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143. 암시장은... 보물창고가 맞다
* * *
“어서 들어오게. 함정은 없으니까.”
나와 체셔는 밀렵꾼의 등 뒤를 따라 미닫이문 너머로 건너갔다. 다행히 공간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인지 미닫이문을 지나가도 다른 장소로 이동하거나 하진 않았다.
밀렵꾼을 따라 걸어가니 사방이 콘크리트로 구성된 방안이 나왔다. 그 방의중심엔 2개의 철장과 하나의 새장, 커다란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그 밖엔 오른쪽 벽에 철제문이 하나 달려 있었고 밀렵꾼이 서 있는 벽면에 누르면 안 될 것 같은 붉은 버튼이 여러 개 달려 있었다. 저 철제문 너머가 진정한 밀렵꾼의 사육장이겠지.
“둘러보게. 보유자금만 충분하다면. 전부 가져갈 수 있겠지.”
“자금은.. 충분할 겁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대체...”
나는 철창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나를 노려보는 짐승들과 시선을 맞추었다. 하나같이 위협적인 기운을 발산하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특이한 녀석들만 준비했지. 어떤가?”
“확실히.. 아주 큰 도움이 될 법한 놈들이네요...”
나는 우선 가장 큰 철장에서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음울한 정신파를 쏘아내며 으르렁거리는 짐승을 보았다. 놈은 머리가 2개 달린 커다란 도마뱀이었다.
[영원한 희생룡: 머리가 2개 달린 돌연변이 드레이크 준성체입니다. 양쪽 머리가 모두 파괴되지 않는 이상 결코 죽지 않습니다. 신선한 피를 주식으로 삼습니다. 머리와 달리 꼬리는 하나뿐이지만 맛은 일품입니다.]
[주의. 희생룡은 상처를 입을 때마다 끔찍한 비명을 내지릅니다. 희생룡의 비명 소리는 주변의 지성체들에게 동정심과 연민을 느끼게 만듭니다. 희생룡의 울음소리에 지속해서 노출될 경우 구출해주고픈 욕구가 커지며, 구출을 저지당할 때마다 우울감과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가격: 74000C]
영원한 희생룡. 그야말로 이름에 걸맞은 효과를 가진 거대한 도마뱀이었다.
‘구출 못하면... 우울감과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된다니...’
상당히 악랄한 정신 공격을 가하는 녀석이었다. 자신을 도축하는 인간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어 결국 자살까지 종용한다니...
‘도축은 멍청한 듀라한에게 맞기면 그만이고...’
왠지 목베기에 집착하는 살육광인 듀라한이라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희생룡의 꼬리를 자를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사이코패스인 듀라한이라면 이 놈이 내뿜는 울음소리에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겠지.
‘차오르는 살점은 물론이고 우리 쪽엔 클레릭도 있어...’
전력외로 취급되는 비각성자들의 피를 뽑아다가 희생룡에게 먹이며 온종일 돌아가면서 회복 스킬을 걸어 주면... 이론 상 놈을 무한히 살려 둔 채로 고기를 채취할 수 있었다.
고로 이 짐승은 귀중한 가축이라 할 수 있다. 회복 스킬을 사용하면... 무한정 재생시킬 수 있는 식량. 위험부담이 있지만.. 육류를 수급할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수단이었다.
‘솔직히 과일이랑 채소뿐이라.. 질리는 맛이 있었지.’
운동장에서 자라나는 과일인지 채소인지 경계가 애매한 식물들만 먹고 살려니 강제 비건이 된 것 같아서 끔찍했는데. 정말 잘됐다.
아무리 볶고 지지고 삶고 난리를 피워도 채소는 그저 채소에 불과하다. 비건이 아닌 나로서는 며칠 동안 채소만 먹는 삶이 꽤 고통스러웠다.
어딘가에 소나 돼지를 키우는 멀쩡한 목장이라도 하나 털지 않는 이상 신선한 고기는 이제 찾아보기 어려워졌으니까. 그렇다고 정신력 떨어지게 인육을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통조림이나 스팸도 너무 많이 먹어서 좀 질렸었다.
그런 찰나에 무한 재생되는 고기덩이를 선물 받은 기분이 들어서 나는 절로 웃음꽃이 피었다. 심지어 생긴 것도 감정이입 덜 되는 파충류라 참 다행이다.
