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가 다운로드 됨-87화 (87/221)

〈 87화 〉 86. 이제는 믿음을 줄 때

* * *

이찬성을 죽이고 서둘러 그녀들이 기다리고 있을 1층으로 내려갔다.

손에 묻은 피는 아무리 옷에 문질러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게 상당히 기분 나빴다.

“오빠!!”

피폐하던 정신을 은지의 목소리가 일깨워준다. 멸망이 시작되고 지금까지 항상 나를 불러 주는 은지 덕에 버틸 수 있다. 여기에 하린이도 있으면 딱인데...

“여기 다들 잡아 뒀어요.”

“잘했어. 어디 보자.”

나는 나에게 안겨 오는 은지에게 손에 묻은 피를 보여 주며 미안 하지만 지금은 껴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아쉽다. 오빠 나중에 잔뜩 안아줄게요.”

“그래.. 나중에 잔뜩 껴안고 있자. 간만에 은지한테 힐링 좀 받아야겠어.”

은지는 아쉬워하면서도 내 안색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난 지금 상당히 초췌한 상태다. 고어한 장면을 너무 많이봐서 정신적으로 조금 질려 버렸다.

이 정신 나간 세계에서 맨정신으로 살려니 영 힘들다.

“오빠! 저는요!”

“주인. 나는?”

“물론 화영이랑 메르도. 아니 너희들 전부다.”

나를 사랑해주는 여자들이 있어서 그나마 힘이 난다. 빨리 마트로 돌아가서 샤워하고 여자들 품에서 잠들고 싶다. 하루라도 좋으니 그냥 맘 편히 쉬고 싶었다.

“저기... 미안.. 어쩌다 보니 나오는 놈들.. 다 죽였어.”

그때 아람이가 부끄러워하며 나에게 사과했다. 입구에서 도망자들을 상대하다 보니 전부 다 죽여 버린 모양이었다.

“괜찮아. 아람이는 다친 데 없지?”

“응...”

“그래, 그거면 된 거야.”

“그러고 보니 저도 못 잡았어요. 너무 강해서. 죽일 수밖에...”

“괜찮아.”

로버나 블레이드 마스터도 전투 중에 죽은 모양이었다. 은지와 아름이가 사로 잡기엔 너무 강했다고 해서 그냥 잘 죽였다고 말해줬다.

그래도 비스트 테이머와 포제션 워리어는 확실히 살아 있었다. 솔직히 그녀들에게 전투를 맡겼을 때 히든 클래스는 전부 죽을 거로 예상했다. 그래도 이렇게 둘이나 살아남았으니까 다행이다.

그런 와중에 비스트 테이머는 힘줄이 죄다 끊겨 있었다.

“도망갈 까 봐 끊었어요.”

“그래. 괜찮아. 잘했어.”

화영이가 단검으로 끊어낸 모양이었다. 어차피 소환사라 기동성은 좀 떨어져도 된다. 나는 화영이에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줬다.

아까부터 내 입에선 괜찮다는 말만 계속 나오고 있다. 어쩌면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괜찮다고 위로받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 생각하자 웬일로 나를 보고 있던 보타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힘들면 말해.]

[기억을 지워줄 수도 있으니까.]

[대신 잘못하면 백치가 될지도 모르지만...]

백치가 된다니. 그녀 나름대로 나를 위로해 줄 생각인 모양인데 백치가 될 바에야 그냥 이찬성을 고문했던 기억을 가지고 사는 편이 났다.

‘괜찮습니다.’

난 그래도 나를 걱정해준 보타밀리에게 감사의 뜻을 감아 거절했다. 인디크론이나 카쉬낙스는 인간을 그저 먹잇감 정도로 여기는 반면 보타밀리는 그나마 좀 더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 인신 공양을 받지 않아서 더 그런 이미지다.

“휴우.. 자, 한 줄로 서라.”

난 복잡한 머리를 휘젓고는 그녀들이 붙잡은 무법자 놈들의 이마에 차례차례 노예낙인을 찍었다. 중간중간에 무법자들에게 납치 감금되어 있던 일반 시민도 있었다. 물론 나는 구분 없이 전부 노예로 만들었다.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야. 이제 어서 돌아가자. 너무 피곤하다.”

