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67. 가자 꿈의 세계로
* * *
지크프리트가 빛과 함께 사라지자 그녀들이 얼른 나에게 몰려들었다.
그 와중에 정문에 있을 화영이만 없었다.
“뭔가 폭풍 같은 사람이었네요? 그런데 방금 그거 사람 맞죠?”
“사람일걸.. 아마도?”
은지의 말에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거대한 존재감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약간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대천사와도 겨뤄볼 만한 인간이더군.”
대천사가 어느 정도로 강한 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재 우리 멤버 중에 단순 전투 능력만 놓고 봤을 때 가장 강한 메르가 몸을 떨 정도니 지크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쉬이 짐작해볼 수 있었다.
“언니, 언니가 상대 못할 정도야?”
“그래.. 솔직히 우리 전부가 덤벼도... 1분을 못 견딜 괴물이다.”
“허... 미친...”
옆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름이가 메르의 말에 한탄했다.
메르의 말대로 정말 우리 전부 다 같이 덤볐어도 그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있었을까 싶다.
“일단은.. 마트로 돌아가자.”
“네.”
당장은 마트로 돌아가서 나가라자의 즙 선물 세트를 얼른 다 까마시고 귀곡도에 갇힌 양지상의 영혼과 대화를 좀 해 봐야겠다.
어쩌면 양지상의 능력을 일부가 아니라 온전히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야! 진성아!”
“예! 형님!”
“저기. 저것들 전부 네 새 부하들이다. 진우하고... 수민아 너도.”
“네...”
“너희 셋이 알아서 관리해.”
“알겠습니다!”
그 뒤로 나는 하진성에게 비 각성자와 각성자들을 다 넘겨 주고 문근오를 불렀다.
“야, 문근오.”
“예, 예! 부르셨습니까!!”
“여기 이 세 명이 이제 네 상관이야. 알겠지?”
“아이고! 예! 물론입죠!”
“여기 세 명이랑 나중에 자기소개도하고. 저기 노예들 데리고서 교회에 남은 쓸 만한 물건들 전부 마트로 옮겨라. 해지면 좆되니까. 다 못옮겼어도 해지면 그냥 마트로 돌아와.”
“예, 예!”
문근오의 안내에 따라 하진성과 나머지 둘이 다른 노예들을 이끌고 교회의 식량 저장고 쪽으로 갔다. 해지기 전까지 열심히 옮기겠지.
비각성자가 수레나 리어카를 구해 물건을 옮겨담고 각성자들이 좀비에게서 그들을 지키면 될 것 같다. 솔직히 하진성이나 황수민 쯤 되면 이제 특수 좀비도 무리 없이 잡아 죽일 수 있으니까.
진화개체나 네임드하고만 안 엮이면 된다. 그런고로 불길한 초커를 차고 있는 강은정은 나와 함께 마트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도?”
“응. 너 존나 불행하니까 너 때문에 노예들 도륙나면 안 되잖아.”
“아니.. 그보다 이 초커.. 언제까지 달고 있어야 해? 이거 때문에.. 뭔가 자꾸 안 좋은 일이...”
“좀만 더 참아. 특별한 이벤트가 일어날 때까지만.”
“아니.. 그게 언제인 줄 알고...”
“뭐 어쩌라고. 그냥 차고 있어라. 대신 이제 육변기 노릇 그만 시켜 줄게.”
“지, 진짜냐..? 알겠다... 그런데 무서우니 너무 노려보지 말아 줘.”
강은정은.. 그러니까 강찬석은 그세 뭔가 여성스러워졌다. 저 예쁜 외모 속에 사실은 대머리가 있다고 생각하니 끔찍하군.
‘육체의 경향성에 정신이 끌려간 것 같은데.. TS되면 다들 여성스러워지는 걸까?’
TS주사를 몇 개 더 얻고 싶다. 내 생각엔 그것도 일종의 약물이니까 마약상에게 찾아가다 보면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저 사람들 다 씻기려면... 운디네 하나로 될까?”
희선 누나가 남은 정령의 자리를 전부 운디네로 채워야 하는 게 아닌가 했다.
