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3. 옆집여자와 마주하다 (수정)
* * *
“아, 안녕하세요...”
“아, 예...”
조금 수줍게 인사하는 옆집여자. 이 아파트 살면서 옆집 여자와 대화해 본 건 이사 온 첫날을 제외하곤 처음이다.
여자는 수면 바지에 분홍색 집업을 입고 있었다. 체격도 작고 살집도 별로 없는 그야말로 슬랜더라 할 수 있는 체형이다.
머리가 부스스하지 않을걸 보아 오늘 감은 것 같고 좋은 향기도 났다.
“헤헤...”
나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마치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하다.
허나 나는 긴장을 풀지 않고서 야구방망이를 손에 꽉 쥐었다. 일단 살아 있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단 생각에 무심코 그녀와 마주섰지만. 직접 얼굴을 맞대고 나서야 갖가지 안 좋은 미래가 연상된다.
혹여나 상대방이 나와 같은 각성자일 수도 있으니까.
문자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 거의 백 명 중에 한 명 꼴로 각성자가 된다지만 문자를 맹신할 순 없지.
심지어 세상이 멸망한지 3일이나 지났으니 이 여자도 나와 같은 각성자일지 모른다.
‘반응만 봐선 그냥 겁에 질린 여자 같긴 한데.’
겉모습만으로는 상대가 각성자인지 아닌지 당장은 파악이 불가능하다.
만약 나처럼 인신 공양이나 그런 특이한 스킬을 가진 클래스가 걸렸다면 엄청 위험할 수도 있다.
내가 잠든 사이 목숨을 노릴지도 모르고.
여러모로 불안 해진다. 뭔가 강력하게 그녀를 속박할 수단이 있다면 최고겠지만... 그럴 수단이 없다는 게 문제지.
더구나 아직 나에게 적대적인 행위를 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먼저 덤벼들었다간 역으로 당해 목숨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지금, 이 여자도 나를 상당히 경계하고 있을 테니.
그런데도 나를 방에 불러들였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만큼 자신감이 있든지, 아니면 그저 혼자 있기 무서웠던 걸 수도 있다.
‘만약 각성자가 아니라면? 그래서 나 같이 이상한 스킬이 있을 수 있단 가정 자체를 하지 못했다면? 그저 나의 보호를 받고자 했을지도 모르지. 얼굴이 상당히 예쁘니. 미인계를 쓰려는 작전일 수도...’
여러 가지 가정 중 최악은 이 여자도 나처럼 미친 스킬을 가지고 각성했고 나를 제물로 삼기 위해 덫을 치고 있다는 건데...
‘어쨌든 각성자라면 나보다 강할 확률이 높아. 당장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기보단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편이 좋다.’
아직은 그 무엇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러니까 조금 탐색해볼 겸 대화가 필요하다.
어쩌면 나에게 악감정이 없을 수도 있는데 나 혼자 착각하곤 무작정 야구 배트를 휘둘러 기절시킬 순 없는 노릇이니까.
‘나를 압살할 정도의 실력이 있다면 나의 비우호적인 행동으로 인해 호감도가 나락으로 떨어질 지도 모르고.’
일단은 상대가 나에게 맹목적인 악의를 가졌다고 생가하지 말자. 어차피 바로 옆집이었던 이상 그녀도 언제든지 이 경량벽을 부수고 넘어올 수 있었다. 게임에 몰두하다 잠들었던 나를 죽일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 일단 들어오실래요?”
“저기 죄송한데 들어가기 전에 질문 몇 개만 해도 되겠습니까?”
“아, 네.”
난 여전히 조금 불안 해 보이는 옆집여자에게 질문했다.
“혹시. 좀비 죽여 보셨나요?”
사실만을 대답할 거란 생각은 없지만 일단은 물어 봤다.
“아, 아뇨. 저 지난 삼일 간 집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갔어요...”
“아하. 그러시구나...”
좀비를 한 번도 안 죽여 봤다라고.
믿을 순 없지만, 그녀는 좀비를 언급하자 말자 진절머리는 냈다.
“취조하듯 물어서 죄송한데. 정말 지난 삼일 간 집에만 계신 겁니까?”
“네... 군인들이 온다고 해서...”
