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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345화 (345/395)

[25번 숙녀분께 낙찰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쿠웅, 소파 뼈대가 울릴 정도로 팔걸이를 세게 내려친 필리아는 레지나에게서 빼앗은 경매품이 사용인들의 손에 들려 사라지는 걸 보며 이를 갈았다.

첫 만남부터 마지막 이별, 그리고 지금까지도 레지나와 자신은 무언가 하나를 두고 매번 경쟁했다.

그 경쟁은 규칙 따위 없는 변수 그 자체였고 작금의 상황에도 필리아는 나름의 납득은 했지만, 자신에게 물건을 빼았겨 앞좌석을 걷어차며 길길이 날뛰는 레지나를 보면 처음 만날 때가 생각나 속의 천불이 끓어올랐다.

***

“우리 레이본 가문은 언제나 이곳 사람들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 이 항구가 배라면 우리 가문은 항구가 나아가야 할곳으로 이끌어 주는 키와 같다는 소리지.”

어린 필리아는 끔벅, 진주 같은 두 눈동자를 깜빡이며 아버님을 바라봤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매번 빼먹지 않고 하는 말, 필리아 레이본- 이름이 가진 무게를 깨닫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라는 이야기겠지.

“곧 있으면 필리아 너의 성인식이구나, 무릇 레이본의 피라면 증명해야 하는법. 스스로 선원들을 모아 바다를 누벼보거라. 그리고 네 귀에도 들어갔을 테다만 항구에 소문이 자자한 해저의 심장 넥타르. 그 물건을 내게 가져오너라.”

기대하마. 무감정하고도 단단한 손바닥이 어깨에 툭 얹어졌지만 온기를 느끼기도전에 사라졌다.

휘황찬란한 깃발과 훈장, 빛바랜 상패로 가득 찬 아버님의 집무실을 둘러본 필리아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조금 전 그가 했던말을 곱씹었다.

“스스로, 선원들을 모아 바다를 누벼라.”

파도가 튀어 오르고 구름이 걷혀질 정도로 행복한 울림. 이미 태풍이 지나간 후 맑게 개인 바다와도 같은 마음이 된 필리아는 망설임 없이 항구에 있는 선술집이란 선술집에 모조리 찾아가기 시작했다.

“너냐? 같이 보물을 찾을 동료를 구한다는 애새끼가.”

술내나는 남정네들과 좆을 세우고 불알을 긁는 혐오스러운 버러지들 사이를 뚫고 뚫으며 지친 필리아의 앞에 나타난 한 여자.

파도와도 같은 푸른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잔잔한 바다처럼 따뜻한 미소를 지은 여인은 자신도 보물을 찾을 동료를 찾고 있었다며, 공동 선장으로 같이 출항하자고 자기 앞에 나타났다.

숫기도 없고 용기도 없는 필리아였지만, 한평생 바다를 끼고 살아온 그녀는 바다와 유사한 내음과 분위기를 가진 여인에게 경계심이 사르르 녹아내렸고 결국, 그녀가 내민 손을 잡고 동료가 되자고 둘이서 밤바다를 바라보며 선언했다.

“내 이름은 레지나.”

“나는 필리아 레이본, 쐐기 이빨 항구의 정당한 후계자야. 먼저 네 이름을 댔으니 처음 저지른 무례는 용서할게.”

“응, 뭐…”

하암, 쩝. 하품을 내뱉고 입맛을 다시는 레지나, 마치 ‘내가 잘못했었나?’라는 생각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긴듯한 뻔뻔한 모습에 필리아는 순간 울컥했지만 앞으로 같이 지낼 동료기도하고 레이본 가문의 장녀로서 품위를 지키기 위해 애써 침착했다.

“그런데 배는 어떡하지? 난 내 또래 여자애가 동료를 구한다길래 무작정 찾아온 거였는데.”

“…아버님께 지원받은 레이본 가문소속의 범선 한 척이 있어. 그거면 될 거야.”

“레이본? 너, 아가씨였구나?”

“…무슨 문제 있어?”

“아니? 배 하나는 기깔 나겠네.”

필리아는 당황했다. 아버님의 이름을 대면 그녀 앞의 놓인 인간들은 항상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었으니까.

눈치를 살피거나, 혐오스러운 시선을 보내거나. 하지만 그 두 부류에서 완전히 벗어난- 초탈 그자체인 레지나의 반응에 두근, 가슴이 뛴 필리아는 준비해 둔 배에 올라타고 레지나와 항구를 누비며 동료들을 모았다.

