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156. 손 안 대고 코 풀기
* * *
“잠깐, 잠깐잠깐. 흩어져서 찾자니. 그게 무슨 소리지?”
바이유는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따져 묻기 시작했다. 닉도 탐탐 찮은 반응이었다. 두 사람 다 내가 팀을 나누자는 말에 부정적이었다. 이건 조금 설득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무작정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일단 내 말 좀 들어봐.”
“이봐. 어떻게 부정적으로 듣지 말라는 거지? 따로 움직이자니. 그러다 하나 죽으면. 그러면 미션 실패라고. 알아 들어?”
“아씨. 좀 말 좀 들어 보라고. 말 끊지 말고.”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내자 바이유는 이런 이상한 의견을 들어 줄 거냐는 표정으로 닉을 쳐다 봤다. 닉은 바이유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들어 보자고. 흩어지자는 이유가 있을 거야.”
“야!! 이 썩을 코쟁이 새끼가!!”
“진정해라, 차이나맨. 의견도 제대로 들어 보지 않고 무시할 수는 없잖아. 그리고 너는 어쨌든 무조건 부정적이니까. 좀 진정하고 상대의 말을 들어줄 필요가 있다.”
“하.. 미치겠군.”
바이유는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더니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다들 조용해졌다. 나는 분위기가 잡힌 것 같으니 슬슬 입을 열었다.
“잘 들어봐. 일단 시간여행하는 방법을 내가 알아. 맞지?”
“그렇지.”
“그리고 우리는 출구도 찾았어. 맞지?”
“그렇지.”
“인장 반지를 우리보다 빠르게 습득했을 녀석이 있다면.. 무조건 여기로 온다는 소리야. 입구는 여기 하나뿐이니까.”
“맞지.”
“그러니까. 누군가는 다른 조가 지나갈 수 없게 입구를 지켜야 해. 누군가는 인장반지를 구해야 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팀을 나눠야 한다는 말이지. 그리고 내가 봤을 때, 닉과 바이유 너희 둘은 역대급으로 강하다. 그러니 흩어져도 다른 플레이어에게 죽을 일은 없단 거지.”
닉과 바이유는 강하다. 그래서 나는 닉과 바이유를 떨어뜨릴 생각이다. 둘이 붙어 있으면 왠지 모르게 나를 견제하는 느낌이니까. 특히나 바이유 이 새끼 반응이 꼭 뭔가를 눈치챈 것 같아서 껄끄럽고 짜증 난다.
그러니 둘 중 하나를 떨어뜨린 다음 나와 같이 있게 만들고서 술을 먹이든 책을 읽히든 수를 쓰는 거지.
둘 다 붙어 있으면 두 놈을 상대하다가 내가 역으로 당할지도 모르니까. 두 사람 다 아직 내 앞에서 전력을 다 내비치지 않았기도 하고 어떤 비장의 수를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 더욱이 둘 중에 한명이 777이 확실하다면 정말 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래도 일대일은 해볼 만하지.'
두 놈을 동시에 상대하기가 버거울지도 모른다는 거지 한 놈만 잡는 거라면 자신 있다.
“반지를 들고 나가는 놈들이 있나 감시하기 위해서?”
“맞아. 반지를 들고 나가 버릴 지도 모르니까. 수문장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지.”
“흠.. 계속해봐.”
“닉과 바이유 너희는 전투력이 높으니까... 너희 둘 중 한 명이 수문장으로 여길 지켜줬으면 좋겠어. 그럼 나와 나머지 한 명이 괘종시계로 시간여행을 하면서 반지를 수색할 테니까.”
“흐음.. 두 사람이 돌아오기 전까지 여기서 버티라는 거군.”
닉은 고민에 빠졌다. 그도 인장반지를 먼저 탈취한 조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금 전부터 계속 하고 있었을 테니 더 쉽게 나의 말에 동조된 거겠지.
닉이 동의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자 바이유는 입마개와 밧줄로 억압당하고 있던 두 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이 두 놈은?”
“당연히 시간여행에 데려가야지.”
“둘 다 데려간다고?”
