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141. 나 혼자만 하드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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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스의 팔찌와 보석상을 내 거점에 정착 시키는 조건으로 나는 그녀의 바람을 들어 주기로 했다.
그녀의 부탁은 단순히 말하자면 아주 간단한 이야기였다.
버려진 저택에 들어가서, 가주실의 집무용 책상 2번째 서랍에 들어 있을 것 같은 인장반지를 꺼내, 자신에게 가져와 달라는 게 그녀의 부탁이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냥 동네 마실이라도 다녀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실상은 전혀 달랐지만.
“그럼 이제 전율저택에 대한 좀 더 긴밀한 정보를 알려줄게.”
“잠깐. 잠깐만요.”
“응? 왜 그래.”
일본에 있는 귀신의 집 이름도 전율미궁인가 뭔가 아니었나?
‘전율저택이라니.. 이름부터 역겹다.’
도대체 얼마나 무섭게 설정된 장소기에 이름부터 전율저택인 걸까. 너무 소름 끼쳐서 등골이 서늘해지고 몸이 부르르 떨리며 닭살이 돋았다.
“아니, 제가 앞으로 갈 곳의 명칭이... 전율저택입니까? 이름부터 너무 살벌한데요.. 들어가서 반지 하나 들고 나오면 되는 간단한 의뢰인 줄 알았는데... 이거 난이도 15레벨 기준인 거 확실한 겁니까?”
“어.. 15레벨은.. 아니고 한 18레벨쯤?”
“하아.."
나의 격한 반응에 보석상이 당황스럽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이름만 그런 거야. 별거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악신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네가 제일 무서워.”
“어...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지. 솔직히 다른 플레이어들 처지에서 나라는 존재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다. 더구나 기억변환의 반지를 끼고 있어서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은 내 얼굴을 제대로 인지조차 하지 못하며 목격한 것 만으로도 두려움에 빠지기도 한다.
이은하도 내가 반지를 벗고 맨얼굴을 처음 보여줬을 때 상당히 놀라워했었지. 생각보다 멀쩡하고 깔끔하게 생겼다면서.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내가 다른 이들의 눈에 얼마나 무섭게 비치느냐가 아니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저택의 난이도에 관한 거다. 이미 하겠다고 말을 했으니 지금 와서 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난이도인지는 대충이라도 듣고 들어가야겠다.
“정확히는 아니더라도.. 대략 어느 정도의 난이도 인지는 좀 알려주세요.”
“그게.. 음..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 만한 난이도야. 악신들과 대면하고도 나와 이렇게 멀쩡히 대화가 가능한 상태인걸 보면... 너는 상당히 정신력이 좋은 것 같으니까 걱정 없겠네.”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된다라... 일단 알겠습니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나올 수 있다니.. 이때까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못 빠져나올 만한 끔찍한 곳만 주구장창 돌아다녔으니까 그건 자신 있다. 솔직히 정신 못 차렸다면 나는 이미 진즉에 죽었을 거다.
“다시 이야기를 되돌려서. 지금부터는 저택에 대한 정보야. 잘 들어둬.”
“예. 알겠습니다.”
자세를 바로한 그녀는 저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해줬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점점 길어질 수록 내 표정은 더욱더 썩어들어갔다.
‘처음엔 그냥 쓱 들어가서 반지하나 들고 나오면 될 것처럼 말해 놓고...’
분명 나를 꼬드기기 위해 보석상은 반지를 탈취하는 일이 마냥 쉽고 간단한 일인 것처럼 설명했다. 마치 빈집에 들어가서 두고 온 물건 하나 쓱 가지고 나오면 될 것처럼.
허나 저택의 진짜 무서움은 그녀의 설명이 하나둘 늘어날수록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일단 방금의 이야기를 대충 정리하자면.. 저택은 온갖 함정이 설치된 뒤틀린 미궁이란 점이고, 내부는 시공간이 뒤죽박죽 꼬여 있으며, 저택을 돌아다니는 저주받은 인형들까지. 있다는 말이네요. 시발.. 이거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는 의뢰잖아요.”