하긴 사람이 좀 많이 늘어나긴 했으니까.
“누나. 역시 한 마리로는 좀 힘들겠지?”
“응.. 2마리 더 계약할 수 있으니까.. 운디네가 더 나와주면 좋겠는데.”
아무리 노예라고 해도 안 씻길 수는 없다. 의사도 없는데 무슨 이상한 병이라도 걸리면 끝장이다.
그리 물 걱정을 하고 있으니 예원이가 의견을 제시했다.
“나중에 빈 건물에 있는 물탱크 같은 것 좀 가져와서 마트 옥상에 둬야겠어요. 비오면 빗물이라도 받아 두게..”
“그러게 비라도 오면 좋겠다. 눈이나.”
“그런데 오빠, 빗물 더럽지 않아요?”
“그런가? 끓이면 되지 않을까?”
우린 그런 대화를 나누며 마트로 돌아갔다.
*****
날이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마트는 다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계, 계약!! 계약하자!]
"잠깐 기다려봐라."
나는 문지상과 대화를 나눴다.
이놈 역시 내 생각대로 스킬로 영체가 되어 돌아다니다가 붙잡힌 거였다.
"그럼 온전히 네 능력을 쓸 수 있는 거냐?"
[그게 온전히는 아니고... 일부만.. 그래도 자아가 남아있는 편이 더 많은 능력을 쓸 수 있다.]
"흐음..."
양지상은 필사적이었다.
검에게 곧 자의식을 전부 빼앗길 것 같다는데 그리 되면 그가 가진 스킬 중 1개만 랜덤으로 쓸 수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양지상의 자아가 깨어있으면 스킬을 3개까지 쓸 수 있단다.
"좋아. 계약하지."
[고, 고맙다.. 잘 받들어 모시도록 하지..]
그렇게 양지상과 노예계약을 맺었다. 이걸로 이제 그의 능력을 3개나 쓸 수 있다.
하나는 악귀생성. 이건 말그대로 죽인 대상을 악귀로 만드는 능력이다. 대신 이걸 쓰면 인신 공양이 불가능하다.
두 번째는 악귀 빙의. 이건 만들어낸 악귀를 물건이나 좀비, 혹은 사람에게 빙의 시킬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은 빙의시키키 어렵고 물건에 빙의 시켜봐야 자의식이 없어서 모두를 공격한단다. 그러니 좀비에게 빙의 시키는 편이 가장 좋다고 했다. 개수 제한은 없지만 너무 많이 빙의 시킬경우 두통이 발생한단다.
세 번째는 스산한 명령. 이건 좀비에게 빙의시켰을 때 간단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스킬이었다. 가령 누군가를 지키라거나 함께 순찰을 돌라거나 하는 그런 명령말이다.
알짜베기 스킬들만 골라서 쓸 수 있게 됐다.
"오빠! 밥 먹자!"
"어, 잠깐만."
이후 저녁을 간단하게 때웠다. 전부 냉동식품이었다.
날이 선선해서 냉동식품을 밖에다 꺼내놓고는 있지만 곧 봄이 되면 다 썩어 자빠질 것 같아서 요즘은 상하기 전에 냉동식품을 잔뜩 먹고 있다. 버리기 아까우니까.
그나마 사람이 늘어서 그런지 먹는 입이 늘어 음식을 상해서 버리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다만 마트의 식량도 더 빨리 소진되겠지만.
‘농사.. 농사를 해야겠지?’
농사란 아포칼립스의 필수 요소라 할 수 있다. 통조림이나 보존식까지 다 뜯어먹고 나면 남은 건 이제 농사를 짓는 일이지.
더구나 사로잡은 비 각성자들 중에 향우회 소속 아저씨들이 농사에 일가견이 있다고 하니 농사를 짓는 다는 말이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더구나 우리에겐 드루이드인 희선 누나가 있으니까..’
희선 누나의 레벨이 더 올라가고, 점점 더 농부로서의 면모가 강해지면 풍작은 따 놓은 당상이다. 물론 농사를 짓기까지가 고생이겠지만.
‘옥상에 텃밭을 조성하고... 흐음..’
