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128. 거주지 이전
* * *
“일단 어... 그림자를 거니는 요마부터 정해야겠다.”
“그냥 다 주면 좋을 텐데. 그쵸?”
“내 말이. 그냥 다 주던지. 아니면 선택지를 주질 말지. 왜 사람 고민하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어.”
“그러게요. 비슷하게 좋은 선택지가 주어지니까 더 미칠 것 같아요...”
만약 이게 그냥 게임이라면 몰라도 이건 현실이다. 선택지가 주어지는 순간 뒤에 가서 후회할 일이 생기게 되는 거다.
'그때 이걸 골랐더라면' 혹은 '그때 이 물건을 선택했더라면' 이라는 후회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고 죽으면 그대로 끝이니까. 죽어도 다시 원점에서 부활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로그라이크 게임이 아니니까 선택 하나 하나에 집중하고 신중해질 수 밖에 없다.
“젠장. 고리.. 차륜.. 귀갑.. 뭐가 좋을까.”
각각 장르를 따지자면 장신구와 무기, 방어구다.
장신구인 부기맨의 고리는 원래 은지가 가진 은신 능력을 더욱 극대화해준다. 암살자 플레이에 용이하며 그림자만 있다면 어디서든 존재를 감출 수 있게 된다.
심지어 주변에 있는 인간들에게 환청을 들리게 만들어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환청의 대상에 우리도 포함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지.”
“그러네요. 확실히 적군이나 아군 구분 없이 ‘인간’이 대상이니까요..”
“이리되면 아군의 피해를 야기할 수도 있어. 특히나 하린이처럼 귀가 좋으면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데... 환청효과에 노출되면 전투 중에 집중력이 떨어지는 일이 일어날 거야.”
“그럼 이건 자동 탈락이네요.”
“그렇지...”
물론 실물을 보고 직접 써봐야 정확한 효과를 알겠지만.. 그럴 수가 없다. 써 보려고 뽑는 순간 선택완료니까. 사용해보고 결정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이 불친절한 아포칼립스에서 너무 많은 걸 바라면 안된다.
‘간혹 설명보다 더 성능이 좋은 경우도 있지만.. 주어진 힌트가 너무 적으니..’
최대한 추리해서 뽑는 수밖에 없다. 언제나 최고의 선택을 하기 위해서 고민해야한다.
“고리를 제외하면 남은 건 차륜과 귀갑이야.”
“흐음... 중, 장거리에서 전면전으로 싸울 생각이라면 차륜이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귀갑도 방어구라 좋네여.”
“그렇지. 차륜은 던지면 알아서 되돌아오는 물건이니까 좋고. 귀갑은 잘 안나오는 방어구니까 좋지...”
그런데 순수 무기라고 하기엔 와뉴도의 차륜도 어느 정도로는 방어구로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정확히는 방패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주인의 곁을 맴돈다는 말이 마치 건담의 판넬 같은 물건처럼 느껴졌다. 아마 주인의 곁을 맴돌면서 공격도 가능하고 방패로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허나 커다란 차륜이 떠 있으면 은신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질 거다. 그러니 차륜을 사용하는 동안엔 은신을 버린다고 생각해야 한다.
솔직히 나는 방어구를 입히고 싶다. 방어도 되면서 고리보단 떨어지지만 은신능력도 유지시켜주니까. 하지만 결국 이걸 사용할 사람은 은지니 그녀의 의견을 들어주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쓸 수 있다면 내 의견이 반 정도 들어가겠지만.. 이건 요력을 다루는 은지만 사용 가능하니까.
“저는.. 차륜이 끌려요.”
“그래?”
“네.. 그리고 사실 반쯤 요괴화 되면서.. 은신보다는 전면전이 더 어울리게 변했기도하고.. 저는 이때까지 날붙이로 기습하거나 뭔가를 투척하는 식으로 싸워와서.. 집어 던지는 편이 더 좋겠다는게 제 생각이에요. 그림자 씌우면 조종도 가능하고..”
하긴 새도한냐로 클래스가 진화하며 함께 변한 스킬들은 이전처럼 은신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되게끔 바뀌었다. 요괴를 몸에 품은 덕인지 스탯도 하린이나 아람이 같은 다른 이종족 클래스들처럼 크게 올랐고.
