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44. 싸워라, 이겨라, 굴복시켜라 (3)
* * *
“어디 보자...”
이한석과의 싸움을 끝내고 뒤를 살짝 돌아보니 다들 굉장히 바빠 보였다.
우선 강화영과 황수민, 이은혜다. 그녀들은 각자 한 명씩 맞아 펑범했던 일반직 신도 셋과 싸우고 있었을 텐데 지금 보니 황수민과 이은혜가 강화영을 말리고 있었다.
“아! 좀 놔봐!!!”
“참아요!”
“아니 다짜고짜 죽이면 혼난다니까!”
“으아!!”
나는 그녀들에게 다가 갔다.
“야 강화영. 뭐 하냐?”
“아니.. 아. 죽여야 하는데. 찝찝해. 죽여야해.”
“죽여도 내가 죽여. 기왕 잡아둔 거 묶어 놓고 감시나해.”
“흐응... 지금 죽이고 싶은데..”
선신측 플레이어에게 맹목적인 살심을 내비치는 강화영을 대충 달래고 황수민보고 감시 잘하라 일렀다.
그런 다음 고개를 돌리니 대머리 남자가 구슬땀을 흘리며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김일우와 김민준, 하진성과 하진우 네 명을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밀림이 없었다.
오히려 조금 압도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4대 1로 저렇게까지 싸우다니.’
확실히 대단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방금 사로잡은 이한석보다 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대머리에겐 결정적인 한 방이 없었다.
버티기는 잘 버티지만 저렇게 싸워서야 결국은 네 명에게 짓뭉개지겠지.
결국은 다섯명 다 스킬을 사용할 마력이 전부 떨어지자 지지부진한 소모전을 이어나갔다.
“으아!!!!”
그때 내 손에 쓰러진 이한석을 본 대머리는 이대로 있다간 다 끝장이란 사실을 깨닫곤 결국 도주를 선택했다.
다가오던 네 명에게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폭사 시켜 뒤로 튕겨 내곤 건물 밖으로 뛰어내리려 했다.
그러자 그의 앞을 가로막는 하진우.
“이 새끼가!!! 죽어!”
대머리는 소리를 빽 지르며 하진우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얼른 피하려던 하진우는 누적된 전투의 피로에 그만 발목이 접질려 놈의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쾅!
하진우의 코뼈가 내려앉고 안면이 함몰되며 이빨 서너 개가 주위로 튀어 나갔다.
그대로 하진우의 몸이 뒤로 튕겨졌고 하진성은 동생이 피를 쏟으며 바닥을 나뒹굴자 비명을 내지르며 대머리 놈에게 몸을 날렸다.
대머리의 하반신을 붙잡아 넘어뜨린 하진성.
둘은 한 대 뒤엉켜 나뒹굴었고 1대 1이 되자 스탯이 더 높은 대머리의 일방적인 구타가 시작됐다.
그걸 더는 보고 있을 수 없어 난 얼른 다가가 촉수로 대머리 놈을 붙잡았다.
그렇게 대머리 놈의 마지막 발악은 나에게 붙잡혀 무산됐다. 사지를 촉수에 결박당한 대머리는 흉악한 음성으로 나에게 욕을 갈겼다.
허나 나는 대머리 새끼의 욕을 들어 주는 취미는 없었기 때문에 놈의 얼굴을 촉수로 돌돌 감았고 나아가 몸을 더 강하게 조여 고통을 증가시켰다.
놈의 근육질 육체가 활처럼 휘며 대머리는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비명을 내질렀다.
“으웁 으으아!!!!”
촉수가 사지를 뜯어내려는 듯 조여 오자 대머리의 맨들맨들한 머리가 터질 듯 붉어졌다. 또한 놈의 얼굴에 혈관이 튀어나와 터지려 했다.
‘공양할 생각이었는데 그냥 노예로 만들까?’
아무리 상대들이 일반 각성자라곤 해도 네 명을 상대로 혼자 버틸 수 있을 정도의 깡이 있는 녀석이다. 살려 두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놈을 고문하고 굴복시킬 틈이 없다.
일단은 다른 쪽도 살펴봐야 하니 난 대머리의 입에 억압용 입마개를 채워 놓고는 녀석과 싸우던 네 명에게 던져 줬다.
“죽이지만 마라.”
“예, 알겠습니다. 형님.”
하진성이 허리를 90도로 수그리며 인사했다.
