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389화 (389/395)

“……”

[여기, 여기다 놓으라고 병신아!]

[닥쳐, 메파언니가 조금 있다 꺼낼 거라고 미리 올려놓으라고 했다니까?!]

-쏴아아아…

멍하니 난간에 팔꿈치를 얹고 바다를 보고 있자 거래를 끝마치고 열심히 정리하는 부하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오고 거기에 화음처럼 얹어지는 평화로운 파도 소리까지.

레지나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왔던 일상이 돌아왔음에도 굳어진 얼굴을 펴지 못했다.

“…”

그런 레지나를 걱정스레 바라보지만 이교도를 자처하는 무리와 대량의 거래를 끝마친 메파는 쏟아지는 일거리에 휩쓸리기 직전이었기에 장부를 들추며 교역품과 금품 정리에 힘쓰기로 했다.

‘분기마다 거래하기로 한 놈들이 왜 이리 급하게 연락해왔지…?’

뭔가 불안하지만 애초에 몇없는 큰 건, 레지나는 거절하지 않고 여기저기 발로 뛰어 물량을 맞춰왔고 제국 근방 해역까지 건너가 거래를 마쳤지만 이후 그녀의 얼굴은 덧없이 굳어 있었다.

“하아…”

온세상 근심을 한 번에 쏟아 내는 듯한 처량한 한숨. 듣는 사람의 기운까지 쭉 빠지는 한숨에 메파는 장부를 펄럭이며 자리를 피했고 난간에 기대 한숨을 내쉬던 레지나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정보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카사노의 배는 팔려 가고 일하던 선원들과 선장은 전원 해산, 카사노와 수인 여자까지 완벽하게 자취를 감췄다고…’

소문에 의하면 카사노와 수인, 아르실 만이 영주 성을 들락날락하며 티치와 묘종의 거래하고 필리아와 교류하는 듯하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문, 도저히 믿을게 못되는 정보였다.

‘필리아…’

결국 또 네가 가져가는 거야?

지긋지긋한 악연에 이를 갈며 무시하려한 레지나였지만 마지막 인사때 새빨간 타인을 대하는 듯 인사하는 카사노의 모습을 떠올린 그녀는 돌덩이라도 내려앉은 듯 속이 답답해져 한숨을 내쉬며 지평선 너머만 바라봤다.

‘선장님…’

실연당한 여인처럼 한숨만 푹푹 내쉬는 모습에 눈가가 촉촉해진 메파, 카사노가 사라지고 예전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처량한 모습에 마음이 쓰였지만 예전같지 않은 건 레지나뿐만이 아니었다.

미친 듯이 포악해진 바다.

매일 같이 커다란 싸움이 끊기지 않고 벌어졌고 해적섬을 주름잡는 대해적단들은 카사노의 빈자리를 먹어치우기 위해 탐욕스럽게 바다를 누비며 수많은 배들을 집어삼켰다.

그런 해적들의 만행을 지켜볼리가 만무한 대륙의 왕국들.

각 왕국은 점점 커져가는 해적들의 규모에 대항하기 위해 사전에 언질이라도 받은 것처럼 준비해 둔 함대를 왕국 근방 해역에 출범시켰고 해적들을 토벌하고 상선을 지켜내며 왕국의 위신을 지켜냈다.

제국 또한 함대를 출범시키고 해적과 대항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하나 다른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레지나의 존재였다.

“히익! 푸, 푸, 푸른 파도 해적단이다아아아!!!”

저 멀리 돛에 그려진 파도문양을 발견한 상단 직원은 겁에 질린 목소리로 경고하려 했지만 오크통을 어깨에 메고 일하던 다른 직원은 그런 그를 비웃으며 안심시켰다.

“아… 이 새끼, 아직도 소문 못 들었어? 레지나 그년은 이제 제국 배는 안 건드려!”

“뭐? 그, 그게 정말이야?”

“그래, 가만히 지켜봐- 봐봐! 지척까지 왔는데도 그냥 지나가잖아!”

“허어…”

몇 달 전이라면 이미 약탈당하고도 물고기 밥이 되어 뜯어먹히고 있었을 시간, 하지만 레지나는 그저 지나가는 상선을 굳은 눈초리로 바라보며 흘려보냈고 덕분에 첫 항해를 무사히 마치게 된 상선은 얼싸안고 환호하며 무척이나 기뻐했다.

“선장님! 진짜 보낼 거예요? 돈냄새가 풀풀 풍기는…”

“야. 제니.”

“넵!”

레지나의 굳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삐걱, 몸을 돌리고 후다닥 뛰어가는 제니. 돈이 돼 보이는 상선의 모습에 똑같은 불만을 품은 해적단이었지만 선장의 명령은 절대적, 그녀들은 다시 하던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조언하려 했던 메파 또한 입술을 깨물며 물러났다.

카사노와의 작별 이후 선장실에 스스로 박혀 있었던 레지나는 거래를 끝내고 항구로 돌아가는 길에 부하들을 갑판위에 모아 한 가지를 지시했고 이후 푸른파도해적단의 소문은 순식간에 온바다에 퍼졌다.

아무런 계약도 맺은 게 없고 제국과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도 모르지만 제국의 상선과 제국의 문양을 내건 함선은 단 하나도 건들지 않기 시작한 레지나.

푸른파도해적단이라면 치를 떠는 상선이 선제공격을 가해와도 제국 문양을 돛에 그려놨으면 레지나는 되갚기식 발포 한번과 함께 거리를 벌려 물러났고 제국 소속의 함선들은 전부 지나쳤다.

뭐, 그런다고 다른 해적들이 약탈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제국의 처지에선 바다의 골칫거리인 레지나를 배제할 수 있단 사실에 무척 기뻐했고 다른 왕국과 해적들은 레지나라는 재해를 피하기 바빴지만 제국만이 그 영향에서 온전히 벗어날수 있었다.