좀 진득하게 농사도 짓고 하려면 좀 더 마트가 안전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거의 매주 강해진 좀비들에게 털리는 느낌이라... 과연 그런 상황 속에서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을까?
한 주 간격으로 좆빠지게 조성해 둔 옥상 텃밭이 박살 나고, 주변이 좀비들 시체로 엉망이 되면 의지가 꺾일 것 같다.
그리고 근처에 모종이나 씨를 비롯한 농예관련 제품을 파는 곳에서 거름이나 흙을 가져와 농사지을 환경을 조성하는 것부터 여러 가지로 힘들 것 같다.
차라리 도심지인 서울을 떠나 변두리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시골 한적한 마을로 내려가서 좀비 영감이나 할매들 좀 싹 치우고 정착하면 어떨까.
‘당장은 마트에 먹을게 풍부하지만... 그래도 슬슬 준비는 해야겠지.’
넉넉하게 오십 명 가량이 일년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농작물을 키우려면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할까... 나는 잘 모르겠다.
민족 대이동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서울에 남아 있어 봐야 뭐 하나 좋은 점이 없다. 전기도 다 끊기고, 가스도 끊기고, 인구수는 더럽게 많아서 그런지 그만큼 좀비도 들끓고...
인프라가 개박살 난 점은 시골이나 도심지나 다를 게 없는데 위험도는 도시가 압도적으로 높으니까.
조만간 일행들과 상의를 좀 해 봐야겠다. 필요물품들 가득 챙겨서 그냥 어디 대관령 양떼목장이나 가면 어떻겠냐고. 양고기나 실컷 먹게.
‘일단은 이것들부터 먹어 치우자...’
난 아까 받았던 나가라자의 혈청과 눈물, 골수를 순차적으로 들이마시기로 했다.
아무리 내 여자들이 좋아도 이런 건 혼자 조용히 챙겨 먹어야지. 나눠줄 수 없다.
괜히 혼자 먹기 찔려서 내 여자들의 눈을 피해 옥상 끄트머리로 왔다.
“자, 어디 한번 야무지게 먹어볼까나...”
나가자라의 혈청이 들어 있는 캡슐의 뚜껑을 열었다.
후욱..
피비린내가 확 올라온다. 코를 막고 쭉 들이켰다.
“읍.. 우욱... 씹.. 개 비려...”
혈청은 그 냄새만큼이나 굉장히 비릿했다.
토 쏠려서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이 아까운 걸 다 토해낼 순 없지.
“으음...”
뭔가 몸의 변화는 느껴지지 않...
“오... 오오...”
혈청이 몸에 제대로 흡수되자마자 피가 점점 따뜻해졌다.
붉은 구슬을 먹고 나서 몸이 따스해졌었던 것처럼... 뭔가 내 몸에 흐르는 피 그 자체가 뜨거워진 기분이다.
‘이래서 병이 잘 안 걸린다 했나..?’
활력이 돋는다. 심지어 느낌상 한 삼 일쯤은 안자도 멀쩡할 것 같았다.
당장 체력 스탯의 변화는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확실히 더 건강해졌다.
‘성능 죽이네...’
다음으로 나가라자의 눈물을 마셨다. 비릿한 냄새는 없었다.
“으아.. 짜..”
그런데 눈물이라 그런지 짜다. 그것도 혀가 말려들어갈 것 같을 만큼 굉장히 짜다.
마치 바닷물을 들이 마시는 기분이었다.
“우읍.. 욱...”
눈물을 머금고 겨우 다 삼켰다. 그러고나니 이번에는 내 몸에 흐르던 마력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뭐랄까 좀 더 빨리 몸속을 돌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뭔가 마력이 정순? 상쾌해진 감각이다.
심지어 사람들의 움직임이나 공기의 흐름을 좀 더 면밀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기감이 높아진다더니 진짜다.
“킁킁..”
코를 비롯해 각종 감각도 더 좋아졌다.
“윽.. 썩은 내..”
그런데 다른 감각은 모르겠는데 후각이 좋아진 건 별로 안 좋은 것 같다.
