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25. 노예들과 내실을 다지자
* * *
“스킬 다 찍었다...”
“와! 고생했어. 오빠.”
“휴... 이제 좀 한시름 놓았어요, 주인님.”
“고맙다. 너희가 없었으면 많이 힘들었을 거야.”
빈말이 아니다. 둘이 손이라도 잡아주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아찔해진다.
‘이제 은지와 하린이 없는 삶은 상상도 하기 힘들어... 그런 고로 둘의 스킬도 어서 찍어줘야하는데.. 업적보상도 받아야 하고...’
물론 당장 급한 건 아니다. 스킬 찍고 업적보상 받기 전에 우선 좀 씻어야겠다. 썩은 피가 말라 붙어서 영 찝찝하다.
“음... 쟤는 어쩌지?”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는 강화영에게 다가 갔다.
“야. 괜찮냐?”
“으에? 아, 네. 하하. 네.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아무 문제없어요. 괜찮아요.”
이거 상태가 많이 심각한데... 전혀 안 괜찮아 보이잖아.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도 그렇고 초점 없이 허공을 봐라보고 있는 눈동자도 꽤나 위태로워 보인다.
“야. 정확한 증상을 말해.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하하.. 저 저 저 진짜. 진짜 괜찮은데...”
또다시 자연스럽게 명령을 캔슬 했다.
이 녀석 뭐지? 지금 죽이는 편이 낫나?
웬만큼 강하게 명령하지 않으면 잘 들어 먹질 않는다.
‘원래 이렇게까지 이상한 상태가 아니었던 점도 영 찝찝하고...’
숫기가 조금 없고 낯가림이 심해 보이긴 했어도 자꾸 어색하게 웃으려한다거나 피를 먹으려 드는 광인은 아니었단 말이지. 클래스의 영향을 이렇게나 깊게 받다니. 조금 무서운 이야기다.
까딱 잘못해서 내가 이런 이상한 클래스를 뽑았더라면 이렇게 정신 나간 상태가 될 수 있었단 소리니까.
“야. 자꾸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뭐가 문젠데.”
“어... 저... 그게... 피... 피가...”
“피?”
하아... 미치겠네. 역시 피가 먹고 싶나 본데...
일단은 화영이가 더듬거리지만 열심히 말하려고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줬다. 답답해 뒤질 것 같았지만 끝까지 참고 들어줬다.
“그게 좀.. 자꾸... 죄, 죄송해요. 흐윽... 피가. 꿀꺽... 피가 자꾸.. 먹고 싶어서 히익..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저 좀 이상하죠. 하하하.... 흐윽... 하하하.”
무슨 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말에 두서가 없다. 감정도 뒤죽박죽 뒤섞인 것 같고. 횡설수설 뭔가 이야기는 하고 있지만 피를 원한다는 것 말고는 제대로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너 피가 먹고 싶구나? 그치?”
“아.. 꿀꺽... 네. 피. 피가... 제발... 한 모금만...”
초점을 잃고 방황하던 그녀의 붉은 두 눈이 드디어 나에게로 향했다.
광기가 묻어난 눈빛. 무언가를 갈망하는 저 두 눈.
피를 원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생긴 건 꽤 예쁜데... 하는 짓이 영 미친년인데...’
가벼운 뉘앙스의 명령은 보란 듯이 캔슬하고.
자신을 감당하기 힘들어 연신 불안 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과연 이 피에 미친 광녀를 내가 잘 써먹을 수 있을까 싶다. 감당할 수 없다면 차라리 지금 죽여 공양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하하... 한 모금... 한 입만... 먹고 싶어. 피... 하아.. 신선한.. 먹고 싶어...”
이 녀석 완전히 맛이 갔잖아!
‘카니지 벰프로 각성하자마자 종족이 바뀐 것도 그렇고. 상당히 특이한 클래스야. 얼굴로 보나 특이성으로 보나 여기서 죽이긴 아까운 게 사실이다. 어찌해야 이 녀석을 다룰 수 있을까.’
사실 다룰 수 있는 방법이야 간단하지.
“피 줄까?”
“꿀꺽... 네... 네! 주, 주세요...! 주, 주인님. 제발... 저 한 입만... 아니, 한 모금만... 한 모금이면 돼요... 제발..!!!! 제발!!! 피!!! 피를!!!”
