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19. 마트 점령은 식은 죽 먹기
* * *
전사셋은 죽은 건지 쓰러진 건지 일어날 기미를 안보였다.
난 촉수에 붙잡혀 발버둥 치는 하진우를 끌어당겼다.
“우...웁...!”
나의 촉수에 단단히 붙잡힌 녀석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봤다.
두 눈에 서린 공포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상상 이상의 쾌감이 느껴졌다.
이거 또 하린이 앞에서 폭주할 것 같은 기분이다.
“하린아. 은지쪽 가서 하진성 처리 좀 도와줄래?”
“네, 주인님.”
총격이 2번 있었다. 아마 높은 확률로 박성오는 죽었겠지.
어쩌면 은지 혼자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린이라도 보내면 일단 안심이다.
“자, 그럼 우리 둘만 남았네?”
난 하진우의 입을 묶고 있던 촉수를 살짝 풀었다.
“이, 이 시발... 너, 너 뭐 하는 새끼야... 이게 대체...”
“어허. 기본적인 말버릇이 안 돼 있네? 십새가 죽을려고.”
손아귀에 약간 더 힘을 줬다.
꽈드득.
“끄아아!!!! 웁...!”
비명 지르는 하진우의 입을 다시 막았다. 미친놈이 다짜고짜 비명 질러서 깜짝 놀랐네.
“쉿. 애들 놀래잖아.”
“이, 이런... 자, 잘못했어요..! 봐주세요 제발!”
[상대가 당신에게 굴복했습니다.]
안타깝지만 당장은 노예로 만들 마나가 없다. 지금까지 총 22의 마나를 소모했기 때문에 남은 마나는 8. 조금 휴식을 취해 10까지 소모된 마나를 채울 필요가 있다.
그동안 이놈에게 억압용 입마개를 씌워 둬야겠다.
하진성 놈은 마비 독니에 뿅간 상태니까 이놈만 억제하면 더 이상 마트에 우리를 위협할 놈들은 없다.
아처 놈이 조금 불안 하지만. 그놈도 쉽게 잡을 수 있을 거야.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 하진우는 내가 아무 말이 없으니 불안 해졌는지 되는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여, 여자들 다 푸, 풀어드릴게요!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제, 제발...!”
놈은 내가 붙잡힌 여자들의 복수라도 하러 온 그런 정의로운 인간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전혀 아닌데 말이지.
“야, 기껏 붙잡은 여자들을 왜 풀어 줘. 병신이냐?”
“예..? 어. 저, 복수하려고 오신 게...”
“복수 같은 소리 하네. 그래도 지은 죄가 많은 건 인정하나 봐?”
“예! 저, 정말 잘못했습니다! 차, 착하게 살 테니... 제발... 한 번만...”
“잘못은 뒤지고 나서 염라대왕에게 빌어라. 나한테 지랄하지 말고. 네놈에게 남은 미래는 죽을 때까지 노예로 구르는 것뿐이야. 등신 같은 새끼야.”
짝!
기분 나쁘게 나에게 애원하는 하진우의 뺨을 때리고 입에 입마개를 채웠다.
남자의 입에 이런 SM용품 같이 생긴 걸 채우고 있으니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다.
여자의 입에 채워주는 거라면 기꺼이 솔선수범해서 입마개를 채워줄 수 있지만 이런 근육질 남자의 입에 채우고 있으니 짜증밖에 나지 않았다.
‘입마개를 해도 스킬만 못쓸 뿐. 원래 싸울 줄 아는 놈이니까 못 움직이게 해야해.’
촉수를 끄고 가만히 있어야 마나가 차오른다. 그러니 이놈을 묶어둘 필요가 있었다.
일단 전자제품 코너에 있는 인터넷 선으로 묶어 둬야겠다.
“그럼 잠시 기절해라.”
“자, 잠깐..! 윽... 으그극...”
촉수를 조아 놈의 숨통을 압박했고, 곧 하진우는 게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읏챠.”
