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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가 다운로드 됨-88화 (88/221)

〈 88화 〉 87. 임신이슈

* * *

스포츠 센터에서 사로잡은 인간들을 이끌고 다시 우리마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고 있던 생존자 둘이 좀비에게 물려 하마타면 순식간에 사로잡은 인간들을 좀비 밥으로 줄 뻔했다.

주의를 집중해도 인원수가 늘어나니까 완벽할 수가 없었다. 둘 셋 정도면 모르겠는데 몇십 명이 함께 이동하다 보니 그들을 전부 보호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인원수가 또 급증 했으니. 돌아가면 제대로 인원을 파악하고 명단을 또 짜야겠네... 문근오랑 하진성한테 맡기자.’

둘이서 간부진 짜고 알아서 굴러가게 만들어야겠다. 이런 것까지 내가 신경 썼다간 머리가 터질 테니까.

나는 저들을 단지 훌륭한 노동력이자 내 노예로서 지배하고 싶은 거지 몸집이 커진 집단을 하나하나 조율하고 다스리는 건 나하곤 맞지 않는 일이니까.

그래, 나는 적당히 뒤로 물러나서 꿀만 빨고 싶다. 그러자고 이 개고생 하며 노예사냥하고 걸리적 거리는 놈들 치우는 거니까.

아포칼립스지만 그냥 섹스나 실컷 하면서 근심걱정 없이 살고픈 마음이다. 물론 세상이 나를 가만 놔두지 않아 계속해서 고생 중이지만. 그래도 이번 주엔 불길한 초커도 해치웠으니 이제 좀 평화롭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이제 백명 넘겠네. 보부상 확정출현인가?’

이번 노예사냥으로 인해 이제 우리도 생존자 캠프라고 할 만할 정도로 사람이 늘었다. 일반 클래스 플레이어만 서른 명이 넘고 비 각성자까지 포함하면 백여 명에 가까워졌으니까.

100여명에 가까운 인원수니 이제 매주 보부상이 출현하겠지. 보부상이 파는 물건들로 하나둘 무장을 갖추다 보면 레벨 이상으로 강해질 수 있을 거다.

체감 상 날이 갈수록 레벨 업이 힘들어질 텐데 레벨 이상으로 강해지려면 이제 슬슬 템빨을 받아야 할 때니까.

‘그러고 보니 업데이트로 무기상과 보석상이 나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보부상과 3번 이상 조우해야 하고, 누적 코인이 10만 코인 이상에 네임드 개체를 최소 10마리 이상 사냥하고, 구울을 1회 이상 잡으면 무기상과 보석상이 랜덤 확률로 등장한다고 했다.

노예들이 열심히 벌어다준 코인 덕에 누적 코인은 이미 진즉에 10만을 돌파했다. 마트 주변을 정리한다고 네임드도 10마리 이상 잡아 죽였고. 구울도 하나 이상 죽였으니 이제 보부상을 1번만 더 만나면 된다.

이번 참에 100명을 채웠으니 보부상이 등장하겠지. 그럼 그때 보부상과 한번 더 만난거니까 이제 내 주변에 무기상과 보석상이 나올 거다. 그 녀석들과 자주자주 거래하면 생존자 캠프가 훨씬 더 강화될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남들과 달리 암시장에도 갈 수 있으니... 그 정신나간 곳으로 다시 들어가긴 싫지만 그래도 특이한 물건을 잔뜩 파니까 다시 가 봐야겠어. 간김에 체셔도 다시 만나봐야겠고.’

이번 주 암시장은 그냥 넘겼으니 다음 주를 노려 봐야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마트에 도착했다. 나는 데려온 노예들을 마중 나온 하씨 듀오에게 맡겼다. 그리고 히든 클래스인 비스트 테이머와 포제션 워리어는 따로 불러내 대화를 나누게 됐다.

“소환수가 죽어서 재계약해야 한다고?”

“예.. 저는 소환수가 죽으면 다시 환계에 있을 짐승들과 계약해야 합니다. 친밀도도 처음부터 올려야 하고... 당장은 불러낼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 그래도 대기만성형 직업이라 쓸만 하실 겁니다! 제, 제발.. 목숨만은..”

"알겠어. 질질 짜지마."

비스트 테이머 임진수는 그리 대답했다. 시간이 좀 필요하단다.

“그런데 제대로 써먹으려면 며칠이나 걸릴 것 같은데.”

“최소 일주일...”

“알겠다. 노력해라.”