이후 제국을 나타내는 문양을 어설프게 따라 하거나 뺏은 깃발을 내거는 해적들이 있긴 했지만, 그건 또 귀신같이 알아채는지 모조리 침몰시키기까지, 그렇게 짧은 삼일 사이 레지나의 소문은 파도를 타고 온 바다에 퍼져나갔고 많은 해적들은 그녀에게 불만을 가지기까지 했다.

“저년 지가 무슨 제국의 개인 줄 아나 보네.”

“안 그래도 게리님이 벼르고 있다 합니다, 레지나 저년의 콧대높은 자존심도 아작날 테죠.”

그칠줄 모르는 해적들의 불만과 같은 동업자에게까지 위협받기 시작한 해적섬의 해적들은 점점 레지나를 배척하고 아예 적대하기 시작했고 그건 그녀의 뒷배를 봐주던 해적섬의 소드 마스터, 게리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같은 해적을 약탈하고 제국의 뒤를 닦는 씨발년! 더 이상 그 만행을 두고 볼 수 없다!”

해적 주제에 해적도 약탈하고 동업자 정신(?)이 부족한 레지나를 손가락질 하며 질타하는 게리.

하지만 그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점점 강해지다 못해 초월적인 전투력을 보이며 소드 마스터에 근접하다는 소문을 듣는 레지나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는 모양인지 그녀는 전서구까지 보내 경고하였음에도 제국에게 손을 대는 일은 없다고 일축했다.

많은 이들은 도대체 왜 레지나가 제국에게 협조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또 그런 그녀를 꺾었던 카사노가 왜 사라졌는지 한참을 입에 담았지만 그 진실은 밝혀질리가 만무했고 답답한 건 그녀들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왜 선장은 제국은 건들지 말라고 할까? 레지나는 매번 대답해주지 않았고 메파에게까지 알려주지 않았기에 부하들의 호기심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궁금해하는 레지나의 속마음은 무척이나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씨발, 왜, 왜 아무 연락도 없는 거야…!’

황자의 개인 카사노가 얌전해진 자기 행보에 궁금해져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어설픔 믿음.

그게 온 바다를 떠들썩하게 하는 행보의 진실이었다.

‘씨발, 기다려도, 기다려도, 기다려도…! 이 새낀 아무 연락도 없고 심지어 보이지도 않아!’

항구에 숨어든 정보 길드에게 의뢰까지해 카사노 수색을 맡겼지만 매일 같이 찾아오는 전서구는 [아무런 정보도 없음]만을 보내왔고 카사노 개인에게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너무 답답해 하루는 직접 나서 쥐잡듯이 항구를 뒤지고 필리아 그년과 부딪치기 직전까지 갔지만 레지나는 카사노의 머리털 하나도 찾지못하고 물러났고 이후 제국 암약에서 거래를 마치고 지금 복귀하는 길이었다.

‘개 씨발 새끼! 지만, 지만 떠나면 끝이야? 뭘 길들이겠다는 거야. 내 여자니 내꺼니 내 암컷이니, 끄으으으윽!!! 개 지랄 발광을 해 놓고 뭐? 끈기? 이런 개 좆 같은 새끼가아…”

“씨바아아아아알-!!!”

“히익!”

“꺄악!”

-콰직! 콰직! 콰직!

레지나 옆에 가지런히 세워진 오크통이 아작나고 죄 없는 상자가 박살 나 먼지를 풍기며 가루가 된다. 오늘은 잠잠할 줄 알았던 선장의 히스테리가 또 폭발한걸 확인한 부하들은 그저 오들오들 떨어대며 서로의 몸을 껴안고 대피했고 갑판은 구역이라도 나눠진 것처럼 아무도 레지나 곁에 있지 않았다.

“하아, 하아, 하아아…!”

카사노가 떠난 뒤로 세리느의 갑판 위 잡기들은 몸 성한 게 하나도 없었다. 거기서 그쳤다면 참 좋았겠지만 메파의 눈에 띄는 것만 해도 박살 난 갑판, 찌그러진 벽, 주먹 자국이 남은 돛대 등등.

레지나의 주먹 자국과 발자국이 안 남은 게 없을 정도로 그녀의 분노는 꺼질 줄 모르는 화산처럼 부글부글 들끓고 있었다.

“선장님, 선장님…”

“응!”

부글부글, 들끓는 감정을 미처 감추지 못하고 대답한 레지나. 하지만 물러났던 메파가 무언갈 움켜쥐고 걱정하는 눈빛을 짓는걸 발견했기에 금방 감정을 가다듬은 그녀는 텁, 낚아채듯 종이를 가져가고 읽기 시작했다.

[레지나, 네년의 좆 같은 행보를 지켜볼 수 없게 됐다. 편지 아래 시간과 장소를 써둘 테니 도망치지 말고 찾아오는 게 좋을 거다.

만약 도망친다면 해적섬, 아니 온바다에 끈이 닿은 놈들에게까지 네년의 살상령을 내리겠다. 네년뿐이 아니라 부하들까지 그 음탕한 몸을 제값으로 치를 수 있는 곳까지 소개해주지. 다신 바다위에서 설치지 못하게 해 주마! 부하 전부를 데리고 오도록.

시각은 19일 오후 5시, 돌고래섬 앞으로.]

“선장님, 이건…”

함정이 분명할 거라고 말리는 메파와 걱정어린 부하들의 시선.

짙은 걱정에도 불구하고 문득 함정을 파 카사노를 유인했던 게 떠오른 레지나는 부하들을 다독이다가도 치가 떨려 이를 악물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 와중에도 카사노를, 씨발 정신 차려 레지나…’

그깟 남자 하나를 잊지 못하는 자기 모습이 너무 한심하고 역겹지만… 모습 한번 보이지 않고 홀로 떠난 카사노를 잊지못하리라 짐작한 레지나는 그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을 굳혔다.