“그, 그래도.. 성공하면.. 누스의 팔찌와.. 나, 나를 얻을 수 있다고!”
“흠.. 알겠습니다. 계속 말하세요. 어차피 해야 할 거 더 불평해 봐야 소용도 없고.”
“크흠.. 수용하는 태도.. 아주 좋은 자세야. 그럼 마지막 전달 사항인데.. 저택에 들어가서.. 조별 과제를 해야 해.”
“예? 뭐라고요?”
방금 이 또라이가 나에게 뭘 하라고 한거지? 내가 잘 못 들었나?
"그게.. 다른 보석상이 데려온 인원 두 명과 조를 짜서.. 그들과 함께 저택을 공략해야 해. 참고로 총 다섯 개의 조가 입장하는 동시에 랜덤하게 짜여져..."
"허... 삼인 일조..."
"그래, 저택을 삼인 일조로 공략을 해야 하는 거야.."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몇 개 있다. 그리고 그중 탑 쓰리 안에 들어가는 단어가 바로 조별 과제다.
‘빌어먹을 조별 과제.’
멍청한 인간들끼리 모여서 조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문제의 시작이다.
교수라는 직업이 미쳐야 미칠 수 있는 직종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단순히 종사자들이 죄다 사악한 놈들이라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조별 과제는 상상만으로 열불이 터지는 일이다.
‘차라리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놈이 명령을 내리는 게 훨씬 낮지. 신분저하가 없는 머저리들끼리 공동 작업을 시켜두면 십중팔구 삽질만 존나하다가 버스 타는 새끼가 나온다고.’
그리고 이게 정말 나에게 있어선 가장 중요한 내용인데... 나는 한평생 성격파탄자로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버스를 얻어 타본 적이 없다.
‘태워준 적은 있어도... 타본 적은 없지..’
이게 제일 큰 문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 같은 조가 되는 새끼들은 분명 나라는 버스를 타게 되어 있다. 이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믿을 수가 없는 현실에 나는 그만 분노하고 말았다. 차마 미안해 하는 인형에게 분노를 쏟아낼 수가 없어서 꾹 참았을 뿐이다.
“후우.. 그럼 셋이서 다른 조와 경쟁해야 하는 거네요.”
“맞아. 네가 속한 조가 가장 먼저 반지를 찾아서... 가지고 나오면 이기는 게임이야.
“다른 보석상의 챔피언... 그러니까 랜덤하게 지정되는 조원들을 제외하곤 다른 놈들은 다 죽여도 되는 거죠?”
“응.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냥하는 편이 좋아. 그리고 다른 조의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처리하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거야. 단지 저택을 빠져나올 때 입장할 때 지정 받은 나머지 조원들과 함께 나와야 통과야. 참고로... 조원들에게 위해를 가하면 안 돼. 노예화도 안 된다는 소리지.”
“아니 시발.. 이거.. 이런 이상한 규칙 만든 새끼가 도대체 누굽니까.”
“있어... 이벤트 제작자라고.. 성격 뒤틀린 녀석들이지. 나도 규칙을 전해 듣고는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어.”
뭔가 NPC들 중에서도 서열이 높은 녀석이 있는 가보다.
‘이벤트 제작자...’
이 빌어먹을 재앙의 운영진 중 하나겠지. 재앙의 운영자라 그런지 하는 짓도 엿 같은 녀석이다.
“하아... 그럼 인장반지를 조원들과 함께.. 무사히 가지고 나왔다고 칩시다. 그건 그럼 보석상 세 명이 나누는 겁니까?”
“응. 인장반지 효과가 세번뿐이야. 그리고 반지를 사용하게 될 세 명의 보석상은 좀 더 자유로워지지. 그래서 네가 반지를 꼭 가지고 나와야 하는 거야. 만약 반지를 얻지 못한다면.. 나는 여기로 거주지를 옮길 수가 없어.”
“하아... 알겠습니다.”
이번 일은 나의 일행들과 함께 들어갈 수 없는 일이다. 나 혼자 들어가서 생판모르는 새끼 두 놈과 협력해 다른 경쟁자 놈들을 적당히 처리하거나 노예로 만들고 반지를 얻어야 한다.
