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 163.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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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의 속내도 모른 채 닉은 이러저런 말을 주절주절 잘도 떠들어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순백의 보석상은 레이스 가득 달린 하얀 손수건을 앙앙 물어뜯으며 으르렁 거렸다.
“저 멍청이! 뭘 실실 웃고 있는 건가요..!! 그쪽이 적이란 말이예요!!”
순백의 보석상은 닉의 헛다리짚기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상대가 비수를 숨기고 있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닉의 행동에 약간 화도 났다. 허나 뭐라고 욕만 할 수도 없었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거짓말을 늘여놓는 조준의 얼굴은 소름 끼칠 정도였으니까. 마치 거짓말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조준은 눈 하나 깜박 안 하고 닉의 말에 격하게 호응하며 바이유 조지기에 동참 중이었다.
‘빌어먹을... 저 멍청한 트릭스터 때문에 완전히 꼬였어..’
트릭스터가 자신을 선신진영이라고 거짓말하지만 않았어도 닉은 그를 무작정 의심하진 않았으리라. 차라리 바이유가 그냥 솔직하게 자신의 클래스와 스킬을 알려주었다면 닉은 바이유와 조준을 동일선상에 올려 두고 두 사람 전부를 의심했겠지.
“이게 다 당신의 챔피언 때문이잖아요! 안 그래요?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급기야 순백의 보석상은 중간에 앉아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중인 메이링 담당 보석상을 향해 윽박질렀다.
“하아....”
메이링의 담당 보석상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바이유의 기억이 소거되어 메이링이 되어 버리는 장면에서부터 눈앞이 깜깜해졌기 때문이다. 손쓸 도리도 없이 당해 버렸다는 생각에 그저 참담한 심정이었다.
‘트릭스터가... 거짓말을 다 들켰으니... 살아서 돌아온 게 용하구나, 메이링.’
이번엔 상대가 나빴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트릭스터의 진가를 발휘하기도 전에 조준의 페이스에 끌려들어갔으니, 두 사람의 역량 차이가 너무 컸다.
“훗..”
그때 닉 담당 보석상이 메이링 담당 보석상에게 화내는 모습을 곁눈질로 살피던 조준 담당의 보석상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너희가 선택한 녀석들.. 둘 다 너무 멍청하잖아? 괜히 조준을 걱정했군.”
“크으으으! 멍청한 게 아니라 조금.. 순수한 거예요!!”
“빌어먹을 년.. 네가 선택한 놈이 미친 거겠지.”
슬슬 신경을 긁는 조준의 보석상에게 분통을 터트리는 닉과 메이링의 보석상.
“하하하! 둘 다 진정해. 그래도 조준이 활약한 덕에 쉽게 반지를 얻었잖아.”
조준의 보석상이 인장반지를 언급하자 닉과 메이링의 보석상들은 눈을 돌리며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조준이 챙겨 온 여러 도구들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으니까.
그 점은 분명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조들이 대부분 손도 못 쓰고 실패하는 장면을 봤기에 더욱 그랬다. 아마 조준이 아니었다면 분명 시간을 더욱 많이 지체했으리라.
“후우.. 좋아요. 인정할 건 인정하죠.. 하지만 당신이 웃을 수 있는 건 지금뿐일 거예요. 당신의 하수인이 준비한 약물 따위. 닉은 마시지 않을 테니까.”
“응? 조준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벌컥벌컥 마실 것 같은데?”
“후후후... 닉이 그렇게까지 바보 같은 인물은 아니예요. 자신만만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저는 그저 닉이 당신의 하수인 보다 조금 모자라 보이니까 화가 났을 뿐. 그가 속수무책으로 컬티스트 따위에게 당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오호.. 뭔가 수가 있나 봐?”
“물론이죠. 무엇보다 닉은 별다른 힘도 들이지 않고 원하는 바를 거의 다 이루었어요. 가만히 서서 인장반지를 얻었으니 이미 여기서부터 당신네 하수인보다 그가 더 뛰어나다는 증명이죠. 닉은 가만히 있어도 세상이 나서서 도와주니까.”