그의 눈엔 대머리를 향한 증오와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걸 티내지 않고서 자신들에게 대머리를 넘겨 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방적으로 구타당한 것에 대한 분노와 동생의 얼굴을 박살 내버린 대머리에 대한 복수심으로 일그러진 미소였다.
곧 김일우와 김민준, 하진성은 쓰러진 놈을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했다.
코뼈가 내려앉은 하진우는 다행히 죽진 않았는지 괜찮다며 피가 쏟아지는 코를 부여잡고는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터프한 새끼.
난 그들을 뒤로하고 여자들의 비명이 터져 나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끄아!!! 죽어!! 좀 뒤지라고!”
“지랄하지 마라!! 이 빌어먹을 악의 종자야!”
그곳에선 나에게 다짜고짜 빛무리를 쏘아 보냈던 금발 머리 여자가 아름이와 아람이의 협공에 정신을 못 차리고 얻어터지는 중이었다.
전면에 나선 아람이가 흑갑으로 금발 머리의 공격을 막아 내며 휘감긴 흑염으로 짓눌렀고, 그 틈에 발 빠르게 아름이가 치고 들어가 숏소드를 휘두르니 금발 머리 여자는 결국 방어에만 급급해졌다.
자매 둘이서 합을 맞춰 금발 머리 여자를 몰아붙이며 스킬을 사용할 틈도 주지 않고 때려대자 금발 머리는 정신을 못 차리고 비명을 질러댔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둘에게 저렇게까지 두들겨 맞으면서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 단 거다. 맷집이 얼마나 좋은지 잘 버티고 있어서 신기할 따름이었다.
“으앗!!!”
“이런! 언니!”
“나는 괜찮아! 계속 때려!”
그러다가도 금발 머리는 순간순간 틈이 생긴다 싶으면 들고 있던 철퇴를 휘두르며 위험한 공격을 날렸다.
그렇기에 한씨 자매는 긴장을 늦출 틈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긴장감 넘치는 철퇴가 휘둘러지니까.
심지어 어찌 된게 금발 머리는 중요한 급소는 죄다 살짝 몸을 비틀어 흘려 내거나 비껴 맞으며 데미지를 최소화 시켰다. 정말 대단한 전투 센스였다.
그야말로 탱커의 표본과 같은 움직임이다.
물론 2대 1이라는 수적 우위 앞에서 그녀도 끝내는 무릎을 꿇었지만.
“크아아!!!”
금발 머리는 결국 한쪽 무릎을 꿇고 입에 맺힌 피를 쏟아 내며 정신을 못 차렸다. 그 순간을 노린 한아람이 금발여자의 머리에 망치를 내려쳐 박살 내려 해서 급히 말려야 했다.
“잠깐! 멈춰!!”
“뭐!?”
“멈추라고! 죽이지 마!”
죽도록 고생해서 다 잡아둔 사냥감을 나에게 홀라당 빼앗겼다는 생각인지 흥분한 한아람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불만스런 눈으로 나를 쳐다 봤다.
허나 그 이상의 반항은 없었다. 한아람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인인 나에게 괜히 군소리 해 봐야 미움밖에 더 받겠냐는 계산을 내린 듯 그녀는 이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곤 피 묻은 망치를 바닥에 대충 내던지더니 양손으로 무릎을 부여잡고는 거칠게 숨을 골랐다.
무기를 손에서 놓는 것으로 보아 한아람은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며 얼추 싸움이 끝났음을 인지한 듯했다.
그에 반해 한쪽 무릎을 꿇은 금발 머리 여자의 목에 숏소드를 가져다 대고 있던 한아름은 날 선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설마.. 여기서 또 여자를 늘리려고요?”
“그래. 불만 있으면 말해.”
“쳇. 됐어요. 마음대로 해요. 그보다... 저희 오빠는요?”
“한태양?”
“네. 안 보이는데... 설마..”
한아름은 조금 불안한 눈초리로 나에게 물었다.
마치 제발 좀 어딘가에 숨어서 살아 있어 주길 바라는 눈초리였다.
“후우. 안타깝지만 그 녀석 못 돌아온 것 같다.”
“예?”
믿기 싫다는 듯 되묻는 한아름. 난 그녀에게 거짓을 고했다.
“아까 저놈한테 순찰 돌던 놈들 어쨌냐고 물어 봤는데... 후우.”
“아...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미안 하게 됐다. 오늘 이놈들이 습격할 줄은 몰랐어.”
“아.. 어떡해. 우리 오빠 어떡하지... 진짜 어떡해요. 아. 흐윽..”