“어? 그런데 주인님. 그 머리 없는 남자는요?”

“아, 맞다. 구교한을 안 데리고 왔네.”

옥상에서 샤프슈터와 싸웠을 듀라한을 까먹었다. 놈에겐 그냥 샤프슈터를 잡으라고만 했지 다른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니까. 아마 멍청한 듀라한은 지금도 옥상에서 가만히 서 있을 거다.

난 빨리 놈을 데리고 나와서 돌아가 쉴 생각으로 다시 스포츠 센터에 들어갔다. 구교한은 내 명령이 아니고서야 들어 먹질 않으니 내가 직접 가야만 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야... 그나마 그녀들이 나를 보듬어 주지 않았다면 더 힘들었겠지. 빨리 돌아가서 씻고 밥 먹고 섹스하고 자야겠다...’

그런데 나의 이 기구한 운명이란 게 참 얄궂게도 나를 그냥 쉬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쿠구구궁...

스포츠 센터의 1층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마치 무언가 거대한 존재가 막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듯.

땅이 살짝 울리며 우린 엉거주춤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서야만 했다.

“저게 뭐야...”

아름이가 물었다.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저런 건 생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저건... 저건 커다란 살점이었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시발...!’

[필드 보스 '썩은 태아’가 생성됩니다.]

[경고!!! 인근의 모든 언데드들이 필드 보스 '썩은 태아'의 영향권 아래 들어갑니다!!]

[시체가 ‘미트 골렘’으로 부활합니다!!]

“우어어어어어!!!!”

거대한 괴물이 스포츠 센터 1층에서 일어섰다.

필드 보스의 머리 부분을 이루고 있는 건 수많은 사람의 머리통이었고 놈의 몸통엔 울부짖는 좀비들이 찌그러지고 펴지길 반복하며 망가지고 있었다.

그건 마치 인간 수십 명을 얼기설기 이어 붙인 모양새였다. 시체로 만들어 낸 가장 불결한 생명체를 뽑으라면 아마 저놈이 아닐까?

심지어 놈은 전체적으로 마치 어린 태아와 같은 모습이었다. 시체로 만든 아기. 보는 이로 하여금 정신적인 충격에 빠뜨릴 법한 외모였다.

“우어어어어어!!!!!”

거의 5미터는 되어 보이는 시체아기가 울음을 터트리며 바닥을 내려쳤다. 마치 아기들이 땡깡을 부리듯이.

그러자 스포츠 센터의 바닥에 죽어 있던 시체들이 일제히 뭉개지며 미트 골렘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일어선 미트골렘들은 몸에 달라 붙어오는 칠흑바퀴를 그대로 흡수하며 더욱 커졌다. 이대로 저 괴물 새끼를 가만히 놔두면 미트골렘에 계속 증가하겠지. 그럼 아마 우린 여기서 살아 돌아 갈 수 없으리라. 설령 도망친다 하더라도 두 번 다시 저 정신 나간 괴물을 사냥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시발!!! 이제 좀 쉬고 싶다고!!”

“오빠!! 피해!!!”

곧 은지가 나에게 소리 질렀다. 허나 물러설 수 없다는 사실을 나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물러서서 도망치면 안 된다. 지금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맞서 싸워야 할 때다. 지금이야 말로 저 괴물에게 승산이 있을 유일한 순간이니까.

난 당장 어깨에 메고 있던 토츠미르의 나팔총을 놈에게 조준했다.

이찬성을 잡을 때는 사용하지 않은 무기였다. 정확히는 꺼내 들 필요도 없이 이찬성이 내 손에 붙잡힌 거지만.

아무튼, 나는 지금이야말로 이걸 사용할 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죽은 시체를 다시 몬스터로 일으켜 세우는 괴물이다.

저 괴물이 살아 숨 쉬는 시간이 1초라도 더 길어졌다간 이 일대가 썩은 살덩어리들로 가득 차게 될 거다. 아까워 하지 말자. 지금이 토츠미르의 나팔총을 사용할 적기다.

그리 생각하며 단 2발뿐인 나팔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콰아앙!!!!!

