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가 다운로드 됨-163화 (163/221)

〈 163화 〉 162. 자,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 * *

“하아.. 시발.. 해냈다.”

“후우.. 후우...”

출구가 있는 현대로 돌아온 조준과 메이링은 거친 숨을 골랐다. 조준은 숨을 고르며 자신의 판단이 맞았나 잠시 고민했다.

‘어쩌면 딸을 되찾은 가주에게 뭔가 선물을 받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 미친놈에게 뭔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것 같지 않아.’

조준은 본인 스스로를 그다지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자신의 비정상적일 정도로 배배 꼬여 있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 만약 그가 뭐든지 좋게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진즉에 죽었을 것이다. 자기객관화가 잘 되어 있었던 덕에 조준은 이때까지 몇번이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괜히 뭐라도 얻어 보겠다고 기다리고 있었다가 영혼추출기까지 다 뺐기고 그대로 놈의 실험체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분명 어찌하든 안 좋게 흘러갔을 가능성이 높아.. 더욱이 이미 나는 놈에게 도둑질하던 새끼로 찍혀서 첫인상을 말아먹은 상태였으니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잭의 팔을 뽑아내 던져 버리고 다른 사람이 딸의 모습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머리를 터트려 버리는 가주를 완전히 정신병자 취급 중이었다. 그런 정신병자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은 기대한 사람이 잘못이다.

조준은 자신의 더럽게 꼬여있는 운명과 미쳐버린 가주의 상태로 미루어 보아 가주에게 보상을 요구했다면 분명 안좋은 일이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한없이 정답에 가까웠다. 아마 도주하지 않고 가주에게 뭐라고 얻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기다렸다면 오히려 연구 자료를 훔치려한 도둑놈 취급을 받아 험한 꼴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전율저택의 가주는 감사보단 강탈을 더 좋아하는 존재였으니까.

‘원래 미친놈과는 오래 상종하는 게 아니야...’

원래 미친놈이 미친놈을 제일 잘 아는 법이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조준의 올바른 판단이었다. 그때 메이링이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잭씨는...”

“잭은 보니까 이미 죽었더라.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받아들여.”

“아하.. 이미 죽은 상태였구나..”

메이링은 잭의 시체를 확인하지 못해 자신들이 그를 버리고 왔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얼마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리암이 죽었을 때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잭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나니 메이링은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저택을 돌아다니는 내내 함께 해서 그런지 그와는 감정적인 교류가 좀 있었으니까, 잭의 죽음은 그녀에게 있어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이미 누군가의 죽음을 숱하게 경험해 본 조준은 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탈출할 때 저택에 남기고 갔어야 할 짐 덩어리를 조기에 처리했다는 생각에 즐겁기까지 했다. 아마 잭이 살아있었다면 착해진 메이링이 그를 구하기 위한 방법을 찾자며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을지도 모르니까.

“그만 일어나. 이제 바로 입구로 갈 거다.”

“응. 알겠어..”

조준은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이제 닉과 합류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물론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지만.

‘닉을 어떻게 조지지... 기억 소거용 와인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먹일 방법이 있을까?’

메이링은 적절한 위기 상황이 발생해서 어부지리로 기억 소거제를 먹일 수 있었지만, 닉은 위기 상황이랄 게 발생할 일이 없었다. 이미 저택 공략은 거의 다 끝난 상태였으니까. 결국 그를 최대한 속여서 그가 자의로 기억 소거제를 먹을 상황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닉에게 술을 먹일 방법.. 흠..’

먹이기만하면 만티의 서를 읽게 하는 건 그냥 누워서 떡먹기다. 조준은 머리를 굴렸다.

‘가만 보니.. 닉에게 약제사라고 구라를 쳤었단 말이지.. 흠.. 그냥 영약이라고 하고 먹일까? 그래, 우리를 기다리는 동안 수고했다고 말하면서 얼렁뚱땅 먹이는 거야...’