“예!”

임진수의 힘줄을 차오르는 살점으로 다시 이어 붙였다. 손가락도 땠다 붙여다 가능한데 끊어진 힘줄 하나 못 붙일까. 물론 임진수는 침을 질질 흘리며 몸을 덜덜 떨었다. 어지간히 아픈 모양이었다.

“그래서. 너는 사람을 죽여야 강해진다고?”

“예..”

“영혼을 먹어?”

“예.”

"그냥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영혼에도 맛이 있냐?"

"예? 아니.. 영혼에 무슨 맛이 있습니까. 그냥 흡수한다는 거지 진짜 뜯어먹는게 아닙니다.."

"아.. 그래."

카쉬낙스가 워낙 맛있게 먹어서 혹시나 싶어 물어본 건데 포제션 워리어인 이훈은 나를 무슨 미친놈 보듯 쳐다봤다.

“그런데 꼭 살아 있는 사람으로만 강화가 되냐? 좀비로는 당연히 안되겠지?”

“예... 이미 죽은 놈들은 아무리 죽여도 영혼이 흡수가 안됐습니다. 적어도.. 살아있는 것. 그게 최소조건 입니다. 그중에서도 인간이 현재까진 가장 효과적이였구요.”

"그럼 사람 말고도 살아만 있으면 영혼 흡수가 된다는 소리네?"

"쥐나 비둘기로 실험을 해봤는데.. 되긴 됩니다. 물론 효과는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메르님인가? 그분과 전투 하다가.. 먹은 거 반을 뱉어내서.. 좀 많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아.. 흐음.."

이훈은 메르와의 전투로 모아둔 영혼의 반을 토해냈다고 한다. 모아 두고 있는 것 자체가 나름대로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데 메르가 무자비하게 잡아 팬 결과 흡수하고 있던 영혼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단다.

“일단 알겠어. 가봐.”

“예. 가 보겠습니다.”

근육질 몸을 실룩거리는 이훈은 기가 팍 죽어있었다. 모아둔 영혼을 상실하며 굉장히 우울해진 모양이다. 마치 근손실을 실시간으로 느낀 헬창 같은 분위기였다. 혹여나 우울증이 심각해지면 안될텐데..

“그러고 보니...”

오늘은 문근오가 첫 번째 종교 집회를 열기로 한 날인데 스포츠 센터 습격한다고 신경을 못써줬다. 뭐, 데마고그의 스킬들을 봤을 때 선동 하나 만큼은 일품일 테니 알아서 잘했을 거로 생각한다.

“그럼 이제...”

먼저 씻으러간 내 여자들이 모여 있을 3층 여자 화장실로 갔다. 희선 누나가운디네를 2마리나 소환해서거의 24시간 내내 물을 모아둔 덕에 우리가 여유롭게 씻을 정도의 물은 보유 중이다.

참고로 희선 누나는 계약 가능한 하급 정령 3마리를 운디네 2마리와 샐러맨더 1마리로 채웠다. 나도 샐러맨더를 불러낼 수 있지만 내가 나가 있는 동안엔 쓸 수 없으니 누나도 계약했단다.

특히 이번 주엔 내가 없었던 시간이 많으니까. 앞으로도 내가 암시장이나 어디 나가있을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가만 보면.. 암시장에서 돌아오고 꿈의 세계에 다녀오고.. 거기다 스포츠 센터 놈들이랑 싸우고...’

며칠 사이에 이 많은 일들이 전부 다 일어났다. 어쩐지 오늘따라 더럽게 피곤하더니 이유가 있었다. 단순히 과도할 정도로 일을 많이 해서 그런 거였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기가... 이렇게 힘들다..’

좆소 다닐 적엔 매일 매일이 엿같긴 해도 거의 똑같은 일상이라 일주일이 금방금방 지났는데. 이젠 일주일이 무슨 한 달 같은 느낌이다. 보내는 시간의 밀도가 다르다. 밀도가.

하루하루가 너무 다양한 좆같음으로 꽉꽉 채워져 있으니 쳇바퀴 굴러가듯 흘러가는 일상과는 체감 시간부터가 달랐다. 매일 매일이 비일상이라 너무 힘들다.

“오빠. 빨리 와. 물 받아 뒀엉.”

“오.. 다들 벌써 들어가 있네?”

“그래. 빨리 씻고 들어와라, 주인. 조금 비좁지만. 그래도 따뜻해서 기분이 좋군.”