[업적 달성! ‘압도적인 화력’]

[업적달성 보상이 주어집니다.]

순간 나는 몇 미터나 뒤로 튕겨 날아가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반동이었다.

반동 제어고 나발이고 몇 미터나 날아갈 정도의 파괴력이라니...

뒤로 날려지는 순간 언뜻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가는 모습을 본 것 같다. 터져 나가는 썩은 태아도.

‘충격 때문에 머리가 울려...’

반동만으로 나는 거인에게 한대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용잡이가 이런 것까진 알려주지 않았는데...

그나마 내 스탯이 워낙 높고 나가라자의 즙을 먹어둔 덕에 의식이 날아가진 않았다.

“주인!”

한참을 허공을 날고 있자 메르헤레가 날아들 듯 달려와 나를 받아 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아스팔트에 얼굴이 죄다 갈렸으리라.

“메, 메르.. 고맙다.”

“아니, 주인.. 코랑 귀에서 피가.. 그리고 방금 그건 대체 뭐냐."

"메, 메르.. 그보다 저길 봐라.”

“어...?”

나를 걱정스럽게 내려다 보던 메르가 스포츠 센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울면서 기어 나오던 썩은 태아는 기어 나오던 모습 그대로 몸뚱이의 절반이 날아가 버린 상태로 멈춰 서 있었다.

또한 일직선상에 있던 모든 게 박살 났다. 스포츠 센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정말 내가 봐도 말도 안 되는 파괴력이었다.

‘젠장... 정조준 했으면 즉산데...’

안타깝게도 빗겨 맞은 덕에 썩은 태아를 즉사 시키진 못했다.

­꾸구구구궁...

그리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을 때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스포츠 센터가 박살 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내 불길한 예감은 항상 맞아서 탈이다.

“우어어!! 머리를 뜯어내야 해!!!”

곧 센터의 옥상에서 비명을 지르며 듀라한이 뛰어내렸다.

저리 외치는 품새가 꼭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모양새였다.

그야 저놈이 할 줄 아는 말이라곤 '머리를 뜯어내야 한다'거나 '목이 가렵다'는 말뿐이니까.

대충 뉘앙스나 말에 묻어난 감정으로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난 지난날 저놈의 감정 상태에 대해 많은 부분을 알게 되었고 그를 통해 유추해 보자면 지금 듀라한은 겁에 질린 상태였다.

“아니, 저 새끼...”

“엄청 빠르군...”

쾅!

땅바닥에 착지한 듀라한은 서둘러 우리 쪽을 향해 전력 질주로 달려왔다. 건물이 무너지려는 파괴 음이 들리니 아무리 지능이 낮은 듀라한이라도 위험하다 판단했겠지. 중요한 건 당황한 나머지 해골마를 불러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기 발로 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도 피해야 한다!”

“어! 빨리 뛰자 메르!!”

곧 스포츠 센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던 썩은 태아도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들며 비명을 질렀다.

허나 레벨 업 표시가 뜨지 않는 걸로 보아하니 건물에 깔렸음에도 놈은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준아!!”

그리 메르와 전력으로 달리는 순간 희선 누나가 나와 메르를 향해 나무뿌리를 쏘아내 무너진 건물의 파편이 닿지 않을 곳으로 끌어당겼다. 덕분에 우리는 무너져 내리는 건물의 잔해에 얻어맞아 죽는 다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스포츠 센터에서 새롭게 사로 잡은 노예들은 하수도 내부로 대피한 상태였다.

­쿠구궁...

그 사이 스포츠 센터가 완전히 무너졌다.

곧 건물의 잔해가 들썩이며 그 안에서 망가진 썩은 태아가 비비적거리며 기어 나왔다.

‘역시.. 보스라 이건가..’

만약 내가 근력이 높아서 정조준 상태로 놈의 정수리를 확실하게 맞췄다면 놈을 바로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그것까진 무리였다. 토츠미르의 나팔 총은 반동이 너무 강해서 쏘는 순간 조준점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차라리 잘됐어. 피는 반 정도 깍은 상태 같으니까. 다 같이 합공해서 죽인다... 그러면 우리 모두 레벨을 올릴 수 있을 거야..’

