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115. 신사에 봉인 된 것
* * *
잠시 누워 있었더니 곧 몸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다.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분명 빛나는 거인이 나를 죽이려 했던 것 같은데 에이낙스가 막아준 건가.’
기억이 흐릿해서 꿈인지 생신지 구분이 잘 안 가지만 분명 자신을 선신이라 소개하며 나를 죽이려고 망치 같은 걸 휘두르던 놈을 얼핏 본 것 같다. 그런데 상처 하나 없는걸 보면 에이낙스가 물리쳤든지 막아준 모양이었다.
더구나 몸도 묘하게 개운하다. 마치 온천에서 몸을 녹인 것처럼 피로가 풀려 있었다. 피부도 좀 좋아진 것 같고.
‘키시리아를 불러냈을 때는 반나절은 잠만 잤던 거 같은데...’
내 체력이 좋아진 건지 아니면 에이낙스가 소환 해제되며 뭔가 수를 쓴 건지 잘 모르겠다. 아마 둘 다 아닐까 싶은데...
그동안 뭘 많이 주워 먹어서 몸이 튼튼해졌기도하고 에이낙스가 소환 해제되며 나에게 뭔가 수를 쓰고 간 흔적도 남아 있었으니 쉽사리 짐작해볼 수 있었다.
‘온몸에 끈적끈적한 게 묻어 있던 걸로 봐선...’
지난번에 계약했을 때도 찢어졌건 고막을 점액질로 치료해줬었다. 이번에도 그때 그 점액질을 이용해 내 몸을 치유하고 떠난 모양이었다.
‘이 점액질이 무슨 성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나쁜 건 아닌 것 같아. 문제는 내 컨트롤을 자꾸 벗어난 행동을 하는 소환수란 점이야...’
지난번 계약 때도 그렇고 이번에 강제소환 건도 그렇고. 에이낙스는 자꾸 나의 명령범위 밖에서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있다. 그나마 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 명령을 듣지 않는 건 조금 짜증 나는 일이다.
‘불러내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기어 나오면... 상당히 곤란해. 한번 끄집어내는 데 소모되는 마나도 장난 아니고...’
그때 문득 일개 소환수가 이런 만행이 가능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강력한 소환수라고 해도 결국은 시스템의 제한을 받게 된다. 허나 이번에 에이낙스는 그런 제한을 뛰어 넘어 행동했다.
‘느껴지던 기운도... 카쉬낙스의 거였어. 에이낙스란 존재의 탈을 쓰고서 카쉬낙스가 튀어나온 게 분명해...’
분명 에이낙스는 카쉬낙스의 일부분이라고 했다. 그럼 결국 카쉬낙스 본인이 소환수의 몸을 빌려 현실에 개입한 게 아닐까.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이렇게 마구잡이로 행동해도 되나?’
분명 지난번 선신의 종자들이 마트를 습격했을 때 질서신이 죽어 가던 목사놈의 몸을 빌려 현현한 적이 있었다. 그때 분명히 이런 식으로 현실에 개입하면 엄청난 인과율 소모와 페널티가 주어진다고 했다.
고로 이번 일로 카쉬낙스는 상당한 인과율의 역풍을 맞았을 가능성이 크다. 비축해 둔 힘을 꽤 소진했으리라. 그동안 대부분의 인간을 카쉬낙스에게 몰아주긴 했지만...
‘카쉬낙스가 후폭풍을 맞고 있다면 그에 따른 반동이 나에게도 올 가능성이 크다.’
카쉬낙스는 나를 관측하려는 모든 선신들과 일부 고대신들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덕분에 그동안 선신들과 관련해선 별문제없이 잘 보내 왔다. 더 이상의 만신전 쪽에서의 습격도 없었고.
차라리 좀비들이 더 위험하다면 위험했지 플레이어들의 암살 시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카쉬낙스의 눈가림이 사라지고 선신들이 나를 대놓고 보기 시작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알 수 없다.
