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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가 다운로드 됨-143화 (143/221)

〈 143화 〉 142. 공포영화도 세 번쯤 보면 무섭지 않다

* * *

어느덧 세 번째인 암시장. 늘 보던 꼬인 골목의 파이프 관과 뭔지 모를 기계가 힘차게 돌아가는 소음은 이젠 익숙하다 못해 정겨웠다.

'냄새나고 시끄러운 풍경이 이젠 뭔가 정감 가는 장소가 되어 버렸단 말이지.'

공포영화도 세 번쯤 보면 더는 무섭지 않게 된다더니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뭐랄까.. 이제 귀신이 어디서 등장하는지 알고 있으니 오히려 기다려지는 그런 단계에 도달하고 말았다고나 할까. 두렵거나 으스스한 느낌보다는 그냥 고어하고 징그러운 동네가 됐다고 할 수 있지.

“준!! 너무 늦게 왔어!! 내가 준이를 얼마 기다렸는지 알아?”

“체셔...!”

암시장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익숙하게 그녀를 불렀다. 항상 체셔는 부른지 5분쯤 뒤에 왔었지만 오늘은 버튼을 누르자마자 1분 만에 도착해 나에게 안겨 왔다.

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왠지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분명 지금 그녀는 해맑게 웃고 있겠지.

“미안 해요. 너무 바빠서..”

나는 지난주에 오지 못한 걸 사과했다. 실종자들의 숲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만나러 올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보내자니 내가 아닌 이상 암시장에서 사지육신 멀쩡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참았었다.

만마의 총애를 가지고 있어도 박스 맨과 같이 나를 위협하는 놈들이 등장하는데 만마의 총애가 없는 인간이 들어왔다가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내가 빨리 오지 못했다고 사과하자 체셔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응. 괜찮아. 괜찮아.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이리 와.”

난 체셔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서 그녀와 함께 한참이나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어맛.. 벌써 10분이나.. 우리 시간도 없는데 어서 움직이자.”

내 머리를 한참이나 쓰다듬던 체셔는 시계를 확인하더니 화들짝 놀라며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와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4시간뿐이니까 효율적으로 사용해야한다. 그리고 그녀는 해결할 일들을 빨리 끝내곤 나를 자취방으로 데려갈 생각이겠지.

만약 내가 한가롭거나 여유로운 상태였다면 그냥 그녀의 거처에 머물며 다음 주 금요일까지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당장 전율저택부터 시작해서 나에게 밀린 숙제가 한가득이라 그럴 순 없었다.

차라리 그녀를 암시장에서 꺼내가는 게 더 낫다. 무슨 견우와 직녀도 아니고 보고 싶을 때 볼 수가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어디부터 갈래?”

“어... 밀렵꾼한테 먼저 갈까요?”

“응! 가보자고!”

오늘은 지난번에 피임약을 사러왔던 것과는 달리 딱히 암시장 그 자체에 목적을 두고 온 건 아니었다. 그냥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체셔를 보기 위해 겸사겸사 왔다고나 할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허투루 시간을 때울 순 없으니까 그녀와 열심히 암시장을 돌아다녀야겠지.

일단은 밀렵꾼에게 먼저 들릴 생각이다. 지난번에 구입했던 정체불명의 알과 알시드 유충, 기생포자와 비명초는 최고의 물건들이었지.

정체불명의 알에선 무려 헤츨링이 태어났고, 알시드 유충은 쓸모없다 여겨졌던 장애인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했으며, 기생포자는 노예 종족인 버섯인간을 탄생시키기 직전이다. 비명초를 복용한 희선 누나는 무려 숲지기가 됐고.

뭐 하나 빠지는 물건 없이 좋은 물건만 잔뜩 팔아준 밀렵꾼한테 감사의 선물이라도 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번에도 뭔가 좋은 물건이 있기를... 거점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그런...’

그런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나는 체셔와 팔짱을 끼고서 밀렵꾼이 있는 미식의 거리, 일명 먹자골목에 도착했다.

“으엑.. 오늘은 중식이랑 양식이네?”

저번에는 경양식이랑 디저트로 나누어져 있지 않았나? 제대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어쨌든 이 골목은 올 때마다 판매하는 음식의 장르가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식문화가 인간과 닮아 있는 거지?’

나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생겨 체셔에게 질문했다. 체셔는 암시장에 대해 정말 많은 걸 알고 있으니까 왜 이런 장소에 '중식'과 '양식'이 있는 건지 알고 있겠지.

“저기 체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말해, 말해. 준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것 전부 다 말해 줄게. 3번가의 아기 사육장이나 중앙광장의 비밀스러운 가게들까지 전부 알려줄 수 있어!”