“그래, 괘종시계는 세 명 이상일 때만 작동해. 그러니까 둘 다 데려가야 한 놈이 죽어도 우리가 돌아다닐 수 있지. 펑크 났을 때를 대비한 일종의 예비 타이어인 셈이야. 그리고 입마개 낀 놈과 달리 밧줄로 묶어둔 이 녀석은 능력도 사용 가능하니까 내가 위험해지면 대신 몸빵시키면 되고. 어때?”
내 제안에 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동의한 듯했다. 바이유는 여전히 내가 팀을 나누자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였으나... 그도 내가 말한 방법이 썩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그럼 일단 나와 차이나 맨 둘 중에 누가 여기 남아서 문을 지킬지 정해야겠군. 이봐, 차이나 맨. 너는 어떡하고 싶나?”
“뭐? 나는...”
“너의 결정에 따르지. 나는 준을 지키며 반지를 찾는 것도 괜찮고. 홀로 남아 입구를 지키는 것도 괜찮거든.”
“흐음...”
나는 솔직히 누가 나를 따라 나서든 상관없었다. 누가 됐든 나를 따라나선다면 적당히 위기상황으로 몰고가 사로잡아서 기억 소거용 와인을 먹일 거다. 기억을 싹 지워버리고 적당히 속인 다음 데리고 다니면 되니까. 그리고 동료인척 클래스와 행운 스탯을 물어보는 거지.
‘둘 중에 하나가 만약 777인데 나에게 기억 소거까지 당한 상태라면... 그대로 만티의 서를 읽게 만들어서 완전히 조져 버릴 수 있지 않을까. 데리고 다니는 거야 나머지 두 노예 후보들에게 시키면 그만이고.’
만티의 서 때문에 움직일 수 없게 되어도 만약 밖에 동료가 있다면 구해는 주겠지. 아니라면 그대로 객사하겠지만.
'만약 전율저택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료가 있거나.. 아니면 구하러온 다른 선신의 추종자들이 777을 무사히 구해 낸다고 해도 1년간은 움직이지도 못한 상태로 멈춰 있겠지.'
그렇게 멍청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고 거기다 세상은 완전히 망해 있으니 어찌할지 감도 못 잡고 알아서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내가 아무리 수작질을 부려도 여길 빠져나가는 순간 선신들이 777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겠지만.’
내가 악신들이 준비한 가장 훌륭한 도구인 것처럼 777 또한 만신전의 와일드카드 같은 존재다. 기억을 잃고 시간까지 동결된 놈을 선신들이 가만히 방치할 리가 없다. 분명 무슨 수를 써서든 원상태로 돌려놓으려고 하겠지.
‘예상보다 빨리 속박에서 풀리고.. 기억이 돌아온 다고 하더라도 놈들을 곤란하게 만들고 시간까지 벌 수 있는 셈이니...’
무엇보다도 엿 같은 선신들에게 엿을 제대로 먹일 수 있다는 점에서 최고다. 관음증 걸린 선신 놈들의 관측을 막기 위해 카쉬낙스가 얼마나 고생 중인데. 내가 소소한 도움을 줘야 하지 않을까.
선신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고 있자 바이유가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다.
“내가 가지.”
“그래?”
“그래. 나 혼자 남기 싫으니까. 그러니 네가 남아라, 코쟁아.”
“하하하.. 좋다. 그럼 내가 여기서 문을 지키고 있지.”
나와 함께 시간여행을 할 사람은 바이유로 정해졌다. 우린 밥을 먹고 잠시 휴식을 가지며 시간을 보냈다. 이후 손목시계를 확인한 다음 괘종시계 앞으로 갔다.
“가 보자고.”
“하아... 야”
“뭐. 왜.”
“괜한 짓 하지 마라.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으니까.”
“이상한 짓이라니. 꼭 내가 뭔가 저지를 것 같다는 의미잖아. 사람을 너무 못 믿는 거 아니야?”
“흥. 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그러냐? 참 피곤하게도 산다. 그렇게 살다간 스트레스로 일찍 죽어 임마.”
“지랄.. 그렇게 살았으니 이때까지 살아남은 거다.”
