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 155. 우리 헤어지자
* * *
“여기 봐.”
“또 죽어 있는 시체들이군.”
“팔찌가 있는 거로 봐선...”
“우리 같은 플레이어들이 확실하지. 뭘 고민하나.”
우린 괘종시계가 작동할 때까지 출구를 찾기로 했다. 그런데 저택을 돌아다니다 보니 한 가지 확신이 들었는데, 여긴 고위이족들이 돌아다니는 더 머나먼 미래의 시간대는 아니었다. 지금은 탈출구가 있을 현대의 시간대다.
그렇게 확신한 이유는 고위이족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족은 한 마리도 없었고 오히려 죽어 있는 사람의 시체나 우릴 보고 도망가는 플레이어들이 더 많았다.
죽어 있는 시체들도 그렇고 어쩌면 이 시간대에 가장 많은 인원이 떨어진게 아닌가 싶다.
“시체는 이미 싹 털린 상태다. 제대로 남아 있는 게 없군. 이런 장소만 아니었으면 장기까지 다 털어갔겠어.”
바이유는 죽어 있는 시체를 뒤적거리더니 짜증스럽게 말했다. 찾는 시체들 마다 짐이 죄다 털려 있으니 짜증스러울 만도 했다. 나도 파밍 할게 없는 시체들만 자꾸 나와서 좀 짜증 난 상태였으니까.
“어쩌면 다들 이 시간대에서 대기 중일지도 모르겠네.”
“이 시간대? 그게 무슨 소리지?”
시간대에 대해 묻는 닉. 언제까지고 감출 수는 없었기에 나는 닉과 바이유에게 저택에 엮여 있는 4개의 시간대에 대해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했다.
“과연.. 출구를 찾은 놈들은 출구 근처에서 죽치고 있겠군.”
탈출구가 이 시간대에 밖에 없으니까 출구도 여기에만 있을 터. 그렇다면 누군가 인장반지를 가지고 나올 거라 여기고선 출구 근처에서 무한정 대기하는 놈들도 분명 있을 거다. 물론 출구가 이 시간대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놈들도 많겠지만.
‘시간 이동을 할 줄 모르는 놈들은 여기 죽치고 있겠지...’
그러다 문득 나는 지금까지는 팀원들인 바이유와 닉의 존재에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가정하지 않았던 가능성들이 몇 개 떠올랐다.
“그런데 만약에 말이야.. 이미 반지를 들고 나간 놈이 있다면 어떡하지?”
“뭐?”
나의 말에 바이유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런 일은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이.
“뜻밖에...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또 아니지. 확실히 준의 말이 맞다.”
닉은 내 말에 동의하며 고민에 빠졌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팀원들이 전원 도굴이라든지 아니면 도둑질이나 뭐 그런 기술에 특화된 클래스를 가진 상태에서 시간 이동 방법을 간단히 알아내고 팀워크도 무진장 좋다면 이미 다 털어먹고 저택을 빠져나갔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굉장히 낮겠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또 아니다.
“잠깐! 우리 저택에 들어온 지 하루도 안 됐다고! 그런데 벌써 가지고 나갈... 미친놈이.. 있으면 어떡하지..”
바이유는 처음엔 격하게 닉과 나의 생각을 부정하려 했지만 말을 이어 나갈 수록 자신감이 떨어지더니 종국엔 완전히 절망한 얼굴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나는 절망스런 표정의 바이유를 보며 말을 이었다.
“먼저 인장반지를 탈취하고 나갔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방법 따윈 없다. 여긴 기간제한도 없고... 무한정 열려 있는 던전 같은 곳이니. 먼저 알맹이만 쏙 빼먹고 나갔다고 해도.. 우리가 그걸 알아챌 방법이 없어. 어쩌면 멍청하게 여기서 시간 낭비하게 될 수도 있지.”
심지어 반지를 탈취한 놈이 어딘지 모를 시간대에서 죽어 버리면... 반지를 찾기 위해 모든 시간대를 돌아다니며 저택을 샅샅이 뒤져야만 한다. 내가 이런 가정까지 전부 설명해주자 바이유는 쭈그려 앉더니 눈가를 문질렀다.
“젠장.. 맞아.. 다 맞는 말이군.. 젠장... 젠장...”
답이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 저택을 돌아다니는 게 우리뿐이라면 그냥 거침없이 인장반지를 구하러 가 버리면 되지만 15개 이상일지도 모르는 공략조들이 제멋대로 설치며 돌아다니는 중이니까.