기왕 이리된 거 다 같이 합공해서 죽이면 되겠지. 그래 나 혼자 독식하는 것 보다 그편이 전력증가에 훨씬 좋다.

생각을 전환해 위기를 기회로 삼기로 했다.

“자! 가즈!!”

“주군!!!!”

그리 놈에게 돌진하라고 소리 지르려 할 때였다.

나보다 훨씬 더 큰 목소리로 누군가 고함질렀다.

“어...?”

그건 너무나 그립고 또 반가운 목소리였다.

그래, 지난날 만귀전으로 갔던 내 첫 노예인 하린이의 목소리였다.

난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거대한 애꾸눈 늑대를 타고 달려오는 하린이가 있었다.

‘뭐야.. 저 늑대는.. 무서워..’

늑대는 무슨 자동차만한 크기였다.

그런데 늑대에 정신이 팔려 보지 못했던 하린이를 자세히 보니 만귀전으로 가기 전과 상당히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회색머리에... 짐승귀...?’

하린이는 늑대의 귀와 꼬리를 달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굉장히... 굉장히 귀여워졌다.

짓고 있는 표정은 늠름하지만 쫑긋거리는 짐승귀와 팔랑팔랑 흔들리는 꼬리가 마치 강아지 같아서..

“주군!! 내가 왔어!! 나 성하린이! 내 하나뿐인 주인을 지키기 위해!! 블루문 비스트가 되어!! 이리 돌아왔다고!!!”

쩌렁쩌렁 울리는 하린이의 목소리에 울부짖던 썩은 태아까지 당황한 듯 멍하니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어... 하린아.. 어서 와라!!”

난 늑대에게서 뛰어내려 내 품에 안기는 하린이를 덥석 껴안았다. 손에 피가 워낙 많이 묻어 있어서 은지의 포옹도 거절했지만, 이리 반가워하는 하린이는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머리색도 바뀌고. 귀에.. 꼬리까지.”

“아주 많은 일이 있었지! 귀와 꼬리는 나중에 실컷 만지게 해 줄게! 일단은 저 괴물을 죽여야 하는 거지?”

“어.. 그래.. 일단은 가자!!!”

얼른 정신을 차린 나는 다시 외쳤다.

“하린아 어서 와!”

“은지 언니!”

“귀.. 귀가..”

“화영! 나중에 너도 만져 봐라!”

“어... 언니..”

“그래, 반갑다 아름아!”

하린이는 상당히 호쾌해졌다. 기죽은 모습 따윈 이제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달라진 그녀를 보고 다들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지만 일단은 필드 보스를 끝장내기 위해 달렸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지만 지금은 필드 보스를 잡을 때니까. 저 놈을 오래 살려둘 수록 우리의 승산이 줄어든다.

그리 썩은 태아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자. 하린이는 다시 차체만한 늑대에 올라타더니 우리를 추월해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자!! 형제여!!”

­아우우울!!!

그 속도를, 그 거친 박력을 도무지 따라 갈 수가 없었다.

그건 하나의 질풍이었다.

해골마를 꺼내든 듀라한 마저도 뒤쳐질 정도의 압도적인 쾌속질주.

“청월의 야수가 왔노라!!”

그녀는 선봉이 되어 돌진했다. 우리가 가는 길을 가로막는 모든 미트 골렘들을 찢어발기며. 한 마리의 짐승이되어 달렸다.

그녀의 목표는 필드 보스인 썩은 태아.

일직선으로 정직하게 달려나가는 하린이는 다른 건 신경쓰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표적을 노려보며 올곧게 나아갔다.

그렇게 필드 보스의 지근거리까지 다다른 순간, 그녀는 탑승 중이던 늑대에서 뛰어올라 양팔을 크게 벌렸다.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무수한 숫자의 미트 골렘들.

“갈기갈기!!!”

의미 불명의 외침. 그리고 그녀의 양손에서 튀어나온 푸른 색으로 물든 클로.

마력으로 이루어진 클로였다. 아마 스킬을 사용한 게 아닐까 싶다.

곧 하린이의 양팔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동시에 그녀를 가로막던 미트 골렘들에게 푸른색 선이 좍좍 그어지더니 죄다 터져 나갔다.