“조용히 해!”
“히끅.. 네.. 저. 조용히 할게요. 저 조용히 잘해요. 저 얌전히 잘 있을 수 있어요.”
이렇게나 간절히 원하는 피를 주면 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피로 통제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입 벌려.”
특수 좀비를 잡고 얻은 드랍템인 의식용 단검으로 손바닥에 살짝 상처를 냈다.
자잘한 상처쯤이야 차오르는 살점을 사용하면 금방 회복 가능하니 이 정도 출혈은 괜찮다.
뚝.. 뚝 뚝...
주먹을 쥐어 쥐어짜네듯 피를 떨어뜨렸다. 그녀의 입안으로.
“하아... 하아.. 꿀꺽. 꿀꺽. 꿀꺽... 주인님... 할짝... 달아요... 너무... 달아... 맛있어...”
무릎 꿇고 있던 화영은 떨어지는 피를 입에 머금으며 점차 일어서더니 내 손을 붙잡고 피를 핥았다.
그녀의 새빨간 혀가 내 손목을 타고 올라 상처 부위를 핥으며 피를 탐닉했다.
단물을 빨아먹듯. 게걸스럽게. 그러면서도 아프지 않도록 조심스레 혀를 놀렸다.
그녀는 한참이나 그렇게 빠져들 듯이 내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마셨다.
상처 부위의 아픔과 화영이의 혀에 말랑한 감촉이 뒤섞여 묘한 간지러움과 따스함이 느껴졌다.
“오, 오빠... 그대로 놔둬도 괜찮을까?”
“영 불안 해요 주인님.”
그런 나와 화영의 모습을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둘 사람이 우려를 표했다.
안 그래도 슬슬 상처를 지혈할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너무 많이 먹게 해주면 애 버릇 나빠질 수도 있으니까.
“여기까지.”
“하읏..!? 하아.. 자, 잠깐만요... 주인님.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진짜..”
“야. 한 모금이면 된다며. 말이 다르네? 이제 피 먹기 싫어? 두 번 다시 못 먹는 수가 있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주, 주인님.. 잘못 했어요. 주인님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세요. 제발.”
내 말 한마디에 강화영은 두려움에 떨며 바닥에 머리를 박고서 빌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연신 잘못했다고,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사정해 온다.
자존심이고 자존감이고 아무것도 없는 모습이다. 처절하게 비는 꼴이 꼭 마약 중독자의 말로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웃겼다. 하루아침에 멀쩡하던 여자가 피 없으면 못 먹고 못 사는 몸이 되다니.
‘이거 생각해 보니... 이런 상태로 며칠 굶기고 인간사냥 시키면 미친 듯이 싸우지 않을까? 피를 위해서라면 인정사정 안 봐줄 것 같아. 대학살의 뱀파이어라는 것부터 학살에 특화된 클래스 같기도하고.’
확실히 피에 굶주리게 만들어 인위적인 폭주를 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그것도 그녀의 레벨링을 하고 나서의 이야기겠지만. 어쨌든 피로 길들일 수 있단 사실을 깨닫고 나니 앞으로의 방침이 정해졌다.
“또 거짓말하고. 내 말 제대로 안 들으면 피 안 줄 거야. 저녁 없다고. 알아들어?”
“네! 저 잘 알아들었어요. 저 이해력 좋아요! 주인님 말씀 잘 들을 게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이 미친년 다루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피를 담보로 뭐든 시킬 수 있겠어.
“그래. 착하게 행동해야 해.”
“크흐윽... 네...! 진짜.. 저 진짜 말 잘 들을 게요..!”
상처 난 손바닥을 치료하고 강화영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걸로 된 걸까요...”
하린이는 영 껄끄러운 눈빛이다.
뱀파이어인 화영이에게서 뭔가를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까 심연관측을 습득하고 나 혼자 숨이 넘어가고 있었을 때도 하린이가 제일 먼저 내 이상을 알아차렸으니까.
이게 바바리안의, 야만인의 감이라는 걸까.
“뭔가 느껴져?”
“음... 그냥. 저렇게 변한순간부터... 눈을 마주치면 닭살이 자꾸 돋아서요. 그냥 제 기분 탓일 수도 있어요.”