촉수를 해제하고 놈의 팔과 다리를 전선으로 묶었다. 뒤로 묶었으니 깨어나도 쉽사리 풀기 어려울 거다.
‘하진성부터 노예로 만들고 하진우를 노예로 만들자. 워리어 놈들은 다 뒤졌나?’
하린이에게 당한 워리어 중 둘은 머리가 깨져 죽었다. 하나는 코가 내려앉아 얼굴이 함몰 된 것 같긴 한데 숨은 붙어 있었다. 그래도 한놈은 건졌군.
워리어들을 확인한 다음 은지와 하린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어, 오빠. 여기 일단 묶어 뒀어요.”
은지가 청 테이프로 몸을 부르르 떨며 뭐라 지껄이고 있는 하진성의 팔다리를 돌돌 감아둔 상태였다.
박성오는... 이미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 가슴과 머리에 한 발씩 박혀 있는 걸 보니 총에 맞아 즉사했겠지. 아쉽군 꽤 유용한 녀석이었는데.
“옆에 그 여자는?”
“아, 저희 도와 준다고 해서...”
은지의 옆에는 속옷만 겨우 입고 있는 젊은 여자가 하나 있었다. 아마 하진성 새끼에게 끌려와서 따먹히던 여자겠지.
청 테이프를 들고 있는 거로 보아 은지의 말대로 묶는 걸 돕고 있었던 것 같다.
하린이는 주변을 살피며 망치를 들고서 서 있었다. 굉장히 듬직하다.
“아, 안녕하세요. 황수민이라고 합니다...”
“어. 그래.”
외모는 그냥저냥 평범하게 생겼다. 은지와 하린이를 보다 보니 별로 구미가 당기지도 않는다. 그녀의 인사를 대충 받아 넘기고 은지와 하린이에게 말했다.
“일단 한곳에 모아두자.”
“네!”
“제가 들고 갈게요, 주인님.”
하린이가 하진성을 들쳐 맸다. 그대로 우린 놈들이 포커를 치고 있던 테이블 쪽으로 가 앉았다.
그때쯤 소란을 듣고 위로 올라온 양아치 놈들이 우릴 발견했다.
“시발!!! 침입자다!!!”
“닥쳐! 이 개새끼야!!!”
“허억...!”
한 놈이 고함질러서 마주 소리치자 놈들이 당황해 했다. 동료를 불러서 어찌해보려는 심산인가 본데 어림도 없지.
다 데리고 와봐야 은지와 하린이 손에 끔살이다. 심지어 장전된 권총도 나한테 있다. 비록 2발밖에 안 남았지만.
“이, 이 개새끼들..!”
“침입자야! 대장이 붙잡혔어!”
“뭐, 뭐라고...?”
“어, 어떻게 들어온 거지...”
“몰라. 젠장! 여기 성오 형님이!”
“시, 시발! 민준이 형 불러!”
“이미 오고 있다!”
우르르 2층으로 올라온 놈들은 마비 독에 취해 바들바들 떨고 있는 하진성과 입마개를 하고선 바닥에 엎어져 있는 하진우, 그밖에 죽거나 기절해 나자빠진 각성자들을 보곤 우리에게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웅성거렸다. 겁쟁이 새끼들.
“다들 비껴봐!”
그때 아처 클래스인 김민준이 모여있던 양아치들을 뚫고 앞으로 한 발짝 걸어 나왔다.
“이게 대체...”
놈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 앉아 떨고 있는 하진성과 죽은 박성오를 살폈다.
“네놈들... 뭐냐?”
놈은 우리를 향해 물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김민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아직도 웅성거리는 하진성의 부하 놈들을 향해 소리쳤다.
“야! 느그들 대장 보이냐! 이 새끼 우리한테 쳐발렸어! 이 씹새들아! 알아들어? 우리가 존나 더 세다고! 알아서 기란 말이다! 뒤지기 싫으면!”
