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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가 다운로드 됨-141화 (141/221)

〈 141화 〉 140. 보석상의 부탁

* * *

“일단.. 네가 찾고 있는 누스의 팔찌는 내가 가지고 있어.”

보석상의 충격발언에 나는 그만 그녀를 인형처럼 껴안고 비행기를 태워줄 뻔했다.

허나 정말로 그런 짓을 저질렀다간 몇십만 코인을 소모하며 높여둔 호감도가 씹창날게 분명했기 때문에 겨우 참았다.

“정말입니까?”

“응... 그런데 벌써 반지와 목걸이까지 손에 넣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운이 좋았습니다.”

“그래.. 정말.. 정말로 운이 좋아... 신기하네.”

보석상이 설명해 주길 제작법이 공표된 누스의 생화반지 같은 경우는 누스의 이름을 빌렸을 뿐인 양산품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어딘지 모를 곳에 모여 사는 보부상들이 길가에 자란 꽃을 꺾어 마법적인 처리를 한끝에 파는 물건인 거다.

허나 누스의 목걸이 같은 경우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다고 했다. 조잡하게 흉내 낸 레플리카는 있을지 몰라도 누스의 정수가 깃든 물건은 따라 만들 수 없는 모양이었다.

고로 희선 누나가 가진 목걸이만이 이 세계에서 유일한 ‘누스의 목걸이’ 진품이며 다른 경로로는 목걸이를 구할 수는 없다다는 말이다.

“그야 드루이드라면 만귀전 소속의 영웅 클래스니까.”

컬티스트가 만마전 진영의 영웅 클래스이듯 드루이드는 만귀전 소속의 영웅 클래스였다.

세계수가 자기 딸을 납치했다는 이상한 이유로 나를 죽이려 할 만 했다. 자기들 쪽의 유일 클래스를 내가 꿀꺽 했으니까 얼마나 화가 났을까.

“뭐, 아무튼 팔찌는 운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건 확실하게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나에게서만 얻을 수 있지.. 아니, 어쩌면 나와 이리 만난 것 자체가 너의 행운이 높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리 보면 행운이 작용했군. 결국 모든 건 운에 의해 결정되는 건가..”

운, 혹은 인과율의 흐름. 그것에 대해 고심하듯 잠시 말이 없어진 보석상. 그녀는 눈을 감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는 대화 내내 묘하게 운을 강조했다. 마치.. 누스의 팔찌를 얻기 위해선 엄청난 행운이 필요하다는 듯이.

“그보다 드루이드를 노예로 만들었다니.. 운이 너무 좋아. 묘하게.. 이상할 정도로 운이 좋은 것 같은데...”

보석상의 눈동자가 순간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무언가를 감지하려는 듯...

나는 이전에 이것과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다.

기생포자를 구입하려고 했을 때 밀렵꾼이 저런 눈으로 나를 쳐다봤었지.. 어쩌면 저건 상대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NPC들만의 특권 같은 게 아닐까?

“흐음.. 그렇군. 반지를 얻고 그걸 딱 맞는 클래스에게 전해 줄 수 있었던 것도... 그 클래스가 하필이면 드루이드라 업적보상으로 목걸이까지 얻어낸 것도 어찌보면 전부 행운의 영역이지.. 그리고 넌 내가 만난 인간들 중... 두 번째로 행운이 높아.”

잠깐, 두 번째? 그럼 666의 행운을 능가하는 인간이 또 있단 말인가?

설마, 선신들 쪽에 정말로 777이 있는 걸까.. 이건 어쩌면 내 최후의 적이 될지도 모를 존재에 대한 정보다.

나는 그녀에게 상체를 들이밀며 첫 번째 인간의 정보를 물었다.

“제가 두 번째란 말이죠..”

“그래.. 두 번째야...”

“그럼 첫 번째는... 혹시 777의 행운을 가진 사람 아닙니까.”

“그렇지.. 궁금한가 보네?”

“물론입니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습니다. 제발.. 좀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흐음.. 그렇게까지 부탁한다면... 네가 컬티스트기도하고.. 흐음.. 그래, 첫 번째는....”

보석상이 나에게 행운 777의 존재에 대해 귀띔해주려는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동시에 그녀의 몸에 밝은 빛이 한차례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크흠. 말을 아끼지.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는군. 나도 입장이라는 게 있어서 말이야. 이렇게까지 날을 세우고 있는데 보란 듯이 규칙을 어길 순 없거든. 이해해 줘.”