하린이는 그저 이유 모를 불안감이 느껴진다고만 이야기했다. 자기가 느끼는 모종의 불안감이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직감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단은 이 녀석도 우리 같은 히든클래스니까. 될 때까지 한번 써 보자. 영 안 되겠으면... 그땐 죽이든 어쩌든 해 보고. 어때?”
“저는 찬성이에요.”
“저도... 흠... 네.”
은지야 별로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에 금방 동의했고 하린이도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은지와 하린이는 지금 나에게 있어 믿고 의지할 만한 유일한 인간들이니까 웬만한 의견은 들어 줄 생각이다. 만약 끝까지 하린이가 거부했다면 강화영의 처우를 좀 달리 생각했을 것 같다.
강화영 같은 경우는 내가 봐도 영 상태가 정상은 아니라 여차하면 버리거나 죽였겠지.
‘물론 그전에 맛은 한번 봐야겠지만...’
노예낙인의 효과가 발휘되고 있는 덕분에 아무리 저항하려해도 결국에는 내 명령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
그리고 굳이 스킬효과를 빌려 강압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더라도 피를 내걸면 당장 옷을 벗고 매달릴 기세다.
“일단은 씻으러 가자. 화영이도 일어나.”
“네에..!”
화영이는 다소 맥빠지는 목소리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붉은 눈이 연신 상처났던 내 손만을 쫓고 있어서 조금 소름 끼쳤다.
“아, 가기 전에 물건부터 쫙 구입해야겠네.”
은지와 하린이는 물론이고 강화영까지 데리고 내려가서 씻을 생각이었는데 지금보니 보부상에게서 물건을 전부 구입하지 않았다.
‘이 보부상 녀석 출현조건은 알겠는데 퇴장조건은 뭐지?’
보부상은 그 자리 그대로 여전히 허공을 응시한 채 앉아 있다.
묘하게 해탈한 표정이 웃긴 아저씨다.
“저기 당신은 언제 떠나는 겁니까?”
NPC라고는 하지만 일반적인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지능이 있었다. 다만 상대가 대화에 잘 응하지 않아서 그렇지.
“물건이 모두 팔리거나. 날짜가 지나기 전까진. 이 자리에 앉아 있지. 그래서 젊은이. 뭔가 살 텐가?”
“그렇가요... 음 어디 보자...”
남은 물건은 ‘TS주사’와 ‘샐러맨더 소환서’, ‘파란 꿈의 안대’. 총 3개가 남았다.
워낙 많은 좀비를 죽여서 그런지 셋 다 바로 구입할 수 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코인이 수급되고 있고...’
아래층에서 하진성과 노예들이 잘 싸우고 있는지 소량이긴 하지만 코인이 계속 습득되고 있다.
“전부 다 구입하겠습니다.”
“하하하! 고맙네! 자네 덕분에 일찍 집으로 갈 수 있겠구먼!”
보부상은 활짝 웃으며 나에게 인사를 건네더니 왔을 때처럼 빛과 함께 사라졌다.
마지막의 저 상쾌한 미소를 보아하니 호감도가 조금 상승한 것 같다.
‘물건을 전부 구입해주면 기분이 상당히 좋아짐... 기억해두자.’
보부상은 좌판이 매진되면 조기퇴근 할 수 있어서 좋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둬야겠다.
혹시나 호감도가 높아지면 뭔가 퀘스트를 주거나 물건 판매량을 늘리거나 그러지 않을까.
“음... 그런데 이 주사는 어쩌지..”
샐러맨더 소환서나 수면용 안대는 유용한 물건이지만 이 TS주사는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지.
‘하진성을 여자로 만들어...? 아니야. 굳이 여자로 만들 필요가 없지. 그보다 여자가 된 하진성이라니... 토 나올 것 같군.’
일단은 그냥 가지고 있어야겠다. 언젠가는 쓸 때가 있지 않을까. 당장 우리 무리 중에 TS시키고 싶은 사람도 딱히 없고. 만약 언젠가 꼭 TS시켜서 나락으로 떨어뜨려주고 싶은 상대가 나온 다면 그때 써야겠다.
“소환서는 어찌 쓰는 물건일까...”
붉은색 표지를 살짝 펼치자 안내문구가 뜬다.
[샐러맨더 소환을 습득하시겠습니까?]
“오...!”