그나마 의지하던 오라비가 죽었다는 소식에 충격에 빠진 한아름은 참고 있던 눈물을 뚝뚝 흘리며 들고 있던 검까지 놓치곤 발만 동동 굴렸다.
“미안하다.”
난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를 자연스럽게 껴안았다.
그러곤 등을 살살 쓸어내려주며 그녀를 잠시 달랬다.
그러자 숨을 고르던 한아람이 역겨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또한 아랫입술을 얼마나 강하게 깨물었는지 그녀의 입술에서 한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는 한아람은 지금 나의 이 촌극이 미칠 듯 증오스럽겠지.
“쉿.”
나는 그런 아람이에게 그저 조용히, 그냥 입을 다물라는 의미로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입단속을 시켰다.
그러자 그녀는 나에게서 시선을 돌리곤 괜히 숨을 헐떡이던 중인 금발 머리 여자를 잡아 패기 시작했다.
다짜고짜 턱을 걷어차인 금발여자가 뭐라 비명을 내질렀지만 아람이는 봐주지 않고 그녀를 걷어찼다.
죽일 생각 없이 오직 울분을 풀겠다는 양 후려패기에 나는 그녀를 굳이 말리지 않았다.
이런 게 바로 아포칼립스니까. 약자는 강자에게 모든 걸 빼앗겨도 뭐라 할 수 없다.
더구나 가만히 있던 사람 먼저 쳤으면서 이 정도는 약과지.
한태양의 죽음도, 폭행당하는 금발 머리 여자도 전부 본인들의 잘못이고 본인들의 과오 아니겠나.
어쨌든 나는 슬슬 아름이를 내 품에서 떨어뜨렸다. 언제까지고 울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아름아. 아직 싸움 안 끝났어. 일단은 진정해라.”
“흐읍.. 흑.. 네.”
아름이의 눈물과 콧물이 가슴팍에 묻었지만 어차피 피와 그을음으로 더러워진 상태였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 마트에 널린 게 옷인데 빨 필요도 없이 버리면 그만이다.
나는 그저 독기와 증오심으로 번들거리는 아름이의 두 눈을 바라봤다. 아름이는 마트를 침략한 적들에게 들끓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선신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면 훌륭한 선신 혐오자가 하나 탄생하겠지.
“이 자식들... 전부 죽여 버리면 안 되겠죠?”
“죽일 놈들은 죽여야겠지만. 취할 놈들은 취해야 해. 어쩔 수 없어.”
“알겠어요.. 참을게요.”
난 애써 울분을 참아내며 고개를 숙인 아름이를 지나쳐 아람이에게 처맞아 피 섞인 가래를 뱉어내고 있던 여자의 머리를 움켜쥐고서 들어 올렸다.
“야.”
“으... 그냥 곱게 죽여라.. 이 빌어먹을 사탄마귀 새끼야.. 난 굴복 안 해. 절대 안 한다고.”
약이라도 맞은 듯 몽롱한 정신으로 그녀는 내게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고 말해 왔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퉷.
그러더니 금발 머리는 거칠게 저항하며 나를 비웃고는 피 섞인 침을 뱉었다.
“씹 새끼가.”
예절주입이 안 된 년의 뺨을 터져라 후려갈겼더니 곧 뺨이 부어오르며 축 늘어졌다.
이 미친 종교쟁이 년을 어떤 식으로 고문해야 나에게 굴복할까.
아직 은지와 하린이쪽은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저기도 도우러 가야 해서 더는 낭비할 시간이 부족한 상태였다.
“후우. 일단 잘 감시하고.”
금발 머리를 바닥에 팽개쳤다. 그러곤 은지와 하린이가 한참 몰아붙이고 있는 목사쪽으로 다가 갔다.
여기도 싸움이 얼추 다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끄읍...”
양복쟁이는 결계를 펼쳐두고서 겨우 하린이의 도끼질을 버티는 중이었다. 그의 눈에서 점차 의지가 사라졌다.
마트를 습격한 이들 중 자신 빼고 전부 패배했단 사실에 그는 깊은 회한을 느끼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곧 하린이가 도끼를 버리고 주먹으로 결계를 후려갈기기 시작하자 쩌적 금이 갔고 금간 틈을 노린 은지의 그림자 비도가 스킬을 영창 중이던 양복쟁이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자 비정상적일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지르는 양복쟁이 아재.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고통증가로 인해 배가된 고통을 느끼는 모양새였다.