“말이 없군. 죽지 않는 생물이라 놀라운가? 진짜 배기 용은 아니지만 이런 놈은 구하고 싶다고 구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야.”
“확실히 맞는 말입니다. 당장 구입하겠습니다.”
“좋아. 직접 가져갈 텐가. 아니면 배달 받을 텐가?”
“그런 것도 정할 수 있습니까?”
“배달료로 1만 코인을 지급할 수 있다면야, 충분히 가능하지.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던가.”
“맞네요.”
밀렵꾼의 말은 일종의 진리였다.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 따위 없다는 그의 주장은 감히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예를 들어 좀비였다가 사람으로 변한 희선 누나처럼 인과율이라는 화폐만 준비할 수 있다면 좀비도 사람으로 바꿔 주는 세상인데.. 뭔들 불가능할까.
결국 1만 코인을 추가로 지급한 나는 소환이라는 형태로 영원한 희생룡을 배달받기로 했다. 계속 돌아다닐 텐데 이놈을 끌고 다닐 순 없으니까.
“배송준비를 하지.”
밀렵꾼이 그리 말하며 방에 있던 스위치를 누르자 바닥이 꺼지면서 희생룡이 들어있던 철창이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멀리서 룡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지만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괜히 호기심에 유심히 울음소리를 듣고 있어 봤자 기분만 나빠질 테니까. 어차피 영원히 희생시키기로 마음먹었으니 괜히 깊게 생각할 것 없지. 저건 그저 살아 있는 고깃덩이일 뿐이다.
‘자, 다음은...’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 물건을 확인했다. 이번엔 희생룡보다는 작은 녀석이었다.
[세계수 진딧물: 세계수의 수액을 빨아먹고 살던 기생충입니다. 굉장히 튼튼하며 매일 일정량의 분비물을 배출합니다. 진딧물의 분비물에는 세계수 수액이 극미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또한 분비물은 극도로 감미로운 식재료이며 생으로 마실 경우 정신적 고양감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가집니다.]
[주의. 과다 복용 시 몸에서 모든 혈액이 방출되며 사망할 수 있습니다.]
[가격: 50000C]
“배달 가능합니까?”
“물론이지. 배달료 포함 6만 코인일세.”
“바로 구입하겠습니다.”
내가 고민도 하지 않고 구입한 이유는 헬러스와 나눴던 대화 때문이다.
‘분명.. 세계수와 관련된 물건은 전부 모아달라고 했었지...’
이유는 단순했다. 물질계에 직접적인 신체(??)를 두고 있으며, 살아 숨 쉬는 신이라 할 수 있는 세계수는 비슷한 속성을 공유하는 다른 만귀전 소속의 신들 중에서도 특히나 부산물을 많이 흘리는 신이라고 한다.
그렇다 보니 오래전부터 다양한 연금술 재료로 세계수의 부산물이 사용되어 왔고... 그중에는 3대 영약이라 할 수 있는 ‘넥타르’, ‘소마’, ‘엘릭서’의 재료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헬러스는 만년 2급 연금술사였지... 헬러스는 1급 연금술사가 되지 못해 나라를 불사 지른 광인이야. 나의 노예가 되며 얻은 새로운 기회를 이용해 그는 1급 연금술사의 자격을 얻으려 하고 있다.. 물론 이미 너무 늦어 허울뿐인 자격이지만...’
장수종인 엘프 교수에게 노예처럼 부려 먹혀진 헬러스는 언제나 2급 연금술사로 살아왔다. 그 덕에 웬만한 시약이나 포션은 눈감고도 만들며 현자의 돌도 연성이 가능하다. 하지만 1급 연금술사들만이 만들 수 있다는 3대 영약의 제조법은 모른다고 했다.
엘프 스승이 죽는 순간까지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그런고로 헬러스는 3대 영약을 만들 재료를 구해다 주면 그걸로 실험해보고 싶다고 했다.
‘만약 영약을 만들어내면.. 나부터 먹게 해준다고 했었지...’