‘거기다 만귀전의 세계수와 몇몇 고대신들도 대놓고 나에게 적개심을 드러낸 상황이고. 제발 별문제 안 생겼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그 정도의 페널티를 감수하고서 얻고자 했던 게 뭘까. 도대체 뭘 얻고자 현실에 직접 강림했는지 모르겠다.
선신들의 하수인들이 숫자가 좀 많긴 했어도 사실 키시리아 선에서 다 죽일 수 있을 놈들이었다. 악마화한 중국인 놈도 내가 부유석 목걸이와 불완전한 피막으로 비행해서 잡을 수 있는 놈이었고.
신이 편법까지 써가며 기어 나올 상황이 아니었단 말이지. 어쩌면 단순히 나를 직접 만나고 싶어서 나온 걸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만마의 총애가 있다고 해도 그게 신이 나에게 집착할 정도의 성능이 있는 스킬이었나...?
그때 인디크론이 굉장히 피곤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스킬 때문만이 아니야.]
‘예..?’
[카쉬낙스는 이렇게까지 깊게 자신과 관계를 맺은 하수인을 갖는 게 처음이다. 그러니 깊은 관심을 가지는 거다. 더구나 네가 먼저 좋다고 기둥을 선물하지 않았나.]
‘아니.. 그건 그냥..’
[별 뜻이 없었다는 건 알고 있다. 그저 호감을 얻어 볼 생각이었겠지. 허나 상대가 나빴어. 인간의 인식에 맞추어 설명하자면... 흐음.. 그래, 너는 억겁의 시간 동안 모두에게 거부만 받던 방구석 폐인에게 연애편지를 보낸 거야. 그것도 당장 결혼하자는 식의 내용이 담긴.]
‘어....’
[내가 말하기도 뭐한 이야기다만. 우리를 대할 땐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 지금, 이렇게 너와 ‘인간답게’ 대화하고 있으나. 이게 내 본질은 아니야. 그저 너라는 인간에게 내가 규격을 맞춰주고 있을 뿐이다. 우린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고차원적이고 어지러운 존재들이지. 너의 별의미도 없는 행동이 우리에건 큰 의미일수도 있고. 우리의 자그마한 배려나 관심이 너희에겐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그 점을 명심해라.]
‘예...’
[특히나!! 그 음침한 촉수 덩어리는 굉장히 소심하고 음탕한구석이 있어. 인간들을 숱하게 집어삼킨 주제에..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 않으니 인간에 대해서도 잘 몰라. 하아... 네가 고생하는 수밖에 없다. 어수룩한 부모를 뒀다고 생각하며 버티는 수밖엔. 정 힘들면 나에게 의지해라. 나는 인간에 대해 해박하니까.]
곧 인디크론은 할 일이 많다며 다시 멀어졌다.
그런데 그녀가 인간에 대해 해박하다고 말하는 건 아마 절망하는 인간의 감정을 음미하며 먹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을 애정하기에 잘 안다는 것보다는 미식가로서 음식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두렵고 부담스럽긴 매한 가지다.
‘어찌되었든 카쉬낙스는 나에게 큰 호감이 있다는 의미군... 그런데 분명 떠나기 전에 확실히 받아 간다고 했는데. 뭘 받아 간걸까... 설마..’
카쉬낙스가 나에게서 받아 간 것. 그건 내 정액뿐이다.
그녀는 나를 실컷 착정한 뒤에 만족스럽다는 목소리로 확실히 받아 간다고 말했다.
‘그럼 진짜.. 그냥 내가 좋아서 정액을 받으러 온 거였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정황상 이게 맞다. 그렇다면 그녀는 내 정액으로 뭘 할 생각인 거지.. 설마..
‘임신...?’
악신이.. 내 아이를 가진다고?
이걸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쾌락 없는 책임.. 이라기엔 너무 기분이 좋았다.
‘솔직히.. 이때까지 경험했던 모든 섹스를 통틀어.. 단연코 최고였어.’
심지어 그대로 그냥 잡아 먹혀도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가시지 않을 정도로 극상의 쾌락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나는 그 착정의 여운에 잠겨 있다.