“아, 아기 사육장이요...?”

“응. 멸종위기 종의 영유아들을 맡기면 돌봐주는 장소야. 맡겨진 아이가 성장하면 다른 곳에 팔고 클론으로 대체해서 아기인 상태로만 계속 돌보는.. 그런 장소지. 궁금하면 말해. 데려다줄 수 있어.. 원칙상으로 플레이어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되는 장소지만... 알 게 뭐야! 준이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지.”

팔린 놈들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리고 체셔는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엄청난 비밀들을 알고 있는 거지? 너무나 두려웠으나 한편으로는 그녀가 내 편이라 굉장히 안심됐다.

암시장 전문 가이드이자 브로커이며 상당한 실력을 가진 여인이 무려 내 여자 친구라니.. 뭐랄까 동네깡패가 부랄 친구라 든든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저, 체셔. 제가 궁금한 건.. 그런 뭐가 알아선 안되는지식이 아니라.. 그냥 여기 미식의 거리에 대한 건데요..”

“응? 응응. 그래서?”

“별건 아니고 지구의 식문화가 여기서도 통용되는 건가 싶어서요.”

“아아. 그게 궁금했구나. 헤헤헤... 사실 미식의 거리에서 파는 것들 대부분이 인간의 문화를 따라하는 거야. 원래 고위이족들은 식문화랄 게 없이 죄다 생식뿐이었거든. 그나마 인간들을 따라 하다 보니 이 정도까지 문화가 발전(?) 한 거지.”

“허어...”

이게 대체.. 오히려 문화의 퇴보가 아닐까 싶은데... 잡아먹을 놈들을 고통스럽게 죽이기 보단 차라리 그냥 깔끔하게 집어삼키는 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다. 아닌가?

“그리고 자기들끼리는 미식이라던데.. 글쎄. 솔직히 내가보기엔 조금 독특한 악식 같아. 물론 진짜 맛있는 것도 가끔 생겨나는 모양이지만.. 맛있는 가게는 주인도 맛있을 거라는 이상한 논리를 가진 놈들이 있어서 가게 주인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종종 발생하지. 그렇게 비어 버린 가게엔 다른 이족이 스리슬쩍 기어 들어와서 장사를 시작해.”

“허 참...”

정신이 혼미해진다. 역시 인간의 상식 따윈 전혀 통하지 않는 거리였다. 혹여나 이런 곳에서 체셔도 밥을 먹는 건가 싶었지만.. 그녀는 주로 중앙광장을 이용한다고 했다. 미식의 거리보단 훨씬 덜 잔혹하고 덜 기괴한 음식점들이 많단다. 무엇보다 통조림이 보편화 되어 있어서 좋다는데...

내가 보기엔... 거기나 여기나 조리법에 미묘한 차이가 있을 뿐 끔찍하긴 매한 가지였다. 그래도.. 체셔는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우니까 뭘 먹든 상관없지. 내 앞에서 식인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여자 친구가 악식을 조금 즐긴다고 해서... 매정하게 버리고 가는 남자가 아니다. 무엇보다 체셔라면 지구 끝까지 나를 쫓아올 것 같기도 하고... 왠지 아까부터 팔짱의 강도가 점점 강해지는 게 묘하게 나에게 집착하는 것 같아서 말이지... 물론 나쁘진 않다.

생명체의 범주에서 훨씬 벗어난 악신들에게도 사랑받는 나인데.. 무슨 사랑인들 못하리. 두렵지 않아. 오히려 좋아....

“그래서 오른쪽이랑 왼쪽이랑 어디로 갈래?”

“어.. 중식쪽으로..”

어느 쪽이든 징그럽고 끔찍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일단 나는 두 젓가락에 구천 원이 넘는 비싼 파스타보단 오천 원짜리 짜장면을 좋아하는 서민 입맛이라 중식을 파는 오른쪽 거리로 갈려고 했다.

만약 중식 골목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나는 분명 발을 들였겠지.

­파자자자자작!!!

­으아아아아!!!! 뜨거워!! 뜨거워!! 뜨거워!!! 꺼내줘!!!

기름에 무언갈 튀기는 소리와 뜨겁다고 비명 지르는 지성체의 단말마.

­위이이이잉, 푸하아아악!!

­끼아아아!!! 멈춰!!! 그만!!!

­끼아아아!! 너무 아파!!!

­아빠아아아!!! 살려 줘!!!

믹서기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와 동시에 들려오는 아이들의 비명 소리.

­텅.! 빠드드득.. 콰작.

­이제!! 재생이 안 된다고 이 시발새끼야!!!

도마에 중식도가 내려쳐지는 소리와 재생이 안 된다며 발버둥 치는 여자의 고함 소리.