“아.. 예. 알겠습니다.”

그녀는 행운 777에 대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선신들 쪽에서 그녀를 직접 압박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타 플레이어에 대한 정보를 언급하는 게 규정상 반칙에 가까운 일이라 운영자 같은 놈들이 훼방을 놓았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아쉽게도 777에 대해 듣지 못했다.

‘행운 777... 상상만으로 두렵다... 도대체 뭐 하는 새끼일까.’

여자일까 남자일까.. 나는 놈의 성별조차 모른다. 그저 존재만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을 뿐. 행운 777의 정보는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다. 부디 상대방도 나에 대한 정보가 차단된 상태이면 좋으련만...

‘나이부터 국적, 이름은 물론이고 성별도 모르는 존재.. 확실한 건..’

나와 그 777의 행운을 가진 플레이어는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싸울 거라는 사실이다. 실상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녀석을 잡아 죽여야만 한다. 나도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순 없을 테니까.

‘나보다 행운 수치가 111이나 높은 새끼라니.. 그 새끼는 가만히 있어도 세상이 알아서 돕겠지? 아마 나처럼 개고생 하면서 기연을 얻지도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니 개빡치는군...’

누군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 가며 얻는 기연을 그 새끼는 방구석에 가만히 누워서 주워 먹는었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서럽다.

‘이 빌어먹을 온실 속 화초 같은 새끼.. 잡초가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마..’

물론 그놈도 나처럼 개고생 중일지도 모르지만... 결국엔 내가 내 손으로 필히 죽여야 하는 놈이니까 무작정 욕하기로 했다. 놈의 사정 따위 내 알 바 아니지.

“뭐, 이야기를 다시 돌려서.. 누스의 팔찌를 갖고 싶다면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 해.”

“역시... 뭔가 조건이 있군요.”

“물론이지. 내가 그걸 얻기 위해 무엇을 희생했었는지 알게 된다면.. 깜짝 놀랄걸?”

무표정인 보석상이 굉장히 재밌는 기억이 떠올랐다는 듯 웃음소리를 냈다. 얼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지만 웃음소리가 나오니 조금 기괴하게 보였다.

“조건이 뭡니까. 너무 어려운 일이라면.. 거절하겠습니다.”

“후후후. 지금의 네가 힘겨워할 정도의 일은 아닐 거야.”

“그렇습니까?”

“그래... 아마도..”

나는 ‘아마도’라는 말이 제일 무섭다.

“불안한데요.. 자세히 좀 말해주십시오.”

“그냥.. 한 가지 물건을 가져와주면 돼.”

“어.. 혹시 그 물건이 무슨 용의 둥지 같은 곳에 있습니까?”

“아냐. 레벨 20도 안 되면서 무슨 용의 둥지야.”

“그럼 도대체 뭡니까.”

“그게... 어느 버려진 저택에 들어가서 반지를 하나 가져와 줘.”

“반지요?”

“그래. 몰락해 사라진 가문의 가주가 사용했던... 인장 반지야.”

인장 반지. 그건 실링 왁스로 편지를 봉인할 때 사용하는 문양이 음각된 반지다. 그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라 할 수 있었다.

‘버려진 저택에... 가주가 쓰던 반지를 가져와 달라니... 배경설정만으로 벌써 공포 영화 한편 다 본 것 같은데...’

고난이도일 것 같은 냄새가 난다. 벌써 역겨운 난이도의 미궁이 연상되는 건 왜일까. 괜히 들어갔다가 공포 영화 한편 찍을 것 같은데...

“저.. 진짜 죄송한데. 그냥 누스의 팔찌.. 돈 받고 저한테 팔면 안 됩니까. 어차피 그거 살 사람도 저뿐이잖아요.”

“그게.. 실은 누스의 팔찌가 아니었어도 너에게 부탁할 생각이었어... 이 일은 다른 보석상들과도 연관된 일이라..”

“다른 보석상이요?”

“그렇지.. 설마 보석상이 나 하나뿐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아니었나? 보부상이야 대화해보니 여려명 있는 것 같긴 했는데.. 보석상은 그냥 그녀 하나뿐인 줄 알았다.

“내가 산타도 아니고. 전 세계 각지를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 웬만한 상인 NPC들은 서버별로 한 명씩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아.”