술에 얻어맞고 안주 접시위에 술 취한 노인네를 내던지는 둥, 악동처럼 굴며 자신들을 따라 보물을 뒤쫓을 패기 있는 젊은이들을 끌어모은 필리아와 레지나는 많은 관심 속에서 출항했고 넥타르를 찾는 여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소문은 무성하지만 실체는 잡힌적도 없는 미지의 보석 넥타르, 그 허상을 쫓을수록 필리아와 레지나의 우정은 두터워졌었다.

“레지나! 부탁해!”

“필리아, 일일이 부탁해 달라는-!”

서걱, 친구끼리 무슨 부탁이냐고,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레지나의 겨드랑이 사이에서 쏘아진 커틀라스는 그녀를 뒤에서 덮치려던 잡졸의 심장을 파고들고 등팍을 뚫었다.

“…말은 하지 마. 친구끼린 그런 말 필요 없다고.”

“알았어 이년아.”

레이본 가문의 장녀로 살며 우수한 교육받고 수많은 기대에 짓눌려 살았던 필리아, 어릴 적 갑갑했던 교육환경탓에 낯가림이 심하고 숫기가 없었던 그녀는 요 몇 개월간 레지나와 함께한 항해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마치 그녀처럼 걸걸해졌다.

간혹 보급문제로 항구에 정박해 본가에 들릴 때면 유모나 어머니가 왜 이렇게 됐냐고, 다 탄 피부를 어떻게 해야 하냐고 울먹이기도 했지만 필리아는 가만히 앉아 가문의 도움이 되기 위한 교육받는것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평생 이대로- 마음이 맞는 동료와 모든 걸 내어줄 수 있는 친구. 이 두 개만 있다면 필리아는 레이본 가문의 영광을 저버릴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우정에 취해 있었다.

“벌써 반년이나 지났네.”

“우리가 항해 시작한 지 벌써 그만큼이나 지났다고?”

-채앵!

가볍게 부딪치는 유리병, 지잉 울리는 주둥이를 입에 문 두 여인은 목울대를 꿀렁이며 내용물을 단숨에 비우고 붉어진 얼굴로 풍덩-! 빈 병을 바다에 내던졌다.

“지긋지긋하네, 찾는 건 보일 기미도 안 보이고… 이러다 쫓겨나면 그냥 해적이라도 해야 하나?”

“후후, 잘 생각했다니까? 같이 자유를 누리는 게 얼마나 행복한데, 필리아 너라면 내가 한 자리, 아니 대신 자리까지 줄수 있어.”

“또 그 소리야?”

해적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레지나는 자신에게 자기 신하가 되어달라고, 같이 바다를 누비는 지배자가 되자며 떠들어댔다.

항구를 이어받고 레이본이라는 피에 흐르는 숙명을 지켜야 한다 교육받은 필리아는 처음엔 거절했지만 점점 레지나와 인연이 짙어지고 자유에 대해 깊은 생각이 들면서 레지나가 말하는 대신의 자리에 흥미를 가졌다.

‘그래도, 돌아가야 하니까.’

“근데 필리아, 네가 찾는 물건은 도대체 뭐길래 코빼기도 안 보이냐? 나도 찾는 물건이 있다만 솔직히 바다를 누비는 게 더 목적이라 상관없지만 너는 다르잖아.”

“내가 찾는 거…”

반년이면 오래 숨기긴 했지, 레지나와 마음이 맞아 항해를 시작했지만 제대로 된 목표를 알려주지 않았던 필리아는 믿을 수 있는 친구가 된 레지나에게 전부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만큼 필리아에겐 레지나란 친구이자 동료, 우정이라는 틀을 넘어서 자기 인생에 손꼽을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었다.

레이본 가문의 장녀로 교육받으며 억압받고 무법항구라는 지리 탓에 제대로 된 사람도 만나지 못했던만큼 필리아는 새로운 인간관계에 점점 깊은 신뢰를 내보였지만 그 신뢰는 곧 산산이 깨져 버렸다.

철썩!

바위에 부딪힌 파도가 산산이 흩어지고 먹구름 가득한 하늘이 천둥을 토해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적셔지는 바위섬 위에 우뚝 선 둘은 서로에게 겨눈 검 끝에 맺힌 물방울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바람에 흔들리고 중력에 이끌려 잡아당겨짐에도 칼끝에 매달려 버티는 물방울이 자신들의 처지같다고 생각한 둘은 뚝, 거센 바람에 빗방울이 날아간 순간 채앵! 검날을 부딪치고 서로를 바라봤다.

