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42. 싸워라, 이겨라, 굴복시켜라
* * *
“와. 아람이 클래스 미쳤네.”
데몬 슬레이어. 이름부터 미친 간지다.
나는 무슨 어디 이교도 새끼같은 컬티스트인데...
성능은 일단 젖혀두고 클래스 명이나 컨셉 하나만큼은 우리 중에서 아람이가 제일 간지난다.
[한아람]
[레벨: 10]
[클래스: 데몬 슬레이어]
[근력: 37]
[민첩: 37]
[체력: 33]
[의지: 40]
[마력: 40]
[행운: 24]
[스킬: 망자분쇄, 마기감응, 마기응집, 흑갑방호, 생명력증가, 아로새긴 저주, 마력 차단, 어둠감시, 저주받은 은총]
우선 [마기감응]은 ‘마기’라는 힘을 쓸 수 있게 해주고 [마기응집]은 몸에 마기를 모아두는 스킬이었다. 이 두개가 데몬 슬레이어가 소비하는 마기를 채워주는 기본 바탕이다. 필수 스킬이라 볼 수 있다.
거기에 [어둠감시]는 나의 변형된 시야나 은지의 들추는 시선처럼 어두운 곳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스킬인데 모든 직업이 이런 류의 스킬을 하나씩을 가지고 있나보다.
‘생명력 증가는 말 그대로 자체 치유 기술이고...’
마법과 같은 방출형 스킬을 상쇄시키는 [마력 차단]이나 피부 위에 검은 갑주 같은 방어막을 생성시키는 [흑갑방호]로 생존력을 높일 수 있으니 탱커로 써먹기 좋겠다.
‘특히나 그녀가 가장 먼저 얻었을 망자분쇄가 좀 많이 좋네.’
망자분쇄는 언데드 형 몬스터에게 극대화된 데미지를 주는 기술로, 현재까지 등장한 특수 좀비들은 거의 다 한 방에 보내버릴 수 있는 고급 스킬이었다.
‘이거라면 워 보이고 좀비지네고 할 거 없이 그냥 뚝배기가 깨지겠어.’
아마 이 스킬로 어젯밤을 버텼겠지. 몸에 흑갑 방호를 두르고서 망자분쇄를 갈기면 웬만한 특수 좀비들도 다 죽일 수 있었을 거다.
거기다 [아로새긴 저주]는 오감 중 하나를 차단하는 대신 다른 신체 능력을 올려주고 후각을 차단하곤 근력이나 반사 신경을 끌어올릴 수 있는 특이한 강화스킬이었다.
전투 중에 시야를 포기할 수 없으니 후각, 미각, 통각 중 하나를 마비시키면 된다. 그러면 다른 신체 능력을 그만큼 끌어올릴 수 있었다.
‘전투 중에 미각은 쓸모없으니까. 마력만 충분하다면 큰 패널티 없이 신체강화가 가능하다... 좋네.’
여기에 더해 [저주받은 은총]은 마력이 허용하는 한 반인반마가 될 수 있는 독특한 스킬이다. 실시간으로 마력이 소모되니 길게는 유지 못하겠지. 필살기 쯤으로 봐야한다.
아람이도 하린이처럼 자체 강화기술이 꽤 풍부했다.
‘마기를 다룬다는 확실한 컨셉이 있는 직업군. 벌써부터 마력차단 같은 스킬이 붙은거 보면 마법사나 그쪽 계통에게 꽤 강할 것 같기도 하고.’
여기서 더 성장하면 진짜 악마도 때려잡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다만 하필 상대가 야만 전사인 하린이었으니 스킬로 강화된 하린이와의 육탄전에서 밀려 그렇게 얻어맞았던 게 아닐까.
한번 페이스 말리면 반격도 못하고 맞는 수밖에 없으니까.
어쨌든 아람이도 우리와 함께 살인강도를 죽여 레벨이 1 오른 참이다. 스킬을 하나 찍어야 한다.
“휘감기는 흑염으로 할게.”
“응.. 마음대로 해.”
아람이의 엉덩이를 만지작 거리며 4개의 선택지 중 하나인 휘감기는 흑염을 골랐다.
이건마력을 소모해육체나 무기에 검은 불꽃을 두르는 스킬이다.
불꽃의 효과는 피격된 적의 속도를 낮추고 몸을 무겁게 한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적들에게만 뜨겁다.