생명 활동의 모든 부분을 정자생산과 정액사정에 몰빵당한 채로 서서히 말라비틀어져 죽어 가던 그 느낌은... 화영이에게 흡혈 당하며 박아 넣을 때보다, 희선 누나의 냄새에 취해 허리를 흔들 때보다 더 굉장했다.
흡혈섹스와 아로마섹스를 넘어선 무지성 착즙의 쾌락.
‘생명과 쾌락의 등가교환... 미치겠군... 중독될까 두렵다.’
또 슬그머니 고간이 자기주장을 시작했다.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지만 죽음보다 값진 쾌락을 맛본 이상 이 흥분을 잠재울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
‘잊자. 다 잊는 거야.’
그리 속으로 애국가를 재창하며 명상을 하고 있자 하린이가 나에게 다가와 생글생글 웃으며 백허그 했다. 하린이의 가슴이 등에 닿는 게 느껴진다.
조금 전 전신이 성감대로 변했었던 나에겐 상당히 큰 자극이었다. 허나 나는 꾹 참았다. 곧 있으면 신사를 공략하고 집에 돌아갈 수 있으니까. 오늘 잘 해결하면 금요일이나 토요일쯤에는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조금만 더 참자...
“주군, 저쪽에 다 모아 뒀어. 생존자는 다섯 명 정도?”
“응. 잘했어.”
여기저기 반쯤 망가져 있던 선신의 종자들을 한 곳에 끌고 오라고 명령해 둔 상태였다. 거의 서른 명에 가까운 놈들이었지만 목숨이 붙어 있는 놈들은 다섯 명뿐이었다.
다섯 명 전부 일본인이라 의사소통에 무리가 있었지만 은지와 호타루가 옆에서 통역을 해준 덕에 그들을 원만히 노예로 만들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에이낙스를 목도한 뒤 모든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선신이고 악신이고 이제 모르겠다며 제발 그냥 살려달라고 빌기에 전원 이마에 지장을 꾹 눌러줬다.
‘직업들이 제법 좋네.’
살아남은 다섯 명의 일본인들을 간략히 알아보자면, 우선 맨 처음 나를 향해 십자가를 휘두른 일본 만화 주인공스러운 생김새의 미남자인 하야토와 그놈의 비서인지 여자 친구인지 모를 안경 낀 여자인 히토미 그리고 홀쭉이인 겐, 뚱뚱한 하쿠보, 기가 쌔 보이는 단발머리 여자 린이 있었다.
놈들 중 근접전투 전문은 하야토와 린이었다. 하야토는 이단 심문관인 인퀴지터로, 데몬 슬레이어의 만신전버전 같은 직업이었다. 린은 템플러였는데 공격 속도가 빨라서 치고 빠지기 전문인 클래스였다. 섀도워커인 은지와 소드댄서인 아름이를 반반 섞은 느낌이다.
그리고 하쿠보와 겐은 둘 다 프리스트로 서양버전 음양사 같은 직업이었는데. 웃긴 건 두 놈이 서로 스킬 셋을 완전히 반대로 찍었단 점이다. 홀쭉이인 겐은 봉인과 디버프 중심으로 상대를 농락하는 스킬을 골랐고 뚱땡이 하쿠보는 결계와 버프 중심으로 진영을 구축하고 버티는 스킬셋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히토미는 치유술사인 클레릭이었다. 치유술사... 차오르는 살점의 라이벌이 등장했다.
“그런데 얘네 뭐 하다 이렇게 다친 거지?”
“자기 손으로 긁었다던데요?”
“허...”
나는 히토미의 치유술이 차오르는 살점보다 성능이 좋은지 잠시 구경해 보기 위해 히토미에게 동료들의 상처를 치유시켜 보라고 말했다.
그러자 히토미는 마력이 부족하다며 치유가 불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보석상에게 구입했던 창성의 목걸이를 벗어서 그녀에게 씌워줬다.
창성의 목걸이는 마력 스탯을 100이나 높여주는 대신 신체 능력과 관련된 스탯을 30정도 낮추는 물건이라 그런지 히토미는 목걸이를 착용하자마자 급격히 피곤해했다.