“준아. 누나가 등 좀 밀어줄까?”

“오. 좋지.”

화장실엔 간이 욕조가 우리 인원수대로 갖춰져 있었다. 우리가 없는 동안 비 각성자 아저씨들이 3층 여자 화장실의 칸막이와 변기를 싹 철거하고 간이욕조를 몇 개 들여 둔 상태였다.

참고로 3층 여자 화장실은 우리 아홉 명만 사용하기로 미리 고지를 해 둬서 다른 노예들은 오지 못한다.

난 간이 욕조에 들어가 몸을 녹이기 전에 일단 샤워하고 몸에 묻은 피를 씻어냈다. 희선 누나가 가슴을 밀착해 등을 밀어 줘서 피로가 좀 풀리는 기분이었다.

“하...”

욕조에 들어가 있으니 절로 한숨이 흘러나온다.

난 몸을 녹이며 생각했다. 하린이와의 대화를 그녀들에게 전부 말해주고 노예낙인을 지울지 말지에 대해서.

‘아람이가 과연... 내가 한태양을 죽였단 사실을 아름이에게 말하지 않아줄까? 그걸 모르겠어.’

아람이가 그 사실을 아름이에게 말한다면, 우리 사이는 굉장히 어색해질 거다.

한태양과 아름이는 나름 친했던 것 같으니. 만약 아름이가 내가 한태양을 죽였단 걸 알게 되면.. 어쩌면 나를 버리고 도망갈 지도 모른다. 아람이는 동생을 따라 갈지도 모르고.

‘그건... 싫어..’

은지나 희선 누나가 나를 떠날 것 같진 않다. 화영이는 사실상 노예 낙인보다 상위에 있는 음문이 새겨진 상태라 노예낙인이고 뭐고 의미가 없이 나에게 완전 종속된 상태라 믿을 수 있고. 예원이는 아마 나를 떠나지 않을 거다. 메르야 당연히 내 편이고.

‘역시 문제는 아름이와 아람이야...’

많은 고민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넌지시 물어보기로 했다.

“얘들아.”

“응. 준아.”

“듣고 있어요, 오빠.”

“주인.. 궁금하니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을 이어다오.”

“아, 응. 저기 그게 말이지. 사실 하린이가 이제부터 노예낙인을 못 찍는데.”

내가 그 사실을 말하자 은지가 화들짝 놀라며 간이욕조에 들어가 귀를 쫑긋거리던 하린이를 쳐다 봤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럼 지금 하린이만 낙인이 안 찍힌 상태예요?”

“어.. 그게..”

“은지 언니.. 그렇게 됐어.”

“허어..”

그런데 은지가 갑자스레 굉장히 안타까운 눈초리로 하린이를 쳐다 봤다.

저 눈빛은 뭐지? 마치.. 동정의 눈빛 같다.

“하린아... 그럼 이제... 오빠랑 질퍽한 질싸 섹스 못하겠네?”

“어?”

당황한 하린이.

그 모습을 보는 은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뭘까. 저 이겼다는 표정은.

그건 마치 귀와 꼬리를 달고 돌아와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하린이를 꾹 밟아줬다는 승자의 미소였다.

자라나는 새싹을, 성장 중이던 정실후보를 제거한... 진성 암컷의 미소.

“어, 언니 잠깐만. 아니, 주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요? 아니, 무슨 소리예요?”

하린이가 당황해하며 나에게 묻자 이번엔 좁은 간이욕조에 억지로 들어간 덕에 다리를 밖으로 내밀고 있던 190 장신의 메르가 살짝 웃으며 답했다.

“그야 하린양. 노예만 주인에 의해 불임, 가임을 조절 받을 수 있잖나. 이제 하린양은 주인의 노예가 아니니... 피임방법을 강구해야겠군. 고생이겠어.”

“어...? 어? 어어..?”

하린이가 고장나버렸다. 미쳐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 노예.. 노예만 생식 기능을 온 오프 할 수 있으니.. 이제 하린이랑 질내사정 섹스를 하려면 피임약을 구해야만 해. 아니면 내가 콘돔을 끼던지. 젠장.’

피임약은 사후 피임약이 아니라 경구 피임약이었던가? 아무튼 약국을 털면 나오기야 나오겠지만... 구해 둔 약이 다 떨어지거나 약의 유통기한이 다 지나면... 그땐 어떡하지?

이제 약을 만들 공장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데...

