게 명령했다.
“아재, 아재도 잠시만 나가 있어요.”
“아가씨, 그래도 혹시 모릅니다, 언제든 지켜드리기 위해선…”
“쓰읍…!”
으르릉, 사자가 이를 드러내자 결국 한수 접기로 한 중년 기사는 침통한 얼굴로 철컹, 철컹, 우리를 지나치고 쿵, 큰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살살 닫아요!”
[바람 불어서 그래요!!!]
아가씨아가씨 곱게 불러도 내심 아까 욕먹은 것까지 감정이 상했는지 울분 가득한 대답, 둘이 보이는 콩트에 피식 웃은 나는 텅 빈 주점 안을 슬쩍 둘러본 후 툭, 테이블에 손을 얹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지만 갑자기 필리아가 수줍은 목소리로 눈을 내리깔고 내게 물어왔다.
“그, 못났지, 이런 차림이나 하고…”
꾸욱, 자신감없는 목소리와 함께 드레스를 구기는 작은 손, 프릴이 가득하다지만 기사가 지적한대로 주름이 졌다간 더 아름다움을 해칠 수도 있었기에 나는 힘없는 손을 움켜쥐고 손가락을 풀어 테이블에 올리도록 도왔다.
“꺄악…!”
“충분히 아름다우신걸요. 기사님이 말씀하긴 것처럼 자꾸 구기면 주름 생겨요, 이미 충분히 아름다우신데 괜히 주름때문에 책잡히면 억울하잖아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진심이었다. 검문소 앞에서 만났을 때처럼 걸걸하게 짖어대는 필리아와 지금 내 앞에 흰색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고 쑥스러워 입을 꾹 닫고 있는 필리아가 동일 인물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드레스 차림의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건강미 있게 태운 피부와 어울리는 순백의 드레스와 윤기 나는 분홍빛 머리칼, 자칫 안어울릴수도 있지만 특색있는 조화가 느껴졌고 날카로운 외모에 걸맞은 안대가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필리아 특유의 매력이라 보면 충분히 커버가 가능했다.
뭐랄까, 코스프레. 코스프레를 보는 느낌이었다. 물론 이걸 필리아 본인에게 말해 줄순 없었기에 나는 모두 뭉뚱그려 아름답다 칭찬했고 그래도 그 칭찬에서 진심을 느꼈는지 어두웠던 필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후헤헤…”
…굳이 저렇게 웃어야 했을까? 아무튼 음흉하게 웃으며 기뻐하는 필리아를 빤히 바라보자 겨우 정신 차렸는지 크흠, 헛기침을 내뱉은 그녀는 쿵, 테이블에 주먹을 두들기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게, 내가 이번에 꼭 가야 할 곳이 있는데 말이야.”
“꼭 가야 할곳이요?”
“그전에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 말이야. 항구에 이미 소문이 자자하긴 하지만 카사노 당신, 레지나와 철전지원수라고 하던데, 사실이야?”
수줍어하던 여인이 사라지고 영애 필리아와 대화가 시작되자 공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공무일까 아니면 개인적인 의뢰일까, 갈피는 잡히지 않았지만 나는 장난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네, 제 고용주가 레지나 그년을 꼭 생포하고 싶어해서요. 이제 항구에 온 지 20일쯤 됐지만 쉽지가 않네요.”
“흥, 나도 그년을 알게 된지 몇 년째지만 제대로 붙잡은 적은 단한 번도 없어, 당신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년 또한 쉽지 않지.”
이미 몇 번 붙잡았지만 말하진 않았다, 괜히 말했다간 뭐 하러 풀어줬냐고 물어볼 테고 조교 했다고 말했다간 모든 게 어그러질 것만 같았다.
“사람 꼴리게, 아니 골리는데 이골이 났더군요, 솔직히 많이 버겁습니다.”
“그렇지?!”
쿠웅, 테이블을 주먹으로 찍고 쿠흐, 콧김을 내뿜는 필리아,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나무 테이블에 주먹이 반쯤 파고들었고 깜짝 놀란 필리아가 주먹을 들었지만 부스스, 나뭇조각만 떨어질뿐 부서진 테이블은 그대로였다.
“크흠, 아무튼! 나도 그년을 잡고, 아니! 그 누구보다 죽이고 싶지. 역시 카사노 당신이랑은 이해관계가 통하겠네!”