“아하.. 그럼 당신은 아시아 서버의 보석상이겠네요?”

“그래. 못돼먹은 운명론자와 미친 회의론자, 그리고 영원회귀를 주장하는 또라이 신들의 치킨런은 이 나라만이 아니라 이 행성 전체에서 진행되고 있으니까.”

또. 또 머리아픈 새로운 키워드가 나왔다. 운명론과 회의론, 그리고 영원회귀를 주장하는 신들.. 이건 각각 만신전과 만마전, 만귀전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한데.. 뭔가 중요한 떡밥같지만 지금은 저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어..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운명론이라니..”

“그냥 불만 많은 인형사의 혼잣말 같은 거니까.. 너는 너무 머리 쓸 거 없어. 단지 누가 마지막까지 살아남느냐하는 이야기니까. 넌 지금처럼 계속 열심히 발버둥 치면 돼.”

“아.. 예.”

대충 이야기를 얼버무린 보석상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자기 사정을 설명했다.

“어쨌든 다른 보석상들은 다들 각자의 챔피언을 내세울 텐데.. 나는 마땅히 내세울 챔피언이 없어서 부탁하는 거야. 나 좀 도와줘, 컬티스트... 대신 누스의 팔찌와 더불어... 내가 여기 상주하는 조건으로.. 어때?”

“예?”

여기서 상주한다고?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여기를 거점으로 삼을게. 그래, 그럼 되겠네. 매주 무조건 나에게서 장신구를 구입할 수 있게 되는 거야. 확률에 의존하지 않고 100퍼센트로 나와 만날 수 있는 거지.”

이건 분명 좋은 조건이다. 내가 실종자들의 숲에 가 있었던 지난주엔 보석상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장신구를 구입할 수 없었지. 하지만 그녀가 여기 상주해 준다면 무조건 매주 3개의 장신구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된다.

이건 흑사의 뒤틀린 내단을 먹고 달성했던 ‘생명담보’ 업적 보상을 하나 더 얻은 것과 같은 일이다. 그때는 보상으로 블랙칩을 얻었지만 세 가지 보상 중에는 바람잡이의 골드 칩이란 것도 있었는데 그녀가 여기 상주해 준다는 것은 그걸 사용한 것과 같은 일이니까. 참고로 바람잡이의 골드 칩은 상인 NPC 하나를 상주시킬 수 있는 효과였다.

“방을 하나 내주면 나는 여기서 생활하며 장신구를 제작하는 거지... 그리고 법사 계열 플레이어도 3명까지는 나에게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걸로 합의보자. 참고로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기술은 보석예장과 인형조율이야.”

“어.. 우와..”

이거 생각보다 엄청난 일이 되어 버렸다. 보석상을 내가 거의 독점할 수 있단 소리니까. 이건 무조건 콜이지. 심지어 연금술사 헬러스와 그녀를 만나게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안 그래도 헬러스의 제자로 이번에 효선여고에서 얻게 된 메이지들을 대거 투입시킨 상태인데..’

나는 메이지였던 황수민이 헬러스의 제자가 되어 윗치로 진화한걸 보고 혹여나 다른 메이지들도 그녀와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을까 싶어 헬러스의 공방에 투입시킨 상태였다.

‘물론 헬러스는 제자 육성에 한계가 있다며 재능있는 두 명만 더 골라 받은 다음 나머지 메이지들을 거절했지만... 이거 새로운 기회다.’

거절당한 이들은 보석상의 제자로 들여보내면 되겠다. 그녀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고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건 거점을 강화시킬 아주 좋은 방법이다.

원소 마법 몇 발 겨우 쏘아내면 조루새끼 마냥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메이지들을 재활용 할 수 있겠다. 그들이 보석상의 기술을 배워 장신구 제작자나 인형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건 할 수밖에 없다.

‘나, 장조준. 암시장, 이면세계, 악몽과 실종자들의 숲까지. 남들은 살아돌아오지도 못했을 곳에서 잘만 살아 돌아왔지. 이번에도 좆빠지게 고생할게 분명하고 정말 힘들겠지만.. 그래도 나는 할 수 있다.’

이건 자만이나 방심이 아니다. 경험에 의한 자신감. 할 수 있다는 용기다.

“하겠습니다.”

“좋아. 훌륭해.”

난 보석상과 악수를 나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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