당연하지. 이런 건 내가 무조건 ‘독식’ 해 줘야지.
“습득한다.”
[샐러맨더 소환을 익혔습니다.]
[샐러맨더 소환: 작은 불꽃 도마뱀을 불러냅니다. 소환하는 동안은 10의 마나를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10의 마나를 쓸 수 없게 된다는 소리는 내 마력 245중에 10을 소환 유지비용으로 계속 사용하고 있겠단 소리였다.
그러니까 샐러맨더를 불러내는 동안 내 마력 스탯 최대치는 235가 되는 거다. 10은 샐러맨더가 계속 사용하는 부분이 되는 거지.
‘다행히 마나가 많으니까 엄청난 부담은 아니네.’
마력을 연료로 삼는 라이터 겸 휴대용 버너가 하나 생겼다.
“샐러맨더 소환.”
화르륵..!
붉은 불꽃이 일렁이더니 곧 작은 도마뱀의 형상을 취했다.
“우와! 오빠 그건 또 뭐야?”
“이거 샐러맨더래.”
“주인님, 이 녀석 만지면 뜨겁겠죠?”
“어... 그러게? 한번 만져볼게.”
화상을 입으면 차오르는 살점으로 치유하자는 생각으로 땅바닥에서 꾸물거리는 샐러맨더에게 손을 가져다 댔다.
놈은 주인을 알아보는지 가만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따듯하네?”
“우와! 오빠! 나도! 나도 만져 보게 해 줘요!”
“잠깐만...”
분명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질량이 있는지 잡힌다. 신기한 감촉이다 불을 붙잡은 묘한 감각은 마치 일렁이는 비단 꾸러미를 어루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자. 살살 만져 봐. 내가 주인이라서 나만 따뜻한 거일 수 있으니까.”
“응! 그럼...”
은지가 샐러맨더의 머리쪽으로 손을 가져다 대자 샐러맨더는 가만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얌전하네.”
“신기하다... 하린아. 너도 만져 봐.”
“네...”
하린이는 불을 만진다는 생각에 조금 무서운지 엉거주춤 손을 뻗었다.
“우와... 맨들맨들한 감촉이네요..”
“그치? 신기하지. 야, 화영아 너는 어때?”
“네? 아. 어. 네!”
이런. 그냥 말을 안거는 편이 낫겠다.
샐러맨더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내 목덜미만 쳐다보고 있다.
만약 노예낙인을 찍지 않았다면 진즉에 내 목을 물어뜯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럼 이제 진짜 씻으러 가자. 밑에 애들 상태도 확인해 보고.”
꼬르륵.
“슬슬 밥도 먹어야겠네요.”
“그러게.”
찬거리야 많다.
주로 유통기한이 짧은 것들부터 조져야하니까 생선이나 고기를 잔뜩 구워 먹을 생각이다.
“그럼 내려가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마트의 지하 1층이 식품 매장. 1층이 의류매장. 2층이 가전재품이나 장난감 등등 잡화매장이다. 3층부터는 주차장이고.
주차장엔 자동차들이 제법 세워져 있었다. 다만 차키가 없어서 무용지물이지. 그나마 바리케이드로 몇 대 끌고 가 써봤지만 보다시피 워 보이 같은 대형 좀비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하진성과 노예들은 4층부터 이 잡듯이 뒤져가며 좀비들을 죽인 모양이었다. 살아남은 좀비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덕분에 우리 넷은 마음 편히 화장실에서 씻을 수 있었다. 마트를 뒤져 바가지와 목욕 용품을 챙겨 와 서로의 몸에 물을 부어 주며 씻었다. 당연히 갈아입을 옷도 챙겼고.
‘그나마 샐러맨더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아직 물과 전기가 나온 다는 게 행운이군.’
아쉽게도 완전 따뜻한 물은 나오지 않았고 미온수만 졸졸졸 흘러나왔다. 그래서 냄비를 가져와 물을 가득 받은 다음 샐러맨더로 물을 데워서 사용했다.
‘물이야 비나 눈이라도 오면 상관없지만... 전기는 어쩌지. 발전기라도 찾아야 하나? 냉동식품은 전기 없으면 다 상할 텐데... 그냥 외부에 꺼내 두면 얼려나?’
