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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가 다운로드 됨-78화 (78/221)

〈 78화 〉 77. 초원의 달밤, 들판을 거닐며

* * *

바람이 산들거리는 초원.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

그리고 달빛에 반짝이는 은빛 털을 가진 거대한 늑대.

[그대의 이름을 밝혀라.]

늑대들의 여왕이 이름을 물었다.

이에 성하린은 용기를 내 대답했다.

“저, 저의 이름은 성하린입니다.”

[좋다. 인간 성하린, 그대는 만월의 축복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나?]

가리아의 말과 동시에 성하린의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고대신 ‘가리아’와 조우했습니다!]

[늑대의 여왕이 당신에게 호감을 품었습니다!!!]

[바바리안에서 블루문 비스트로 전직할 수 있습니다!!!]

[아직 전직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전직 조건을 충족하면 블루문 비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성하린은 망설임 없이 전직을 선택했다.

지금의 클래스로는 결국 장조준과 다른 여인들을 따라 갈 수 없다고 여기던 찰나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게 된 만귀전에서 항상 조준이 이야기하던 신적인 존재와 대면해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 지금, 이 천금 같은 기회를 거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네. 각오가 됐습니다...”

그녀가 기꺼이 청월의 축복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자, 주위를 에워싼 모든 늑대들이 밤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새로운 식구를 맞이했다.

[망설임 없군. 좋아, 너를 우리의 가족으로 받아들이마.]

“가.. 가족..”

[허나 아직 너에게 묻은 사바세계의 향이 너무 짙다. 그러니 그 향을 좀 빼야겠군. 가룸.]

“아­우우울!!!”

가리아의 부름에 애꾸눈의 늙은 수컷 늑대가 크게 대답하며 무리를 헤치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 아이는 나의 첫 번째 송곳니인 가룸이다. 앞으로 너에게 청월의 율법에 대하여 알려줄 것이니. 그를 따라 율법을 익혀라. 그리하여 가룸의 인정을 받는다면 너에게 3가지 시련을 부여할 것이다. 그것들을 모두 통과할 경우, 너를 나의 화신으로 삼겠다.]

“네..!”

곧 가리아가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다른 늑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떠나자 성하린의 앞엔 애꾸눈 늑대 가룸만이 남았다.

“크르르...”

가룸은 이를 드러내며 성하린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더니 성하린을 향해 날이 선 목소리로 경고했다.

“어머니는 너를 가족으로 여기시는 모양이지만. 나는 너를 아직 한식구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를 극한까지 굴릴 거다. 포기하려면 지금해라. 만약 훈련이 시작되고 나서 나에게 조금이라도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씹어 먹을 테니까.”

자동차만한 크기의 늑대가 내뿜는 살기.

피부가 아려올 정도의 진득한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 내자 그녀는 다리의 힘이 풀릴 것 같았다.

허나 그런 서슬 퍼런 경고에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오호라.. 이걸 버틴다고?”

가룸의 압박이 더욱 커진다.

그러나 압박이 커질 수록 하린이는 더욱더 오기를 품으며 투지를 끓어 올렸다.

고작 이런 위협 때문에 포기하고 다시 돌아간다면, 언젠가 자신은 모두에게 뒤처져 낙오될 거다.

어쩌면 버려질지도 몰랐다.

‘그런 건 싫어. 버려지다니.. 내가 쓸모없다고 버려지다니.. 그딴 건 결코 용납 못 해..’

성하린은 세상이 멸망하기 전까지만 해도 상당히 잘나갔었다.

체육이면 체육, 공부면 공부. 뭐 하나 못 하는 게 없는 만능 우등생 타입의 인간. 뭐 하나 잡았다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의 소유자.

허나 세상이 멸망하고 별별 괴물들이 다 기어 나오기 시작한 지금, 그녀는 점점 뒤처져 갔다.

클래스 바바리안은 개인의 생존엔 특화되어 있으나 그밖에 특출한 무언가를 가진 클래스는 아니었으니.

결국 팀 내에서 자신이 가장 약하다는 사실을 그녀 스스로가 인정해 버렸다.

처음엔 마음이 꺾일 것 같았다.

잘난 듯이 떠드는 다른 여자들에게 묻혀 존재감이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은신에 특화되어 상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목을 그어 버리는 이은지와 피를 조작하며 광범위 파괴를 일으키는 강화영은 물론이고 한씨 자매도 레벨이 높아짐에 따라 자신보다 점차 강해졌다.

더욱이 김예원도 소환수 세 마리를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점에서 장점이 뚜렷하고. 메르헤레는 팀 내에서 장조준을 제외했을 경우 최강자라 감히 견줄 수도 없었으며, 정령을 다루는 드루이드인 강희선은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여덟 명 중 가장 쓸모없는 인간.

심장 박동 탐지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애매한 존재.

그게 그녀가 자기 스스로에게 내린 냉정한 평가였다.