‘아름이는 어떨까.’
[한아름]
[레벨: 9]
[클래스: 소드 댄서]
[근력: 38]
[민첩: 48]
[체력: 31]
[의지: 37]
[마력: 34]
[행운: 21]
[스킬: 가벼운 발걸음, 날붙이의 은혜, 흐르는 몸짓, 양손에 하나씩, 완벽한 균형, 바람의 춤, 난격검무, 회륜참격]
소드 댄서답게 스킬들이 죄다 검무와 관련된 스킬들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이나 [흐르는 몸짓]은 회피에 특화된 스킬인데 이 두 스킬 덕분에 은지와 화영이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었을 거다.
여기다 [날붙이의 은혜]로 예기를 다루는 손놀림이 더 좋아지는데다가 [양손에 하나씩]과 [완벽한 균형] 스킬의 조화로 양손잡이 마냥 이도류를 쓸 수 있다.
심지어 민첩 스탯도 레벨 9치고 상당히 높고. 진짜 무희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야말로 회피 딜러의 표본.
아람이가 맞으면서 반격한다면 아름이는 죄다 피하고 명치를 죽어라 때리는 클래스다.
‘바람의 춤과 난격검무, 회륜참격...’
아름이가 만약에 검을 들고 있었다면, 심지어 이도류였다면.
바람의 춤으로 종횡무진 움직이며 적절히 난격검무와 회륜참격을 섞어 썼다면... 어쩌면 은지와 강화영이 아름이에게 된통 당하거나 정말 까딱 잘못했으면 큰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죽지야 않았겠지만. 상처를 치유한다고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은지의 얼굴을 봐야 했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아름이와의 전투 당시 은지는 상당히 마력이 떨어진 상태였고 강화영은 레벨이 훨씬 낮았었는데 그때마침 아름이가 이상한 무기를 들고 있어서 다행이었구나.
“야, 너 사슬낫 왜 쓴 거야? 스킬이랑 매치가 1도 안되는데?”
“네?”
“아니. 스킬이 죄다 검무관련인데... 왜 굳이 사슬낫을 쓴 거지 싶어서.”
“아아. 원래 식칼 두 자루 들고 다녔는데... 너무 거리가 짧아서 몇 번 물릴 뻔해서요. 그러다가 사슬낫 드랍 돼서 그거 들었어요. 큰 검은 오빠가 들겠다고 우겨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아름이는 우리와 조우하기 몇 시간 전에 무기를 사슬낫으로 바꿨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리 잘 다룰 수 있었던 건 날붙이의 은혜 스킬 때문이었는데 사슬낫도 낫이니까 판정범위 안에 들어간 것 같다.
‘한태양와 아람이는 사슬낫을 다루기 힘들었을 거고 그나마 다룰 수 있는 게 자기라서 사슬낫을 들고 있었구나.’
그나저나 판정이 후한 스킬이다. 망치에 커터 칼을 달아도 날붙이로 판정 될까? 아마 거기까지 후한 판정은 아니겠지.
“은지야. 아름이랑 너희 서로 무기 좀 바꿔야겠다.”
“숏 소드랑 사슬낫이요?”
“어. 그게 맞지.”
숏소드를 두 자루 쥐어 주면 아름이는 날개를 단 새처럼 날아오를 거다.
그리고 그림자에 숨어드는 은지는 왠지 사슬낫이 잘 어울렸다.
여자 닌자 같다고 해야 하나. 몸 선도 가느다랗고. 그림자를 다루는 것도 딱 맞네.
은지는 심지어 그림자 수리검까지 집어던지니까.
물론 날붙이의 은혜가 없는 은지가 사슬낫을 잘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우린 몇 가지 실험을 해봤다.
“이렇게 해서... 잠시만요.”
방법은 이러하다.
사슬낫에 달린 쇠추에 그림자 직조로 뽑아낸 그림자 단검을 달아버리는 거다.
그리하면 비도발출 스킬로 명중률을 높이고 나아가 그림자 염력으로 조작까지 해버리는 거지.
이론상으론 가능하다.
“됐다.”
은지가 그림자 속에 쇠추를 집어넣었다 빼자 투박하게 생겼던 쇠추에 그림자 단검이 결합되어 끌려올라왔다.
“이대로...”
은지는 몇 번 쇠사슬을 뱅뱅 돌리더니 표적을 향해 집어 던졌다.
쾅!