‘그야말로 혼돈...’
정해진 행동만 하는 NPC가 아닌 플레이어들은 어떤 멍청한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어쩌면 인장반지를 얻지도 못하고 여기서 빠져나갈 수도 없어질지도 모르지.
“일단은 출구를 계속 찾아보자.”
당장은 어찌 대처할 방도가 없었기에 입구를 계속 찾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약 1시간 동안 저택을 돌아다닌 끝에 우린 출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삼각형 유리창...”
“저택에서 유일하게 하얀 문.”
“장미문양까지. 저거로군.”
이때까지 저택을 돌아다니며 본 문들은 죄다 어두운 갈색의 나무 문들이었는데 출구만은 하얀 페인트로 칠해져 굉장히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
그리고 출구 앞에는 진을 치고 있던 여섯 명의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우리의 예상대로 입구 앞에는 두 개나 되는 조가 미리 와서 대기 중이었다.
아마 이 녀석들이 합심해서 플레이어들을 습격하고 물건을 빼앗은 거겠지. 이익을 위해 놈들은 나름대로 연합을 구축한 놈들인 모양이었다.
보글보글..
“꿀꺽.. 뭘 저리 끓이는 거지?”
“모르겠군. 고기 냄새가 난다만..”
“꿀꺽...”
놈들은 입구 바로 앞에서 불을 피워두곤 뭔가를 끓여먹고 있었다. 이에 바이유는 고기 냄새에 입맛을 다셨다. 다행히 놈들은 아직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자기네들끼리 신나게 떠들며 냄비에 들어 있는 건더기를 퍼먹기 바빴다.
‘꼴을 보니 여섯이서 다른 플레이어들을 털어먹으며 꽤 자신감이 올라간 모양이로군. 그러니 저렇게 무방비하고 먹고 마시고 있지.’
마음 같아선 바로 심연아귀 융단폭격으로 놈들의 머리를 죄다 뜯어내고 싶었지만, 나는 지금 전투 불능 생산직 클래스라는 컨셉을 유지 중이라 전투를 닉과 바이유에게 맡기기로 했다.
“저놈들 무슨 말하는지 알아듣나?”
“흠.. 스페인어 같기도.. 대화를 시도해볼까?”
바이유의 질문에 닉이 아리송하게 대답하며 놈들과 대화하려고 해서 내가 얼른 막았다. 대화는 무슨 대화야. 그냥 놈들이 눈치 못 챘을 때 빨리 쓰러뜨려야지.
“무슨 언어를 쓰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저 새끼들 다른 생존자들을 무참히 죽인 살인마들이야.”
“확실히... 시체들의 상태가 예사롭지 않았었지..”
“그래, 분명 잔혹하게 고문하다 죽였을 놈들이다. 저런 놈들은 대화가 안 통해. 그냥 쓰러뜨리자. 나한테 놈들을 속박할 아이템이 있어. 이걸로 저놈들을 써먹자.”
나는 억압용 입마개와 조련용 밧줄을 가방에서 꺼내 보여줬다. 입마개는 익히 알다시피 상대의 능력을 봉인하는 도구고 조련용 밧줄은 실종자들의 숲에 들어가기 전에 보부상에게서 구입했던 물건으로, 길들이고 싶은 짐승의 목에 채워 말을 듣게 만드는 물건이다.
“너는 정말 별별 특이한 물건들을 다 가지고 다니는군... 좋아. 두 녀석만 죽이지 않고 쓰러뜨려 보지.”
닉은 내 설득에 넘어와 약한 적과의 의미 없는 대화와 같은 쓸데없는 짓으로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 곧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바이유도 양손을 빛으로 휘감는 스킬을 사용하며 달려 나갔다.
한참 뭔가를 끓여먹고 있던 놈들은 순간 복도 끝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자 눈살을 찌푸르며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허나 놈들이 상대해야 할 적들은 일반적인 플레이어의 차원을 벗어난 놈들이다. 바이유의 주먹질에 고기를 뜯고 있던 놈의 앞면이 함몰되며 뒤통수가 터져 나갔다.
그사이 칼춤을 추기 시작한 닉. 그에 의해 플레이어들의 사지가 베이며 목숨을 잃었다. 전투는 순조로웠다. 나는 열심히 싸우고 있는 두 놈에게 박수를 치며 상황을 주시했다.
‘그런데 닉 저 녀석... 스킬하나로 더럽게 우려 먹는군...’