리더인 장조준이 대놓고 그녀를 차별한다거나 눈치를 준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나약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남들보다 뒤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남자는 그런 걸 표현하거나 티 내는 사람이 아니니까..’

장조준은 자기 여자는 무작정 싸고도는 남자다. 하린이도 그걸 안다.

대놓고 좋다는 티는 안내지만 여덟 명 전원을 차별 없이 엄청 애지중지하고 있음을 그녀들은 다들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더 그에게 버림받거나 쓸모없다고 여겨지기 싫었다. 떡 한번 쳤다고 저리 맹목적으로 자신을 아껴주는 남자를 어찌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자 지금 이 하등 쓸모 없는 짓거리에 짜증이 났다.

이미 늑대들의 여왕이 허락한 마당에 자신을 평가질 하고 있는 이 늑대새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율법이나 말해!! 이 빌어먹을 개새끼야!!!”

그녀는 겨우 전신을 짓누르는 압박에서 벗어났다.

분노에 찬 눈으로 애꾸눈의 늙은 늑대를 노려보며 욕을 내뱉었다.

순간 그녀는 아차싶었다. 순간 감정이 격해져 필터없이 욕해 버렸다. 이 거대한 늑대에게.

“뭐? 개새끼? 지금 나에게 한 말이냐? 내가 개새끼라고? 하... 하하하하하!!!”

가룸은 소리 높여 웃었다.

아흔 살도 안 된 자그마한 애송이가 감히 수백 년을 살아온 늑대인 자신에게 개새끼라 말하니. 그 당돌함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점점 커지는 늑대의 웃음소리에 성하린은 식은땀이 흘렀다.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되는 대로 지껄인 건데 혹여나 선을 넘어 버린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늑대보고 개새끼라는 건 조금 심했나... 설마 나, 여기서 죽는 걸까....’

곧 한참이나 웃던 가룸은 정색하며 식은땀을 삐질 흘리고 있던 성하린을 다시 내려다봤다.

그리곤 얼굴을 들이밀며 거친 말들을 쏟아부었다.

“이 빌어먹을 인족 계집년이..! 그래도 패기는 있는 년이었군. 좋다. 이 빌어먹을 잡것아. 네가 원하는 대로 예의는 저 멀리 집어치우고 단도직입적으로 너에게 율법을 때려 박아주마. 알겠나! 대답!”

“네..!”

“대답이 작다 더 크게!!!”

“네!!”

“그딴 것도 대답이냐!!! 그것밖에 안 돼? 더 크게!!”

“네에!!!”

“아직 부족해!!! 근성을 보여라!! 기합을 내지르라고!!! 악!!! 따라 해라!! 악!!!”

“아악!!!”

성하린의 포효에 가룸은 콧김을 내뿜으며 만족했다.

“좋아. 지금부터 너에게 청월의 율법을 알려주마! 복창해라!! 실시!!”

“시, 실시!!”

텐션을 따라가기 힘들었지만 성하린은 일단 가룸이 시키는 대로 따라 했다.

달 아래를 걷는 늑대 특유의 광기와 이상하리만치 경쾌한 분위기에 휩쓸려 버렸다.

“첫째, 우리는 결코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첫째!! 우리는 결코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둘째, 우리는 가족을 지킨다.”

“둘째!! 우리는 가족을 지킨다!!”

“더 크게!!! 셋째!!!”

“셋째!!!!”

“우리는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마지막, 우리는 명예를 알며, 용맹을 숭상하고,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푸른 달의 전사다.”

“우리는! 명예를 알며! 용맹을 숭상하고!!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푸른 달의 전사다!!!!”

그리 정신 없이 가룸의 말을 따라 외치고 나니 목이 아파 왔다. 허나 가만히 서서 쉴 틈 따위는 없었다.

“동료를 버리고 도망가지 않기 위해선 그만큼 사나워야 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선 그만큼 거칠어져야하고, 뒤로 물러서지 않으려면 그만큼 강인해야 하지. 따라와라. 우리의 율법을 지킬 수 있을 푸른 달의 전사로 만들어 주마.”

그리 말하며 가룸은 숲으로 향했다. 이에 성하린은 아파져 오는 목을 쓰다듬으며 늑대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더!!! 더 빠르게 뛰어!!! 네가 선택한 길이다!!! 포기하지 마라!!”

“알겠습니다악!!!”

하린이는 진흙탕을 나뒹굴며 소리쳤다.

그러곤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돌아가는 편이 좋았을 것 같다고.

*****

시간이 꽤 흘렀다.

그동안 가룸은 이야기했다.

여기와 현실의 시각은 조금 다르게 흐른다고.

그러니 밖은 며칠 지나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덕분에 성하린은 원 없이 늑대들과 초원을 달리며 점차 한 마리의 야수가 되어갔다.

