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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가 다운로드 됨-79화 (79/221)

〈 79화 〉 78. 두 마리 늑대를 잡다

* * *

공동의 중앙에 선 것은 흰색 천으로 몸을 대강 감싼 여인이자늑대의 귀가 쫑긋거리고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의 여신.

인간형의 가리아를 본 순간 성하린은 세상에 저리 아름다운 존재가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하느냐. 어서 이리 오지 않고?”

“아.. 죄송합니다!!”

여자가 보아도 반할 것 같은 외모에 넋 놓고 가리아를 보고 있던 성하린은 성큼성큼 늑대들의 여왕을 향해 걸어갔다.

“오, 오랜만입니다!!”

그녀는 일단 허리를 90도 숙여 여왕에게 인사했다.

그동안 가룸을 비롯한 여러 늑대들과 함께 생활하며 하린이의 몸에 배인 상급자에 대한 예절이 자연스럽게 발휘됐다.

그 모습을 본 가리아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살짝 웃으며 하린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한결 부드럽고 누그러진 태도였다.

“확실히 가룸에게 가르침을 받은 아이답게 군기가 바짝 들었구나. 가룸은... 특히나 예민한 녀석이니.”

“네!! 전부 형제들 덕분입니다!!”

“그래, 좋다. 그치만 내 앞에선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가리아는 성하린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그녀를 껴안았다.

가리아의 풍만한 가슴팍에 안긴 성하린은 은은하게 풍기는 고소한 향에 마음이 진정됐다.

진짜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 전에 없던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그녀는 자기 품에서도 비슷한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성하린은 자신의 성격뿐만 아니라 외형까지도 점차 변해가고 있음을 아직은 자각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인간의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으시네요?”

“별로 어려울 것 없지. 무엇보다 너와 대화하려면 이편이 더 안정적이니.”

“아하.. 감사합니다..”

“됐단다. 뭘 이런걸로 감사까지야.”

성하린은 그녀의 따스한 말에 점점 더 기분이 좋아졌다.

가리아는 코를 벌름거리는 하린이에게 황동 잔을 하나 건넸다.

잔 안에는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액체가 한 컵 가득 들어 있었다.

“이건...”

“이건 월청수다. 이걸 쭉 들이키거라. 그리하면 너의 두 번째 시련이 시작된다.”

“두 번째 시련!”

어서 빨리 시련을 해결하고 싶었던 성하린은 얼른 가리아가 건넨 월청수 원액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들이켰다.

그녀가 자신에게 이상한 걸 줄 거란 의심 따윈 하지 않았다.

“우와, 이거 엄청 청량하.. 으음..”

털썩.

월청수를 마시자마자 쓰러져 버린 그녀를 가리아가 받아 냈다.

가리아는 자신의 품 안에서 가사 상태에 빠져든 성하린을 내려다 봤다.

보기 드문 인간이다.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늑대고.

“그런데 더욱이 보기 드문 괴물에게 속박 당했구나.”

가리아는 하린이의 이마에 새겨진 노예 낙인을 문질러 지워 버렸다.

상위 신격인 그녀에게 있어 같은 신격들끼리 거는 속박도 아닌, 겨우 인간에 불과한 존재가 새긴 노예낙인은 너무나 간단히 지워 버릴 수 있는 잡 기술에 불과했다.

“너는 이제 자유롭다.”

[노예 낙인이 해제됩니다!!]

성하린의 몸에 남아 있던 마지막 악취가 사라졌다.

이제 그녀에게서는 야수의 정취와 들판의 자유로움만이 묻어나겠지.

처음 초원에 도착해 달을 구경하던 성하린의 몸엔 악신들의 진득한 비린내와 코를 찌르는 썩은 내가 가득 베여 있었다.

그 악취에 놀라 성하린을 공격하기 위해 달려든 검은 짐승들은 가리아가 풀어둔 첨병이었으니.

가리아는 처음엔 성하린이 악신들의 끄나풀일 거라 여겼다. 그렇기에 적당히 위협해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성하린이 검은 짐승들과 싸우고자 투지를 끓어 올리는 순간 악신들의 짙은 잔향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진정한 본질이 드러났다.

이때 가리아는 저 자그마한 인간이 악신들의 권속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녀를 가까이서 마주 본 결과 가리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쇠사슬에 칭칭 감긴 상태에서도 여전히 자유를 품고 있던 인간.’