“얘들아, 나 믿지?”

흔들리는 눈동자는 가라앉고 믿음이 떠오른다. 그때의 카사노도 그랬을까? 레지나는 떨리는 손으로 피레아의 손잡이를 움켜쥐며 꺾이는 돛과 휘어지는 파도를 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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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새끼들, 몇 명을 데리고 온 거야?”

“선장 앞에선 쪽도 못쓰던 새끼들이 기세등등한 것봐…!”

“선장님! 지금이라도…”

“아니, 계속 가.”

이젠 누굴 따르는 것도 믿는 것도 신물이 났다. 그런 자신에게 남은 건 오직 가족뿐.

곁에서 쫑알쫑알 떠들면서도 걱정을 앞세우는 부하들과 지금도 거처인 동굴에서 자기 소망을 위해 힘써 주는 어머니를 떠올린 레지나는 마음을 가다듬으면서도 아주 잠깐 카사노와 붙어먹던 부하들과 눈이 마주치자 몸이 굳었지만 그 기억은 흘려보내주기로 했다.

그래, 난 파도처럼 다정한 여자니까…

“레지나 이 가랑이 가벼운 년아! 게리님한테 빌빌 길 준비나 흐아아아아악!!!”

-쿠드득! 쏴아아…!

정조를 지켜낸(?) 여인으로서 듣기 역겨운 조롱, 레지나는 참지 않고 마나를 일으켜 파도를 끌어모으고 역겨운 개소리를 지껄이던 놈의 배를 단 한 번의 파도로 침몰시키고 모조리 수장시켰다.

“……”

순식간에 조용해진 바다, 잔인한 손속이긴 해도 부하들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선장님의 강함을 칭찬하기 바빴고 술에 취해 흥겨운 안줏거리 보듯 구경하던 해적 놈들은 입을 꾹 닫고 정박하는 레지나를 가만히 지켜봤다.

“왔군.”

끼익, 못이 뽑히기 직전의 헐거운 나무 의자에서 일어나는 한 남자, 해적치고 탄탄한 몸과 봐줄 만한 얼굴이긴 해도 카사노와는 비비지 못하는 추남, 하지만 주렁주렁 달고 있는 칭호중 가장 가치가 높은 게 있다면 그건 소드 마스터인 남자. 그게 눈앞의 게리라는 남자였다.

“그래 씨발아, 왔다 어쩔래?”

“부하들은 전부 데려…”

“아, 아, 씨발 잡소리하려고 데려왔냐? 좆이나 까 씹새야, 쓸데도 없는 좆이나 잘라주려고 찾아왔으니까.”

후웅, 콰악-!

유려하게 뽑힌 검날은 앞에 놓인 탁자를 베어내고 게리가 앉아 있던 의자까지 깔끔하게 반으로 갈랐다.

후웅, 바람가르는 소리와 함께 푸욱, 바닥에 박힌 검날을 가만히 지켜본 게리는 콧방귀를 뀌며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레지나에게 내밀었다.

“서명이나 해. 글도 못 읽는 머저리년을 위해 설명은 해주지, 레지나측은 제국을 비롯한 관련된 왕국과 상선을 모조리 약탈하고 그중 9할을 해적섬에 상납하고 노예해방단장과 소문난 이교도 놈들과의 거래를 전부 양보할 것.”

“그게 조건이라고? 그럼 대가는?”

“앞으로 내가 지배할 바다 위에서 머리를 꼿꼿이 들고 다닐 수 있는 권리, 정말귀한 대가지… 안 그래?”

낄낄낄, 제 부하들을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보이는 추남, 추레한 몰골을 하고 두 손을 움찔거리거나 혀를 날름거리는 역겨운 몰골을 보고 있자니 헛구역질이 솟구친 레지나는 손을 내저으며 거래를 거절했다.

“지랄하지 마, 그딴 개소리할 거면 가고… 아, 다신 눈에 띄지마. 내 가족한테 한 모욕은 한때 동업했던 인연으로 봐줄 테니까.”

“뭐 좀 치켜세워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나 본데… 내가 누군지 잊었나 봐?”

자신감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꺼드럭대는 게리, 하지만 그 남자와 다르게 누리끼리한 이빨을 보이며 떠들어 대는 사내의 허세는 레지나를 압도하는 ‘무언가’가 부족했다.

그리고…

“씨발, 소드 마스터라고 뻣대던 새끼가 혀가 왜 이렇게 길어? 이제 보니까 개 좆도 아닌 거 같은데.”

“뭐, 뭐?”

벽에 부딪혀기 전, 레지나는 해적섬에서 마주친 압도적인 무력과 기세를 내뿜는 게리를 보고 당황했다. 하지만 벽에 부딪치고 벽을 넘기 일보 직전인 레지나의 눈에는 게리라는 남자에게서 아무런 위압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겁에 질린 복어가 몸을 크게 부풀려 가시를 자랑하듯, 그저 실력이 딸린 머저리 가 부풀린 기세에 눌렸다고 확신한 레지나는 갈무리한 살기를 내뿜으며 땅에 박아넣은 피레아를 뽑아 들었다.

“큭…”

그에 지지 않고 허리춤에 찬 커틀라스를 뽑아 드는 게리, 정교한 자세와 갈무리된 기세, 피어오르는 마나는 그 또한 어설픈 떠중이는 아니란 증거였지만 레지나는 도저히 저딴 놈에게 지리라는 생각은 못 하고 검을 뽑아 든 채 대치를 이어 나갔다.

‘마나, 그리고 근본적인 무언가는 대단해. 하지만 저 새끼 한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게리 선장, 그냥 지체말고 배에 애들을 보내겠습니다. 몸뚱이 하나는 기가 막힌-!”

-서걱.

데구르르, 투욱, 피슉!