쇠추에 달린 그림자 비도가 정확히 표적이었던 나무판자에 틀어박혔다. 심지어 코너에 있던 나무 판자에. 이쯤되면 아름이가 썼을 때보다 훨씬 성능이 좋다.
그리고 박히는 순간 나무판자가 강한 충격에 쪼개지며 터졌다. 동시에 내구력이 다한 그림자 비도가 깨져나가며 쇠추를 다시 회수할 수 있었다.
“이거 쇠추에 달아서 쓰니까 충격량이 확 증가 한 것 같아요.”
“와. 언니 진짜. 대박이다."
옆에서 구경하던 하린이도 엄지를 척 들었다. 사슬낫을 던지는 솜씨가 장난아니네. 만족스럽다.
"이제부터 너는 훌륭한 닌자다. 축하한다, 은지야. 하산해라.”
은지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그러자 은지는 내 거친 손길에 머릴 맡기곤 기분 좋은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흐헤... 그런데 닌자요? 저 닌자는 잘 모르는데.”
“아니야. 닌자에 너무 부담가지지 말고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하면 돼.”
“네!”
은지가 레벨을 더 열심히 올려서 어서 빨리 강해졌으면 좋겠다.
알차게 육성된 섀도워커라면 갑자기 나타난 닌자 마냥 적들을 다 몰살 시켜 버리는 짓도 가능할 것 같으니까.
그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슉, 슉슉. 슉. 슉슉 슉.
“허어.. 시발..”
그사이 숏 소드 두 자루를 신나게 휘둘러보던 아름이는 착착 감기는 검의 손맛이 너무 좋은지 욕까지 지껄이며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휘둘러지는 숏 소드는 거의 무슨 살아 있는 뱀 새끼들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심지어 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무섭다.
“어, 그럼 스킬이나 마저 찍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름이가 검을 늘어뜨렸다. 집중이 깨져서 그런지 좀 아쉬운 표정이다.
아름이는 [잔불의 춤]을 습득시켰다. 바람의 춤이 종횡무진 움직이며 자유롭게 적을 공격하는 스킬이라면 잔불의 춤은 몸에 피로도가 누적될 수록 더욱 거센 검압을 보여 준다는 설명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검압이 높아지면 피격 범위가 늘어난단다.
스킬을 다 찍은 이후 우린 아줌마가 차려온 밥을 먹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오늘 밤도 어제처럼 좀비 웨이브가 밀어닥칠지도 모르니까 마트 내 최고 전력인 우리도 돌아가면서 경계를 설 생각이다.
황수민이나 하진성 같은 다른 노예들은 2명씩 돌아가면서 서고 우리 쪽 다섯 명 중에서도 한 명씩 돌아가며 보초를 선다.
우선 처음으로 내가 경계를 서기로 했다. 2시간 뒤에 하린이를 깨우고 그다음이 아람이, 아름이 은지 순서다.
순서를 정하고 난 뒤 네 명의 여인들은 곧장 잠들었다. 하루를 굉장히 알차게 보냈으니까.
“하~암.”
굉장히 피곤하다. 그래도 경치가 좋아서 버틸 만했다.
사람이 많이 죽어 세상이 조금 어두워진 덕분인지 밤하늘별이 잘 보였기 때문이다.
“어? 야. 너 뭐하다 이제 오냐?”
"헤헤헤. 헤헤헤."
그때 해맑은 얼굴로 옥상에 올라온 강화영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너 이때까지 피 빨고 있었냐?”
“엉! 배불러요!”
“허... 그 새끼 설마 죽였어?”
“어... 죽진 않았고, 살아 있어요.”
죽지 않게 조절해서 야금야금 빨아먹었나보다.
애새끼가 부디 내일을 버틸 수 있길 빈다. 그래야 계속 피 주머니로 써먹지.
“야, 너 스킬은.”
“네? 몰라요? 그냥 알아서 찍혀 있던데?”
피를 양껏 먹어 배가 부른 강화영은 계속 웃고 있었다.
세상 행복한지 묻는 말에도 또박또박 다 대답하고 피 달라고 아우성치지도 않아서 좋다.
“어디 보자...”
[강화영]
[레벨: 8]
[클래스: 카니지 뱀프]
[근력: 44]
[민첩: 46]
[체력: 47]
[의지: 14]
[마력: 50]
[행운: 42]
[스킬: 핏빛손톱, 흡혈회복, 혈류가속, 포식자의 시야, 혈액분출, 혈액조작, 떨어지는 피, 혈흔폭발]
“허...”