성하린은 악신의 권속 따위가 아니었다. 떨어져 나가지 않을 만큼 강하게 악신들의 악취가 묻어 있긴 했지만, 그 속에서도 성하린이라는 한 인간의 정체성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이는 그녀에게 낙인을 새긴 인간이 그녀를 강제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한 악신들도 자신의 권속이 내린 선택을 존중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성하린이 굳센 의지를 갖춘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이런걸 새기지 않아도. 이 아이는 너를 배신하지 않을 것인데. 의심 많은 아해로고.”

성하린이 한참 늑대들과 들판을 뛰놀던 그때 가리아는 동굴에 틀어박혀 성하린의 이마에 노예 낙인을 새긴 존재인 장조준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장조준이란 인간은 속세에 관심을 끊고 살던 그녀조차 놀랄 정도로 신들의 이목을 끈 인간들 중 하나였다.

워낙 자존심이 강해 대화가 안 통하는 선신놈들마저 하나같이 위험하다 소리친 인간이자, 이상하리만치 고통내성이 높으며 악신들을 직접 마주하고도 정신이 붕괴하지 않은 유례없을 정신력을 가진 인간.

또한 한차례 반칙을 저질러 존재말소의 형벌을 받고 있던 공허의 뱀을 억지로 끄집어낸 존재.

게임 판에 있어 그 어떤 플레이어 보다 위험한 변수덩어리가 바로 성하린의 주인이었다.

“아무리 네가 대단하다 할지라도. 이제 이 아이는 나의 자식이다. 그러니 자그마한 경고를 남겨두는 편이 좋겠지.”

늑대의 여왕은 성하린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이것으로 이제 노예낙인은 성하린에게 통하지 않게 됐다.

또한 조준이 다시 하린이의 이마에 낙인을 찍으려 할 경우 가리아가 남긴 경고를 보게 될 것이다.

“결말을 향해 달려갈 때. 나의 아이가 네 앞길을 열어 주겠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난 어미된 자로서 자식의 선택을 믿을 것이니.”

고대신들은 게임의 승패에서 한 발짝 물러난 존재들이다.

아직 이름이 없던 악신들이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고 선신들이 탄생하기도 전, 고대의 신들은 결말을 한번 선택했다.

그 결과 이제 그들에겐 선택권이 남아 있지 않다. 그저 악신과 선신 중 한곳에 달라붙어 어느 한쪽이 이기길 응원하고 지원할 뿐인 집단. 그게 바로 쇠퇴한 만귀전이었다.

“그 늙은 나무는 여전히 결말에 집착하고 있지만... 글쎄.”

가리아는 이제 어찌 되든 별 상관이 없었다.

그녀의 전쟁은 이미 끝난 지 오래고.

이제 남은 것은 천천히 다가올 미래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악신이 승리하던 선신이 승리하던 가리아로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건 자신은 살아남을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저 당장 눈앞의 현재에만 집중했다.

지금은 부디 자신의 품에 들어온 새로운 자식인 성하린이 이 시련을 잘 이겨 내길 기도할 때였다.

“부디, 너의 답을 찾기를.”

*****

어둡고 또한 황량한.

메마른 평원. 무색무취에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곳.

무의식과 표층 의식의 경계선에서 성하린은 깨어났다.

“여긴...”

장조준이 꾸었던 그런 종류의 꿈의 세계는 아니다.

이곳은 월청수의 효과로인해 올 수 있게 된 곳이었다.

“여기서.. 난 뭘 해야 하지..?”

성하린은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했다.

그녀의 육감이 말한다. 멋대로 움직였다간 두 번 다시 되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그 경고에 성하린은 행동을 멈추었다.

“어, 어떡하지..?”

이때까지는 항상 목표가 주어졌었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목적지도 정해져 있었고.

방금 전 지나온 동굴 만해도 그렇다.

일직선으로 쭉 뚫려 있는 수평갱도는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됐다.

허나 이곳은 아무런 목표도 목적도 없는 무에 가까운 공간.

여기서 하린이는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움직여야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리 한참을 제자리에서 서성이던 그때.

어둠의 저편에서 검은 늑대가 한 마리 걸어 나왔다.