전기가 언제 끊길지 모른다는 게 가장 불안 했다. 냉장고를 비롯해 각종 전자기기가 정지해 버리면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꽃핀다. 당장 난방부터 곤란해질 테니까.
“하핫!”
“어, 언니!”
그때 한창 샴푸로 서로 장난치고 있는 하린이와 은지가 눈에 들어왔다.
“흐흐.”
둘의 해맑은 모습을 보니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 풀린다. 동심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화영아.”
“네! 주인님!”
화영이는 몸에 비누칠을 하곤 멍하니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여전히 어딘가 맹해보인다.
“어서 씻어. 좀 있다 피줄게.”
“아! 네!”
피를 준다는 말에 다시 삶의 의욕을 되찾은 표정이다. 피를 준다는 말이 저리도 기쁜 걸까.
‘굳이 내 피를 줄 필요는 없지. 쓸모없는 비 각성자가 둘이나 있으니까. 그놈들은 앞으로 화영이 밥이다.’
비 각성자 구지환과 김도경을 피 주머니로 쓰면 딱 맞겠다.
어차피 각성자도 아닌 놈들이니 그런 일이라도 해야지. 싫으면 인신 공양 당하는 미래도 있다. 죽는 것보단 이렇게 예쁜 뱀파이어의 비상식량 겸 피 주머니가 되는 게 훨씬 이득 아닐까?
그런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형님! 싹 다 둘러보고 왔습니다!”
화장실 밖에서 하진성이 나를 불렀다. 나는 얼른 몸에 묻은 거품을 헹구고 허리에 수건만 대충 두르고서 나갔다.
“그래, 다들 수고했어.”
이제 노예들에게 옥상 청소를 시킬 생각이다.
벌써 시체들에 파리를 비롯한 온갖 잡 벌레가 꼬이기 시작했으니까.
이대로 시체들을 방치하면 역병이 창궐할 것만 같다.
마음 같아선 옥상 한구석에 모아 두고 전부 불사 지르고 싶지만 그랬다간 주변에 굉장한 어그로가 끌려 생존자들이 마트에 다 모일지도 모른다...
‘음.. 차라리 그렇게 유인하는 편이 나을지도?’
어차피 밖으로 나가서 생존자를 사냥할 생각이었다. 노예로 부려 먹든 인신 공양 제물로 쓰든 당장은 인력이 필요한 시점이니까. 더구나 싸움에 집중하려면 청소를 비롯해 잡역부가 필요하단 사실을 새삼 깨달은 참이라 노동력이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 싶다.
어젯밤이야 뭐 어쩔 수 없이 비 각성자들을 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래, 주변에 있는 생존자들을 이곳으로 유인해 사로잡는 편이 좋겠다.’
적대적인 놈들이 오더라도 마트 안에서 노예들을 통제하며 게릴라전을 유도하면 비교적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워낙 마력량이 증가한 상태라 실시간으로 노예를 양산하며 싸우는 전법도 쓸 수 있을 테니까. 난전으로 끌고 가서 적들을 인신 공양해 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 같고.
“일단 마트에 있는 시체들 옥상으로 전부 옮겨서 한 곳에 모아. 그다음에 기름 찾아서 뿌리고 불 질러. 전부 태워.”
시체들로 캠프파이어를 한다. 생존자가 있음을 알리는 봉화 겸 다른 생존자를 불러들이는 유인책이다. 연기를 보고 좀비들이 반응할 수도 있지만 마력만 충분하다면 촉수를 무제한으로 소환할 수 있으니 크게 걱정 없다. 지금이라면 특수 좀비 수십 마리가 와도 무리 없이 싸워볼 만하다.
그리고 좀비들 보단 생존자들이 연기에 더 격하게 반응하지 않을까 싶다.
“예 알겠습니다!”
“그거 다하면 일단 너희도 좀 씻고 밥 먹고 락스랑 청소 도구 가져와서 옥상 청소 좀 하자.”
“예!”
이후 3시간 동안 시체를 옮기고 불태운 하진성과 노예들은 옥상청소로 5시간을 더 보냈다.
그리고 그사이 나와 은지, 하린이를 비롯해 내 노예 하렘의 문턱에 발을 반쯤 걸친 화영이까지. 이렇게 넷이서 고기를 구워먹었다. 아직 상하지 않은 고기를 보이는 대로 긁어와 구웠다. 미리 다 구워 놓고 다른 노예들 나눠줄 생각이다. 녀석들은 옥상청소 한다고 고생했을 테니 일종의 포상이랄까. 주인님이 구워주는 고기라니.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야한다.