하루 사이에 레벨 8까지 오른 것도 모자라 스탯까지 엄청 올랐다.
‘의지 스탯을 제회하곤 거의 1렙 당 무조건 4씩은 올랐네. 대신 의지는 1렙당 1씩 밖에 안 오르는 구나.’
동일 레벨 중에는 스탯이 가장 좋을 것 같은데 의지가 14밖에 안 된다. 내가 봤을 때 의지 스탯이 마력 회복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이렇게 낮아서야...
‘그래도 피를 빠는 거로 어느 정도 마력까지 회복해 버리니까. 전투 중에는 피 나올 구석만 있으면 계속 싸울 수 있겠지.’
언데드만 아니라면 계속 싸울 수 있는 클래스다. 피를 뽑고 마시며 회복하고 다시 죽여 피를 뽑는 무한 순환구조.
'다른 스킬은...'
화영이는 선택지가 하나뿐이라 스킬선택이 의미가 없으니까. 그냥 대충 다 습득한 상태였다.난 새로 추가된 스킬들을 확인했다.
[포식자의 시야]는 특이하게도 인간만 찾아내는 스킬이었다. 하린이의 심박추적과 비슷하지만 대상이 오직 인간이란 점에 차이가 있다.
그밖에 [혈액분출]은 사로잡은 대상에게서 피를 잡아 뽑는 정신 나간 스킬이었고 [혈액 조작]은 뽑아낸 피를 조종하는 스킬이었다.
“떨어지는 피라...”
이건 뽑아낸 피를 공중에서 비처럼 분사시키는 스킬이다. 광범위하게 피를 흩뿌린다. 이 스킬 하나만 보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 허나 진정한 가치는 다음 스킬인 [혈흔 폭발]에서 나온다.
“자신이 조작해 묻힌 피를 폭파시킨다...”
떨어지는 피 스킬로 광범위하게 피를 흩뿌린 다음 대규모 폭발을 일으킬 수 있었다.
‘물론 스킬들에 마력 소모가 극심하고 폭발이 어느 정도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대박이다. 이거라면 양민학살이 가능해.’
사람 한 명 잡아다 피를 죄다 뽑아내고 흩뿌린다음 폭파시키면 좀비 새끼들은 그냥 아작날 것 같다. 다만 범위내에 아군이 끼어 있을 경우 함께 폭사하겠지만.
“다 확인했다. 대박이네.”
“그래요? 헤헤. 저 이제 자도 돼요?”
“너 보초 안설거냐? 배부르다고 바로 자게?”
“어... 깨어 있으면 계속 배고파지는데..”
“아니다. 그냥 자라.”
대충 인사한 강화영은 옥상 바닥에 그대로 누웠다.
‘안춥나..?’
뱀파이어라 추위를 안타는 건지, 아니면 미친년이라 저러는 건지.
그녀는 눕자마자 코까지 골며 잠들었다.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아직 2월 초라 날이 풀리지 않아서 새벽 공기가 차가운데.
난 담요를 한 장 가져와 그녀에게 덮어줬다. 언제 써먹을지 모르는데 몸상하면 안되니까.
“흠...”
남은 시간 동안 나는 옥상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마트주변을 살폈다. 그렇게 자정이 넘길 기다렸다.
그리고 곧 12시가 되며 화요일로 날짜가 바뀌자 거리 곳곳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촤하학!!!
끼아아아!!!!!
곳곳에서 특수 좀비로 변한 좀비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어젯밤처럼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하... 미친놈들...”
몇 마리가 마트로 달려온다.
그나마 어제처럼 정신 나간 물량은 아니다. 난 잠들기 전에 은지에게 받은 대마도사의 귀걸이를 착용하고서 스킬을 사용했다.
“우어어어!!!!”
“시끄러워. 다들 자는데.”
원거리에서 촉수를 쏘고 구강을 소환해 좀비들을 죽인다.
와중에 정기보고를 하듯 칠흑바퀴가 교전을 시작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자세한 상황까지는 모르겠고 그냥 뭔가와 싸운다는 감정의 편린만이 느껴진다.
내가 놈에게 중점적으로 확인하길 바란 건 살아 있는 인간 각성자에 대한 거였으니 좀비와의 싸움이야 어찌 되든 관심 없다.