그도 그럴게 온 동네가 좀비와 썩은 시체들로 가득해서 후각이 더 좋아지니 저 멀리에서 나는 썩은 내까지 나 혼자 다 들이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겨우 익숙해졌다 느낀 시체 썩은 내가 다시 새로워진 감각. 난 코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진짜 여길 벗어나던지 해야겠어...’
도시엔 시체가 너무 많다. 누가 치워주지도 않으니.
난 마지막 남은 하얀 액체, 나가라자의 골수를 들이마셨다.
“으으으.. 써.. 개써.. 써.. 헤엑...”
혀를 긁어내고 싶을 정도로 쓰다.
나가라자의 즙.. 비리고 짜고 쓰고... 맛이 정말 최악이다.
두 번 다시는 먹고 싶지 않은 맛. 흑사의 내단은 입안에서 사르르 녹던데..
“이건 변화가 없나?”
골수는 마셨는데도 딱히 변화가..
[칠두금사의 피와 마력, 근골을 이어받았습니다!!!]
[흑사의 내단이 반응합니다!!!]
[흑사의 뒤틀린 내단이 반응합니다!!!]
[조건이 일부 충족되어 육체가 반인반사로 진화합니다!!!]
[업적달성! '허물 벗는 자']
[업적달성 보상을 선택하십시오.]
뿌드득... 빠득. 꾸드드득!!
“크으으으읍!!!”
뼈가, 근육이 뒤틀리는 격통. 내 몸이 근본부터 변하고 있다.
나는 끔찍한 고통에 못이겨 옥상 난간을 붙잡고 주르륵 침을 흘리면서 주저앉았다.
“어? 오빠 여기 있었네.. 오빠? 오빠!!! 아이 씨!!! 이 인간 또 뭘 처먹을 거야!!!”
은지가 얼른 달려와서 쓰러져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나를 부축했다.
“끄으윽..!!! 으, 은지야...!!! 조, 존나 아파..!!!”
“아니!!! 이 미친 인간아!!! 뭘 좀 먹으려면 혼자 숨어서 먹지 말고!!! 좀!! 아 진짜!!!”
은지가 보기 드물게 진심으로 짜증을 낸다.
걱정을 동반한 짜증이었다.
하긴.. 내가 좀 뭘 숨어서 많이 먹긴 했지. 그러다 죽을뻔하기도 했으니...
그렇지만 혼자서만 날름 까먹으려니 영 미안 해서...
“누가 뺏어 먹는데요! 좀! 말 좀 하고 처먹어요!!!”
“으윽.. 미, 미아.. 아.. 끄으으!!!”
내가 숨쉬기 힘들어하자 그녀는 얼른 내 옷을 벗겼다.
아마 난 지금 얼굴에 피가 몰려 실핏줄도 터지고 얼굴도 굉장히 붉어졌겠지.
사실 진짜 아파서 미칠 것 같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카쉬낙스의 촉수로 내 온몸을 비틀고 쥐어짜는 느낌이다.
“허.. 허억.. 이, 이게 뭐야...! 그, 근육이 꿈틀거려!!!”
“언니? 은지 언니 왜! 무슨 일이예요!”
“아, 아름아!! 오빠가!! 이상해!!!”
멀찍이서 아름이가 부르자 내 몸을 보며 기겁하던 은지가 이내 다른 여자들을 불러 모았다.
“허억!!!”
은지의 비명에 가장 먼저 달려온 희선 누나가 경악하며 내 몸을 내려다봤다.
도대체 무슨 광경이기에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모르겠다. 그냥 더럽게 아프다.
“흐엑!!! 이게 뭐야!!! 오빠 괜찮아?!! 은지 언니 잠깐만 비껴봐..!”
화영이가 은지를 살짝 밀어내고 내 가슴팍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더니 눈을 감고 심장 박동을 면밀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도대체.. 뭘 먹은 거지..?”
“그걸 모르겠어.. 어.. 이거 약병..”
“아까 그 커다란 남자가 준 거 아냐?”
“커다란 남자? 그게 무슨 소린데?”
“아, 화영이는 못 봤겠구나.. 그게..”
난 그녀들의 걱정 어린 분노를 받으며 잠시간 더 몸을 뒤틀었다.