문자의 지침에 따라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확실히 믿긴 어렵지만. 그녀가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여전히 난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일단은 그녀의 집안에 남은 흔적들을 보기 위해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내가 과하게 경계해서 그런지 여자는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의 집은 비교적 깨끗했다. 생활감이 넘치기는 하지만 향수를 뿌렸는지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좀비의 시체 썩은 내도 안 났다.
“저기, 뭐라도 하나 마실래요? 그 야구방망이는 일단 내려놓으시고...”
“아, 죄송합니다. 좀비들을 보고 나니까 이거라도 들고 있어야 좀 안심돼서.”
여자는 냉장고에서 사과주스를 꺼내 왔다. 난 사과주스를 마시지 않았다. 수면제라도 탔으면 끝장이다.
“저희 간단하게 자기소개나 할까요?”
“예. 저는 옆집 사는 이은지라고 합니다. 올해 스물여섯이예요.”
“저는 장조준이라 하구요. 올해 서른입니다.”
스물여섯. 나랑 딱 네 살 차이 난다.
“우와. 그럼 저기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예? 아. 넵. 어, 그럼 나도 반말해도 되나?”
“네, 오빠.”
여자가 오빠라고 불러 주는 일은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지만 지금은 그리 좋아할 일이 아니다.
오늘의 오빠가 내일의 좀비가 될 수도 있고, 이 여자가 나를 오빠라고 불러줬다 해서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당장은 그냥 같은 생존자끼리 만난 사이에 불과하다. 어쩌면 서로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를 그런 생존자들끼리...
아마 멸망한지 대략 한 달 쯤 뒤에 이런 생존자를 우연히 마주친다면 일단 총이든 뭐든 서로 겨누고 볼 사이다. 아니면 일단 쏴 죽인 다음 대면하던지.
아직 멸망 초반이니까 이런 어정쩡한 상황도 생기는 거지.
‘집안에 남은 흔적을 찾아야 해.’
만약 좀비를 죽였다면 핏자국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화장실을 살펴봐야겠다.
“저기 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
“아, 네!”
야구방망이를 쥐고서 얼른 화장실로 들어왔다.
“흐음...”
세면대부터 미처 살피지 못했을지도 모를 구석까지 전부 눈에 불을 켜고 살펴봤지만 피라곤 휴지통에 들어 있는 생리대 밖에 없었다.
“흔적이 없네...”
꼼꼼하게 다 지워 낸 걸까?
하수구까지 살펴봤지만 핏자국이나 흔적이 전혀 없었다.
나는 괜히 의심받지 않기 위해 물을 한번 내리고 손까지 씻고 나왔다.
여전히 여자는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탁자에 앉아 있었다.
“저기... 혹시 오빠 각성하셨어요?”
은지가 먼저 나에게 각성했는지 물었다.
나는 거짓말을 해 보기로 했다. 각성여부를 알리지 않고 상대를 떠보는 거다. 만약 은지가 각성자라면 내가 비 각성자란 사실을 알았을 때 지금이랑은 다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니까.
“나 각성 못했어. 아무것도 안 뜨더라.”
“아... 그렇구나...”
은지는 굉장히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암울해했다.
“왜 그래?”
“아, 아니예요. 죄송해요. 혹시나 그냥... 오빠가 각성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래?”
“아, 네... 비 각성자보단 각성자가 살아남기 쉬울 테니까요. 조금 의지하고 싶었나 봐요. 죄송해요. 각성 못한 게 오빠잘못은 아닌데. 멋대로 실망해서...”
“뭐,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그럼 이제 저도 오빠도 둘 다 비 각성자네요... 헤헤. 그래도 둘이서 같이 열심히 살아남아 봐요.”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손을 뻗어왔다.
혹시나 손을 맞잡으면 발동하는 스킬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마주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이 너무 처량해 보여서. 도저히 이 여자가 힘을 숨긴 각성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건 그저 나의 감에 불과했지만. 난 나에게 뻗어진 은지의 손을 마주 잡고 말았다.
허나 나의 불안과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따뜻한 온기만이 전해졌을 뿐이다.
“그래. 우리 열심히 해 보자.”
손을 마주 잡고 흔들자 은지는 조금이지만 불안감이 사라진 미소를 지었다.
의지할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딘가 기뻐 보이는 얼굴이다.
나에게 악의를 품었을지 어떨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미소를 조금 믿어보기로 했다. 언제까지고 날만 세우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결국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는 없을 테니까.
“은지야 그런데 혹시.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어?”