그런데 은지가 더 이상 닌자 플레이를 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 나는 조금 시원섭섭했다. 전투 상황이 되면 어느샌가 사라져 적들의 배후에 나타나 기습을 걸던 은지는 더 이상 못 보게 되는 걸까... 어쩔 수 없지. 성장하는 과정 중에 전투 스타일은 계속 변하게 되는 법이니까. 개인적으로 아쉽지만 은지가 강해졌으니 그건 또 기분이 좋다.
“그럼 그렇게 하자. 어차피 이건 이제 요력을 다루는 은지 전용무기 같은 개념이니까. 네가 끌리는 물건을 쓰는 게 맞아.”
“헤헤.. 고마워요.”
결국 그림자를 거니는 요마의 보상으로 와뉴도의 차륜을 선택했다.
“그럼. 바로 불러볼게요?”
“응.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 구경이나 해 보자고.”
곧 은지는 허공에 차륜을 불러냈다.
후우웅...
차륜의 중심엔 험악한 남성 요괴의 얼굴이 음각되어 있었다. 아마 와뉴도라는 존재와 연관이 있는 형상이겠지. 상당히 못생겼다.. 절 입구에 새워진 사천왕 조각상의 얼굴 같은 느낌이다.
“진짜 둥둥 떠 있네요.”
“그러게.. 잠깐만. 은지야 가만히 있어봐.”
"네?"
나는 옥상에 굴러다니던 작은 콘크리트 조각을 아나 찾아서 은지 쪽으로 툭 던졌다.
깡!
그러자 은지의 주변을 맴돌고 있던 와뉴도가 곧바로 반응해 돌멩이를 막아 냈다. 심지어 차륜의 중심에 음각된 요괴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며 나를 노려봤다.. 저거 의지가 있는 물건이다. 에고차륜..?
“와아... 성능 죽이네..”
“뽑기 잘했다, 그쵸?”
“그러네. 진짜.. 좀 부럽네.”
차륜은 예상대로 무기 겸 방패로 쓸 수 있는 물건이었다. 집어 던지면 다시 주인의 손으로 돌아오고, 소환해 둔 상태에선 주변을 맴돌며 날아드는 공격을 자동으로 요격하는 기능이었다.
어찌 된 게 내 여자들이 뽑는 보상은 하나같이 나도 하나 갖고 싶은 개쩌는 물건들이 많다. 부럽지만 뺏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그녀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 하는 수밖에.
“요력 소모는 어때?”
“음... 그리 엄청 높지는 않아요. 소환한 상태로 한두 시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본격적으로 전투에 사용하면 유지 시간이 좀 심하게 떨어지겠는데요? 조종한다고 생각하니 요력 소모가 엄청 높아져요.”
“그렇구나.. 하루 온종일 소환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네.”
그나마 한냐의 가면이 부족한 요력을 올려주니 다행이다. 보상이 세 개나 되니까 아이템들끼리 서로 보조해 줘서 좋다.
“자, 다음은...”
반인반요의 업 보상은 지난번 반인반마의 보상과 느낌이 비슷하다. 아람이의 반인반마의 업 보상도 근거리 무기 하나, 각성용 장신구 하나, 원거리 무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근거리 하나, 각성용 목걸이 하나, 원거리 무기 하나다.
이번엔 진짜 앞으로 그녀가 계속 써야할 전용무기들이니까 앞으로 어찌 성장시킬지 정하는 중요한 선택지다.
‘일단 지옥 참마도.. 다 좋아. 다 좋은데 요마가 아닌 이상 검에 자아가 빼앗긴다는게 걸리네...’
중요한 건 이 ‘요마’의 범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냐다. 말 그대로 순수 요괴만을 요마로 취급하는 건지 아니면 반인반요도 요마의 범주에 들어가는 건지 알아야 했다. 판정 범위가 제대로 확실하게 명시되지 않을 경우 잘못 사용했다가 된통 당할지도 모른다.
“아마 반인반요도 포함되는 거 아니까요?”
“그래?”
“네. 그야.. 반인반요의 업 보상이잖아요.. 설마 반인반요가 못 쓰는 물건을 보상으로 주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보상의 의미가 없으니까요.”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네.”