“기한은 무제한. 혹여나 반지를 구하지 못하더라도 출구만 찾으면 빠져나올 수 있어.”
“꽤 여유로운 조건이네요.”
실종자들의 숲은 일주일이라는 시간제한이 있었다. 더구나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되는 스킬이 없다면 끝도 없이 펼쳐진 숲에서 출구를 찾는 것도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그리고 저택에서 마주치는 사용인들은 결코 믿어선 안 돼. 알겠지?”
“예. 저는 원래 인간 불신이라 타인을 잘 안 믿어요.”
“그거 하난 정말 믿음직스럽네. 간혹 보다 보면 너무 호구 같은 인간들이 있어서 말이야.”
잘 모르는 사람을 다짜고짜 믿는 머저리는 죽어 마땅하다. 인증되지 않은 대상에게 믿음을 주는 것 또한 어찌 보면 자만이고 방심이다. 그리고 아포칼립스에서 방심한 놈은 꼭 죽더라.
“그럼 언제부터 들어갈 수 있습니까?”
“다음 주 월요일 오전 11시. 내가 데리러 올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면 돼.”
“그러죠. 아, 가시기 전에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이후 나는 헬러스를 보석상에게 소개해 줬다. 보석상은 그와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자신이 전뇌화 프로젝트를 굉장히 다양한 방면에서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본인 스스로가 인형이기도하고 인장반지를 무사히 가져와 주기만 하면 여기서 헬레스와 함께 연구를 돕겠다고 말했다. 이거 인장반지 구출 작전을 실패해선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
“그럼 다음 주에 보자고.”
“예. 살펴 가세요.”
곧 보석상은 빛과 함께 사라졌다. 올 때는 티 안 나게 조용히 오면서 돌아갈 때는 빛과 함께 사라진다. 배웅해 달라는 의미인가?
“대화는 어땠어?”
“흐음.. 굉장히 지적인.. 인간은 아니었고. 지적인 존재더군요. 그녀와 저는 어쩌면 다른 세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연금술을 극한까지 파고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연금술을..? 보석세공사가 아니라?”
“어... 대화를 나눠보니 그녀 또한 상당히 연금학적 지식이 높더군요. 계통이 많이 다를 뿐. 그녀 또한 일종의 연금술사라 볼 수 있습니다.”
“허어.. 그렇군.”
“이거 오랜만에 지식을 나눌 상대를 만나서 기쁘군요... 하하하.”
보석상과의 이십 분 남짓한 대화만으로 헬러스는 굉장히 기뻐 보였다. 늙은이와 인형의 조합이라... 상당히 변태스러운 조합이로군.
이후 헬러스를 공방에 남겨둔 나는 효선 여고의 간부진들을 소집했다. 그들에게 나는 다음 주에 전율저택이라는 곳으로 갈 거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아니... 오빠. 혼자 뭐 이리 일정이 빡빡해요? 지금 바쁜 남자라고 자기 어필하는 거죠? 그쵸?"
"아, 아냐. 그런거 아니야, 화영아. 나도 가기 싫어."
"저희랑 놀 시간은 챙겨두고 있는 거 맞아요?"
“어.. 그래. 물론이지 은지야. 나야 항상 너희랑 뒹굴고 놀고 싶지.”
"가만 보면 오빠 혼자 재앙을 너무 열심히 즐기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맨날 우리 방치하고!"
“하.. 미안하다, 예원아. 그렇지만 일이 자꾸 꼬여서.. 나도 참... 이게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야. 모두에게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이게 다 우리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 이해 부탁해.”
나는 은지와 화영이에게 각각 오른팔과 왼팔을 내준 채로 예원이에게 젖꼭지를 꼬집히며 한참이나 심문 당했다. 여자친구이자 마누라가 너무 많다. 바가지를 사방에서 긁어 대니 조금 피곤한데... 그게 꼭 나쁘진 않네. 다들 예쁘니까... 그리고 같이 있고 싶어서 이러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으니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하지만.. 777인지 뭔지 하는 개 같은 놈도 나처럼 나날이 성장 중일 텐데... 나 혼자 놀고먹고 있을 순 없잖아. 내 여자들 전부 먹여 살리고 나중에 애도 낳고 행복하게 살려면 죽을 둥 살 둥 일해야만 해...’