“왜, 왜 날 배신한 거야.”

주륵, 빗물에 얽힌 붉은 핏방울이 흐르고 필리아의 턱 끝에 맺히는 순간 레지나의 푸른 눈동자가 파르르 떨려왔지만 이미 친구, 아니- 옛동료의 눈을 베어 넘긴 레지나는 체념과 함께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배신이라니, 그렇게 따지면 너도 날 속였잖아. 찾고 있는 물건이 이거라곤 한 번도 알려주지 않았으면서.”

레지나의 능글맞은 대답이 끝나고 덜컹, 흔들리는 작은 나무상자에 필리아의 시선이 향한 순간 서걱, 검날을 쳐 낸 레지나의 커틀라스가 필리아의 어깻죽지를 베어넘겼지만 필리아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빠악!

발끝에 걸리는 묵직한 상자의 감촉, 발끝에 힘을 주고 굳게 조이는 팔을 풀려고했지만 도끼처럼 내려치는 은빛 검날에 발을 거둔 필리아는 욱신거리는 눈가를 손등으로 덮고 후우, 하얀 김을 내뱉으며 레지나를 바라봤다.

폭풍우속 뒤집힌 배에서 나가떨어진 선원들, 난간을 붙잡고 버텨 낸 레지나와 필리아 둘만이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 죽을날만 기다리던 둘은 마치 환상처럼 나타난 바위섬에 배를 박고 나뒹굴며 떨어졌고 크지도 않던 섬 중앙에 비를 얻어맞으며 향했다가 예의 상자를 발견했다.

이대로 갖고 돌아가기만한다면 모든 게 끝났을 텐데. 감격에 찬 레지나는 굳게 닫힌 상자에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기운에 열어 보자 제안 했고 필리아 또한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덥썩 수락했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나는, 나는…”

주륵, 눈이 아려오고 핏물이 뺨을 타고 흐를 때마다 하나 남은 눈이 흐릿해지고 뿌옇게 물들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필리아는 알 수 없었지만 차라리 빗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네가 내게 양보해 달라 이야기했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건네줬을 거야.”

“그랬을까? 반년 동안 꼭 찾아야 한다고, 그걸 위한 항해라며 수십수백 수천번을 이야기한 게 필리아 너인데, 자신도 알 거 아니야.”

“닥쳐!!!”

-쏴아아아아아!!!

필리아의 노기어린 고함과 함께 바위섬을 뒤덮는 커다란 파도. 필리아는 파도가 자신을 뒤덮고 집어삼키는 그 순간에도 상자를 끌어안는 레지나를 보고 핏물어린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짓이기고 절규했다.

‘네가 정말 내게 부탁했다면 난 양보했을 거야, 하나뿐인 친구였으니까. 친구란 그런 거라고 몇 번이고 네가 말했잖아…’

꼬르륵, 점점 깊어지는 바닷속에 힘없이 가라앉기 시작한 필리아는 벌어진 입술 틈새로 빠져나가는 공기 방울을 보며 하나 남은 눈을 감았다.

철썩, 발목을 두들기는 미끈한 무언가.

발목을 쓰다듬는 야릇한 느낌에 하나 남은 눈을 뜬 필리아는 열심히 펄럭이는 지느러미와 수면 위 달빛을 머금은 여인의 상체를 보고 뒤늦게 눈에 힘을 줬지만 이미 혼절하기 직전이었던 필리아는 결국 그대로 눈을 감고 자신을 이끄는 알 수없는 손길에 몸을 맡겼다.

“미안 해…”

힘없이 귓가에 맴도는 짧은 사과.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하기도 전에 완전히 기절한 필리아는 그렇게 햇빛이 내리쬐는 해안가에서 눈을 떴다.

“흐아아아!!! 켈룩, 크흐, 후웁, 후으, 흐으, 흐으으으…!”

울컥, 목을 긁으며 내뱉어지는 바닷물을 쏟아 내자 온몸이 욱신거리고 뼈마디가 비명을 내질렀지만 필리아는 더 욱신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바다를 바라봤다.

철썩이는 파도와 파도위를 달리는 푸른 머리칼.

배신하고 우정을 짓밟은 주제에 이제 와서 남의 목숨을 건져 내는 파렴치한 뒷모습에 필리아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언젠가, 네가 원하고 바라는 모든 것을 눈앞에서 빼앗아가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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