이건 꽤 중요한 질문이다. 만약 가족이 있다면 가족을 찾으려고 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너무 먼 곳에 있다면 포기하겠지만... 적당한 위치에 있다면 찾으려고 할지도 모르니까.’
그건 좀 곤란하다. 나하나 먹고살기도 바쁜데 가족 찾기까지 어울려 줄 수는 없으니까. 갈라서거나 버리는 수밖에.
“아뇨... 저 가족이랑 연끊긴 지 좀 돼서... 보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이제는 사실상 남보다 못한 사이라.”
다행히 그녀는 가족을 그리워한다거나 찾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긴 설에도 본가에 안내려간 거 보면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싶었는데 그게 맞나보다.
“그렇구나. 나도. 나는 아예 가족 자체가 없어. 그럼 혹시 찾으러 가야 할 소중한 사람 있니? 가령 친구라든지. 뭐 연인이라거나.”
역시나 중요한 질문이다. 가족 다음으로 친지나 연인을 찾으려 하니까. 가족이 없는 그녀라면 오히려 더욱 이쪽에 매달리려 할지도 모른다.
“친구는.. 지금 찾을 상황이 아닌 것 같고. 남자 친구는 진즉에 헤어졌어요...”
“아하. 그렇구나. 이런 거 물어봐서 미안한데. 혹시나 찾으러 가고 싶다고 하면... 어쩌지 싶어서. 보다시피 상황이 상황이니까.”
“맞아요...”
그녀는 나와 비슷한 처지였다. 가족도 친지도, 연인도 당장은 없는. 홀로 남아버린 생존자.
파고들 틈이 있는 상대다. 어쩌면 향후 나의 소중한 동료가 되어 줄 지도 모르고.
“은지야. 우리 좀비 한 마리 죽여 볼까? 혹시 네가 각성할지도 모르잖아.”
“네? 서, 설마 밖에 나가시려고요... 안 돼요. 그러다 죽어요, 오빠...”
내 소매를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은지.
고개를 흔들며 나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이제 더는 혼자 있기 싫어요. 오빠... 괜히 나가지 마요.. 그러다 죽으면... 그냥 우리 군인들이 올 때까지 조금만 더 버티면 안 돼요?”
군인이 과연 올지는 미지수지만.
일단 그녀의 간절한 부탁에 나는 좀 더 마음을 열기로 했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나를 붙잡는 모습에서 거짓을 찾기 어려웠다.
‘물론 눈물이 여자의 무기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더는 뭔가 그녀가 이상한 스킬을 보유한 각성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쯤 와서까지 그녀가 각성자임을 숨기며 나에게 거짓말할 이유도 없어 보였고.
“나 사실 각성자야. 좀비에게 안 들킬 방법도 있으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네? 아, 아까 아니라면 서요..”
“미안 해. 떠볼 수밖에 없었어.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 오롯이 믿을 수는 없으니까.”
“그, 그건 그치만...”
그녀는 내 말에 곧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못할 수밖에 없지.
특히나 나 같은 경우는 ‘인신 공양’이라는 스킬까지 본 마당에 무작정 타인을 믿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내가 한 마리 쓰러뜨릴게. 네가 그놈의 머리를 부숴. 그거면 돼.”
“어...”
은지는 여전히 두려워 보였다. 하긴 평범한 사람보고 좀비를 때려잡으라고 하면 무섭겠지.
하지만 그런 상태로는 이 미쳐 버린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법도 도덕도 거의 다 망가져 버린 이 빌어먹을 세계를 살아가려면 강해져야 한다.
“은지야. 집에 식량이 어느 정도 있어?”
“그게... 어 쌀 한포대 있고. 김치 있고. 사실 저희 둘이서 먹으면 엄청 많은 양은 아니에요.”
“우리 집도 그래. 식량도 부족하고. 군대가 우릴 구해주러 오지 못할 상황이라면... 각자도생 해야겠지?”
“그쵸..”
“그러니까 너도 각성자가 되는 편이 서로 도우면서 살아남기 더 쉬울 거야.”
기왕 이렇게 우호적인 관계가 됐으니 은지도 각성해서 서로 돕고 협력하면 더 살아남기 유리하겠지.
“확실히 오빠 말이 맞아요. 제가 너무 겁먹고 있었나 봐요.”
은지는 결의를 다지며 한번 해 보자고 했다.
“그런데 오빠 좀비한테 안 들키는 방법. 그거 혹시 좀비 기피제인가 그거예요?”