“뭐... 조준이 고생할 운명을 타고난 부분은.. 확실히 맞는 말이지. 그래도 말이야.. 나는 온실 속 화초보단, 초원에 핀 들꽃이 더 좋아. 더 질기고.. 더 끈질기니까.”
“흥.. 그래 봤자, 이름 없는 들꽃일 뿐... 관리받는 한 송이의 장미가 더 가치 있어요.”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세 명의 인형은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그녀들은 분명 반지를 얻었으니 기뻐해야 했지만 아직 마음 놓고 기뻐할 수는 없었다.
조준과 닉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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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보석상이 인정했듯 닉은 온실 속의 화초였다.
조준이 항상 엿 같이 꼬여 버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돌파구를 찾아내 힘을 얻어 왔다면, 닉은 그저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도와주듯 일이 술술 잘 풀렸으니까.
이는 만신전이 보유한 인과율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인데, 여기엔 사정이 있었다.
현재 진행 중인 게임은 보타밀리의 희생(반칙)에 의해 강제로 성립된 2회차다. 만마전이 밀리고 있던 챔피언을 교체해 다시 시작한 게임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이를 선신들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고, 끝나기 직전에 되돌린 시곗바늘은 그에 걸맞은 페널티를 악신들에게 부여했다. 또한 합당한 어드밴티지를 선신들에게 넘겨줌으로써 균형을 맞추었다.
그런고로 만신전은 마지막 게임을 한번 승리하기 직전까지 끌고 갔기에 더 많은 자원(인과율)을 가지고 게임을 시작할 수 있었다. 반대로 만마전은 여러모로 밀리는 상태였고.
카쉬낙스와 인디크론이 죽도록 일하는 중이지만 만마의 삼주신 중 하나가 이면세계로 추방당하고 하위 신격들이 모조리 봉인 당한 현 상태에서 무리하게 치러지는 게임은 역시나 악신들에게 엄청나게 불리했다.
당장 만신전 진영의 플레이어들이 엄청나게 많은 와중에 만마전 소속은 조준뿐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즉 현재의 만마전은 무작정 자신들의 하수인에게 이득이 되는 상황만을 몰아 줄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긴장감 없이 성장해온 닉은 부유하지만 그저 힘만 센 바보였고, 숱하게 굴러 온 조준은 가난하지만 능구렁이 같은 사내가 되었으니.
역시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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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래서 나는 바이유 저 녀석에게 제약을 좀 걸고 싶어.”
“제약?”
“맞아. 제약. 죽일 수 없으니까. 이걸 먹일 생각인데... 보아하니 너에게 많이 의존하는 것 같으니까.. 이걸 대신 먹여줄 수 있을까? 아마 여자라고 생각하는 중이라면 더 먹이기 쉬울 것 같은데...”
닉은 별다른 의심 없이 조준에게 자신의 패를 보여줬다.
그는 조준이 이번에도 자신을 돕기 위해 나타난 귀인이라고 생각했다. 닉의 처지에서 귀인이란 위기 상황이나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때 나타나 그를 돕는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였다.
이번 전율저택 공략도 그런 귀인의 도움으로 잘 풀어냈다고 생각한 닉은 조준이 자신의 목 끝에 닿아 있는 비수라는 사실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컬티스트로 의심하던 바이유가 기억을 잃은 것조차 자기가 가진 행운 덕이라 생각할 정도였으니.
닉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운명이나 행운에 의존하는 편이었다.
한편 조준은 닉이 꺼내 든 물건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그건 꿈틀거리는 애벌레가 든 투명한 플라스틱 통이었다.