잘린 머리통이 공처럼 튕기다 흙바닥에 파묻히고 잘린 단면에선 핏줄기가 찌익, 새어 나왔다. 게리와 몇 년을 동고동락하며 그에게 부족한 지혜를 채워줬던 부선장, 그는 반격… 아니- 목이 베였다는 걸 인지도 못하고 그렇게 레지나의 손에 죽어 버렸다.

“이, 씨발 년이…”

“덤벼 개새끼야, 내 가족을 입에 담은 죗값은 치러야지.”

-카앙!

키기긱, 피레아의 강도에 견줄 만한 검인지 불똥만 튀기며 밀리지 않는 검날, 레지나는 물소처럼 달려는 게리의 힘에 이를 드러내면서도 발끝을 지익 옆으로 밀며 몸을 틀고 그대로 앞으로 쏠리는 게리의 배를 무릎으로 걷어찼다.

-퍼억!

“씨, 바아아알!!!”

카앙, 카앙, 카앙!

꽤 묵직한 타격이었음에도 밀리지 않고 도끼질하듯 검을 내려치는 게리, 묵직한 검격 하나하나를 받아 내고 빈틈을 파악하려는 그때 레지나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헛소리를 듣고 이를 드러냈다.

“그 천박한 몸뚱이라도 대주면서 뭐 얻어먹기라도 했나보지? 가족을 입에 담으면서 뭣하나 양보할 생각도 안 하는 거 봐, 제국이라면 거품물고 날뛰던 걸레 년이…”

걸레 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천박한 단어에 마나를 일으켜 피레아에 휘감자 게리의 검에도 푸른 이슬 같은 마나가 맺혀 단단하게 굳었다.

소드 마스터가 이룰 수 있는 기적중 하나, 검강(劍罡)이 피어오르고 카앙, 두 검이 맞닿는 순간 피레아에 둘러진 마나가 흩어지며 밀려났지만 레지나는 눈 하나 깜짝않고 마나를 더 불어넣으며 속 안의 울분까지 연료 삼아 모든 걸 불태웠다.

“아가리 닫고 덤벼 씨발아, 좆 같은 냄새나니까. 그리고 걸레여도 너 같은 새끼 한텐 대줄 생각도, 없어!”

-서걱!

“끄으으윽…!”

“…!”

게리의 압도적인 검강에 정박한 채 구경하던 해적들의 열기는 미친 듯이 뜨거워졌고 뒤이은 함성소리에 귀가 멀정도였지만 레지나의 검이 검강을 흩트리고 게리의 어깨를 벤 순간 섬은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씨발, 어디서 잔재주를…!”

“지랄…”

‘뭐지? 진짜 검강이 아닌가? 아니, 분명, 나는…’

카앙, 카앙, 카앙, 카앙.

수많은 검로를 그으며 폭풍처럼 쏟아지는 게리의 검격.

초창기의 자신이었다면 하나하나 받아 내다가 자세가 무너지고 뒤이어 목을 내줄정도로 압도적인 검격과 검강이었지만… 레지나는 검과 하나라도 된 것처럼 떨어지지 않는 손잡이를 더 강하게 움켜쥐고 머리부터 발끝, 온몸을 맴도는 모든 마나를 쏟아부어 피레아에 둘렀다.

단단히 벼려진 검강에 마나가 흩어져 검날이 드러나면 파도처럼 쏟아지는 마나가 빈자리를 메워 검날을 보호했다.

아니, 종국엔 빈자리를 채우고도 넘쳐흐른 마나가 점점 그 몸집을 불려 피레아에 둘러진 처음의 크기를 벗어나 마치 검강처럼 영롱한 푸른빛을 뽐내기까지 했다.

“어디서, 씨발, 얕은 수를 쓰고, 있어어어!!!”

허억, 허억, 거친 숨을 토하며 말을 끊어가면서까지 덤비는 게리, 하지만 자세 곳곳을 파고드는 검은 맥없이 튕겨 나갔고 점점 밀려나기까지해 게리의 검강은 점점 제빛을 잃어갔다.

서걱-

“!!!”

털푸덕.

마치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는 갈색빛의 살덩이.

여태껏 침몰시킨 배의 문양을 자랑스레 팔뚝에 새겨둔 문신 가득한 팔은 맥없이 잘려 바닥을 나뒹굴었고 난데없는 격통에 두 눈을 부릅뜬 게리는 순식간에 거리를 벌려 검강을 거두고는 경악에 찬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씨발, 씨발!!! 지랄하지 마, 내가, 내가 밀린다고? 내팔, 이 호로잡년이 무슨 수를 쓴 거야아아!!!”

어느새 싸늘한 적막이 가라앉은 섬.

음란한 몸매를 가진 레지나가 바닥을 뒹굴며 목숨만은 살려달라 애원하는 몰골을 보러 온 해적들도, 그녀에게 큰 원한을 가진 해적들도 모두 조용해진 상황에서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건 그녀의 배, 세리느에 올라탄 푸른파도 해적단뿐이었다.

“씨발, 졌으면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도 모자랄판에 호로잡년이 뭐야, 팔 하나 더 잘라줘?”

몇 번이나 주고받은 공방에 구슬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게리와 달리 이마에 땀 몇 방울과 가슴팍만 땀으로 적신 레지나.

오히려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며 도발하는 그녀의 모습에 섬을 가득 채운 해적들은 숨을 참고 레지나와 게리를 번갈아 보며 경악했다.

게리가 소드 마스터치고 인성이 개차반같고 수련도 안 하는 병신이라고 소문나도 딱 하나 부정할 수 없는 진실, 그건 게리가 소드 마스터라는 사실이었다.

‘진짜 소드 마스터’라는 칭호를 달고 수많은 배들을 침몰해온 해적섬의 대장격인 그가 장난감을 뺏긴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으며 레지나에게 덤벼드는 모습은 모든 해적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때 모든 해적들의 머릿속을 스치는 하나의 소문.