조준은 나름 머리를 굴렸다. 닉을 속이기 위해서라면 그는 지금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차피 소분해 둔 상태라 아이템 표시창이 안 떠서 뭔지 모를 거야.. 닉이 만약에 나를 컬티스트나 그에 준하는 존재라고 의심하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가망이 있다. 그래, 기억을 잃은 메이링이 컬티스트인 걸로 대충 몰아간 다음 닉을 기만해야겠군.’

그런 생각을 이어나가다 보니 조준은 어느덧 입구가 있는 곳 근처에 다다랐다. 입구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닉은 팔짱을 끼고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메이링이 조준에게 살짝 물었다.

“저기.. 저 사람은 누구야?”

“저 녀석은 닉이다. 우리의 동료였어.”

“아하..”

“네 사정에 대해선 내가 설명할 테니 아무 말 말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왜..?”

“닉은.. 여기 들어와서 만난 동료거든. 혹시나 우리를 뒤통수칠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너는 메이링이 아니라 바이유라고 저 녀석에게 소개했으니 그리 알고 있으면 돼. 이번만 보고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상대니까. 내가 지켜 줄 테니 나만 믿어라, 메이링.”

“응. 알겠어. 믿고 있어 준..”

어수룩한 메이링이 괜히 입방정 털지 않게 주의를 준 다음 조준은 닉에게 다가 갔다. 이틀간 조준에 의해 몇 번이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메이링은 철석같이 조준을 믿었다. 메이링은 지금 조준 말고는 믿을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저놈.. 멍때리고 있는 건가...빌어먹을 코쟁이 새끼.. 팔자 좋군...’

조준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콧노래를 부르는 닉을 보자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실제로 조준과 메이링이 죽을 둥 살 둥 개고생을 하는 동안 닉은 입구를 지킨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물론 닉은 혹여나 누가 올까 싶어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였으나.. 그건 조준과 메이링도 비슷했다.

그런고로 닉이 만약 여기를 무사히 벗어난다면 그야말로 조준표 버스를 제대로 탄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 다들 왔군!”

조준과 메이링이 가까이 다가오자 닉은 반가워 죽겠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안 그래도 슬슬 지루해서 미칠 것 같았는데 타이밍 좋게 두 사람이 나타나자 그는 드디어 이 저택을 탈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조준은 웃고 있는 닉을 따라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최대한 우호적인 상태가 되어야 기억 소거제를 스무스하게 먹일 수 있을 테니까. 조준은 웃기 싫었음에도 억지로 웃었다.

“닉! 오래 기다렸지!! 우리가 찾아왔다!! 반지를 구해 왔다고!!”

“오오오!! 준!! 바이유!! 해냈구나!!!”

닉은 인장반지를 꺼내 흔드는 조준을 보자 진심으로 기뻐졌다. 가만히 기다린 것 말고는 한일도 없는데 조원들이 알아서 반지를 가져오니 닉은 그야말로 횡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하. 거의 이틀 만에 재회했군. 별일 없었나?”

“그게.. 좀 많은 일이 있었어.”

“뭐?”

조준은 목소리를 낮춰 닉만 들리게 끔 작게 중얼거렸다.

“바이유가 들으면 좀 그런 이야기야.”

“아하..”

조준은 적당히 메이링을 쫓아내기로 했다.

“잠깐, 메이링. 닉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잠시 자리 좀 피해 줄래?”

“응?”

“여길 나가고 나서 받게될 보상에 대한 이야기야. 닉이 나와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네.”

“그, 그래도... 같이..”

“아니, 메이링.. 제발.. 날 좀 믿고 잠깐만 비껴줘. 최대한 우리에게 덕이 될 조건을 제시할 테니까.”

“어.. 아, 알겠어..”

메이링은 이게 무슨 일인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조준의 억지에 의해 잠시 다른 방으로 갔다. 메이링으로서는 동료라 생각 중인 조준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메이링이 없어지고 나서야 조준은 닉에게 제대로 구라를 칠 수 있었다.

“바이유가 메이링이라고?”

“하아.. 지금 바이유 저 새끼. 자기를 메이링이라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심지어 나에게 약간 집착하고 있어서 정말 미칠 것 같군.”

“뭐라고..?”