그가 바닥을 나뒹굴자 결국 결계가 깨져나갔고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은지가 그의 머리끄덩이를 붙잡고서 목에 낫을 걸자 전투가 끝났다.
양복쟁이 아저씨는 앙크모양의 십자가를 얼른 집어던지고 양손을 위로 들며 항복의사를 밝혔다.
“하아... 젠장. 이런 놈들을 어찌 이기라고..”
그는 한탄하며 나를 쳐다 봤다.
“졌소. 내가 졌어. 살려만 주시게. 나 치유술도 쓸 수 있고. 버프도 걸 수 있어. 그리고 방금 그 결계 봤지? 아마도 총알도 막아낼 걸? 그러니 나 좀 살려 주시게. 분명 쓸모있을 거야.”
[상대가 당신에게 굴복했습니다.]
그는 모든 의지를 잃은 듯 곧장 나에게 항복했다. 고문조차 당하기 싫었던 모양이다.
난 그를 비웃으며 아저씨를 노예로 삼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때 가만히 그 꼴을 지켜보던 카쉬낙스가 나에게 요구했다.
[질서신의 종복이야. 나 줘.]
“예?”
[나 주라고.]
카쉬낙스의 요구는 정당했다. 그녀는 배고픔을 꽤 많이 참고 있었으니.
한태양과 이한석을 둘 다 인디크론에게 빼앗긴 그녀는 지금 심술난 목소리였다.
“어. 알겠습니다.”
난 이 양복쟁이를 그녀에게 바치기로 했다. 그야 그녀의 충고 덕에 신성폭탄도 빠르게 잡아낼 수 있었고. 여러모로 나를 도와주니까. 이정도는 바쳐야 앞으로도 그녀에게 잘 보일 수 있겠지. 호감도도 올리고 여러모로 바치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다.
“저, 자, 잠깐만.! 분명 항복했지 않았나!!”
“미안 하지만. 나의 주께서 너의 영육을 원하신다. 그러니까 괜히 가만히 있는 사람 건들지 말았어야지.”
“아, 안 돼!!”
의식용 단검을 뽑아 들어 놈의 눈에 쑤셔 박으려고 했다.
허나 나는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놈의 눈에서 순간 백색 안광이 뿜어져 나오더니 나와 은지, 하린이를 튕겨 냈기 때문이다.
놈은 마치 성화에 불타는 사람처럼 입과 눈에서 하얀빛을 내뿜었고 놈의 머리엔 불안정한 헤일로가 생성되며 등 뒤로는 광배가 떠올랐다.
마치 인간의 몸에 신이라도 강림한 듯.
전장에서 모조리 빠져나간 줄 알았던 선신의 기습이었다.
[이 빌어먹을 파멸주의자들의 종놈이. 감히. 감히 우리를 능멸해?]
순간 놈의 입에선 인간의 정신으론 거역하기 힘든 거룩하고 경건한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위엄 넘치는 그 목소리가 나를 향하자 난 순간 구토감을 참지 못하고 울컥이며 피를 토해냈다.
검은 핏물이 입에서 쉼 없이 쏟아져 내리고 시야가 흔들리며 죽음의 공포가 나를 짓눌렀다.
“이, 무슨...”
놈에게서 뿜어져 나온 빛이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결계를 구축했고, 외부세계와 나를 단절시켰다.
이 결계 안엔 놈과 나 단둘만이 남았다. 나를 구하기 위해 은지와 하린이가 미친 듯이 결계를 쳤으나 미동도 없었다.
[네놈의 존재 자체가 우주의 해악이다. 죽어라, 벌레.]
곧 놈의 손에 빛으로 이루어진 의사봉이 생성되었다.
그게 나의 머리를 터트리기 위해 휘둘러졌다.
[경고! 경고! 경고!]
[차원이 왜곡됩니다!!!!]
[과도의 신성의 개입으로 인과율이 소용돌이칩니다!]
[질서의 주인 케포누스의 대적자가 인과를 얻어 이곳에 강림합니다!!!]
꿈틀.
이로 말할 수 없는 진득한 악의.
발밑에서부터 기어올라오듯 넘쳐흐르기 시작한 질척이는 촉수다발이 내 몸을 감쌌다.
촉수들에 감싸이자 따스하고 또한 난폭하며, 무엇보다 자애로운 어미의 손길이 느껴졌다.
촉수가 내 뺨을 어루만졌다.
한없이 포근한 그 품에서 나는 마치 방금 막 깨어난 태아처럼 안겨들었다.