[레지나는 소드 마스터에 올랐다]

진위여부도 확인되지 않고 그저 역병처럼 이리저리 오가던 레지나를 보고 돈 이야기였기에 소문만 무성했을 뿐이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은 어쩌면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하며 떠들던 입을 닫고 속으로 게리를 응원했다.

여기서 게리가 죽으면 그를 응원하고 그의 위세를 등에 업고 레지나를 모욕한 그들의 말로는 누구보다 잔혹할게 뻔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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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점칠된 추레한 얼굴.

피를 닦아내는 투명한 구슬땀.

환한 햇빛을 받아 내는 푸른 파도 같은 영롱한 검강은 그 빛을 차츰차츰 잃어 무너지고 있었고 검을 맞댄 레지나의 검은 꺼질 줄 모르는 검기를 일으켜며 게리의 검을 꺾었다.

이래선 안 됐다, 게리는 무너지는 두 다리를 힘겹게 일으키고 영혼 한 방울까지 쥐어짜 무너지던 검강을 일으켜고 우뚝 섰다.

“후우…”

주황빛 태양을 등지고 땀에 젖은 앞머리를 찰랑이는 여자.

가벼운 엉덩이로 그 악명을 만들어 낸것만은 아닌지 점점 자신을 압도하는 레지나. 그녀의 강함을 피부로 체감한 게리는 눈을 적시는 땀이 따끔한 고통을 만들어냄에도 불구하고 두 눈을 부릅뜨며 더 크게, 더 강하게 검강을 일으켰다.

“와아…”

적인 푸른파도해적단까지 무의식적으로 감탄을 뱉게 하는 압도적인 검강.

오후를 넘어 저녁이 되자 저무는 해와 맞물려 어두워지는 하늘, 그 모든 걸 불살라 뒤덮는 영롱한 푸른빛 검강.

위대한 광경에 모두가 입을 벌리고 감탄하고 검강을 일으킨 게리 본인또한 속으로 감탄하며 후들거리는 팔을 곧게 펴고 레지나를 바라봤지만 오직 한 명, 레지나만이 심드렁한 얼굴로 게리를 바라봤다.

마치 그게 전부냐는 듯 자신을 책망하는 푸른 눈망울.

자존심만으로 이자리까지 올라 소드 마스터라는 경지를 이룬 게리는 도저히 넘길 수 없는 그녀의 눈빛에 주륵, 코피가 흐르고 두 눈의 실핏줄이 퍽퍽터지는 와중에도 모든 영혼을 불어넣어 검강의 크기를 불려 나갔다.

더 크게, 더 강하게, 더 단단하게-!

살면서 이토록 모든 힘을 쏟아부은 적이 있었을까? 아니, 게리는 모든 인생을 통튼다 해도 오늘같은 노력을 해본적도 없고 앞으로도 할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이 모든 게 자기 최선이자 최고, 그리고 최강이었기에- 그는 망설임 없이 하늘을 찌른 검강을 천천히 휘둘렀다.

구름이 베이고 하늘이 갈라지는 광경.

자기 착각만이 아니었는지 게리는 뿌듯함 가득한 얼굴로 반으로 갈라질 레지나를 바라봤지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아니, 심드렁한 게 아닌- 무언가 초연해진 듯한 얼굴.

감정은 희석되고 두 눈은 굳은 결의로 차올른 레지나. 푸른 검강을 일으킨 자신보다 환하게 빛나는 그녀의 모습에 의문이 들 무렵, 게리는 조용해진 좌중이 일제히 레지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자각했다.

“아…”

하늘이 드넓은 바다라면 피어오른 한줄기 검강은 하나의 파도.

어두워지는 밤바다를 가른 파도는 하늘을 찌른 검강을 무너뜨리고 거친 물쌀과 함께 검을 휩쓸었다.

촤아아아악-!!!

게리의 검강이 흩어지고 검이 무너진다. 그 압도적인 검강을 뒤덮은 자기 위용적인 모습에 레지나는 피레아를 더 높이 치켜들고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게리를 향해 휘둘렀다.

검날에 이슬처럼 맺힌 마나가 단단하게 굳고 수정처럼 빛나는 그 순간.

검강과 검강이 부딪혀 일어난 후폭풍에 꼴사납게 밀려난 게리는 땅바닥에 엎어져 몇바퀴나 구르고 그 옆에는 서걱, 게리를 밀어낸 레지나의 검강이 땅바닥을 갈랐다.

하늘, 구름, 검강, 섬, 모든 걸 베어낸 레지나의 검강은 서서히 흩어져 세상에 스며들었고 깊게 파인 검자국을 보며 모두가 경악하던 그때 세리느 선두에 뛰쳐나온 메파가 모두가 들을수 있게 소리쳤다.

“레지나가 승리했다!!!”

“와아, 와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푸른파도 해적단에게 보복당하고 싶지 않아 소리치는 해적섬의 해적들과 레지나의 압도적인 위용에 감화된 해적, 그리고 그녀를 처음부터 믿었던 푸른 파도 해적단의 환호가 화음처럼 엉키며 섬을 뒤흔들었다.

우레 같은 함성이 쏟아지고 배 위에 있던 부하들이 벌떼처럼 섬으로 뛰어드는 행복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레지나는 묵묵히 엎어진 게리를 바라봤다.

이젠 이전에 겪었던 압도적인 기세조차 느껴지지 않는 유약한 인간.

레지나는 그런 그가 아직 마지막살기를 내뿜으며 검을 주워 드는걸 확인하고 비어 있던 왼손을 들어 부하들을 제지하고 타앗, 바닥을 박차며 게리에게 달려들었다.

-카앙, 카앙, 카앙, 카앙!