나야 원체 깡 스탯이 높아서 착용하나 벗으나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당장 쓰러져 잠들고 싶어 했던 히토미는 눈에 띌 정도로 힘들어했다.
“엄살 피우지 말고 빨리 움직여.”
“크읏...!”
내가 내린 강압적인 명령에 히토미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하야토의 앞에 서더니 그의 머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곧 그녀가 뭐라 일본어로 주문을 외자 손에서 녹색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하야토의 찢긴 피부를 치유했다.
‘이게 차오르는 살점보다 성능이 좋을까..?’
나는 통역으로 은지를 중간에 두고서 그녀에게 스킬에 대해서 물었다. 듣자 하니 그녀의 치유 스킬은 세부적으로 나눠져 있다고 한다.
나는 그냥 무작정 스킬을 사용하면 잘려 나간 신체 부위도 붙일 수 있는 스킬이었지만 그녀는 외상, 내상, 질병, 정화 등등 치유범위가 다양하게 세분화되어 나눠져 있다고 했다.
솔직히 막 쓰기엔 내 쪽이 더 마력소모도 적고 효율이 높다. 비록 치료받는 이들이 아파서 죽으려고 하긴 하지만.
그런데 아쉽게도 차오르는 살점은 질병 치료나 완전히 소실된 신체 부위의 재생 같은 경우는 불가능하므로 다채롭게 사람을 고칠 수 있다는 점에선 클레릭이 확실히 더 유용했다.
그래도 그녀는 내 차오르는 살점처럼 다른 사람이나 생물의 신체 부위를 절단 부위에 접목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스포츠 센터를 털 때 이찬성을 상대로 실험했던 것들 말이다. 가령 손목을 잘라 발목에 붙이고, 발목을 잘라 손목에 붙이는 행위라거나. 다른 사람의 팔을 뜯어 이식시키는 행위가 가능하냐고 묻자 히토미는 나를 미친놈 보듯이 쳐다 봤다.
“호타루, 악마 시체는 찾았냐?”
“저기에 이써스므니다.”
“주물 잘 챙겨 왔지?”
“하이. 요기. ???です. (청동거울입니다.)”
“좋아. 다 모였구나.”
하야토가 넘겨 준 청동 검과 호타루가 악마빙의자의 시체에서 파밍해온 청동거울. 거기다 내가 가진 곡옥까지. 삼신기가 전부 모였다.
우린 신사의 공터에서 간단히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며 만전의 준비를 했다.
곧 우리는 삼신기를 들고서 신사의 입구로 갔다. 그러자 신사의 입구에 걸려 있던 쇠사슬이 일제히 풀리며 3미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아무리 열려고 해도 결코 열리지 않았던 신사의 입구는 삼신기를 가져다 대자 단박에 열렸다.
“윽.. 썩은 내..”
“하린아 힘들면 빠져 있어도 돼.”
“괘, 괜찬아여.. 우욱...”
문이 열리자 건물 안에 고여 있던 낡고 오래된 공기가 외부로 방출됐다. 우리 중에서 후각이 가장 뛰어난 하린이는 코를 붙잡고서 인상 썼다.
신사 내부에선 나무뿌리의 냄새가 가득 났다. 뭐라 말로 형용하기엔 너무나 역겨운 냄새에 일행들 전원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어.. 준아. 저기 저거. 신의 우상 같은데.. 그치?”
“어.. 누나. 맞는 것 같아.”
무녀인 나나세 소라가 빛을 밝히자 신사의 중심에 놓여 있는 자그마한 토템이 보였다.
그건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부처의 모습 같았다. 저게 신의 우상이겠지. 아마 저걸 가져가려고 하는 순간 신사에 봉인된 것과 전투를 치르게 되지 않을까?
“일단.. 다들 입구 근처에 서서 대기. 촉수로 가져올게.”
난 굳이 저걸 가지러 신사 안까지 깊이 들어가기 싫었다. 그래서 촉수를 뻗어 신의 우상만 쏙 빼서 도망칠 생각으로 스킬을 사용했다.