하린이를 뒤따라 달려간 듀라한과 반인반마 상태의 아람이가 뚫린 길을 따라 내달려 필드 보스의 머리통을 특대검과 망치로 후려쳐 깨버렸다.

비슷하게 도달한 메르가 낫으로 썩은 태아의 몸을 베어갈랐고 나머니 멤버들이 차례차례 도달하며 놈에게 일격을 먹였다.

이걸로 다들 필드보스를 죽이는데 한 숟가락씩 거들 수 있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하던 15레벨에서 드디어 탈출이다.

[레벨이 1 올랐습니다.]

[가장 공적이 높은 플레이어에게 업적이 돌아갑니다!]

[업적 달성! ‘썩은 태아 토벌’]

[업적달성 보상이 주어집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보는 레벨 업 표시였다.

“우와!! 죽였다!!”

“허.. 이게 되네.”

“하린아!! 이 늑대 만져 봐도 돼?”

“아, 만져도 된대.”

죽은 필드 보스를 옆에두고 우린 웃음꽃이 피었다.

그사이 나는 하린이에게 다가 갔다. 그녀의 회색빛 머리칼에 썩은 태아에게서 나온 살점과 피가 가득 묻어 있었다.

“하린아. 왔구나.”

“응. 주군. 나 어어엄청. 노력했어.”

“그래그래. 잘했어. 수고했어.”

“흐헤...”

난 하린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내 눈에 무언가 떠올랐다.

[플레이어 성하린의 노예낙인이 지워진 상태입니다.]

“어..?”

난 하린이와 눈을 마주했다.

하린이는 조금 우물쭈물하더니 나에게 고백했다.

“주군. 나는 이제 노예가 될 수 없는 모양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푸른 달의 여왕, 가리아의 딸이 됐어. 그래서 이제 누군가의 노예가 될 수 없데.”

“어.. 아니.. 그게.. 무슨..”

난 순간 휘청거렸다.

그러자 하린이가 나를 부축해주려고 했다.

흠칫.

난 나를 붙잡으려는 하린이를 살짝 밀어냈다.

“하, 하린아. 그럼 이제.. 두 번 다시 내 노예가 될 수 없는 거야?”

“응... 주군.. 아니, 조준 오빠.. 노예가 아니면.. 역시 안 되는 거야?”

“어.. 그게..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좀 줘..”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해졌다.

이미 이런 일이 한번 있긴 했다. 아람이가 능력을 일부 각성했을 때 우리마음교회의 지하 주차장에서 노예낙인이 한번 풀렸었다.

‘또.. 또다시...’

노예낙인은 만능 스킬이 아니란 사실이 계속해서 입증되고 있다.

‘진정해... 장조준.. 이미 처음부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건 알고 있었잖아...’

선신들의 개종자들이 우리마트를 습격했을 때. 그때 어렴풋이 노예낙인을 지우는 클래스가 나타나면 어쩌지 싶었다. 그때 나는 내 스킬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으면 어쩌나 많은 고민을 했었던 기억이 있다. 고민에 답은 나오지 않았었지.

“하린아.”

“응.. 오빠.”

“조금 뜬금 없지만..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야 겠어.. 그러니까 진심을 담아서 말해 줬으면 좋겠어..”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방법 같은 건 없다.

그저 진실을 말해 줄 거라고 믿는 수밖에. 그래, 믿는 수밖에 없다. 한평생 불신만 가득했던 내 가슴에 믿음이란 말은 너무나 멀고도 어색한 단어지만.. 그런데도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오빠. 나는 사실 거기서 몇 달 보냈어.”

“며, 몇 달?”

“응. 만귀전은 밖이랑 시간이 좀 다르게 흐르더라? 아무튼 거기서 형제들이랑. 정말 원 없이 달렸어. 뛰고 또 뛰고. 아무 생각 없이 근심 걱정 없이. 푸른 달을 보면서 달렸어.”

“응..”

“달리다 보니 생각났어. 나 있지. 처음 오빠랑 만났을 때. 그러니까 오빠한테는 몇 주 전의 이야기지만 나는 몇 달 전의 이야기거든. 헤헤.. 아무튼 그때 오빠한테 활 겨눈 거 기억나?”