이전의 게리가 휘두른 것처럼 수많은 검로를 누비며 빈틈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피레아.

넘쳐나는 활기를 앞세워 검을 휘두르는 레지나였지만 들끓던 마음은 검격을 주고받을 수록 차분하게 가라앉았고 후들거리는 팔로 검을 받아 내는 게리를 압도할 수록 레지나는 벽 너머 펼쳐진 광경에 몰두했다.

은하수가 쏟아지는 밤바다 한가운데에 표류한 것처럼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

왼쪽으로 검을 휘둘러 빗겨나가는 순간 레지나가 행할 수 있는 수많은 검로는 그녀를 어지럽혔지만 정보를 흡수한 레지나는 최적의 검로를 찾아나서며 게리의 온몸에 새빨간 실선을 새겼다.

“아.”

짧은 단말마와 함께 눈을 감고 우뚝 서는 레지나.

폭포처럼 쏟아지는 세찬 검격을 받아치기 급급했던 게리는 우뚝 멎은 레지나의 움직임에 그녀가 소드 마스터라면 응당 겪은 그 현상이 찾아왔음을 알아채고 스응, 자세를 낮추고 뛰쳐나갈 준비를 마쳤다.

지금, 아니- 지금이 아니면 찾아올리가 없는 최선의 적기.

마지막 힘과 마나, 그리고 생명까지 쥐어짜 정말 죽기 살기로 모든 걸 끌어낸 게리는 미약하지만 현재로선 최고의 검강을 피어내고 그녀가 눈 뜨기 전 얇은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짧은 움직임 한번.

필부, 즉 해적들이 보기엔 그저 단순한 휘두르기 였지만 그 한 번의 움직임에 잘려 나간 목은 힘없이 바닥을 구르며 누군가의 발끝에 부딪혔고 머리를 잃은 몸은 철퍽, 앞으로 쓰러졌다.

-툭, 타악!

발끝에 부딪힌 머리통을 걷어차고 잡아채자 경악에 물든 추레한 몰골과 눈이 마주친 레지나.

보잘것 없는 남자였지만 자신이 벽을 깨부수는데 일조한만큼 존중하기로 한 레지나는 머리통을 사뿐히 바닥에 내려놓고 반으로 부서진 커틀라스를 터억, 머리통 앞에 꽂아줬다.

“후우…”

끓어오르는 한숨을 내쉬며 검에 묻은 피를 털고 검집에 집어넣기까지 단 일초도 걸리지 않는 상황.

레지나는 너무나 빨라진 몸의 반응에 어깨를 떨면서도 달려오는 부하들을 향해 미소 지어줬다.

[와아아아아아아-!!!]

바다가 울릴 정도로 환호하는 푸른 파도 해적단과 새로운 소드 마스터, 아니- 진짜 소드 마스터의 탄생에 경배하는 해적들.

레지나는 완벽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고 나서야 왜 게리에게서 이길 수 없다는 위압을 느끼지 못했는지 알아냈다.

벽을 부수고 소드 마스터라는 경지를 이룬게 아닌 벽에 뚫린 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꿀, 검강만 받아먹으며 벽을 부수려고 했던 게 게리라는 남자였기에 그와의 일 전에서 벽을 부수고 소드 마스터가 된 레지나를 이길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해적섬의 소드 마스터 게리의 죽음으로 끝을 맺은 결투.

선명한 검강과 압도적인 위력을 보이며 방심한 게리의 목을 잘라 낸 레지나는 온 바다에 소드 마스터란 경지에 도달했음을 널리 알리게 됐고 그녀를 의심하던 해적들은 레지나가 보이는 검강이란 증거에 침몰해 사라졌다.

순풍을 탄 돛단배처럼 멀리 퍼져나가는 레지나의 소문, 소드 마스터가 된 레지나는 더 이상 단순한 해적이 아니란 걸 온세상에 알렸고 레지나는 지친 몸을 부하들에게 기대며 늘상 내렸던 명령을 웃으며 뱉었다.

“얘들아… 돌아가자!”

“네에!”

우리들의 거점, 쐐기이빨 항구.

소드 마스터란 경지까지 이루고 모든 걸 빼앗으려 들었던 게리라는 놈팡이를 정리했음에도 들뜨지 않고 덤덤히 기뻐하는 레지나. 그런 그녀의 모습에 부하들은 세리느의 갑판에 올라타 얼싸안고 행가래까지 끝마쳤지만 레지나는 끝까지 옅은 미소만 띈채 부하들의 축하를 받아 냈다.

그렇게 조용히 넘어가려던 그때, 선장의 압도적인 전투에 지려 버린(실제로 오줌을 지렸다) 제니는 옷가지를 허리에 두르고 폴짝폴짝 뛰며 한 가지 제안 해 왔다.

“선장님! 오늘같은 기념일에 술이 빠지면 씁니까! 한 잔만 마셔요, 네에? 선장니이이임!”

“맞아요! 오늘같은 날에 안마셔주면 서운하죠, 선장님, 가실꺼죠?”

“어? 어?”

‘어머니를 찾아뵈려고 했는데…’

결국 이뤄낸 성취를 알리고 칭찬받을 생각이었던 레지나.

하지만 생각해 보면 카사노와의 일로 부하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느라 편하게 쉬게 해준적도 없고 술자리도 가진적 없다는 걸 떠올린 레지나는 초롱초롱, 애원하는 아이처럼 눈망울을 빛내는 부하들을 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벽을 깨부수자 늘어난 마음의 여유. 여유를 되찾은 레지나는 지금이 적기인가? 짧은 생각하며 엉겨 붙는 부하들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소리쳤다.

“그래, 오늘 즐겨보자 얘들아!”

“와아아아아아!!!”

