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 158. 거짓말은 더한 구라로 받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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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링... 딱 봐도 여자 이름인데.. 설마 이 새끼 성별을 숨기고 저택에 들어온 건가... 교활한 놈..’
‘TS주사’나 ‘혼란스런 당신’과 같은 성별 전환용 아이템을 나만 얻었으리란 법이 없다. 보부상은 전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고 업적보상이나 기타 여러 방면으로 아이템을 얻을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포칼립스의 세상에서 뭇 남성들의 손길을 피하고자 남자로 성별을 바꾸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특히나 얼굴이 예쁜 여자라면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으므로 TS관련 아이템이 나오면 무작정 사용하는 편이 좋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법과 도덕이 사라진 세계에서 여자란 힘 있는 놈들의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니까. 당장 나만해도 노예낙인으로 괜찮다 싶은 여자는 죄다 내 여자로 만들었으니까.
‘뭐, 이 새끼가 여자든 남자든 무슨 상관이야... 중요한 건 이 새끼가 가진 행운과 클래스다...’
아무렴 어떠랴. 이 녀석이 여자든 남자든 나에게 중요하진 않다. 어차피 저택을 빠져 나가면 논공행상을 한 뒤 영영 헤어질 사이니까.중요한건 이 자식의 행운과 클래스다.
나는 여전히 지금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바이유... 아니, 메이링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메이링.. 설마.. 기억을 전부 잃은 거야..?”
“예..?”
“메이링.. 나, 기억 안 나? 나 준이야.. 준... 기억 안 나냐고... 젠장... 메이링..”
“누, 누구신데 그러세요...? 저, 지금 제 이름 말고..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데... 여긴.. 히이익.. 저것들 뭐야!”
그제야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확인한 메이링은 헛구역질을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우욱... 어... 내 몸.. 내 몸은 또 왜 이래.. 왜... 이게 달려있는 거지?”
더욱이 그녀는 자기 몸을 만지작거리더니 소스라 치게 놀랬다. 이름뿐만 아니라 성별까지도 어렴풋이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용량 조절을 확실하게 한게 아니라 어림잡아 먹인 거라 어쩌면 완전히 기억이 소거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 어째서 내 몸이.. 왜 가랑이에 고간이 있는 거지.. 아니, 내가 남자였나.. 끄윽.. 머리가..”
메이링은 기억을 떠올리려 했고 그 순간 두통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다. 저러다 기억이 돌아오는 불상사가 일어나진 않겠지? 방심할 수 없다. 나는 행운 666의 소유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다.
“메이링.. 일단 진정해.”
“이, 이 시체들은 다 뭐고.. 나는 왜 남자가...모, 모르겠어...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도 이젠 흐릿하고... 머리가.. 머리가 아파.. 아파...”
“진정해라, 메이링! 너는 저 바닥의 괴물들에 의해 잠시 성별이 바뀐 거니까. 그리고 지금 너는 기억마저 잃은 상태로 보인다. 괜히 뭔가를 떠올리려 하지마. 뇌가 이상해질 수도 있으니까.”
그래, 괜히 떠올리려 하지 마라.. 진짜 떠올릴까 봐 불안 하니까.
“기억이 안 나... 내 이름 말고는... 난.. 누구였지.. 난 대체... 그리고 당신은 누구지.? 알려줘.. 아무것도 모르겠어.. 무서워..”
“진정하고.. 일단, 우린 동료였어.”
“다, 당신과 내가.. 동료였다고...?”
“그래.. 이 험난한 세상을 함께 해쳐나가던... 진짜 동료. 거의 가족이었지.”
“아...”
“후우.. 일단은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 줄 테니 잘 들어 메이링.”
“으응.. 알겠어..”
나는 메이링에게 지금 세상은 재난영화마냥 박살 났고 우린 외계인들에게서 서로를 지켜 주던 동료였다고 말했다.
난 거짓 없이 진실만을 말했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세상은 진짜 망했고 우린 이족(외계인 추정)들을 상대로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지켜야 하는 조원이었으니까.
“과연... 그런 일이...”
“그래. 험난했지.. 그나마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메이링..”