“어. 알고 있네?”
“인터넷에서 누가 사진 찍어 올린 걸 봤어요.”
“아하..”
그녀는 인터넷을 통해 도전과제 달성 보상이 뭔지 들은 것 같다.
아직 인터넷이 완전히 끊기진 않았으니까 비교적 활발하게 정보가 오가고 있다.
가령 자신이 각성자라며 자랑 글을 올리는 놈들도 제법 있겠지.
은지는 그런 글들 사이에서 도전과제 달성 보상에 대한 정보를 들은 것 같다.
“오빠는 스프레이로 고르셨구나.”
“어. 당장 돌아다니거나 움직이려면 스프레이가 좋다고 생각했거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좀비한테 몰렸을 때 물리면 도망치기도 전에 죽을 테니까. 해독제를 쓸 겨를이 없을 거고. 인벤토리는 좀비를 피할 수 있게 해주진 못하잖아요.”
“그치. 다섯 개밖에 못 넣고. 그냥 가방들고 다니면 되지.”
“맞아요.”
“아무튼 이걸로 빠르게 나갔다 올게. 2시간짜리라서. 그 안에 쓸 만한 거 주워 오려면 꽤 바쁠 것 같거든.”
약국에서 약도 챙겨 와야 하고 철물점도 들려야 하고 식량이랑 식수도 챙겨야하고 중간에 다이소도 한번 털어 줘야 하고 엄청 바쁘다.
“그러니까 나 나갈 때 좀비 하나 반쯤 죽일 테니까 네가 그거 죽여. 알겠지?”
“네, 오빠. 저 노력해볼게요.”
좋아. 여기서 안 한다거나 못한다거나 무섭다거나 징징 거렸으면 조금 실망했을 텐데.
은지는 머뭇거리긴 했어도 못하겠단 소린하지 않았다. 내가 각성자임을 알리고 나서부턴 자기도 각성자가 되고 싶다는 열의까지 내비쳤다.
상당히 마음에 드는 여자다. 얼굴도 예쁘고. 이 정도면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함께할 상대로 부족함 없지 않을까?
사실 가지 말라고 소매를 잡았을 때 그녀의 애처로운 표정에 조금 심쿵하긴 했다.
차가운 심장에 불이 살짝 붙어 버렸다고나 할까. 그래서 더 지켜 주고 싶다. 내걸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에 생겼다.
일단 당장 내 생각은 그렇다.
물론 앞일은 어찌 될지 모르지만 당장은 그녀와 함께 생존해 나가보기로 했다. 그러고 싶다.
“후우... 그럼 간다.”
취이익!
얼굴에 스프레이를 뿌리고 밖으로 나갔다. 휴대폰에 1시간 반 뒤에 울릴 알람도 맞춰뒀다. 괜히 딴 짓 하다가 약효 시간대 놓쳐서 뒤지고 싶진 않으니까.
은지는 스프레이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급히 현관문을 닫고 들어갔다.
내가 한 놈 남겨둘 때까지 나오지 않으리라. 그렇게 움직이기로 미리 말을 맞춰뒀다.
“진짜 안 건드네...”
좀비 기피제의 효과는 확실했다. 놈들은 나를 보면서도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관성에 따라 내 집 현관을 계속 두드리고 있을 뿐이다.
“시끄러운 새끼들.”
좀비들의 숫자는 대략 8마리 쯤 됐다. 이중에 하나만 남겨두고 다 죽이면 되겠지. 이미 2시간 카운트가 시작됐으니 빠르게 패 죽이고 가자.
후웅 깡! 퍼적!
좀비들의 머리를 쉼 없이 후려쳤다. 두개골이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하잘것 없는 망자들이 다시 지옥으로 기어들어간다.
뭔가 경쾌하다. 30년 동안 현대사회의 부조리함에 억압당해 있던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다.
[좀비 처치로 40 코인을 얻었습니다.]
아쉽게도 레벨 업은 못했다. 겨우 8마리 죽인 걸로는 턱도 없나보다.
“후우...”
평소에 운동 좀 열심히 해둘 걸. 몇 번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어깨가 뻐근하다. 올 때 파스 꼭 가져와야겠다. 제발 약국이 다 털려 있지 않기를.
“은지야. 하나 남겨뒀어.”
은지는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망치가 들려 있었다. 그녀도 여자 혼자 살다 보니 호신용으로 망치를 구비해 뒀다고 한다.