이게 가장의 무게인가.. 어깨가 무겁다. 부양할 가족이 너무 많아서 큰일이다.
참고로 은지와 화영이, 예원이가 절치부심해 나를 절찬리 성희롱 중이지만 아무도 뭐라 딴지를 걸진 않았다. 모여 있는 간부진이라고 해 봐야 내 여자들과 내가 해야 할 일을 전부 도맡아서 처리 중인... 비선실세 하진성이 전부니까.
솔직히 요즘 들어서 노예들이 나보다 하진성을 더 무서워하는 것 같다. 나야 중요한 일이 아니고서야 딱히 마주칠 일이 없지만 중간관리자인 하진성은 효선 여고 내의 노예들과 두루두루 엮여 있으니까.
사실상 나는 그냥 마주치면 안 되는 자연재해에 가깝고 실질적인 상급자는 하진성이니 그가 무서울 만도 하다.
“어쨌든 이번에는 나 혼자 다녀오는 일이니까. 다들 집 잘 지키고 있어. 이상한 거 나오면 무조건 죽이고.”
“알겠다, 주인. 걱정 안해도 잘 지키고 있을 테니까.”
나는 듬직한 메르의 등을 두드려 줬다. 그다음 이리저리 물건들을 챙겼다. 나 혼자서 노예로 만들 수도 없는 전혀 모르는 놈들과 함께 협력해야 하는 일이니.. 조금 불안 하고 긴장된다. 물론 조원들도 나에게 위해를 가할 수는 없겠지만..
멸망이 시작된 이후 혼자 밖으로 나갔던 첫날을 제외하면 이때가지 나는 나를 배신할 수 없는 노예와 함께 행동해서 그런지 타인의 존재가 더욱 큰 거부감으로 다가왔다.
‘가만 보면 암시장 초기나 악몽 속을 제외하곤 거의 계속 내 여자들과 함께 다녔었네.’
그러나 이번에는 나를 백업해주는 노예나 나의 여자 없이 혼자서 다 해야 한다.
‘다른 인간을 감지해주는 하린이나 화영이도 없고.. 은밀하게 움직여 정찰을 다녀오는 은지도 없으니..’
삶의 질을 높여주는 희선 누나는 물론이고 항상 듬직하게 나를 지켜 주는 아람이나 메르도 없다. 아름이나 예원이는 항상 내가 보살펴주는 느낌이지만.. 지킬게 있을 때 나는 더 악착같아지는 타입이라 그녀들도 나에겐 굉장히 중요하다.
‘주하와 은하는... 아직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적응하는 중이고. 소라도 열심히 한국어를 배우고 있고...’
참고로 소라는 요즘 부쩍 한국어가 늘었다.
“조시미.. 다녀오세요..! 오니쨩!”
이렇게 간단한 인사쯤이야 이젠 바로바로 말할 줄 안다. 귀여운 녀석. 의붓 오라비를 흘겨보던 눈빛은 악녀 그 자체였지만, 그때 이후론 항상 내 앞에선 미소를 유지하고 있다.
그 웃음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지만, 그녀는 나를.. 뭐랄까.. 꿈에 그리던 잘생기고 키 큰 한국인 남친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뭐, 나쁘진 않다.
“일단 암시장부터 다녀와야겠네.”
보부상과 무기상은 내일 올 생각인가 보다. 혹여나 내가 암시장에 들어갔을 때 여기로 찾아온다면 마주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지난주에 숲을 돌아다닌다고 만나지 못한 체셔를 만나러 가야 하니까.
“다녀올게.”
“네~!”
“이번에도 노예 데려올 거예요?”
“봐서. 헬러스 영감 같은 좋은 매물 있으면 구입해 올게.”
나는 여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암시장으로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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