통 큰 결정에 또다시 시작되는 행가레. 몇 번이나 공중에 떠오르고 나서야 진정한 부하들은 쿠당탕, 레지나를 피해 흩어졌지만 소드 마스터에 오른 레지나는 가뿐히 착지하고 도망친 부하들을 찾으러 갑판위를 뛰어다녔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딸랑딸랑!

“어서 오허업!”

컵을 닦고 잔에 맥주를 따르는 둥 손이 바쁜 술집주인이 열린 문을 흘겨보며 인사를 건네다 경악했다.

-쨍그랑!

놓친 잔이 박살 나고 난데없는 소음에 집중된 이목, 자연스레 흩어질 이목들은 내친김에 열린 문에 잠시 머물렀고 술집 안에 머물던 손님들은 전부 경악해 벌떡 일어났지만 이목을 이끈 주인공인 레지나는 관심이 싫어 손을 내저으며 주인에게 말했다.

“가장 안쪽, 자리 있지?”

“네, 네, 네!”

“한 번만 대답해.”

“네!”

“맥주 큰통 열 개랑 안주 되는 거 전부 다.”

철렁, 깔끔한 주문과 함께 술집주인의 가슴팍을 두들기고 테이블에 얹혀지는 주머니. 살짝 열린 틈새 사이 빛나는 은빛을 확인한 술집주인은 부리나케 주방으로 뛰어가 주문을 전했고 쿵, 쿵, 쿵,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레지나의 테이블에 오크통을 얹어 주며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달라 말한 후 물러났다.

이미 항구에 정박할 때부터 느꼈지만 부담스러운 시선들.

범람하는 강처럼 번진 소문은 항구에 스며든지 오래였고 레지나는 부담스러운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술집안에 들어서 부하들과 술자리나 거하게 즐기기로 했다.

-콰앙!

“흐흐흣!”

-쿠웅!

“흐흐흫!”

-쿠웅, 쿠웅, 쿠웅!

“흐헤헤헤헤!” “응하아앗!” “더, 더, 더, 쭈욱, 쭈욱, 와아아앗!”

“으음…”

딸꾹, 올라오는 취기에 입술을 달싹이면서도 정신 하나만큼은 또렷한 레지나. 그녀는 엉망진창인 부하들을 흘겨보며 후우, 취기 어린 한숨을 내뱉고 믿음직한 메파를 잠시 찾았다.

“섹스! 섹스하고 시퍼! 섹스하고 싶다구우우우!”

“미친년…”

섹스를 언급하는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치솟았지만 감정은 금세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래, 어머니는 끝나고 찾아뵙자. 어차피 누가 찾아올 사람도 없으신 분이니까 늦게가도 잔소리 조금 듣겠지.’

쐐기이빨항구에 아우리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적었다, 뭐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지만 단 한 사람. 거슬리는 이름 하나가 아우리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바다에 나온 초창기, 아우리아의 이야기를 필리아에게 한 적이 있긴 했지만 한 번도 필리아가 아우리아를 해코지하거나 찾아온적은 없었다. 그리고 뭐- 안다고 해도 위대한 마녀인 그녀에게 무슨 해를 입힐 수 있을까? 라는 게 레지나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놓고 전부 내려놓은 채 술을 마시기 시작한 레지나.

부하들 전부가 얼콰하게 취하고 술집에 있는 잔을 모조리 깨고 의자를 부수고 테이블을 엎으며 난리 치는데에 동참한 그녀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가게를 나가면서 울고 있는 주인에게 주머니 하나를 더 던져 주고 나왔다.

“스언장님~! 잘 안 들려요! 네에! 선장님!”

“뭐라는 거야 미친년, 안 그래 메이?”

“엉니, 저 여기써요, 으붑, 크헤에엑!”

“하아, 지랄났네.”

두귀에 손을 갖다 대고 웃고 떠들며 소리 지르는 제니, 그런 제니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가로등을 두드리는 메파와 메파에게 자신은 여기 있다며 쓰레기통에 얼굴을 들이밀다 들어가 버리고만 메이까지.

취기가 한 방에 싹 가신 레지나는 우르르, 엎어진 여자들을 억지로 밀어내고 밧줄로 묶어 질질 끌고 가는 지경까지 되고 나서야 푸른파도 해적단의 집, 세리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야, 곱게 쳐자 곱게! 갑판에서 자면 입돌아간다!”

“엉니이, 저히랑 가치 자요, 자자, 가치 자아!”

“씨발, 어머니한테 가 봐야 한다고!”

“아라따!”

쿠당탕,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갑판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부하들. 마나를 일으켜 육감을 강화한 레지나는 배를 투과하고 선실에 기어들어 가는 부하들의 잔영을 보고 나서야 안심되어 마나를 거두고 숨을 골랐다.

“흐응…”

온몸을 맴도는 마나와 살짝 옅어지는 취기. 뭔가 할 수 있단 자신감에 차오른 레지나는 마나를 일으켜 온몸의 혈관에 불어넣자 순식간에 취기가 사라진 걸 느끼고 감탄했다.

“오오.”

후욱, 혀끝에 맴돌던 술 냄새까지 사라지는 완벽함에 주먹을 움켜쥐고 눈을 감은 레지나는 철썩, 철썩, 파도 소리를 들으며 마나를 일으켜 자기 몸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소드 마스터에 올랐지만 아직 모르는 무한한 가능성, 정말 소드 마스터란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레지나는 눈을 뜨고 텅 빈 길거리와 조용한 부둣가를 두리번거리다가 천천히 허리춤에 걸친 피레아를 뽑아 들었다.

“하아아아…”

검을 치켜들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수많은 검로와 동작들.

벽에 부딪히던 시절에 행하기 힘들었던, 먹을 수 없는 과실로만 보이던 모든 동작들을 당장에라도 펼칠 수 있단 사실에 흥분한 레지나는 발끝을 세우고 천천히 눈을 감은 채 떠오르는 검로에 몸을 맡겼다.