나의 말에 웅성거림이 한층 더 커졌다.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때 마나가 10까지 찼다. 생각보다 빨리 찼군. 딱 좋은 타이밍이다.
“자, 하진성 내 노예가 돼라...”
하진성은 아까부터 굴복했다는 의사를 내비추고 있었다. 덕분에 이마에 지장만 찍으면 이 새낀 나의 노예가 된다.
9렙짜리 훌륭한 전투노예.
이건 못 참지.
얼른 엄지손가락에 피를 내고 놈의 이마에 지장을 찍었다.
치이이익!
“야 이 새끼야!!!”
그때 하진성이 뭔가를 당한다는 생각에 대치 중이던 김민준이 우리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놈은 뭐 의리로 살고 의리로 죽는 놈인가? 무슨 정신으로 달려드는 거지? 뭔가 비장의 수라도 있나? 확실히 속도가 빠르긴 한 것 같은데...
“은지야, 하린아.”
“네.” “넵.”
둘은 내 말에 즉각 반응해 달려드는 김민준을 붙잡아 바닥에 내리꽂고는 마구잡이로 짓밟았다.
“끄아아!!!”
놈은 별거 아니었다. 활 없는 궁수는 그냥 개 좆 밥이군. 놈은 감시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사이 난 노예가 된 하진성의 뇌에 명령을 새겨 넣었다.
“자, 하진성. 잘 들어라.”
“크으... 예.”
“결코 나를 배신하지 마라. 내 명령 없이 함부로 자해하지도 마라. 나와 은지, 하린이를 비롯해 팀에 해가 갈 행동도 하지 마라. 이건 명령이다. 알겠으면 대답해.”
“아, 알겠습니다...”
치욕스럽다는 듯이 이를 꽉 깨물면서도 놈을 알겠다고 대답했다. 아무리 싫어도 주인의 명령인 이상 노예는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자, 그럼 느그 부하들 통솔해.”
“예. 야이 새끼들아! 다들 진정해라!”
때마침 마비독의 효과가 풀린 하진성은 곧장 일어나 웅성거리는 놈들을 향해 소리쳤다.
“오늘부로 우리는... 저기 성함이?”
“장조준이다.”
“아, 옙. 크흠. 오늘부터 우리는 장조준 형님의 아래로 들어간다! 봤지? 존나 강하신 분이다! 이분의 형수님들도 강하다! 우린 이 분들과 함께라면 살아남을 수 있다! 알겠냐!”
하진성의 외침에 웅성거림도 잦아 들고 곧 납득했다는 반응이 흘러나왔다.
“어..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조준형님이 큰형님이십니까?”
“그래! 이분이 이제 우리 최고 큰형님이시다!”
“조준형님! 사랑합니다!!!”
그렇게 하진성에 의해 소란은 일단락되고 양아치 부하 스물다섯을 얻었다.
영 못미덥고 사악한 놈들이지만 일단은 이런 놈들이라도 써먹어야 한다.
“갇혀 있을 여자들 다 데려와.”
“예, 알겠습니다. 야! 여자들 다데려와.”
“예!”
곧장 사내놈들이 우르르 내려갔다.
그리고 홀로 남은 김민준.
“혀, 형님... 이게 대체..”
김민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하진성을 올려다 봤다. 그 모습이 꼭 버림받은 개 같아서 처량해 보였다.
“조준형님. 저놈에게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어? 그래라. 대신 내가 보는 앞에서 해.”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진성은 자기 처지를 받아들이고 나에게 깍듯이 대하기로 한 모양이다. 예의를 지키고 나에게 잘 보여야 자기도, 자기 동생도 좀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단 걸 바로 깨달았겠지. 역시 한 무리의 수장을 하던 양아치 답다. 줄을 잘서고 눈치가 빠르단 말이지.
은지와 하린이는 하진성이 가까이 다가오자 옆으로 물러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앉아서 마나를 회복 중인 내 뒤에 수문장처럼 섰다. 둘 다 엄청 듬직하네.
“둘 다 너무 잘해줬어.”