한 번도 제대로 느껴본 적 없는 어머니의 품 조차도 이처럼 따스하진 않았으리라.
살며시 안겨 그 온기를 느끼며 비릿하나 무엇보다 편안 해지는 향을 맡았다. 자궁 속으로 되돌아간 평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 행복에 겨워 있으니 곧 뿜어져 나온 촉수더미가 뭉쳐들며 인간의 형상을 이룬다.
허나 아직은 완벽한 인간의 외형을 재현할 수 없었던 것인지 그건 그저 인간의 모양만을 흉내 낸 촉수더미였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사실 외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세상 그 무엇으로부터라도 나를 지켜 주겠다 그 의지가 고마웠다.
음침하고 때론 잔악하며 그 무엇보다 포학한 혼돈의 주인이 나를 껴안고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의 빛으로부터 내 불결하고 부정한 육신을 지켜냈음이 감격스러웠다.
그 품에 나를 강하게 껴안고서 질서 신의 의사봉을 받아내는 그녀의 존재 자체에 감복했다.
험악한 세상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안정감을 나는 지금 악신의 품에 안겨 느끼고 있었다.
그때 떨어져 내리던 망치를 한 손으로 잡아낸 혼돈의 주인 카쉬낙스가 눈앞에선 대적자를 향해 조용히 읊조렸다.
[이 이상은 반칙이다. 설마 게임 판에서 추방당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노기로 가득 찬 목소리.
항상 들려주던 배고픔과 굶주림으로 가득 차 있던 어딘가 맹해 보이는 그런 목소리가 아니었다.
배고프다며 나에게 투정 부리며 인간을 바치라던 사악해 보이지만 때론 장난스러운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녀의 노기가 커져감에 따라 주변 공기가 짓눌려 소음을 냈다.
착 가라앉은 분위기 속, 양복쟁이의 눈과 입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점차 사그라졌다.
그의 뒤에 떠오른 광배가 꺼지고 헤일로가 휘청거리다 깨져나갔다.
[추하다. 결과에 승복해라. 단지 너의 하수인이 약했고. 나의 아이가 더 강했을 뿐인 것을. 어찌 이리 추하게 매달리는지.]
[하, 결과에 승복하라고? 너희가 그 자그마한 인간의 몸에 몰아넣은 인과의 흐름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가!]
[이건 우리가 손 쓴게 아니다. 이 또한 그저 이 아이의 운명이었을 뿐. 특히 너희가 좋아하지 않았나. 그 빌어먹을 운명론을 말이야.]
카쉬낙스의 쓴웃음에 질서신은 이를 갈며 말했다.
[파멸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기필코 우리가…….]
허나 카쉬낙스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말을 잘랐다.
그러곤 강하게 의사를 전달했다.
[불안정한 유지야말로 우리 손으로 확실히 끝내주마. 이제 꺼져라. 패배자여.]
결국 먼저 강림해 나에게 선빵을 치려한 결과 인과율의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 케포누스가 양복쟁이 아저씨의 몸에서 빠져나가며 소동이 잠식됐다.
양복쟁이의 몸은 감당하기 버거운 존재가 들어갔다 나간 덕분에 한 줌의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완전히 질서신이 사라진 모습을 보고 나서야 서서히 분위기가 풀어지며 카쉬낙스가 굉장히 힘든 목소리로 나에게 고했다.
[후. 힘들고 배고프니까. 공양 많이 해라.]
“어. 예.”
곧 카쉬낙스도 억지로 구축하고 있던 인간의 형상을 풀고 다시 꿈틀거리는 촉수다발로 변하더니 시공의 균열을 만들어 그 안으로 꿈틀거리며 기어들어 갔다.
“하악... 하악...”
빌어먹을 신들이 사라지자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둘이나 되는 신들이 서로 맞부딪힌 덕분에 그사이에 끼어 있다가 진짜 터져 죽을 뻔했다.
고래 싸움에도 새우 등이 터지는데 신들의 알력 다툼에 완전히 영혼이 찌부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나마 카쉬낙스가 나에게 오는 부담을 상쇄시켜 주지 않았다면 칠공에서 피를 쏟으며 죽었으리라.
“오빠!!!”
“주인님.. 괜찮아요?”
결계가 깨지자 은지가 얼른 달려와 나를 껴안았다.
난 안절부절못하는 하린이에게 힘겹게 괜찮다고 말한 뒤 멍한 정신으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굉장히 피곤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