[마녀 기생체: 복용할 경우 마력 스탯이 200 증가하고 나머지 모든 스탯이 30씩 떨어집니다. 복용자가 남성일 경우 여성으로 성별이 바뀝니다. 기생체로 인해 성별이 바뀔 경우 빠르게 피곤해지며 금방 허기지게 됩니다. 기생체가 제거되지 않는 이상 성별이 여성으로 고정됩니다.]
‘마력 증가가 200이라고..? 흐음.. 하지만 불이익이 너무 커. 생긴 것도 징그럽고 무엇보다 기생체라니.. 굳이 내가 먹을 이유가 없는 물건이다..’
닉에게서 기생체가 든 통을 넘겨받은 조준은 옆방에서 쓸쓸히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던 메이링을 불렀다.
“메이링 이거 받아.”
“윽.. 그게 뭐야.. 징그러워..”
“이건 다시 여자가 될 수 있는 물건이야. 닉과 거래를 해서 겨우 얻은 거야.. 이걸로 이제 원래 몸으로 되돌아 갈 수 있어.”
“어.. 그치만 너무 페널티가 큰데...”
메이링은 여자가 될 수 있다지만 금방 지치고 배고파진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보였다. 이에 조준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메이링. 내가 치료할 방법이 있으니까. 나 약제사잖아. 너는 그냥 여자로 되돌아가는 걸로 끝이야. 뒷감당은 내가 해줄게.”
“저, 정말..? 고마워, 준..!”
조준이 자신의 진정한 동료라고 믿고 있던 메이링은 성별 전환을 할 수 있게 해준 닉과 조준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닉은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에게 인사하는 메이링을 보며 웃었다. 조준이 설득한 덕에 의심 없이 기생체를 덜컥 집어삼키는 메이링을 보며 그는 완전히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한편 꿈틀거리던 기생체를 꿀꺽 집어삼킨 메이링은 속이 안 좋은 듯 연신 헛구역질했다. 그러더니 이내 잠들어 버렸다.그 모습을 확인한 조준은 가방에서 붉은 액체가 든 유리 병을 꺼내 닉에게 건네줬다.
“응? 그건 뭐야?”
“아, 이건 내가 만든 특제 발효주야. 일종의 영약이지. 혼자서 입구를 지킨다고 고생했다는 의미로 주는 선물이야. 나가기 전에 주고 싶었어. 그리고 네가 정말 만신전이라면.. 잘 보이고 싶거든. 자, 어서 받아줘.”
“오..”
닉은 조준이 건네는 기억 소거제를 받아들였다. 알아서 일도 척척 잘하는 동양인 녀석이 영약까지 챙겨 주니 닉은 점점 더 조준이 마음에 들었다. 기회만 된다면 그를 전속 약제사로 영입하고 싶을 정도였다. 닉의 머리속에 동양인은 일 잘하는 부하 같은 이미지였으니까.
“그런데 이거 무슨 효과가 있는 거지?”
“마력 회복력을 높여주고... 정력에도 좋아. 남자에게 특히 더 좋지. 너 보살피는 여자가 많을 거 아냐.”
조준은 생각했다. 닉 정도 되는 놈이라면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여자도 분명 많을 거라고. 그렇기에 일부러 혹할 만한 정력증강을 들먹였다.
조준의 생각대로 닉은 여자가 많았다. 그는 유리병에 든 붉은 액체를 흔들어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귀한걸 받았군..”
“흐흐흐. 뭘, 이런걸 가지고. 그런데 닉, 이게... 아직 시제품 같은 거라서.. 미안한데 지금 마시고 맛 좀 평가해줄래? 나는 맛있던데 너무 쓰다는 의견이 많아서 말이야.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본격적으로 포인트 받고 팔아볼 생각인데 네가 평가 좀 해 줘. 나는 더 이상 내 입맛을 못 믿겠거든.”
“이거 내가 또 평가가 냉정한데... 일단 먹어 볼게.”
닉은 의심 없이 유리병을 기울여 안에 들어 있던 소주잔 한잔 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기억 소거제를 삼키려 했다.
‘됐다..!’