“저번에도 그러시더니 레지나와 많은 악연이 있으신가 보군요.”
“이 항구의 주인에게 아무런 존중과 존경도 보이지 않는 원숭이년, 이 땅을 짓밟고 제멋대로 굴며 행패를 부리는 개같은 년을 떠올리기만 하면 구역질이 절로 치솟아.”
“…그리고 이 눈도.”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분홍빛 눈동자를 눈꺼풀로 살포시 덮은 필리아는 천천히 안대를 쓰다듬으며 남은 한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레지나를 증오한다는 말은 정말 거짓이 아닌지 증오로 불타오르는 분홍빛 눈동자는 꺼지지 않는 잔불을 일으키며 내 눈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필리아님.”
“응?”
끔벅, 끔벅. 기다란 속눈썹이 바람에 떨리고 눈꺼풀이 감길 때마다 그 끝이 사르륵, 나비가 착지하듯 내려앉는다.
눈에 대한 이야기를 묻고 싶긴 했지만 대뜸 지금 물어 봤자 이야기해 줄 것 같지도 않았기에 나는 가만히 옅은 미소를 짓고 필리아를 바라봤다.
“뭐, 뭔데.”
“그냥 보고 싶어서요.”
“우우웃…”
히죽, 히죽, 내 대답에 광대를 꿈틀거리며 미소 짓는 필리아, 쑥스러워하는 모습에 괜히 골려주고 싶어 아예 테이블에 팔을 얹고 지그시 바라보자 참지 못한 필리아가 빼액, 소리쳤다.
“그, 그만 봐!”
쿠웅, 또 한 번 테이블을 내려찍는 주먹, 하지만 앞서 반파됐을 때부터 약해진 테이블은 결국 다음 주먹을 견디지못하고 폭삭 무너졌고 파스스, 바닥에 떨어진 나뭇조각이 먼지를 일으키며 삐꺽, 완전히 무너졌다.
“오우.”
“흡!, 흐, 흥, 테이블이 좀 약하네…”
아니 그렇게 말해봤자… 뻔뻔하게 나오는 필리아의 모습에 머리가 멍했지만 필리아는 툭, 툭, 구두 끝으로 무너진 테이블을 두들기다가 크흠! 부끄럼 가득한 헛기침을 내뱉곤 다른 테이블이 있는 자리로 옮겨앉았다.
-풀썩
“흠, 흠! 자, 보여 줄게 있어.”
빨갛게 달아오른 볼끝을 손등으로 쓰다듬고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필리아, 이번엔 부술 생각이 없는지 테이블에 종이 한 장을 살포시 얹은 그녀는 톡, 검지로 종이를 두들기고 내게 설명했다.
“이게 뭔지 설명부터 해 줘야겠지, 우리 항구가 제국령에 소속되지 않은 자주도시인건 알고 있지?”
“네.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툭, 툭, 툭, 테이블을 두들기며 옅은 미소를 지은 필리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여러 득실관계가 얽혀 있는 것도 맞지만 무법 항구라는 이름을 내걸고 타국에서 건너오는 교역품과 특산품이 모이는 덕에 남부왕국, 사막왕국, 하다못해 성국까지 이곳에 흘러들어와 물건을 찾고 있는 실정이야.”
쿵, 이전과 다르게 힘없이 테이블을 두들기는 작은 주먹.
“제국은 그 탓에 이곳을 독점하고 싶어 하지만… 아버님의 생각은 다른가 봐, 지금이 안정됐다 생각하시고 별다른 의견을 내진 않으시거든.”
나는 솔직히 한곳에 붙는 게 편하지만… 홀로 중얼거린 필리아는 대화 중이란 걸 다시 자각하고 덤덤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아버님은 몰라도 나는 되도록 불법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지만 좋은 기회를 하나 얻었거든.”
툭, 지익- 테이블에 얹혀진 종이, 그러니까 티켓 모양을 한 그것을 내 쪽으로 밀어 준 필리아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티켓에 대해 설명했다.
“라켄 해역에서 일 년에 한번 벌어지는 수상 암시장이 있어, 황제조차 탐내는 귀한 무구와 수많은 상인들이 군침을 흘리는 각양각색의 유물들이 암시장에서 열리는 경매장에 출품되지.”
“이게 그 초대장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