“하. 그래, 그래. 알겠다고. 슬슬 간다.”
방금 막 하루가 지났다. 난 괘종시계의 시곗바늘을 4시 44분 44초로 돌렸고 곧 우리의 몸은 또 다른 시간대로 전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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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당탕!
천장에 검은 홀이 생기며 조준과 나머지 일행들이 떨어졌다. 바이유가 제일 먼저 떨어지고 그다음 조준이 그의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들 옆으로 사로잡은 다른 조원 둘이 한 대 뒤엉켜 떨어져 내리며 열렸던 구멍이 닫혔다.
“제기랄... 왜.. 항상 내가 제일 밑인 거야...”
바이유는 아파 죽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에게 떨어진 조준을 거칠게 밀어냈다.
그는 조준이 영 못미더웠다. 닉은 듣지 못했으나 귀가 좋은 바이유는 조준이 갈고리에 걸려 있던 남자를 죽이며 ‘바칩니다’라고 작게 중얼거린 걸 엿들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인간을 죽이며 ‘바칩니다’라고 말할 리는 없을 테니 바이유는 조준이 만귀전이란 사실 자체를 의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자신이 만신전이라고 닉을 속인 것처럼.
“끄으윽...”
“아파...”
그때 억제용 입마개를 찬 플레이어가 말을 할 수 없으니 고통 어린 신음만 흘렸고 밧줄이 목에 감긴 플레이어는 허리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이유도 그들을 따라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읍..! 으읍!!”
“뭐? 풀고 싶다고?”
“읍!!”
억제용 입마개를 한 플레이어가 조준을 향해 입마개를 풀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어딘지도 모를 시간대에 떨어졌는데 능력이 봉인된 상태라 그는 굉장히 불안 하고 초조했다. 허나 조준은 그럴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입마개를 착용하고 있던 플레이어는 격분했다. 그때 바이유가 팔을 들어 올려 더 이상 큰 소리가 나지 않게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러곤 목소리를 낮춰 모두에게 경고했다.
“잠깐.. 다들 조용히 해 봐... 뭔가 들린다.”
바이유는 뭔가를 감지했다. 조준은 바이유의 말대로 입을 닫고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 인간 냄새다.
꾸르륵... 또.. 인간이군...
꾸럭... 신선한 뇌...
뭔가 촉수들이 꿀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네 명의 플레이어들 중 그들의 말을 이해한 사람은 조준뿐이었다. 만마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그는 저들이 떠드는 소리가 무슨 말인지 전부 이해했다.
허나 그렇지 않은 바이유와 나머지 둘은 점차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괴하고 끔찍한 목소리에 점점 정신이 오염되기 시작했다.
“젠장... 뭔가 이상한 게 문 너머에 있어.. 끄윽..”
바이유는 갑작스러운 편두통을 느끼며 식은땀까지 흘렸다. 그는 순식간에 정신적으로 몰린 듯했다.
조준은 안색이 급격히 나빠지는 바이유와 나머지 두 사람을 확인하곤 여기가 어느 시간대인지 알아챘다.
‘이런 정신 공격을 걸만한 상대는... 미래의 시간대에 있을 이족들뿐... 잘못 왔군... 아닌가.. 오히려 기회일지도.. 나는 만마의 총애가 있으니...’
조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재채기를 시전 했다.
“애취!!!”
“이런 미친 새끼가!!”
전혀 참지 않은 듯한 조준의 커다란 재채기 소리에 순간 바이유는 진심으로 그에게 살심을 품었다.
그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애써 숨죽이고 있었는데 그 모든 노력이 미친놈의 재채기 한 방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니...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여기서 더 좆 같은 점은 조준이 미안하다 말하며 멋쩍게 웃었단 거다.
‘이놈 설마 일부러..!?’
바이유는 조준의 해맑은 미소를 보고 그가 일부러 재채기를 해서 방 밖에 있을 괴물들의 주의를 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이유는 소름이 끼쳤다. 조준은 미친놈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곧 문이 터져 나가며 촉수로 이루어진 괴물들이 들이닥쳤다.
바이유는 울고 싶어졌다.
역시 닉과 떨어지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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