“미래로 갔을 때 외계인 같은 놈들에게 정신 공격을 당한 후로.. 애가 기억이 좀 뒤죽박죽 섞이더니 자기를 여자라고 생각해. 내 생각엔 자기를 자기 여동생으로 여기는 모양인데.. 자세히는 나도 잘 모르겠고 그냥 사내 새끼가 매달려서 죽을 지경이다.. 나는 호모포비아라 좀 많이 역겹더군. 무슨 말인지 알지?”

“그럼.. 알지. 이런. 엄청난 고생을 했군, 준..”

아주 거짓말이 자동으로 나오는 조준이었다.

닉은 조준의 말에 그를 안쓰러워하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부들거렸다.

바이유가 컬티스트라고 생각 중이던 닉은 바이유가 반쯤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조준의 말에 당장에라도 환호성을 지르며 방방 뛰고 싶었다.

생각보다 일이 너무 잘 풀렸다는 생각에 소름까지 끼쳤다.

‘역시.. 행운 777... 나는 난놈이다.’

닉은 자신의 행운이 이번에도 큰일을 해줬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려울 거라고만 생각했던 인장반지 탐색 의뢰는 다양한 도구를 가진 조준이라는 귀인(보물 고블린)을 만나 너무나 잘 풀렸고 대적자인 컬티스트(아님)도 알아서 자멸했으니. 닉의 처지에선 최고의 상황이었다.

‘이 새끼.. 바이유가 좆됐다는 말에.. 왜 이렇게 기뻐하는 거지..? 설마...’

조준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닉의 표정 변화를 면밀하게 살폈다. 그러다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이 등신... 메이링이 컬티스트인 줄 아는 건가.. 허어..’

이건 기회다. 메이링이 컬티스트라고 생각중인 닉을 속여먹을 절호의 기회. 굳이 상황을 몰아갈 필요도 없었다. 닉은 알아서 바이유를 의심 중이었으니까.

조준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때 닉이 조준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준.”

“응?”

“알려줄 사실이 하나 있다.”

“뭔데..”

굉장히 진지한 표정의 닉. 그는 조준을 향해 마치 엄청난 비밀을 알려주는 것처럼 말을 늘여놓았다.

“사실.. 메이링은.. 컬티스트라는 직업을 가진 이 세상의 재앙이다.”

“뭐..?”

“저 녀석은.. 놀랍게도 악신들의 사주를 받아 세상을 무너뜨리려는 악의 사도야.”

“그, 그게 대체 무슨...”

“너도 만귀전 소속이고 너를 후원해주는 신이 있다면 알겠지. 악신과 선신의 관계를 말이야.”

“어... 둘이 사이가 굉장히 나쁘다고 들었어... 잘은 모르지만...”

“맞아. 악신과 선신은 이 세상의 끝에 대한 견해가 너무 달라. 그 덕에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하지. 내가 봤을 때 바이유는 악신의 사도다.”

조준은 닉이 말해주는 고급 정보에 눈이 번뜩였다.

‘세상의 끝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고..? 이건 무슨 소리지?’

악신들에게 그런 이야기는 일절 전해 들은 적 없었던 조준은 닉의 말에 악신들이 고의적으로 정보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허나 지금 중요한 것은 세상의 끝이나 결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준은 금방 잡생각을 날려 버렸다.

'지금 중요한 것은 닉이 완전히 바이유를 컬티스트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지... 그런데 왜 저리 확신하는 걸까...'

문득 조준은 왜 닉이 이렇게까지 메이링이 컬티스트라고 확신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잠깐.. 그런데 닉.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말해 줄 수 있어? 분명.. 바이유는 선신계열의 스킬을 사용했다고.”

“그게 바로 내가 바이유를 악신의 하수인이라 의심한 이유야.”

“뭐...?”

“저 녀석.. 선신 계열 클래스의 스킬들을 섞어서 쓰고 있었어. 그 말은.. 놈이 모종의 수를 써서 지금 선신진영으로 둔갑한 채 우리를 속이고 기만질 중이었다는 말이지..”

“세상에..!”

놀라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조준은 속으로 닉을 비웃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