얼마나 굉장한 영약일지 가늠이 안 되는 넥타르, 소마, 엘릭서. 나는 그걸 꼭 맛보고 싶었다. 그런 고로 세계수의 수액을 빨아먹고 자라 분비물에 수액의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는 진딧물은 무조건 구입해야 하는 녀석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구입하니 놀라울 지경이군. 자네... 생각보다 돈이 아주 많아.”
“뭐.. 그렇죠.”
지금도 실시간으로 일하는 노예들이 있으니까. 사실상 주인님이 아니라 사장님이다. 덕분에 나는 여기서 코인을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고 노예들은 그 혜택을 받게 되니 상부상조다.
어쨌든 순식간에 십사만 사천 코인을 사용한 나는 남은 두 개의 품목도 빠르게 확인했다.
[길 잃은 요정: 길을 잃은 요정입니다. 갈아 마실 경우 마력이 100증가합니다. 꽃을 먹일 경우 날개를 털어 매일 일정량의 요정가루를 흘립니다. 항상 서럽게 울고 있습니다.]
[주의. 새장에서 풀어 줄 경우 근처의 인간을 행성 내의 랜덤한 장소로 날려 버립니다.]
[가격: 25000C]
이것도 재료로 귀중하게 쓰일 것 같으니 구입하고...
[인어왕자의 심장: 별도의 가공 없이 복용할 경우 잠수했을 시 아가미 호흡이 가능해지며 물갈퀴가 돋아납니다. 해저 도시의 왕에게 인어왕자의 심장을 바칠 경우 그들의 귀빈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의. 복용할 경우 모든 수중생물들이 적대적으로 변합니다. 상온에 보관 시 상할 수 있습니다.]
[가격: 80000C]
두 개다 굳이 배달하지 않아도 되는 크기의 물건이다. 추가로 1만 코인씩 소비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미친... 심장 하나에 팔만? 메르도 이렇게는 비싸지 않았는데...’
나는 엄청난 고민에 휩싸였다. 이걸 구입해 버리면... 제대로 된 노예를 구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앞선 물건들로 십만 코인 이상을 태워 버렸기 때문에 상당히 고민이 된다.
‘업적보상으로 받은 도박사의 황금동전을 사용하면... 코인 소모 없이 얻을 수 있지만.. 굳이 수중호흡이 가능해지는 심장 하나에 업적 보상을 소모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
흑사의 내단을 먹고 달성했던 ‘목숨을 건 도박’의 업적보상으로 받은 도박사의 황금동전. 그건 상인 NPC가 파는 물건은 하나 공짜로 얻을 수 있는 보상이다. 그걸 사용할 정도의 가치가 저 심장에 있을까?
'물론 가격이 저렇게 비싼 만큼 분명 중요한 물건이겠지. 더구나 지금 시점에서 해저 도시라는 장소의 키워드가 나왔다는 말은 언젠가는 가게 될 장소라는 뜻일 텐데...'
특히 해저도시의 귀빈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물건의 가치가 높아지는게 아닐까 싶다.
“왜 그래?”
“아.. 그게 너무 비싸서..”
내가 심장을 앞에 두고 고민하고 있자 체셔가 나에게 귓속말했다.
“흠.. 준아. 내가 저거 사줄까?”
“네?”
사실 그녀는 오늘 나에게 가이드 비용조차 받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선물까지 사주겠다니.. 너무 고맙지만 그럴 수는..
“아저씨. 이거. 내가 살게.”
“뭐? 허.. 그래, 알아서 해라.”
“체, 체셔! 너무 비싼데요..!?”
“됐어. 선물이야. 선물. 언젠가는 나를 이 끔찍한 새장에서 꺼내줄.. 백마 탄 왕자님을 위한 선물.”
체셔는 웃으며 인어왕자의 심장을 밀렵꾼에게서 건네받아 내 가방에 쏙 집어 넣어줬다. 나를 위해 무려 8만 코인이나 소비해주는 멋진 여자 친구라니...
“고마워요. 체셔.. 꼭 보답할게요.”
“응! 너무 부담가지지는 마! 그냥 매주 보러와주기만 해도 되니까.”
"체셔...!"
나와 체셔가 팔짱을 끼며 서로를 향해 미소 짓자 밀렵꾼은 콧방귀를 뛰더니 손을 내저었다.