그녀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했으나 연중 내내 푸른 달과 노란달이 교차하며 밤이 지속되는 이 정신나간 들판은 그녀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광기를 일깨우고 신중함과 망설임이 있던 자리에 용맹함과 경쾌함을 불러왔다.

평소와 같이 들판을 달리던 성하린은 문득 자신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과 조금 많이 달라졌단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그녀는 이제 인간 세상의 향이 거의 다 사라졌다. 마치 자연에서 나고 자란 늑대소년마냥 야성과 본능의 비중이 더욱 커졌다.

숫기 없고 자존감 낮은 여자는 이제 이곳에 없다.

이제 성하린은 대초원의 용감무쌍한 전사가 되었으며 푸른 달을 숭상하는 한 마리의 거칠고 사나운 야수나 다름없어졌으니.

“준비됐나?”

“예!!!”

“기합 한번 좋군.”

꽤 오랫동안 함께 숲과 들을 쏘다니며 훈련한 덕에 가룸과 하린이는 많이 친해진 상태였다.

처음엔 그녀를 잡아먹으려던 가룸이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따라오는 그녀의 기개에 늑대는 탄복했다. 또한 점점 날이 갈수록 용맹해지는 그녀의 모습에 감동했고.

이제 가룸은 성하린을 자신과 같은 푸른 달을 거니는 늑대로 여겼다.

물론 그의 눈엔 아직은 여전히 애송이었지만.

“너는 이제 곧 시련을 통과하기 위해 어머니를 만나러간다.”

“드디어...”

성하린은 드디어 가리아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신났다.

그녀 자신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으나 꽤 오랫동안 늑대들과 함께 생활한 덕에 그녀는 성격이 제법 활달해지고 별거 아닌 걸로도 꽤 신날 수 있게 됐다.

그녀는 지금 첫날 마주했던 그 커다란 늑대이자 어머니를 만난다는 생각에 흥분되고 신났다.

“자, 나는 여기까지다. 이 동굴을 따라 쭉 나아가라. 어머니를 만나는 것까지가 너의 첫 번째 시련이다.”

“예...!”

“그동안 고생했다. 다음엔 저 밖에서 다시 만나자, 우리의 형제여.”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성하린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곧 가룸은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성하린은 홀로 동굴 앞에 섰다.

‘이 동굴을 지나면...’

다시 늑대여왕을 만나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럼 현실에 있는 주군과 동료들을 다시 볼 수 있다.

그들을 만나는 일은 굉장히 설레고 신나는 일이다.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한 성하린은 겁도 없이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예상대로 동굴은 굉장히 어둡고 음습했다.

또한 무엇보다 근원적인 두려움을 주는 장소였다.

“음...?”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의 속도를 높이던 중 문득 그녀는 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됐음을 깨달았다.

‘아무 냄새도 느껴지지 않아...’

허나 그렇다고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걸음을 멈추면 그대로 이 동굴에 잡아먹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 계속해서 일직선으로 쭉 이어진 동굴을 걸어 들어가자 이젠 귀가 먹먹해지더니 곧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감각이 하나둘씩 차단됐다.

곧 마지막 남은 시각마저 차단되며 성하린은 자신은 걷고 있는 건지 멈춰 선 건지조차 알 수 없어졌다.

‘이, 이게 대체...’

그녀는 길을 잃었다.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자신이 정말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점차 그녀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에서 공포를 맛보았다.

패닉에 빠져 사고가 점차 마비되어 간다. 불안감이 커지고 여기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늑대는 결코 도망치지 않는다.’

문득 청월의 율법이 떠올랐다.

아무리 두려워도 나아가기 시작한 늑대는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으니.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저 앞으로 나아가 길을 열뿐.

그게 바로 선봉의 역할이며 청월 야수의 본질이다.

곧 성하린은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지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성하린의 머릿속에 무언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오감의 한계에 속박되지 말거라.]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저 너머에 있으니.]

[자신의 한계를 만들지 말고, 너의 육감을 믿어라.]

[멈추지 말고 나아가거라.]

[바람을 가르며, 달밤을 등지고서.]

그 말이 지표가 되어 성하린은 복잡했던 생각을 하나로 좁힐 수 있었다.

본다는 생각을 버리고.

듣고 맡는 다는 생각도 버렸다.

그저 느낀다.

주변을 그리고 자신을.

“됐다.”

곧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눈으로 보지 않고도 보였으며 소리로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그녀의 발걸음은 경쾌하기 그지없어 더 이상의 망설임도 미혹도 담겨 있지 않았다.

“축하한다. 첫 번째 시련을 무사히 통과했구나.”

곧 동굴의 끝에 도달한 성하린은 거대한 공동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는 여인을 보았다.

“어...?”

그건 은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었다.

또한 짐승의 귀가 쫑긋 서 있는... 굉장히 아름다운 미인.

“이 모습은 처음이겠구나. 이리 오거라. 나의 아이야.”

그건 청월의 주인 가리아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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