동시에 반대편에서 하얀 털을 가진 늑대가 다가온다.

곧 두 마리의 늑대는 성하린을 가운데에 두고서 대치 상태에 돌입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상황 속, 가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마리의 늑대.]

[검은 늑대는 너의 열등감, 피해의식, 분노와 증오 그리고 욕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의 총체다. 이 녀석을 선택하면 아주 강한 힘을 얻겠지. 하지만 점차 정신이 광기에 물들 거다.]

[하얀 늑대는 너의 의지와 도전정신, 용기와 투지 그리고 불굴의 정신과 같은 선한 감정들의 총체다. 이 녀석을 선택하면 힘은 크게 얻지 못한다. 하지만 이전처럼 계속 은은하게 빛날 수는 있겠지.]

[선택해라. 너의 선택에 따라 아주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강한 힘을 동반한 광기인가. 아니면 이성적이지만 나약한 힘인가.

가리아의 목소리가 서서히 옅어지고 서로를 마주 보던 늑대들은 순식간에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달려들었다.

가운데 서있던 성하린은 풍압이 일어날 정도의 충격에 뒤로 크게 밀려났다.

두 마리의 야수들이 내뿜는 살기가 형상화하며 주변을 할퀴고 지나갔다. 가까이 다가가면 필히 큰 상처를 입을 거다.

날카로운 살기에 성하린은 격돌하는 늑대들에게 다가가기가 더 어려웠다.

또한 그녀는 망설였다. 어느 쪽을 골라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애초에 힘을 원해서 이곳에 왔다.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만큼 강한 힘을.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길을 선택하면 광기에 휩쓸려 동료를 다치게 만들지도 몰랐다.

‘우리는, 늑대는 가족을 지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의 송곳니가 향하는 방향을 잘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가룸이 해줬던 말이다.

그렇다고 하얀 늑대를 선택하기엔 아무런 소득 없이 다시 현실로 돌아갈 것 같았다. 그럴 순 없었다.

그리 그녀가 고민에 빠진 사이 늑대들의 상처가 늘어갔다.

검은 늑대는 한쪽 앞다리가 뜯겨나갔고 하얀 늑대는 목덜미가 움푹파였다.

고민에 빠져 있던 그녀는 풍겨 오는 피 냄새에 고개를 들었다.

상처 입은 두 마리의 늑대가 보인다.

순간 그녀는 자신이 바보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살기를 정통으로 맞으면서도 상처 입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늑대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하아.. 하아...”

곧 하린이는 두 마리 늑대 앞에 도착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그녀의 팔과 다리, 몸을 비롯한 곳곳에 상처가 생겼다. 허나 고통 따윈 없었다. 이미 두 마리의 늑대는 자신이 다가가길 망설이고 주춤거린 사이 상처투성이가 된 상태였으니까.

‘청월의 율법.’

성하린은 상처 입어 죽어 가면서도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는 늑대들을 껴안았다.

자신의 품에 두 마리의 늑대를 모두 품었다.

“너희 둘 다 나야.”

그녀는 깨달았다.

애초부터 둘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따윈 없었단 사실을.

열등감도 피해의식도 증오도 분노도.

도전정신과 투지, 용기도 전부.

전부 그녀 자신의 것이며 한평생을 함께해온 동료나 다름 없었다.

무엇이 되었든 그저 버리고 싶다고 버릴 순 없다.

늑대는 동료를 버리지 않기에.

“겁쟁이처럼 고민할 시간에. 너희에게 달려왔어야 했어. 늦어서 미안하다.”

그녀의 품에 안긴 두 마리 늑대가 소멸 했다.

동시에 가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번째 시련 통과.]

[훌륭하구나.]

성하린은 자신의 선택이 과연 정답이 맞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단지 시련을 통과했을 뿐이다.

[그럼 마지막 시련이다.]

[너의 육신은 이제 새로 태어난다.]

[고통을 견디거라.]

생각을 이어나갈 새도 없이 마지막 시련이 시작됐다.

세번째 시련은 고통을 견디는 것.

그게 마지막 시련이자 가장 어려운 시련이었다.

변화하는 과정 중 정신을 놓거나 급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물론 성하린이 견디지 못할 리가 없다.

그녀는 이미 어엿한 한 명의 전사이자 내면의 통합을 이루어낸 청월의 야수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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