은지와 하린이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 줬다.
“오빠한테 칭찬받았다.. 헤헤”
“크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예요, 주인님.”
둘 다 내가 칭찬해주자 굉장히 만족한 미소로 답해준다. 강하고 착한데 순종적이라 너무 좋군.
우리가 그리 훈훈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하진성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김민준에게 분노를 토해냈다.
“민준아. 이 시발 새끼야.”
“혀, 형님...”
“네가 시발 감시를 잘했으면... 저분들이... 까드득... 여기까지 들어오실 일도 없었잖아...”
“혀... 형님... 그게...”
김민준은 사색이 돼서 하진성을 올려다 봤다.
한 인간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은 제법 봐줄 만한 광경이었다.
절망에 빠진 저 표정. 짜릿하군!
“후우... 됐다. 너도 살고 싶으면 알아서 기어. 나도 지금 좆 빠져라 기고 있으니까. 알겠냐. 내 동생 같은 놈이라 해주는 충고야. 괜한 자존심 부리다 뒤지지 말라고. 이해했어?”
“예... 알겠습니다. 이해했습니다.”
“그래... 능력만 제대로 입증 받으면... 쉽게 죽이진 않으실 거야.”
“노, 노력하겠습니다.”
“그 말은 내가 아니라 저분한테 해라. 난... 이미 아무런 힘이 없어.”
그 말에 김민준은 비척이며 일어나 내 앞에 와선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아, 앞으로! 노, 노력하겠습니다!”
[상대가 당신에게 굴복했습니다.]
이거 다들 내 스킬의 효과를 모르니까 너무들 쉽게 쉽게 굴복한다.
만약 굴복하는 순간 노예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차라리 죽기를 택했겠지.
“그래. 고개 들어.”
“예, 옙!”
“일단 옥상에 가서 감시하던 거나 계속해. 경계근무 하나는 기똥차게 잘한다며.”
“예! 자신 있슴돠!”
“그래, 어서 가 봐.”
마나가 차면 그때 찬찬히 노예로 만들기로 하자. 활도 있으니까 그거 쥐어주면 날아다니겠지.
김민준은 어색하게 경례를 하곤 옥상으로 돌아갔다.
그때쯤 1층에서 부하들이 아홉 명의 여자를 끌고 올라왔다.
“형님! 여자들 다 데려왔습니다!”
“어 수고했다. 다들 다시 1층으로 돌아가서 할 일들 해.”
“예! 알겠습니다!”
양아치놈들은 군기가 바짝 들었다. 하진성이 나에게 극도로 깍듯이 대하자 부하 놈들도 덩달아 나를 두려워하는게 눈에 보인다.
하긴 사람 때려죽여가며 레벨 9까지 오른 녀석이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니 당연히 겁먹을 만하지. 박성오에게 듣기론 무슨 살인병기 같은 놈이었다던데.
아무튼 아홉 명의 여자들에게 뭔가 말을 하려고 할 때 하린이가 던진 망치에 얻어맞아 기절했던 놈이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으며 깨어났다.
“끄윽...”
“어, 일어났네?”
“큭... 시발... 내 코...”
깨어나자마자 내려앉은 코를 붙잡고 고통을 호소한다. 응급처치를 해 줘야 할 것 같다.
“진성아.”
“예!”
“이 새끼 데려가서 응급처치 좀 해라.”
“알겠습니다!”
“아, 맞다. 진성아.”
“예, 형님. 말씀하십쇼.”
“얘들 반항하면 알지?”
“예, 잘 알겠습니다. 교육하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여기 여자들. 앞으로 막 못 건들게 해라. 반발이 나오겠지만. 싫으면 나가라고 해. 아니면 내 손에 죽는 다고 하고.”
“예, 알겠습니다. 확실히 인지했습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어. 수고하고. 부탁해.”
하진성은 고개를 꾸벅 숙이곤 그대로 고통스러워하는 각성자 놈을 데리고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제 내 앞에 남은 건 황수민을 포함한 열 명의 여자와 내 뒤쪽에 서 있는 은지와 하린이, 아직 기절중인 하진우뿐이다.