‘시발...’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유사 인류의 아우성이 중식 골목에서 흘러나왔다. 내 뛰어난 청각이.. 들어선 안되는 소리를 죄다 잡아내고 만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비명 소리들이 아련하게 울려 펴지는 중국 민요에 묻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소름 끼치고 충격적이었다.

분명 중식 골목으로 들어갔다간 뭔지 모를 것들의 해체쇼나 산 채로 삶아지는 유사인류를 볼 것만 같았다. 아무리 내 정신력이 평범한 인간들보단 뛰어나다고 해도 눈앞에서 인간이 산 채로 삶아지고 잡아먹히는 장면은 좀.. 많이 역겹고 충격적일 것 같다. 기분이 좀 심하게 나빠질 지도 모른다.

“얌전해 보이는 양식 쪽으로 갈까요?”

“그래! 사실 나도 중식 쪽은 고기 누린내가 심해서 말이지. 별로 내키지 않았어.”

체셔도 중식 골목은 별로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린 얼른 양식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나마 여긴 중식 골목보단 평화로웠다. 누군가가 죽어 가며 내지르는 단말마도 들려오지 않았고 길목에 피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골목을 돌아다니는 이족들의 수가 중식 골목보다 적었다. 체셔의 말을 들어 보니 확실히 이쪽 식당들이 가격대가 높고 비싼 모양이었다.

“다 왔다.”

빠르게 골목의 끝에 도달한 체셔가 얼른 밀렵꾼의 움막 입구를 열고서 활기차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정말로 또 왔군. 세 번이나 방문할 때까지 살아 있다니. 놀라운 걸?”

칭찬인지 뭔지 모를 인사를 건네는 밀렵꾼. 나는 그의 인사를 대충 받아줬다.

“어.. 제 명줄이 제법 긴 모양입니다.”

“덕분에 체셔를 자주 보는군. 이봐 체셔! 너는 인사도 없냐!”

“안녕! 아저씨! 참고로 아저씨 가게 이어받을 생각 전혀 없으니까 단념해!”

“이.. 이 녀석이... 하아. 됐다. 때가 되면 너도 결국 이 자리에 앉게 될 거다.”

“지랄마시지! 나는 이 엿 같은 동네에서 내 남자친구랑 같이 빠져나갈 거라고!”

밀렵꾼에게 그리 호언장담하며 나의 옆구리를 껴안는 체셔. 나는 멋쩍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러자 밀렵꾼은 딸이라도 빼앗긴 아버지 마냥 입꼬리를 잔뜩 내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나에게.. 텔레파시인지 뭔지 모를 정신파를 보냈다.

[이봐. 컬티스트... 혹여나.. 체셔가 상처 입을 만한 짓을 한다면. 지옥 끝까지 쫓아갈 테다. 명심해라. 나는 한번 정한 사냥감은.. 결코 놓치지 않아. 네놈의 친구인 용사냥꾼도 감히 나를 가로막진 못 할 거다.]

­꿀꺽...

용사냥꾼 지크와 내가 친밀하단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둘째치고... 그조차 밀렵꾼을 막을 순 없다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가늠이 안 되는 암시장에 떡하니 가게를 차려 둔 밀렵꾼의 협박에 나는 오금이 저려왔다. 마치... 올가미에 붙잡힌 사냥감이 된 듯한 느낌이다.

무엇보다 지옥 끝까지 추적해 온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 같았다..

“응? 왜 그래?”

“아, 아니예요.. 아무것도..”

“응? 애 상태가 이상한데.. 이봐!! 아저씨!! 뭔 짓 했어!!!”

“글쎄? 아무 일도 없었는데? 이봐, 긴장 풀어 컬티스트. 규정상 나는 지금 너에게 손댈 수 없으니까.”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카운터에서 일어나 가게 내부로 이어진 미닫이문 앞에 섰다.

“그보다 지난번에 약속했었지? 다음에도 체셔와 함께 온다면 미닫이문 너머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어...”

솔직히 그가 그런 말을 했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방문했던 게 무려 이주전의 일이기도하고 중간에 실종자들의 숲에서 구른다고 상당히 힘들었으니까 그사이 까먹어 버렸다.

“그, 그랬던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나의 컬렉션을 보여주마. 물론 4개밖에 보여 주지 않으니 너무 기대하진 말고.”

곧 그는 미닫이문을 열었다.

순간 문 너머에서 서늘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들어와라. 오늘의 추천 메뉴를 보여주마.”

2개의 철제 케이지와 1개의 새장. 그리고 유리병에 들어 있는 뭔지 모를 생물의.. 커다란 심장까지.

나는 코인이 충분한지 걱정해야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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