“빌어먹을 녀석들. 볼일 다 봤으면 썩 꺼져! 그리고 체셔!! 너는 분명 내 뒤를 잇게 될 거다... 괜히 꿈과 희망 품지말고 수습 밀렵꾼 수업이나 들어!”
“헛소리 마시지!! 메롱이댜! 준! 빨리 도망가자! 저 늙은이가 자꾸 이상한 소리하기 전에!!”
체셔는 장난스럽게 밀렵꾼을 놀리더니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읏챠!”
“후우...”
밀렵꾼의 움막을 빠져나옴과 동시에 우린 마약 중독자들이 널려 있는 지하수로에 도착했다. 빠르게 구걸하는 거지 놈팡이놈들을 대충 걷어차며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마약상의 가게, 드러그 앤 러쉬에 들어갔다.
그런데... 마약상의 모습이 이상했다.
“어서 오세요. 드러그 앤 러쉬에.”
내가 만났던 마약상은 항상 여장남자의 모습이었다. 머리가 두 개 달려 있으며, 한쪽 머리는 항상 약에 취해 있는.. 근육질 적인 여장남자.
심지어 말투도 여성스러워서 상당히 징그러웠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진짜 바텐더처럼 검은 슬랙스에 새하얀 와이셔츠와 검은 넥타이를 입고 있었고 까만 단화를 신은 말끔한 차림이었다. 여전히 한쪽 머리는 약에 쩔어 있지만... 머리를 깔끔하게 손질한 그는 분명 멋있는 바텐더로 변해 있었다.
“어?”
“잭슨!”
“오, 이런. 체셔, 오랜만이군요.”
체셔는 마약상을 잭슨이라고 불렀다. 분명 지난번에는 분명 고급 술집의 마담처럼 입고 있었던 제키였을 텐데... 지금은 잭슨?
“아하. 준은 모르겠구나. 이쪽은 잭슨이야. 자세히 보면 제키 때랑 깨어 있는 머리가 다르지?”
“어? 그러네요?”
체셔의 지적에 나는 그제야 깨어 있는 머리가 전과는 다르단 사실을 눈치챘다.
“하하.. 저의 쌍둥이 여동생인 제키와 저는 번갈아 가며 몸을 사용합니다. 정확히는 번갈아 가며 서로에게 약물을 실험하고 있죠. 지난번에 찾아오셨을 때에는 제가 한창 새로운 신약을 실험 중이었습니다. 때문에 제가 아니라 동생인 제키와 마주치셨겠지요.”
놀랍게도 두 쌍둥이 남매는 하나의 몸을 두고 서로 번갈아 가며 마약을 투여 중이었다. 마약의 효과를 한쪽 머리가 오롯이 감당하는 동안 다른 쪽 머리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거다.
뭐랄까.. 실험정신이 투철하다못해 미쳐 버린 수준이었다. 딴 놈들에게 임상시험을 하기 전에 자기 몸에 먼저 투여해 보는 광적인 약쟁이들이라니...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저 몸의 원래 주인은 잭슨이라는 점이다. 그는 죽어 가던 쌍둥이 여동생의 머리를 때서 자기 몸에 이식했다고 말했다.
“뭐, 그런 사연이 있었죠. 암시장에선 비교적 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모처럼 오셨으니 칵테일 한잔 서비스로 드리겠습니다. 모든 종류의 칵테일이 주문 가능하니 말만 하시죠. 파우스트? 러스티 네일? 블루 하와이? 아니면 섹스 온 더 비치와 같은 유명한 녀석도 가능합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코블러 셰이커를 흔들고 있는 잭슨에게 칵테일을 주문할 뻔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마력이 있어서 뭔가 이야기를 귀담아 듣게 만드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미친...’
하마타면 마약상에게 음료를 한잔 얻어 마실 뻔했다. 물론 그전에 체셔가 말렸겠지만 만약 한 모금이라도 마셨다간... 나도 저 지하수로를 전전하는 약쟁이 거지 놈이 되었겠지.. 소름끼친다.
“안 속아요, 잭슨. 오늘의 추천메뉴나 보여주세요.”
“후후. 알겠습니다. 똑똑하신 고객님. 그럼, 여기. 오늘의 추천 메뉴를 보여드리죠.”
잭슨은 장난을 실패한 아이마냥 눈웃음을 치더니 카운터 아래에 숨겨둔 주류를 4병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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