“저, 저기... 경구 피임약 먹어 본 사람 있어요? 나 그거 한 번도 안 먹어 봐서.. 어떡해해야 할지.. 날짜 계산도 해야 하죠? 아.. 어떡하지..”

생각지도 못한 난제에 당황해하는 하린이. 그녀의 구슬픈 물음에 유부녀 출신인 희선 누나가 손을 살짝 들었다.

“나 먹어봐서 먹는 방법은 알아. 하린아 너무 걱정하지마. 괜찮을 거야.”

“아.. 희선 언니..”

희선 누나가 당황해 횡설수설 중인 하린이를 달래줬다.

'믿음이고 나발이고.. 질싸섹스를 못하게 된다니. 그럴순 없지. 노예낙인은 계속 유지돼야해...'

임신은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맹점이었다. 노예낙인을 찍을 수 없을 경우 피임관련으로 골치가 아파지겠구나.

“저, 저기.. 혹시 이중에 노예 낙인 지우고 싶은 사람?”

나는 우중충한 분위기 속에 기습질문을 날렸다.

“싫어요.”

예원이 즉답.

“나도.”

따뜻한 물에 잠겨 반쯤 녹아 있던 아람이도 싫단다. 아름이는 그냥 눈치만 살피고 있고... 희선 누나도 싫다고 얼른 고개를 도리질 쳤다.

“오빠랑 질싸섹스 하려면 계속 노예인편이 더 좋아. 하린아.. 어떡하니..”

은지는 여전히 하린이를 놀리는 중이다.

“음... 이런 상황 속에서 임신은.. 조금 벅차군. 안정적인 기반을 좀 더 잡으면 모를까. 그래, 어디 목 좋은 곳에 집이라도 한 채 짓고 살 때쯤이면 임신해도 되겠어. 출산은 내가 도울 수 있으니 다들 걱정 마라.”

메르는 임신은 좀 더 나중이 좋겠다며 밝은 미래를 그렸다. 심지어 그녀는 산파술을 익히고 있다고 했다. 임산부와 태아를 다루는 기술 말이다. 그녀는 전직 천사라 그런지 별걸 다 익히고 있었다. 너무 유용하다.

“헤헤... 그보다 다들 고생이네. 음문 새기면 편한데. 음문이 생기면 본인 의사로 불임가임 정할 수 있는 거. 다들 몰랐죠?”

그런 와중 화영이가 욕조에서 일어서더니 아랫배에 새겨진 음문을 살살 쓰다듬으며 은근히 모두에게 자랑했다. 그러자 메르가 헛기침하며 눈을 살짝 감는다. 부러운 거겠지...

그런데 음문에 그런 기능이 있는 줄은 나도 몰랐다. 그냥 하루하루 무지성으로 화영이에게 질싸 중이었는데. 화영이가 혼자서 이미 관리 중이었구나...

“화영아 진짜야?”

“네에~ 오빠도 몰랐죠? 저한테 신경 좀 더 써 줘요!”

“아.. 미안. 미안 해.”

아무튼, 그런 대화가 오고 갔다. 다들 피임약이나 콘돔을 써야 할 경우를 떠올리자 노예낙인이 지워지는 걸 반대했다.

어차피 내가 나쁘게 대하지도 않고 오히려 잘해주는 마당에 노예낙인의 존재 자체가 그녀들에겐 그다지 큰 제약으로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름이는 다들 노예 낙인을 지우지 않길 원하자 혼자서 눈치만 살폈다. 그러다 자꾸 야한 이야기가 오고 가니 얼굴이 뻘게져 욕조에 잠수해 버렸다.

“그런데 준아..”

“응. 누나.”

“피임약.. 내 기억 상으로 유통기한이 제조일로부터 2년 정도인가 그럴걸..?”

“그럼 2년 지나면.. 약효가 다 사라지는 건가?”

“그건 아닐 테지만.. 역시 유통기한 지나면 조금 불안 하지?”

“하...”

정말 얼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피임약이 다 떨어지기 전에 아포칼립스가 다운로드 되는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생존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서 아이를 낳아도 될 만한 여건을 충족시키던지. 아니면 뭔가 다른 수를 구하던지.

‘악신님들은 뭔가 알지 않을까? 악신이라도.. 그래도 신이니까...’

당장 물어 봤다.

[음? 임신? 임신이라..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냐. 내가 인간으로 보이나?]

‘아.. 죄송..’

[죄송할 시간에 공양이나 더 해라.]