그때, 신사의 저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존재가 팔을 뻗어 우상을 가로채곤 나의 촉수를 붙잡더니 입을 열었다.
“이런!!”
[순순히 가져갈 수 있을 거라 여겼나.]
중후한 압박이 느껴지는 중성적인 목소리가 신사 안에 울려 퍼졌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저 목소리 만으로 압도됐겠지만 우린 반나절 전에 우주적인 공포를 목도한 사람들이다.
목소리를 깔아봤자 우리에겐 씨알도 안 먹히는 위협이란 소리지.
“그냥 순순히 내놓는 게 좋을 텐데.”
난 키시리아라도 불러낼 생각으로 마력을 끌어올리며 놈에게 말했다.
저놈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이 숲은 15레벨 기준의 던전이다. 이때까지 숲의 짐승들이나 괴이들을 잡아 죽여 본 결과 15레벨 각성자들이 다섯 명 이상 뭉칠 수만 있다면 충분히 죽일 수 있을 만한 놈들 뿐이었다.
고로 이놈도 플레이어 수준에 맞는 적이겠지. 아니면 약화된 상태거나. 어쨌든 키시리아 급의 정신 나간 괴물은 아닐 확률이 높다.
[지, 진정해라. 나도 너 같은 이상한 인간과 싸울 생각은 없다. 다만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을 뿐.]
“무슨 제안. 들어나 보자. 좆 같은 제안이면 바로 전투다.”
[거참... 저돌적이군.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소리겠지. 하긴, 악신의 관심을 받는 인간이니 기고만장 할 법도 하지.]
“말 끌어서 시간 벌지 마라.”
[알겠다! 후우.. 어쩌다 내 신세가 이리된 건지 모르겠군.]
놈은 신세 한탄을 하더니 한숨을 푹 쉬곤 다시 입을 열었다.
[나의 제안은 별거 아니다. 나를 이곳에서 꺼내줬으면 좋겠다.]
“꺼내달라니? 봉인을 풀어달라는 말인가?”
[아니. 그게 아니야. 단순히 봉인이 풀리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이 숲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게 무슨 소리야.”
[봉인이 풀려도 나는 이 숲에선 빠져나갈 수 없다. 하지만... 너희들 중 하나가 나를 받아들인다면.. 나는 이 지독하게 답답한 숲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 받아들인다고?”
놈은 굉장히 권태로운 목소리로 나에게 재차 부탁했다.
[너는 일반적인 플레이어가 아니지 않나. 너에게선 나와 동류의 냄새가 난다. 인간을 제물 삼아 살아가는 그런 천박한 말종의 냄새가... 허나 식인의 흔적은 없으니. 넌 악신의 종복이겠지?]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놈의 불그스름한 눈동자가 번뜩였다. 놈은 나를 관찰했다. 또한 내 뒤에 있을 존재들을 확인했고 미소지었다.
[부탁한다, 만마의 총애를 받는 이여. 너희들 중 누군가 나를 받아들여 주면 좋겠다. 그저 신사에 묶인 봉인을 인간의 몸으로 옮기는 거다. 큰 힘을 얻게 될거야. 부탁하지.]
난 간절하게 부탁하는 놈의 말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봉인을 옮긴다니. 무슨 구미를 뱃속에 품은 나루토도 아니고. 배에 봉인을 새기기라도 해야 한다는 소린가?
이거 영 껄끄러워서 그냥 죽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자 곧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신사에 봉인된 오니, ‘치히로’와 계약할 수 있습니다.]
[계약을 원할 경우 오니의 제안을 받아들이십시오.]
[치히로를 품을 경우 클래스가 변화합니다.]
[진영이 만마전으로 바뀌게 됩니다.]
"오빠. 저... 제가 하고 싶어요..!"
은지도 같은 알림을 봤는지 손을 번쩍 들었다.
"굳이..? 너도 충분히 강하잖아, 은지야."
"저도... 저도.. 음문... 새기고 싶단 말이예요. 만마전 소속 되고 싶어요..."
"아..."
난 은지의 간절한 바람을 이뤄줄 수 밖에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