닉은 시종일관 검을 빛으로 물들이는 스킬만 사용했다. 연비가 제일 좋아서 저 스킬만 쓰는 건지... 아니면 그저 쓸 수 있는 빛과 관련된 스킬이 저것뿐인 건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처럼 자기가 가진 패를 숨기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에 반해 바이유는 이때까지 총 3개의 빛 관련 스킬을 썼다. 첫 번째는 돼지 가면을 죽일 때 사용했던 온몸을 빛으로 물들이는 스킬이고, 두 번째는 토끼 가면을 죽일 때 사용한 빛을 쏘아내는 스킬이었다. 마지막이 방금 쓴 양손을 빛으로 물들이는 스킬이다.
‘아마 저것 말고도 육체 강화계열 스킬을 몇 갠가 더 사용한 상태겠지...’
바이유의 스킬 사용이 닉보다 더 다채롭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닉 저 새끼... 선신 진영이라더니.. 맞나?’
어쩌면 닉이 선신진영이라 빛의 검을 쓰는 게 아니라, 그가 가진 검 자체가 특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려 세 자루나 허리춤에 차고 있는데 그중 2개는 뽑지도 않았다. 이때까지 닉이 사용한 검은 저 양날 직검 하나다. 어쩌면 검이 빛나는 것은 놈의 스킬이 아니라 그저 저 검이 가진 효과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지.
그렇다면.. 내 가설과는 달리 닉이 777의 용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특이한 검을 사용하는.. 선신 진영의 플레이어거나. 아니면 그마저도 거짓말이고 그저 선신 진영임을 설파하고 다니는 사이비일지도 모르지.
‘전력을 감추고 있는 건지.. 아니면 거짓말을 친 건지...’
솔직히 잠정적 범죄자(용사)를 닉으로 규정하고 있었는데... 너무 하나의 사고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내가 두 사람의 전투를 분석하고 있을 때쯤 여섯 명 중 네 명이 사망하고 나머지 두 명은 바닥을 기며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마음 같아선 노예낙인까지 딱 찍어 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참아야 했다.
나는 쓰러진 두 놈에게 억압용 입마개와 조련용 밧줄을 묶었다. 이제 이놈들은 유사노예다.
“이 새끼들 이거. 아주 먹을 걸 쌓아 뒀군.”
“인장반지를 가진 놈이 올 때까지 기다릴 속셈이었겠지.”
바이유는 쓰러진 플레이어들의 짐을 뒤지며 기뻐했다. 아예 가방 하나를 빼앗아 식량을 쓸어 담고는 자기가 멨다.
“닉. 이 두 놈들이랑 대화가 되나?”
“음.. 잠시만.”
닉이 영어로 말을 걸자 사로잡힌 두 놈 중 하나가 닉과 대화를 시도했다. 역시 영어는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라 그런지 할 줄 아는 사람이 꼭 한 두 명 식 있다.
“이봐, 준. 새로운 정보다.”
“응? 뭔데?”
“여기, 이 팔찌를 착용해 봐.”
“이건..”
닉은 죽어 있던 놈들의 시체에서 팔찌를 빼낸 다음 나에게 넘겨줬다. 조원들끼리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팔찌였다.
“설마...”
“그래, 그 설마다. 다른 조의 팔찌를 빼앗으면 그 조에 속한 나머지 인원들과 대화가 가능해진다더군.”
“허...”
정말로 닉이 건네준 팔찌를 착용하자 사로잡힌 포로 두 명과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이거 슬슬... 계획을 실행해도 되겠군...’
의사소통 가능한 포로를 무려 둘이나 얻었다. 그렇다면 계속 생각만 해왔던 제안을 닉과 바이유에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이쯤에서 탐색 방법을 바꾸지.”
“뭐?”
“무슨 방법?”
“이제부터 흩어져서 찾자.”
두 놈 중에 용사가 있을지 없을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기 입으로 선신 진영이라 말한 놈들이다. 그러니 꼭 처리해야 할 적들이라고 할 수 있지.
고로 나는 아까 전부터 놈들을 엿 먹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려면 두 놈을 떨어뜨릴 필요가 있었는데.. 이게 웬걸. 딱 맞는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좋아... 수작을 부려볼까...’
선신진영인 닉과 바이유를 떨어뜨린다. 그다음 기억 소거제를 한놈에게 먹이고. 남은 놈은 만티의 서를 읽히는 거지.
실로 완벽한 계획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