하진우는 아직 노예로 만들려면 시간이 더 걸리니까 일단은 이 열 명의 피해여성과 이야기를 나눠볼 차례로군.
“자, 어디 보자. 안녕하세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내 앞에 선 열 명의 여자들에게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어? 왜 인사 안 받아 주시지?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흐윽...”
여자들이 단체로 울음을 터트린다. 이런.. 뭔가 실수를 했나?
“어... 왜 저래..”
“그... 오, 오빠.”
“응?”
“저분들 아직 겁에 질리신 것 같아... 좀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도 될까?”
“어. 그래. 나는 그 저기 뭐냐. 잘 모르겠네. 어찌 대해야 할지. 은지랑 하린이가 어떻게 분위기 좀 풀어 줄래?”
“네!”
“맡겨두세요, 주인님.”
열 명의 여자들은 며칠간 저 양아치 놈들에게 꽤 시달린 상태였다.
붙잡힌 지는 일주일도 안 됐겠지만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수모를 당했겠지.
남자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감이 생겼을 수도 있다. 노리개로 잡혔던 여자들이니까. 그래서 잘 해주려고 노력중이다. 어찌 되었든 공존해야 하니.
그러니 여기선 은지와 하린이가 같은 여자로서 분위기를 완화시켜 주길 기대해 봐야겠다.
“저기 여러분. 일단 자리에 둘러앉을까요? 서서 이야기하면 다리 아프니까.”
“너무 겁먹으실 거 없습니다. 해치거나 함부로 대할 생각이 아닙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라고 안심시키곤 내 눈치를 한 번 쓱 살피는 하린이.
은연중에 내뱉은 발언에 허락을 구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눈웃음을 지어줬다.
“저, 정말인가요...”
“다, 다행이다...”
“우리, 일단 앉아요. 뭔가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있나 봐요.”
황수민도 나서서 여자들을 안심시켰다. 잠깐이지만 나와 함께 있어서 그런지 묘하게 적극적으로 도우려고 한다. 자기 가치를 증명하고 싶은 모습이었다.
은지, 하린이, 황수민이 나서서 분위기를 주도하자 그제야 겁에 질렸던 여자들의 두려움이 약간 완화됐다.
곧 자리에 앉은 여자들이 쑥덕거리며 조금이나마 편안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래, 일단 앉혀야 진정이 되는 거구나. 한 가지를 또 배웠군.
“자, 여러분. 이제 조금 진정이 되셨을까요?”
“네...”
“이, 이제 괘,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지만 괜찮다니 그냥 믿어 주자.
“다행입니다. 우선 저는 장조준이라고 합니다. 일단 오늘부로 여기의 우두머리가 됐습니다.”
“네...”
“그래서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공지사항 다들 보셨죠?”
“네... 그, 좀비들이 똑똑해지고...”
“막 강해진다던데...”
“예. 그거 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여러분 중에 아직 한 번도 좀비를 안 죽여 보신 분계신가요?”
열 명의 여자 중 여덟이 손을 들었다. 각성자가 될 가능성을 가진 여자가 무려 여덟 명이나 된다. 이거참 행운이로군. 제발 내 행운 수치 666이 여기서 열 일 좀 해줬으면 좋겠다. 적어도 셋은 각성자가 되어 주길...
“좋아요. 여러분들은 내일 저랑 같이 좀비를 죽일 거예요. 각성자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하고 가야 하니까요. 아시겠죠?”
편안 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하자 떡진 머리를 한 4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손을 살짝 들었다.
팔이 살짝 떨린다. 나를 보는 두 눈도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여전히 내가 무서운 것 같군.
“네.. 저,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 그, 질문해도 될까요...?”
“예. 말씀해 보세요.”
“저기... 혹시.. 각성자가 아니라면.... 흐윽... 다, 다시 노리개가 돼야 하나요...?”