카쉬낙스는 자신한테 그런 걸 왜 묻느냐고 화를 냈다. 신의 분노란 살이 떨릴 정도로 두려운 법이기에 얼른 사과했다.

그다음으로 인디크론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나 혼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살짝 눈을 질끈 감고서.

[흐음.. 글쎄. 난 분열밖에 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군. 그런 의미로 키시리아도 나의 일부였지.]

인디크론은 자가 분열로 새끼를 친다고 했다. 혼자서 증식 중인 그녀였다.

‘그, 그럼 설마 칠흑바퀴도... 인디크론님의 자식인...’

[그놈은 원래 인간이었다. 심연을 너무 깊게 들여다본 결과. 여기로 굴러떨어진 인간. 본명이 아퀴나스였나? 그랬을거다.]

‘예? 칠흑바퀴가... 인간이었다고요?’

그러고 보니 칠흑바퀴와 계약할 때 설명 문구에 ‘심연에 굴러떨어진’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던 것 같다. 그럼 그 문구가 진짜 심연에 빠졌다는 의미였구나.

[그래. 그래서 코스트가 낮은 녀석치곤 상당히 똑똑하지. 인간이었으니까. 그리고 만남을 알선해준 것이 바로 나다. 잘 쓰고 있는 모양인데. 늘 감사히 여기도록해라.]

처음 칠흑바퀴를 만날 수 있었던 게 인디크론 덕이었다니... 칠흑바퀴는 내가 가진 패 중에서 가장 유용한 편에 속한다. 요즘엔 무슨 일이 생기면 일단 무작정 칠흑바퀴부터 꺼내고 보니까.

‘허어... 감사합니다. 인디크론님..’

[뭘, 이 정도로. 그보다 촉수 녀석의 말에 너무 상처받지 말거라. 그 녀석은 지난날의 습격 이후 항시 너를 관측하려는 선신들의 눈을 막고 있으니.]

지난날의 습격. 그러니까 성기사 이한석을 필두로 한 선신의 종자들이 나를 죽이러 마트를 습격했을 때, 그때를 말하는 거겠지.

‘그때 질서신이 나를 죽이기 위해 목사의 몸에 직접 현현까지 했다.’

정의봉에 대가리가 깨져 죽기 직전에 나를 구해 준 게 카쉬낙스였고. 그때 그녀의 촉수가 온몸에 휘감겨들며 느꼈던 따스함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생전 느껴보지 못한 부모의 품과 같았지.

그리 생각하니 카쉬낙스에게 조금 마음 상할 뻔했던 게 싹 사라졌다.

[그리고 방금 전부터 너를 보려는 시도가 더욱 커졌다. 이젠 심지어 만귀전의 개입까지 시작됐어. 아마 그 늑대의 딸 때문인 것 같구나. 만귀전 소속이 둘이나 컬티스트의 밑에 있으니. 열불이 터지는 거겠지.]

‘아...’

드루이드인 희선 누나에이어 하린이까지 만귀전 소속의 신과 관련된 클래스가 됐으니까 나에 대한 관심도가 엄청 높아진 모양이다.

‘카쉬낙스님.. 툴툴거려도 역시 뒤에서 나를 위해 여러 가지 서포터를 하고 있었구나.’

카쉬낙스가 왜 맨날 나에게 공양을 하라고 재촉하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선신들의 눈을 가리고 있었어... 거기다 이젠 만귀전까지..’

조만간 젊은 놈으로 하나 바쳐야겠다. 카쉬낙스는 젊고 신선한 인간을 좋아하니까.

그때 보타밀리가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이봐 컬티스트.]

‘아.. 보타밀리님..’

[피임.. 그거 보부상에게 물어봐.]

[길을 제시해 줄 거야. 그들은 현인들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보부상에게 피임에 대해 물어보라고..?

‘맞아. 뭐든 파는 족속들이니. 해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이후 우린 좀 더 탕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당장은 방법이 없으니 고민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보부상과 만나보라는 조언을 얻었으니. 보부상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봐야겠지.

그리고 몇 시간 후면 12시가 지나 월요일이 시작된다. 슬슬 옥상에서 준비를 해야 했다. 밤을 새야할지도 모르니까 저녁도 든든히 먹어둬야 하고.

'초커도 없앴고.. 정확히는 듀라한으로 만든 거지만 아무튼 이번엔 우리 쪽으로 좀비들이 습격이 안 와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우리들은 옥상에 진을 치고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업데이트가 시작되길 기다리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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