“그리고 오빠. 저 한냐의 가면으로 제 그림자에 봉인된 치히로를 깨울 수 있잖아요.”
“그치. 그럼...”
“치히로는 완전한 오니 그 자체니까.. 지옥 참마도를 자유자재로 쓰지 않을까요?”
“그렇긴 해. 일단 알겠어.”
다음은 천귀의 구슬. 이건 페널티가 진입장벽이 너무 크다. 이성을 잃는 단 사실 만으로 감점 100점이었다.
“이건 이성을 잃을 수 있다는 게 좀...”
“맞아요. 저도 그건 좀 감당하기 어려운 페널티 같아요.”
안 그래도 반인반요가 되며 스탯이 증가해 강해진 상태인데 여기에서 진정한 요마가 되어 미쳐 날뛰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결국 파마의 각궁 아니면 지옥 참마도네.”
“활이랑 검이네요.”
“그런데 은지 언니..”
“응?”
“언니 활 쏠 줄 알아..?”
“어... 태어나서 한 번도 쏴본 적이 없긴 해.”
가만 보니 파마의 각궁은 은지가 쓰기엔 애매했다. 그녀는 생전 활을 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원본 클래스도 활과는 연관이 없는 스킬들이고 은지는 이때까지 도검류나 사슬낫을 주 무기로 사용해 왔다. 지금와서 활을 다시 처음부터 익히라기엔 무리가 있어보였다.
‘심지어 요력을 소모해서 쏘는 활이라.. 딴 사람은 쓸 수도 없고... 요력도 막대히 소모되니.. 한 발 한 발을 필살기로 써야 하는데... 적들이 피하거나 못 맞추면 끝이다...’
선택지가 하나로 좁혀졌다. 지옥 참마도를 고르는 게 제일 이득이다. 자아를 빼앗길 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일단은 반인반요도 요마의 범주에 들어가면 자아를 빼앗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다 안 되면 한냐를 불러낸 상태로만 쓸 수밖에 없겠지만...
‘제발.. 판정이 느슨해서 반인반요도 요마의 범주에 넣어 주기를...’
천귀의 구슬 설명에도 진정한 요마로 만들어 준다고 된 걸 보면.. 반인반요는 불완전하지만 요마긴 요마라는 거니까...
“그럼 이걸로 선택할게..”
“네. 지옥 참마도로. 저도 활보단 검이 더 좋아요.”
결국 우린 오랜 고민 끝에 지옥 참마도를 선택했다. 사실 나는 이 물건의 이름을 읽은 순간부터 이게 끌렸다...
“우와... 엄청.. 멋있게 생겼네요.”
“그러네.. 진짜.. 존나 부럽다.. 나는 왜 이런 전용 무기 없지...?”
외관만 보자면 무슨 가챠게임의 SSSR 등급 아이템이다. 검붉은 검집과 화려한 황금빛 코등이에 손잡이의 그립감도 죽여 준다. 검을 뽑는 순간 자아가 빼앗기는 사양인 건지 검집에 들어있을 때는 내가 만져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일단 가면 써서 치히로 불러낸 다음에 뽑아볼까요?”
“그럴레? 걔랑 대화 가능해?”
“네. 가끔 먼저 말걸 때도 있어요.”
“진짜?”
“네. 대부분 일방적인 질문이긴 한데.. 그래도 적대적인 느낌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아요. 세상을 관찰하거나 아니면 대부분 자는 느낌이죠.”
“허어.. 그럼 어서 불러내보자.”
“네!”
은지는 한냐의 가면을 쓰고서 중얼중얼 그림자 속의 치히로와 대화했다. 옆에서 보고 있는데 정신이 살짝 이상한 사람처럼 보였다.
평소에 내가 악신들과 대화할 때도 아마 저런 광인과 같은 모습이겠지.
“음.. 곧 바뀔거예요. 좀 있다 봐요.. 오빠.”
“응. 조심해.”
“헤헤. 네!”
곧 은지의 의식이 뒤로 물러서고 그 자리에 봉인된 치히로가 나타났다.
두쿵.
“으윽...!”
“오, 오빠아...”
"히에에!!"
순간 옥상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히이로 마저 비명을 지를 정도로 거대한 압박감이 우리를 짓눌렀다.