다행히 메이링은 별다른 의심 없이 내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실제로 당장 눈앞에 죽어 있는 이족들도 있었고 칼질 몇 번으로 노예로 만든 존과 리암도 내 눈치를 보며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저기.. 그런데 이 두 사람도 동료야...?”
메이링은 두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적당히 여기서 만난 생존자로, 지금 함께 다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역시나 그녀는 내 말을 의심 없이 수긍했다.
‘너무 잘 믿어서 오히려 의심스럽군... 재앙이 시작되기 전에는 제법 순진한 여자였나? 지금은 웬 아저씨가 된 상태지만...’
메이링은 대충 무슨 상황인지 이제 알겠다면 몸에 묻은 파란색 피를 탁탁 털어내며 자리에게 일어섰다.
“정말 다행이야. 그래도 상황설명해줄 수 있는 동료가 곁에 있으니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아.. 고마워.”
이때까지 계속 불안해 하던 메이링은 조금 안심한 모양인지 오글거리는 멘트를 날렸다. 사내 새끼에게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받아서 그런지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속 알맹이는 여자니까 참기로 했다.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클래스와 스탯을 물어봐야 하니... 약간은 호감도를 높여둘 필요가 있지.
“저기, 근데 메이링. 너 클래스가 뭐였더라? 겜블러였었나?”
“응? 클래스?”
“그래, 스테이터스나 상태창, 메뉴 같은걸 떠올려 봐. 뭔가가 보일 테니까. 아, 행운 수치도 좀 알려 줘. 기억 상실 치료제를 만들려면 행운 수치를 알아야 하거든.... 참고로 나는 소환사야. 기억해둬.”
“아하.. 잠시만...”
행운수치를 알아도 기억을 돌아오게 만들 수 있는 방법 따위 없지만 적당히 거짓말했다. 메이링은 집중해서 허공을 응시하더니 곧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어..”
메이링은 의심할 겨를도 없이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을 확인한다고 바빴다. 나는 그녀가 상태창을 살피는 동안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777이기를...’
만약 777이라면 바로 만티의 서를 읽혀서 끝장낼 생각이다.
허나 나의 기대와는 달리 바이유는 선신측의 용사가 아니었다.
“어... 행운은 99.. 클래스는.. 트릭스터...?”
“뭐?”
“트릭스터라는데? 동료였다면서.. 설마.. 내 클래스도 몰랐던 거야?”
행운 99라는 소리에 너무 당황해서 눈에 띄게 반응하고 말았다. 그런데 메이링은 내가 자신의 동료인 주제에 클래스도 몰랐던 거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내가 놀란건 클래스가 아니라 행운 수치였는데 말이다.
'여기서 더 당황해하거나 어버버 거리면 나를 정말 의심할 게 분명하다. 자고로.. 구라는 자신감이야.'
나는 적반하장으로 메이링에게 큰소리쳤다.
어차피 기억을 잃은 상태니 내가 뭔 소리를 하든 메이링의 업보로 만들어버릴 수가 있었다. 애초에 기억을 상실한 그녀는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니야!! 내가 네 클래스를 몰랐을 리가 없잖아!! 네가 나한테 거짓말한 거야!!!”
“뭐? 내, 내가?”
“그래!! 이 거짓말쟁이야!! 너, 나보고 겜블러라며!!! 트릭스터라니!! 역시.. 날 속이고 있었구나..”
“아, 아니야!! 그게 아니라..”
“어쩐지 나에게 알려주지 않더라니... 결국 나를 버리고 떠날 속셈이었겠지.. 약해빠진 소환사는 별볼일 없으니까.. 난 너를 진짜 동료라고 믿고 있었는데... 실망이다..”
내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버리자 감수성 풍부한 여성인 메이링은 횡설수설 변명하려했다. 당장 제대로 기억나는 것도 없는 상태에서 한적도 없는 일을 사과하려니 말이 꼬이겠지.
‘그보다.. 이 녀석... 99의 트릭스터라고? 클래스 이름부터 골치 아픈데... 만귀전 쪽인가? 만마전은 확실히 아닐 거고...’
트릭스터와 관련된 신은... 내가 알기로 로키나 헤르메스 정도다. 고로 메이링은 고대신들이 모여 있는 만귀전 소속이 아닐까 싶다.