칠흑바퀴가 아무리 심층지주보다 급이 낮다고 해도 명색이 심연에서 건져 올린 괴물인데 네임드도 아닌 좀비에게 쉽사리 죽을 리도 없고.
특수 좀비들과의 전투는 첫날과는 달리 별다른 긴장감 없이 흘러 갔다.
그리 조금은 느슨해진 분위기 속에서 그날 밤이 지나갔다.
*****
사사사삭...
“뭔 소리 안 들렸어요?”
순간 불길함을 느낀 성처녀 김예원이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소리? 무슨 소리?”
“어.. 뭔가... 뭔가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그런 소리요.”
“벌레? 시체에 꼬인 파리소리 아냐?”
“나도 다른 소린 못 들었는데.”
“그래요? 잘못 들었나..”
아니다. 김예원은 정확히 들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뭔가 우리에게 따라 붙었고 방심하길 기다리고 있다고.
신에게 총애받는 그녀의 감은 간혹 거의 예지에 가까울 정도로 정확했다.
허나 이중에서 그녀말고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다. 여기서 더 우겨봐야 불안감만 커질테니 김예원은 속으로 기도문을 외웠다.
언제라도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끔.
“너. 뭔가를 느꼈구나.”
“네, 우릴 노리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아마도.”
성기사 이한석은 김예원의 감을 믿었다. 그녀의 감 덕분에 도움받은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음... 마트에 다가갈 수록. 기분이 묘하게 불안 해지는군.”
“교주님. 그거 갱년기 아닙니까?”
“예끼! 이 사람아. 자네는 안 느껴져?”
“음... 글쎄요. 음... 확실히 그 말을 들으니 뭔가... 묘하게 다가가기 싫네요. 저 마트.”
한편 선두에서 걷고 있던 프리스트 박기훈과 몽크 강찬석은 마트가 가까워질 수록 이유 모를 불길함과 가까이 다가가기 싫다는 혐오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여덟 명의 선신진영 플레이어들은 전원 마트에 가까워질 수록 묘한 기류를 느껴야만했다.
“진짜 뭐가 있긴 있나 보네.”
“그러게...”
선신진영 특수직인 김예원과 이한석, 박기훈과 강찬석을 제외한 나머지 네명. 선신진영의 일반직인 빌리버 클래스들도 뭔가를 느꼈다.
“흠...”
“진정 커다란 악이 우릴 기다리고 있나 보다.”
박기훈에 말에 일동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사삭.
미세한 떨림. 공기의 진동. 벌레가 기어가는 소리.
한껏 긴장하고 있다던 김예원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허나 그녀가 고개를 확 돌렸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억... 어억.. 우욱...”
꿀렁... 꿀렁... 꿀렁...
빌리버 클래스의 남자 하나가 거대한 검은색 벌레에게 붙잡혀 입으로 뭔가를 주입 당하고 있었다.
“어... 어.. 저게 뭐야...”
그녀는 기껏 해야 특수 좀비나 네임드 개체가 따라붙은 거로 생각했다.
허나 눈앞에서 목도한 괴생명체는 좀비 따위와는 전혀 다른 괴물이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괴물과 목도한순간 정신적인 충격에 몸이 굳어 버렸다.
“이런 시발!!!!”
그들 중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이한석이었다.
이한석을 곧장 달려들어 들고 있던 검을 내질렀다.
보는 순간 쉽사리 베기 공격이 안 통할 단단한 키틴질임을 간파한 그는 성화를 일으켜 관통력을 높이고선 찌르고 들어갔다.
놈에게 붙잡힌 빌리버 클래스의 남자는 이미 죽었다고 판단하고서 거리낌 없이 그대로 함께 찔러 죽일 작정이었다.
푸드드득!
푸욱...!
허나 칠흑바퀴는 이한석이 다가오자 얼른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라 이한석의 공격을 피했다.
이한석의 검은 그대로 바퀴에게 알을 주입 당하던 남자의 심장만을 찌르고 들어갔고.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의 배가 터지듯 열리더니 수십 마리의 검은색 바퀴들이 밖으로 기어 나왔다.
“이런 젠장!!! 이한석! 뒤로 물러나라!!!”
“신이시여!!! 우리에게 질서의 가호를 내려 주소서!!!”