“어.. 기억나. 그때 너랑 처음 만나서.. 너를 붙잡았으니까.”

“응. 그때 있지. 그날 우리 가족들이 전부 죽은 날이었거든.”

“아.. 몰랐어..”

“괜찮아. 아무튼 그날 나는 혼자서라도 살겠다는 일념으로 밖에 나온 거였어. 그런데 오빠한테 그렇게 허망하게 붙잡혔잖아.”

“응..”

“그날 나는 진짜 이제 끝장이구나 싶었어. 그때는 오빠가 그냥 미친 변태인 줄 알았거든.”

“아.. 미안..”

“아냐. 사과 하지 마. 그냥 그때는 그랬어. 그랬는데. 오빠랑 같이 다니다 보니까. 그게 좀 우습지만 오빠한테 많이 의지하게 됐어. 오빠는 뭐든 금방금방 부수고 앞으로 나가니까. 뒤를 따라가는데 꽤 살만하더라고? 오빠가 나한테 잘해주기도 했고.”

“어... 그야.. 하린이 좋아하니까.”

“나도 그래. 나도 좋아. 겨우 몸 한번 섞었다고. 끝까지 책임지려고 하는 모습이나. 맨날 아침마다 좋다고 뽀뽀해주던 것도. 전부 좋아. 그래서 있지. 나 맨날 그 넓고 푸른 초원을 달리다 보면. 항상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

“응. 형제들. 그러니까 초원의 늑대들이 그랬어. 그냥 여기서 같이 살자고. 그러면 굳이 다시 고생하러 갈 필요 없을 거라고. 그런데 나 자꾸 오빠 얼굴이 생각났어. 나는 혼자 이렇게 평화로운 삶을 사는데. 오빠는 냄새 나는 좀비들이랑 고생하고 있을 거 아냐. 오빠나 은지 언니나. 화영이나. 아람 언니도 그렇고. 아름이랑 희선 언니랑 메르 언니도. 전부 생각났어. 그래서 꼭 돌아가자고 생각했어.”

“어...”

“오빠. 청월의 야수는 결코 가족을 버리지 않아. 오빠는 이미 내 가족이나 다름없어. 다른 사람들도 전부. 그러니까 버리지 않아. 배신하지 않아. 그러니까 끝까지. 나랑 같이 달리면 안 될까? 내가 오빠의 길을 열어 줄게. 누구보다 빨리 달리 수 있어. 나랑 같이... 달리자. 오빠랑 같이 가고 싶어.”

“하린아...”

날것 그대로의 고백.

그녀는 두서 없이 떠올리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나에게 말해줬다. 들으면서 알 수 있었다. 진심이란 사실을.

나는 하린이의 손을 붙잡았다.

이렇게까지 진심을 담은 고백을 받아놓고 거절하면 그건 남자도 뭣도 아니다.

“좋아. 하린아. 우리 같이 달려보자.”

“응.. 고마워. 헤헤. 오빠 사랑해.”

“나도.”

이제 조금 나의 가치관을 바꿀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서른 평생 나는 항상 타인을 믿지 못했다. 물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난 생판 남은 절대로 못 믿는다.

하지만.. 그래도 하린이는 믿어볼 수 있지 않을까?

은지도 그렇고... 내 여자들은 그래도 믿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믿음을 줘야할 때가 온 거다.

항상 두려움에 떨며 나를 꽁꽁 감추고서 타인을 잠재적인 적으로 여겼지만. 이제 내 가슴에 들어온 그녀들에겐 믿음을 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밤.

그녀들과 이야기를 조금 해 봐야겠다. 어쩌면.. 오늘 그녀들을 전원 노예에서 해방시킬지도 모른다. 하린이만 해방 시킬 순 없으니까. 해방 시킬 생각이라면 예외 없이 그녀들을 전부 해방시켜줄 생각이다.

그리하면 어쩌면.. 누군가는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

어쩌면 배신당할지도..

그런데도 나는 믿어보고 싶다.

다들 하린이와 같은 생각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나도 이제 누군가의 약점을 잡은 관계가 아닌.

진실된 믿음으로 구축된 관계를.. 가져 보고 싶어졌다.

* *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