다행히 아픔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서서히 몸이 정상적으로 돌아온다.
“허억... 허억...”
“이제 좀 괜찮아요?”
“어.. 응... 저기 그, 뭐냐. 미안.”
“하아.. 진짜 미치겠네... 오빠... 좀.. 제발.. 왜 맨날 숨어서 먹지...?”
“크흠.. 미안.”
난 괜히 멋쩍어서 은지를 푹 껴안았다.
“하아.. 걱정했다.”
“메르도 미안. 다들 걱정끼쳐서 미안 해.”
메르는 쓰러진 나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었다. 상당히 부끄럽지만 지금 온몸에 힘이 빠져 버려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때 하린이가 내 손을 붙잡고 조물주물 마사지하며 조금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 주인님이 갑자기 죽으면... 진짜 눈앞이 깜깜해지니까.. 자제 좀 해 줘요..”
저번에도 하린이가 내가 쓰러졌을 때 손 마사지해준 것 같은데. 기분 좋다.
“맞아. 지난번에도 무슨 내단인가 그거 먹고 숨넘어가서.. 정말 식겁했지.”
은지는 내가 흑사의 뒤틀린 내단을 혼자 까먹고 숨넘어갔을 때를 이야기했다.
“맞아요. 그때 화영이가 무슨 독이 퍼졌다면서 피뽑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하린이가 웃으며 은지의 말에 맞장구치자.
“그게 무슨 얘기야? 나도 해 줘.”
희선 누나가 굉장히 궁금해하며 물었다.
그때는 아름이도 아람이도 없었으니까 그녀들도 궁금해했다.
메르는 나를 내려다보며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라고 경고했고.
“미안해...”
뭐라 할 말이 없다. 땅거지 마냥 몸에 좋다하면 다 주워 먹으니... 그런데 어쩔 수 없었다.
나이 서른에 끼고 사는 여자만 이제 여덟 명이라 전부 상대하려면 몸이 좋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물론 이미 충분히 좋아지긴 했지만..’
그녀들을 기절할 때까지 박아서 가버리게 만드는 게 기분 좋다고 할까.
‘가만 보니 마약 상에게서 젊어지는 팩인가 뭔가 샀던 것 같은데...’
나중에 희선 누나랑 한 팩 씩 해야겠다. 다른 애들은 아직 이십 대라서 괜찮을지 몰라도 나나 희선 누나는 서른을 넘었으니 5년쯤 젊어지면 좋겠지.
‘그러고 보니 파란색 알약도 먹어야 하는데..’
가만보니 마약상에게서 꿈의 세계로 가서 특별한 만남을 가지게 해준다는 알약도 한 알 샀었다. 뭔가 특수 이벤트의 냄새가 난단 말이지.
“자, 우리가 돌아가며 보초를 설 테니 주인은 오늘 밤 좀 푹 쉬어라.”
“고마워, 메르. 저기, 근데 가기 전에 가방에서 파란색 알약 좀 꺼내 줘.”
“알약...?”
메르에게 살짝 알약을 달라고 말하자 옆에서 몰래 듣고 있던 은지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더니 메르보다 빨리 가방을 뒤져 파란색 알약을 찾아냈다.
“음... 외면하는 파란약?”
“어. 은지야.. 그게..”
“오빠. 이거 먹고.. 또 숨넘어가면 어떡해요..?”
“어.. 그게. 기왕 잘 거면... 어차피 잘건데 그거 먹고 자는 게 효율적이기도하고..”
“... 오빠... 말려도 어차피 먹을 거죠?”
“그건.. 그렇지.”
언젠가는 먹어야 할 물건이다. 더구나 무슨 이벤트가 발생할지 모르니까 내가 먹어야 하고.
만약 좋은 이벤트라면 개꿀이고 위험하고 안 좋은 이벤트면 가장 행운 수치가 높고 악신들에게 지켜지는 내가 먹는 편이 좋다.
그런 이유로 내가 단호하게 먹어야 한다고 말하자 은지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은 나에게 외면하는 파란약을 건넸다.