마치 중력이 2배로 작용하는 느낌이다. 이에 내 옆에서 헬겐에게 마나수유를 하고 있던 예원이가 고통스럽게 인상을 찌푸리며 헬겐을 감추듯 품에 껴안았다. 난 얼른 그런 예원이를 덮듯이 안았다.
“카야!!!”
예원이의 품에 안긴 헬겐 또한 순혈 오니가 내뿜는 위압감에 고함을 지르며 주인인 예원이를 지키기 위해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쳤다. 제발 부탁인데 지금 해츨링 따위는 아무 도움 안되니까 가만히 좀 있었으면 좋겠다.
[흐음... 미안하다..]
“커헉.. 이, 이런 미친...”
곧 치히로가 사과하며 손을 휘휘 휘젓자 일대의 공기를 짓누르던 위압감이 사라졌다.
[오랜만에 바깥공기를 마셨더니... 너무 흥분했군...]
“후우.. 다, 당신..”
[흐음.. 이은지의 몸을 빼앗을까 봐.. 걱정하고 있군.. 걱정 마라.. 나는 그럴 생각이 없어.. 솔직히.. 그림자 속이.. 더 편하거든... 나오면.. 피곤해..]
“아.. 그, 그렇습니까..?”
[하~암.. 응... 그래, 궁금한 건 이 검이겠지.]
“예.. 맞습니다. 설명에 요마만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요마.. 범주가 넓군. 이은지도 사용 가능할 거다. 다만.. 이걸 만든 녀석인데... 비왕의 작품인가.]
“예?”
또 나왔다. 빌어먹을 떡밥용 키워드.
비왕이 언급됐다는 건 조만간 마주치거나 엮인다는 뜻이다.
'용왕을 겨우 피했더니 비왕과 엮이고 말았다...'
나는 행운 666의 컬티스트로 살아오며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결코 마주치면 안 되는 존재나 지나가듯 언급된 존재는 꼭 한 번 이상 마주치게 되더라.
[흐음... 어차피 기원은 비슷하니.. 이상 없겠지.. 그나저나 피곤하군... 그럼 궁금증은 해결 됐을 테니... 난 이만...]
곧 치히로의 인격이 물러나고 암전되어 있던 은지의 의식이 다시 표면으로 올라왔다. 난 아직도 조금 무서워 하고 있는 예원이를 껴안은 채로 은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은지야. 이상 없어? 몸 상태는 좀 어때?”
“이거.. 많이 피곤하네요...”
“그래?”
“네.. 그거 말고는 이상 없어요. 그리고 이거.. 반동을 치히로가 고스란히 다 받는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힘들기 보단.. 치히로가 굉장히 힘들어했어요. 지금도 바로 잠들었고요... 오빠 이거.. 의식 교체하는거.. 어쩌면 몸을 빼앗기는 걸 고민할게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치히로가 나오기 힘들다고 안 나오는 걸 더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허어.. 그건 또 예상 밖의 문제네.”
원래 다른 영화나 뭐 그런 걸 보면... 봉인되어 있던 놈이 기어나오고 싶어서 미치려고 하던데... 치히로는 좀 달랐다.
이놈 이거 진짜 그냥 숲이 답답해서 신사 밖으로 나온 거였다.
“뭐야. 그럼 진짜 그냥 힐링 하려고 나온 거야...?”
“그런 거.. 같네요?”
“허... 욕망 없는 요괴일세..”
다른 야망이나 몸을 차지하겠다는 야욕이 아니라.. 그냥 세상 구경하려고 나온 거였다니. 뭔가 맥빠지는 놈이다.
‘그래도.. 일순간 내뿜은 기운은.. 상당했어..’
주박궁전의 주인인 키시리아 급의 압박감은 아니었지만 저 정도면 충분히 제 몫을 하고도 남을 것 같다. 적어도 필드보스 급은 혼자서 썰어죽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인상이다.
‘다만... 본인이 싸우려는 의지가 거의 전무하니...’
일단 그래도 지옥 참마도를 은지가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그걸로 만족이다. 그리고 몸을 빼앗으려는 놈들보단 그냥 무기력한 녀석이 훨씬 낫다.
“자, 그럼 이제 진짜 쉬어 볼...”
“주인!!!”