'지가 진짜배기 만귀전 소속이었으니... 날 의심했던 걸까...'
내가 만귀전 소속이라 했을 때부터 나를 의심했었던 게 아닐까. 이유야 어찌되었든 나를 위심했던 바이유는 이제 없다. 남은 것은 재앙을 겪어보지 못한 모지리 메이링뿐.
“됐어. 기억을 잃지 않았더라면 너는 계속 나를 기만했겠지. 지금이라도 알아채서 다행이네.”
“아, 아니.. 그, 그런 게..”
나는 메이링의 손을 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다시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불안 해하든지 말든지 내 알 바 아니다. 이제 기억을 싹 지워 버린 바이링인지 메이유인지 뭔지 하는 새끼 한테 볼일 없다.
‘남은 후보는 닉... 그 새끼는 정말 용사일까..’
내 다음 목표는 닉이다. 닉도 어쩌면 777이 아닐 수도 있다. 심지어 바이유 이 새끼처럼 만신전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미 조지기로 마음먹은 상대니까..
“일단 계속 움직이자. 그리고 메이링.. 이젠 나에게 거짓말하지 마. 네가 내 믿음을.. 배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응.. 미안 해..”
그래도 저택을 빠져나가기 전까진 써먹어야 하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여줬다. 그러자 감동받은 듯 나를 쳐다보는 허름한 차림의 짱깨.
'바이유일 적에는 그래도 남자 같아서 이질 적이진 않았는데...'
남자의 모습으로 계속 여성스럽게 행동하니 영 적응이 안 됐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따라와. 괜히 이상한 거 손대지 말고.”
“응.. 알겠어..”
그렇게 상황은 일단락 됐다. 저택을 배회하던 이족들은 바퀴 떼에 의해 질퍽한 시체가 되었고 칠흑바퀴와 새끼바퀴 떼는 내 명령에 따라 저택에 남아 있는 생명체들을 사냥하러 갔다.
‘굳이 이 시간대에 배회하는 건 시간 낭비니까...’
적당히 돌아다니다 별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난 이중나선 회중시계를 사용하려고 했다. 이족들의 시체 때문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저택에 머물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때 칠흑바퀴에게서 무언가 신호가 왔다.
열리지 않는 방. 튼튼함. 부술 수 없음.
“으응?”
나는 칠흑바퀴의 신호를 따라 일행들을 데리고 갔다. 뭔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이하네.."
그곳엔 이때까지 저택을 돌아다니며 봤었던 문들과는 좀 다른 문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통짜 강철 문..?’
덜컹. 덜컹.
“흠... 안 열리네.”
이때까지 열리지 않았던 방은 대부분 닉과 바이유가 때려 부숴서 지나갔다. 솔직히 보부상이 건네준 도황의 만능열쇠를 쓸 필요조차 없었지. 그런데 이건.. 뭔가 부수기 어려웠다.
억지로 열어 보려고 힘을 써도 꿈쩍도 안 했고 닿는 걸 부패시키는 부정한 손길도 먹히지 않았다.
“메이링. 스킬 사용법 알지?”
“응.. 기억났어.”
“좋아. 이 문을 부숴봐.”
난 메이링에게 문을 부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메이링은 잠시 눈을 감고 집중하더니 양팔을 푸른 마나로 물들였다. 처음 보는 스킬이었다.
‘스킬 발동이 너무 느린데...’
바이유였다면 곧바로 스킬을 사용했겠지만 기억이 소거되며 전투 경험이 리셋된 메이링은 스킬을 사용하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쾅!!!
“이런.. 미동도 않는군.”
“그러게..”
푸른 마력을 덧씌운 메이링의 주먹질에도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까워서 안 쓰려고 했는데...’
난 결국 도황의 만능열쇠를 꺼냈다. 열 번밖에 못 쓰는 물건이라 최대한 아끼고 싶었지만 별수 없었다.
“자, 그럼.. 연다.”
열쇠 구멍이 있는 자리에 만능열쇠를 쑤셔 넣자 아무런 문제 없이 쏙 들어갔다.
딸칵.
문이 열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