“오늘 밤은... 제가 밤새 옆에서 오빠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
“잠깐. 은지 언니. 내가 보고 있을게. 언니는 먼저 자. 피곤하잖아.”
“아니야, 화영아. 괜찮아. 언니가 볼게.”
은지와 화영이의 묘한 신경전...
그때 아름이가 헛기침하며 끼어들었다.
“그냥 다 같이 보고 있죠?”
“그럴까?”
그러자 은지와 화영이의 기백에 밀려 뒤로 물러나 있던 하린이가 얼른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다.”
“나도 동의.”
“저, 저도요!”
메르와 희선 누나 그리고 예원이도 동의했다.
그러자 눈치를 살피던 아람이가 손을 살짝 들었다.
“저기.. 나는 너무 피곤한데..”
그녀는 어제 저녁부터 악마 빙의자를 잡아 죽인다고 고생했다.
다른 여자들도 웃으며 그녀에게 어서 자라고 말했다.
마치 경쟁자를 한 명 제거했다는... 그런 음흉한 미소였다.
“하~암..”
아람이는 멋도 모르고 내 옆에 눕자마자 잠들었다.
“이걸 옆자리에서 자버리네...”
“치우자.”
“네.”
아람이가 순식간에 구석 자리로 옮겨진다.
뭔가 눈빛들이 무섭다... 마치 수컷 사자를 노리는 암컷 사자들의 신경전 같은...
“오빠, 꼭 무사히 깨어나야 해요. 우리 기다릴게요. 쪽.”
“어? 어. 응.”
나는 그녀들의 굿나잇 키스를 받으며 얼떨결에 알약을 집어삼켰다.
점점 졸음이 밀려왔다...
잠드는 나를 보며 해맑게 웃고 있는 일곱 여인의 미소를 보며.. 서서히 잠들었다.
*****
“오빠? 오빠?”
이은지는 조준의 귓가에 입을 대고 몇 번이나 그를 불렀다.
허나 조준은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곧바로 조준의 볼에 뽀뽀하며 베시시 웃었다.
“후.. 정말.. 걱정이야..”
강화영은 잠든 조준을 걱정하며 슬쩍 그의 가슴팍을 쓰다듬었다.
“아까 그거 마시고.. 우리 준이 뭔가 더 잘생겨지지 않았니?”
“맞아요.. 얼굴이랑 근육도... 더 멋있어졌고...”
조준의 말벅지를 쓰다듬는 희선의 말에 조준의 손을 만지작 거리던 하린이가 동의했다.
“그래서 순서는?”
아름이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은지가 슬쩍 조준의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기려 했다.
“크흠. 저기, 역시 내가 처음..”
그러자 얼른 메르가 은지의 손을 때리며 끼어들었다.
“잠깐. 이건 연장자를 우대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마, 맞아..!”
여기서 가장 나이가 많은 건 메르다. 그리고 그다음이 강희선이고.
강희선은 메르의 의견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면 처음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두 번째는 자신일 테니까.
“저, 저기.. 제가 첫 노예였는데...”
하린이가 그런 의견을 냈지만 무시당했다.
그러자 하렘 멤버 중 가장 숫기가 없는 예원이가 하린이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난 음문도 있어. 역시 내가 먼저지.”
강화영이 바지를 살짝 내려 음문을 드러내자 메르헤레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먹을 쥐었다.
“이거 다들 상당히 끈질기군. 안 되겠어. 결투로 승부를 보자. 이참에 서열정리 좀 해야겠다.”
“자, 잠깐...! 메르 언니랑 싸워서 누가 이겨요!”
“그럼 그냥 공평하게 가위바위보 어때?”
“가위 바위.. 뭐? 그게 뭐지?”
“아니, 언니. 천국에는 가위바위보도 없어요?”
“천국은... 정당한 결투만이..”
“안내면 꼴찌! 가위바위보!”
“잠깐! 안내면 꼴찌라니!! 그게 무슨!!”
“자, 메르 언니 탈락.”
“이런!!! 결투다!!”
조준이 잠든 사이 암컷향기를 풀풀 풍기는 여인들의 살벌한 신경전이 오고 갔다.
아무것도 모르고 잠든 아람이는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웃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