곧장 강찬석과 다른 빌리버들이 이한석의 몸에 들러붙은 바퀴들을 털어냈고 박기훈이 신성결계를 전개하며 팀원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이한석은 팔을 기어올라 옷을 찢고 살점을 씹어 삼키려는 벌레들을 붙잡아 성화로 불태우곤 급히 뒤로 물러서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미친.. 저게 대체 뭐지?”
사람만하던 칠흑 바퀴는 그사이 무너진 건물 어딘가로 숨어 모습을 감췄다.
사사삭. 사사사삭. 사사사사사삭.
오직 불길한 벌레의 발자국 소리만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시작부터 정신 나갈 것 같네..”
결계를 깨부수려는 새끼 바튀들을 보며 강찬석은 혀를 찼다. 그는 신체 강화를 중첩하고선 결계 밖으로 나가 다가오는 벌레들을 짓밟았다.
벌레들은 경화된 강찬석의 피부를 뚫지 못했고 허망하게 밟혀 한 줌의 검은 연기로 화했다.
그때 빌리버 한 명이 손가락으로 어느 건물을 가리켰다.
“어? 저, 저 저기...”
“이런... 젠장...”
벌레 때가 기어 온다. 좀비들을 숙주삼아 증식된 벌레 때가.
무수한 칠흑의 바퀴벌레들이.
진절머리 나는 광경이다. 사람 손바닥만 한 벌레들이 떼를 지어 단체로 기어 오는 장면이란 정신적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허나 이곳에 모인 것은 선신에 종속 된 자들이다.
어둠에서 발호한 악의 존재들에게 쉽사리 굴복하지 않을 강인한 정신을 가진 이들이니.
“빛이여. 우릴 밝히소서.”
성처녀 김예원이 철퇴를 높게 들어 올렸다.
그녀의 짧은 영창이 끝남과 동시 한줄기 서광이 구름을 뚫고서 그녀의 철퇴를 비춘다.
“하아...!!!!”
고양감에 휩싸인 그녀는 결계 박으로 뛰쳐나갔다.
다가오는 칠흑의 파도에 몸을 날리며 철퇴를 휘두른다.
빛으로 물든 철퇴가 한번 휘둘러질 때마가 홍해가 갈라지듯 벌레들이 죽어 나가니.
성스러운 광명이 심연의 찌꺼기들을 몰아냈다.
“나, 맹세하니. 자신을 태워 희망의 등불이 되리라.”
또한 그녀의 옆에 서있던 이한석이 자신을 거둔 희망의 여신을 향해 소신맹세를 하며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그의 몸에 성화가 피어오르며 점차 불씨를 키워나갔다.
“후우...”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그는 눈을 반개했다.
이교추적을 사용해 건물 안에 도사린 칠흑바퀴를 감지했다.
그는 오직 저놈 하나만을 노리고 있다.
이 식인 바퀴 떼의 근원인 거대한 괴물의 목을 베는 것만을 생각하며 그것 하나만을 노리고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달려드는 괴물의 새끼들이 자신을 공격하든 뭘하든 모조리 무시한 채.
“이 미친놈이! 또 지 혼자 나가!”
곧장 그의 옆에 따라붙은 강찬석이 험께 길을 뚫었다. 레벨 15의 각성자들이 서로 힘을 합치자 금방 길이 만들어졌다.
“····신께서 원하신다!!!‘
그리고 드디어 기나긴 영창 끝에 박기훈에게서 광역 버프기가 발동했다.
일행들의 신체 능력이 극한까지 높아진다.
무려 3개나 되는 버프의 혼합이었으니.
“시샤사사삿!!!!”
바퀴는 좀비들에게 부패 액을 주입하며 동시에 꼬리로 알을 까고 있었다.
놈의 뒤로 달려든 이한석. 그는 망설임 없이 괴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신체가 강화된 지금이라면 저 괴물의 갑각을 뚫고 목숨을 취할 수 있을 테니.
“죽어라.”
촤학!!!
칠흑바퀴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며 소환이 해제된다.
칠흑바퀴는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
·
·
“이런. 벌써 왔네...”
잠들어 있던 장조준이 눈을 떴다.
그는 칠흑바퀴가 죽어 가며 내지른 단말마를 들었다.
바퀴는 빛이 왔음을 경고했다.
“일어나! 다들 빨리 일어나!”
장조준은 당장 자고 있던 이들을 깨웠다.
“선신의 개종자들이...”
그리고 분노했다.
자기 보금자리를 침범한 악인들에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