“어...?”
망치를 휘두르려던 은지가 멈칫했다. 뭐지? 왜 이래?
“왜?”
“아, 저. 그게. 이 좀비. 그... 아는 사람이라서요. 아무것도 아니예요. 영화로나 보던 걸 실제로 접하니까... 확실히 느낌이 다르네요. 하하..”
그녀가 몹시 당황해하며 쳐다본 바닥에 기어 다니던 좀비는 아직 20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설마... 이 좀비 전 남친 인가...? 반응이 그런 것 같은데.’
아닐지도 모르지만. 왠지 그럴 거 같은 느낌이다.
콰직!
내 야구 배트 맛에 정신을 못 차리고 바닥을 기던 좀비의 머리통이 은지의 망치질에 박살이 나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은지는 이미 죽은 좀비임에도 울분을 토해내듯 몇 번이나 더 망치를 내려쳤다.
‘역시 이 좀비 새끼 전남친인 것 같은데...’
별로 좋게 해어진 것 같지도 않은데 이놈은 전 여친 만나러 여기까지 찾아왔다가 좀비에게 물렸나보다.
설 연휴에 고향이나 내려가지 괜히 전 여친 집에 왔다가 봉변을 당했구먼.
난 은지가 죽인 좀비를 보며 조소를 지었다. 그러곤 은지에게 물었다.
“각성했어?”
슬슬 가 봐야 해서 조금 재촉하듯 물어봤다. 사실 그리 큰 기대는 안 한다.
백 명 중에 한 명도 각성하기 쉽지 않다는데 그녀가 한 번에 각성했을 리가...
“어... 자, 잠시만요. 뭔가 문자가 떠올라서...”
진짜? 이렇게 쉽게 각성한다고?
혹여나 나에게 버림받기 싫어서 거짓말을 치는 걸지도 몰라 은지의 눈을 잠시 쳐다봤는데 눈동자 굴러가는 게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그녀도 조금 전의 나처럼 상태 창을 읽고 있었다.
설마 내 말도 안 되게 높고 이상한 666의 행운수치가 여기서 작용한 건가?
행운수치가 666이라 이게 행운인지 불행인지 잘 모를 판이었는데.
은지가 단박에 각성한걸 보아하니 행운이 맞나보다.
“그럼 보상이나 스킬은 네가 알아서 정하고. 나는 시간 없으니까 일단 다녀올게.”
“어. 아. 네! 다녀와요! 꼭! 꼭 살아서 돌아와야 해요! 저 혼자 두면 안 돼요!”
“그래. 알겠어. 어서 들어가.”
“네!”
은지는 나에게 신신당부를 하듯 죽지 말고 꼭 돌아와야 한다며 외쳤다.
역시 마음에 드는 여자다. 어떤 직업인지는 나중에 다녀와서 물어봐야겠다.
혹여나 그러지는 않을 것 같지만 각성했다고 내 뒤통수치면 큰일이니까 이번에 나간 김에 레벨도 좀 올리고 와야겠다.
상대를 완전히 믿을 수 있을 만한 뭔가가 생기기 전까진 항상 힘의 우위에 서야 한다.
‘좋아... 그럼 가 보자...’
루트는 이미 정해 뒀다.
일단 가장 가까운 편의점을 들렸다가 담배나 물건 좀 챙기고 별거 없으면 바로 약국으로 간다.
항생제나 의약품은 나중엔 귀중해질 테니까.
뭐, 각성자 중에 힐러가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당장엔 뭣도 없으니까.
감기약도 챙겨야겠네. 그냥 약국에 보이는 물건은 다 쓸어 담아야겠다. 다른 생존자야 어찌 되든 내 알 바 아니다.
그렇게 약국을 알뜰살뜰 다 털어먹고 바로 마트에 들어가서 카트를 노획한 다음 통조림이나 먹을 만한 식량, 휴지, 속옷 등의 물건을 쓸어 담고서 집으로 가는 길에 철물점과 다이소까지 들리면 진짜 완벽하다.
차를 운전해가면 좋겠지만 은지도 나도 자차가 없는 인간들이라 열심히 발품 팔아야 한다. 차를 이용하면 좀비가 꼬일 지도 모르고.
‘2시간 타임 어택...’
대략적인 루트를 머릿속으로 되뇌며 서둘러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부디 개꿀 파밍을 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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