“음. 피 말고 고기도 잘 먹네?”
“네에! 하하.. 그래도... 여전히 피가 먹고 싶네요..”
화영이는 좀 전에 구지환과 김도경에게서 피를 왕창 받아먹었다.
둘의 낯빛이 많이 안 좋아졌지만 내가 크게 신경 쓸 바는 아니지.
어쨌든 피를 적당량까지 섭취한 화영이는 상당히 대화가 잘 통하는 상태까지 이성이 돌아왔다. 물론 여전히 피에 대한 갈망이 남아 있었지만.
내가 봤을 때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피를 빨아야 만족할 것 같다.
“어우 배부르다.”
“하~암...”
“일단 좀 잘까?”
“네...!”
5시간 뒤로 알람을 맞추고 등산용품 코너의 텐트 안에 들어가 잠시 낮잠을 자기로 했다.
실질적인 전투는 우리가 담당하고 있으니 이렇게 짬이 생길 때 자둬야한다. 무박으로 버티기엔 너무 피곤했으니. 몸을 섞을 기력도 없었다. 무리하게 관계를 맺었다간 박는 중에 기절할 것 같았다.
“쿠울..”
은지와 하린이는 금세 내 팔을 베고는 잠들었다.
화영이는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새우잠을 자고 있고.
나는 은지와 하린이의 체취를 음미하며 업적보상을 고르기로 했다.
당장 자고 싶지만 할 건하고 자야지.
“어디 보자...”
지난밤 나는 업적을 무려 6개나 달성했다.
우선 흑사의 내단을 먹고 마력이 200증가하면서 얻은 업적들이다.
순서대로 ‘흑사의 내단’, ‘목숨을 건 도박’, ‘마나유저’가 있다.
그다음은 인신 공양을 하곤 카쉬낙스와 조우하며 얻게 된 업적이다.
‘미지와의 조우’, ‘용서받지 못할 자’, ‘카쉬낙스의 종복’이다.
‘일단은 흑사의 내단 달성 보상부터 차근차근 골라보자.’
[보상을 선택하십시오.]
[1. 흑사의 송곳니]
[2. 흑사의 알]
[3. 흑사의 뒤틀린 내단]
우선 흑사의 송곳니부터...
[흑사의 송곳니: 찌른 대상을 즉사시킬 수 있습니다. 단 1회밖에 쓸 수 없습니다.]
굉장한 물건이다. 찌른 대상이 누가 됐든 무조건 죽일 수 있다니.
하지만 단 한 번밖에 쓸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혹여나 나처럼 흑사의 내단을 복용하고 살아남은 놈이 이걸 골라 나를 찌른다면... 즉사하겠군.’
내가 당할걸 상상하니 실로 대단한 물건이긴 하지만... 일단 다른 보상도 알아보자.
[흑사의 알: 새끼 흑사를 길들일 수 있습니다.]
‘흑사를 길들인다라... 소환수 개념인가? 그전에 흑사를 부화시켜서 어디에 써먹지?’
잘 모르겠다. 샐러맨더처럼 실생활에 유용한 종류의 소환수는 아닐 것 같고 전투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종류가 아닐까?
‘흑사라... 은지한테 주면 잘 어울릴 것 같단 말이지.’
키워서 성체로 만들면 엄청 유용해질 것 같다.
문제는 마지막 보상인데... 이게 보상이 맞나?
[흑사의 뒤틀린 내단: 복용할 경우 마나가 500 증가합니다. 55퍼센트의 확률로 즉사합니다.]
‘정신 나갔네. 55퍼센트면... 먹었다간 그대로 뒤진다고 봐야겠군.’
차라리 독약으로 쓰는 편이 낫겠다.
아무리 마나를 500이나 올려 준다고 해도 난 싫다. 반절보다 높은 확률로 즉사한다는 데 웬만한 강심장 아니고서야 이걸 선택하는 인간이 있을까?
‘송곳니 아니면 알인데...’
뭘 선택할지 모르겠다.
선택 장애가 올 것 같은 이지선다.
‘하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