조금만 힘을 주면 모든 게 가능했고 마음만 먹으면 이미 몸은 움직이고 있다.

육체와 영혼을 가르던 두터운 벽이 허물어진 순간 자유로운 존재로 등극해 버린 레지나.

하나의 경지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상 보통 인간에서 벗어나 또 다른 존재가 된 게 소드 마스터라는 경지. 그 경지의 진실을 무의식적으로 깨우친 레지나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신비의 영역에 다다른 자기 강함에 감탄하면서도 툭, 발끝을 멈추고 검집에 피레아를 집어넣으며 두 눈을 떴다.

“그대로네.”

수많은 검로를 따라 검을 휘두르고 다양한 동작을 행하며 곳곳을 누볐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뜬 순간 제자리에 서 있는 자신.

하나의 신비를 경험한 레지나는 들끓는 환희를 애써 억누르면서도 문득 떠오른 의문에 답을 내려보기로 했다.

“이 상태로 카사노와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자기도 모르게 육성으로 내뱉은 의문. 하지만 후회는 없기에 레지나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그와의 첫 만남을 회상했다.

처음은… 그래, 솔직히 말해 압도당한 감이 없지 않은 초반. 그래도 차츰차츰 좁혀나간 격차였고 마지막 전투만 해도 마음을 내려놓고 헬렐레한 몰골만 아니었어도 지지 않았을게 뻔했다.

그저 병신 같은 짓으로 모든 걸 망쳐 버린 마지막 전투, 이전과 같은 흐름으로 부딪혔다면 사슬에 묶인건 카사노일게 뻔했다.

더 이상 숨길만한 수도 없어 보이고… 아니, 만약에라도 숨겨 놓은 수가 있다 해도 마지막으로 싸워 본 카사노와 지금의 자신이 전력으로 부딪친다면 도저히 질래야 질 수없는, 배당률이 정배인 싸움이었다.

“이길 수 있어. 이길 수 있어…!”

암컷의 몸? 극복할 수 없어? 밑에 깔리는 게 맞아…?

카사노의 헛소리에 천천히 들끓던 분노를 애써 갈무리한 레지나는 분풀이로 쿵, 발을 구르고 갈라진 도로를 바라보며 큼, 큼, 헛기침과 함께 슬쩍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개소리를 한껏 지껄이던 주둥이를 확실하게 짓뭉갤수 있다,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된 레지나는 일단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인 만큼 감정을 갈무리하고 항구 외곽 해저동굴와 이어진 예의 그 동굴로 걸음을 옮겼다.

“후우우…”

판자를 열고 종유석에 맺힌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동굴에 들어서자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바닷냄새.

메파에게 말린 불가사리 가루를 받던 동굴이었지만 거기에 숨겨진 비밀이 하나 있었다.

“오랜만이네…”

찹, 찹, 젖은 물기 가득한 종유석을 어루만지며 동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자 환하게 빛나는 동굴.

종유석에 감춰진 마나석에 두 손을 얹은 레지나는 두 눈을 감고 마나를 받아들였고 우웅, 요동치는 마나와 함께 흐릿해진 시야는 곧바로 후욱, 그녀의 몸이 이동했음을 증명했다.

“아…”

이전의 동굴과는 확연히 다른 동굴의 풍경.

동굴벽 곳곳에 자리 잡은 소라와 조개껍데기는 마나를 머금고 환하게 빛나고 어두운 동굴임에도 불구하고 넘쳐나는 마나에 노출된 이끼들은 환한 빛을 내뿜으며 조명 같은 역할을 해냈다.

“어머니의 향기…”

그리운 고향에서 맡는 향취처럼 가슴을 포근하게 만드는 동굴의 냄새에 레지나는 한참 동안 숨을 크게 들이쉬며 시간을 지체했고 뚝, 종유석에 맺힌 물방울에 정수리를 얻어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어머니께 미리 언질을 보냈으니 아마 계속 기다리고 있을게 뻔했다. 항상 그런 분이셨으니까.

터벅, 터벅, 찰박, 터벅.

물웅덩이를 밟고 단단한 동굴바닥을 걸으며 어머니에 대한 생각에 깊이 빠진 레지나는 입술을 깨물고 곰곰이 앞으로의 일생을 머릿속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왕이 될 몸이야. 어머니의 기대, 어머니의 희망을 등에 업고 살아갈 나는 이제 그 누구한테도 지지 않아.’

카사노를 떠올릴 때마다 꺾였던 투지는 다시 피어오른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 레지나는 어릴 적 자기 볼을 붙잡고 어머니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언젠가 찾아올 마녀들의 희망. 레지나 당신은 그 희망을 위해 바다의 왕이 돼야 해요. 그게 예언, 나아가 이루어져야 할 운명이니까요, 알았죠?’

‘네, 어머니!’

‘그 희망만이 우리 마녀들의 삶의 원천. 부디 이루어 주세요 레지나.’

쪼옥-!

‘나의 딸, 나의 희망.’

볼을 감싼 손바닥은 천천히 머리를 끌어안고 이마에 닿았다 떨어진 입술은 쪽, 쪽, 이마와 정수리를 번갈아 쪼며 애정깊은 축복을 내려주었다.

꾀죄죄한데다 온종일 바닥을 구르며 수련한 꼬질꼬질한 자기 이마에 아랑곳않고 입맞추며 사랑을 속삭였던 어머니, 아우리아.

항구의 쓰레기더미를 뒤지다 먹을 것을 찾지 못해 굶어 죽어 가던 자신을 거두어 사랑으로 살아가게 해준 것 또한 아우리아.

나의 어머니, 나의 희망-

그런 그녀의 기대를 등에 업고 수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으며 성장했던 레지나, 그때 사춘기 적 떠올렸던 의문이 문득 떠오른 레지나는 아직도 해소하지 못했던 의문을 천천히 되새기며 동굴 안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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