조준은 마른침을 삼키며 닉이 기억 소거용 와인을 삼키길 기다렸다. 저걸 들이 마시는 순간 닉은 끝장이었다.
허나 닉은 와인을 들이 마시기 직전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손을 잠시 멈췄다.
“아 참, 이거 미안한데. 뭘 먹기 전에 꼭 확인해 보라는 말을 동료에게 들어서 말이야. 잠시 잊고 있었는데 방금 생각 났다.”
“뭐..? 확인?”
“그래. 너를 의심하는 건 아니고..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러는 거니까 너무 마음 상하진 말아 줬으면 좋겠어.”
“어.. 어..?”
조준은 당황했다.
닉이 갑자기 동료의 말을 들먹이며 유리병에 있던 기억 소거제를 가방에서 꺼낸 은색 접시에 들이 부었기 때문이다.
“이 물건은 말이지 독이 들었거나 소유자에게 위험하다 싶은 음식을 담으면 검게 물들... 으음..?”
은색 접시가 조금 탁해졌다.
극독이 아니라 술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새까맣게 물들진 않았지만 분명 빛을 잃고 어둡게 변하긴 했다. 기억을 지운다는 건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니 접시가 쉽사리 판단하지 못했다.
‘이런 젠장...’
거짓말이 들킬 위험에 조준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서둘러 변명을 늘여놓았다.
“이게 들어간 재료가 좀 특이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래? 흠..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준, 너 혹시... 악신의 사도냐?”
닉의 물음에 조준은 심장이 철렁 내려 앉는 기분을 느꼈다. 허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열심히 내저었다.
“아니, 갑자기 나를 의심한다고?”
“뭐... 내가 너무 바이유만 염두에 둔 것 같기도 해서...”
“하! 그냥 돌려 줘. 의심받으면서까지 내가 열심히 만든 약을 선물로 주고 싶진 않군. 죽어라 반지를 얻어왔는데.. 아직도 나를 못 믿을 줄은...”
적반하장이야말로 조준의 특기. 조준은 오히려 의심 받은 게 억울하다며 화를 냈다. 그러자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은색 접시를 쳐다보던 닉이 먼저 꼬리를 내렸다. 어쩌면 동료로 만들 수 있는 귀인일지도 모르는데 괜히 날 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하군.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닉은 조준에게 사과하곤 기억 소거제를 들이켰다. 그의 담당 보석상의 생각과 달리 닉은 훨씬 더 화끈하고 호쾌한 상남자였다. 의리와 믿음을 중요시하는 닉은 조준의 선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게 이때까지 그가 동료를 만들어온 방법이었으니까. 그렇게 살아도 다 잘 풀렸으니까.
다만 이번엔 상대가 조금 나빴을 뿐이다.
"어... 여긴..."
"이봐 닉! 정신이 들어?"
기억을 잃은 닉에게 조준은 대충 거짓말을 하며 성별 변환용 위스키를 마시라고 권했다. 멋도 모르고 위스키를 마신 닉은 졸음이 쏟아져 왔고 조준이 손에 쥐어준 책을 잠결에 읽어버렸다.
물론 저택을 빠져 나가면 선신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닉을 원상복구 시키겠지만, 분명 그를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선 지출이 클게 분명했다.
또한 이번 경험으로 닉은 컬티스트가 누군지 정확히 파악했고 쉽게 사람을 믿지 않는 등 여러모로 좀 더 성장하겠지만 조준은 상관 없었다. 낭낭하게 1승을 챙겼으니까.
"어우, 개운해. 그럼 집에 가볼까."
조준은 잠든 메이링과 굳어버린 닉을 챙겨들고서 저택의 문을 열었다.
그렇게 메이링은 기생체를 얻었고, 닉은 만티의 서를 얻었으며, 조준은 크나큰 만족감을 얻은 채 전율저택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을 지켜보던 닉의 보석상은 돌처럼 굳어 버렸고 조준의 보석상은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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