그때 메르가 비명을 지르며 옥상으로 올라왔다. 덩달아 심각한 표정의 하진성을 필두로 내 노예들과 하렘멤버들이 죄다 옥상으로 뛰어올라왔다.
“왜!! 다들 무슨 일인데!!”
“뭐? 아니..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어?”
내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뒤따라 올라온 아름이가 말했다.
“방금 뭔가 사악한 기운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다들 올라온 거고. 여기 뭐 없었어요?”
“아..”
나는 모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들은 다들 소름 끼치는 치히로의 음기를 느끼고 반응한 모양이었다.
“뭐, 기왕 다들 모인 김에 중대 발표나 하나 할까 싶은데.”
“응? 무슨 일이야?”
“아, 누나. 별건 아니고. 우리 슬슬 거점을 옮기는 게 어떨까 싶어서. 그리고 이때까지는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인사를 결정했는데. 이제는 좀 체계적으로 사람을 관리하고 싶기도하고.”
실종자들의 숲에서부터 생각했던 일이다.
마트도 분명 좋은 안식처였지만 이제 인원도 늘고 좀 더 크고 방도 많은 곳으로 가고 싶다.
‘그렇다고 호텔 같은 곳은 무리지. 전투발생 시 대응하기도 어렵고 공간도 협소해서 건물 내부에서 싸우다 보면 무너질 확률이 높으니.. 화재 위험도 있고...’
적당히 인근의 학교나 아니면 대형 백화점이 어떨까 싶다. 거기서 적당히 구역을 나눠서 생활하는 거지. 그리고 지난번에 황수민이랑 윤하준, 연금술사 헬러스가 좁은 방에 처박혀서 연금술 공방이랍시고 약 만들고 있는 불쌍한 꼴을 보고 나서 그런지 그들에게 과학실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학교 과학실에는 플라스크나 도구가 많이 있을 테니까. 헬러스가 엄청 좋아하지 않을까.
“그래서 당분간 업데이트가 좀 뜸할 때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서 이동할 생각이야.”
“음.. 그래요? 저는 찬성!”
“목을 때야해...!”
듀라한의 어깨에 앉아 있던 손하은이 뼈만 남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듀라한도 그녀를 따라 손을 번쩍 들더니 목을 때라는 이상한 소리를 지껼였다. 동의한다는 의미겠지. 듀라한 저거 하은이랑 붙어다니더니 좀 많이 유순해진 것 같다. 물론 여전히 저 둘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없었다. 간혹 나 말고는 다들 말도 안걸어 주고 피하는 느낌이고.. 불쌍한 듀오다.
“응. 그래. 찬성해 줘서 고맙다... 하은이란 교한아... 자, 그럼 주변에 운동장 있는 학교가 어떨까 싶은데. 다른 의견 있어? 다들 의견 있으면 말해 봐.”
운동장이나 강당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사람들 모아 두고 뭔가 모임을 가지거나 단체로 일하기도 좋고. 그리고 운동장이 있으면 거기다 뭔가 만들거나 드래곤으로 변했을 때 이착륙도 쉬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옥상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비각성자 노예들은 주눅이 들어 아무 대답이 없었고 일반직 각성자 노예들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내 하렘 멤버들이야 다들 내 의견에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분위기고.
"그럼 인근 학교를 물색하는 걸로..."
그때 문근오가 손을 번쩍 들더니 말했다.
“국회의사당 어떻습니까?”
“뭐?”
국회의사당...?
“아주 그냥 청와대를 털자고 말하지 그래. 여기서 여의도까지 가자고?”
“어.. 아닙니다.”
“아냐. 꽤 좋은 의견이었어. 너무 주눅들지 마.”
“어... 예!”
나는 문근오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나는 되도록 이 주변에서 돌아다니고 싶다. 그런데 여의도까지 가려면...
용으로 변해서 가면.. 금방가나?
이거 라갈의 인장으로 폴리모프해서 용의 등에 몇 명까지 탈 수 있는지 봐야겠다.
‘국회의사당에 집중하기 보단.. 여의도를 점령한다는 느낌으로... 한강도 바로 앞이라 물 끌어오기도 좋고... 강북에서 내려올 좀비들은 마포대교 무너뜨리면 되고.. 한강에서 잡히는 물고기.. 먹어도 되나?’
뜻밖에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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