여기서 노리개가 되라고 하면 반발이 엄청나겠지. 그리고 은지랑 하린이도 나에게 실망할 테고.
나도 각성자가 아니라고 해서 이 여자들을 다시 노리개로 만들 생각까진 없다. 노리개가 되어도 나의 노리개가 되는 거지 저놈들이 무자비하게 손대게 두진 않을 거다.
“노리개가 될 필요는 없고. 공동체로서 열심히 일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저 양아치놈들에게 맺힌 게 많으실 거 같은데. 복수하고 싶으셔도... 죄송하지만 저는 당장은 저놈들을 다 죽일 생각이 없습니다. 앞으로 생존하려면 필요한 전력입니다. 굉장히 껄끄럽고. 불편하고 화가 나시겠지만. 지금은 안타깝게도 저놈들과의 공존만이 살길입니다.”
고개까지 꾸벅 숙였다. 당장 강간당한 피해자들에게 가해자를 눈감아 줘라고 말하는 형국이니. 내가 고개라도 숙여야지.
안 그랬다가 이 열 명이 미쳐서 단체로 테러를 해 버리면 답이 없어진다. 좀비 상대하기도 벅찬데 말이지.
“네...”
“아, 알겠어요...”
“흐윽...”
다시 눈물바다가 됐다.
자신들의 소중한 사람을 죽이고 납치 감금해 강간했던 놈들과 공존해야 하니 화가 나겠지.
그녀들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가 없다.
스물다섯이나 되는 노동력을 당장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우니까.
그래도 더 나은 생존자들이 우리쪽에 대거 합류한다면 굳이 양아치들을 쓸 필요가 없긴 하지.
애초에 양아치새끼들을 내가 안 좋아한다. 학창 시절의 안 좋은 기억들부터 여러 가지 이유로 말이다.
“그래도 저놈들을 대체할 인력이 생기면 하나둘 처리할 생각이니까. 다들 조금만 더 참읍시다. 언젠가 봄이 올 겁니다. 당장 조치를 취해 줄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괘, 괜찮아요... 그래도... 조준씨 덕분에.. 상황이 많이 나아졌어요... 흐윽.. 가, 감사합니다..”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다행히 당장 지옥 같던 상황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분위기였다.
황수민과 은지, 하린이가 솔선수범해서 분위기를 이끌어 준 덕분이다.
혹여나 저놈들을 죽여 달라거나 복수심에 눈이 멀어 말도 안되는 부탁을 했다면 꽤 귀찮았을 텐데.
그렇게 대충 이야기를 끝내고 여자들을 2층 어린이 놀이 코너에 재웠다.
“하아. 이제 이놈만 노예로 만들면 끝이네. 둘 다 좀 쉬어. 오늘 정말 수고했어. 진짜 은지랑 하린이 너무 최고야.”
“오빠야 말로 최고야. 진짜 좋아.”
“주인님, 오늘 결단력 있는 모습 멋있었어요.”
상황이 일단락되자 은지와 하린이가 나에게 달라붙으며 양 볼에 입을 맞췄다. 하아. 이맛에 산다.
“고생은 너희가 다 했지. 둘 다 고마워.”
은지와 하린이를 껴안고서 마나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미 새벽이 됐고 졸리고 엄청 피곤하지만 하진우를 노예로 삼지 못하면 불안해서 쉽사리 잠들 수가 없으니까.
‘후우... 내일은 집으로 돌아가서 필요한 물품을 최대한 여기로 옮기고 마트를 요새화 하자... 자동차랑 가구들 모아서 혹여나 좀비가 들어 올 만한 빈틈은 최대한 막고... 식량이랑 생필품도 전부 체크하고.. 철물점에도 다시 가서 싹 다 챙기고... 주변에 털만한 곳도 다 털고...’
그렇게 마트 요새화 작업 및, 주변 상가 약탈을 하며 아주 바쁜 주말이 지나가고.
‘죽음의 월요일’이 업데이트 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