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 164. 뒷풀이는 생략한다
* * *
전율저택을 나서는 순간 우리 셋은 어딘가로 전송됐다.
잠깐 빛이 번뜩이고 다시 눈을 뜨니 처음 우리가 만났던 그 장소였다. 닉과 바이유가 쓸데없이 신경전을 벌이던 그 조모임 장소 말이다.
'이제 저택 벗어났으니.. 죽여도 되나?'
나는 이제 저택을 벗어났으니 혹시나 닉과 메이링을 '푹찍' 찔러 죽여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허리춤에 칼을 빼 들었다. 그때 곧바로 경고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팀 킬을 지양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경고입니다. 칼을 넣으십시오.]
“쳇.”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칼을 집어넣었다. 그때쯤 안내방송을 얼핏 들은 메이링이 겨우 눈을 떴다.
“우욱... 우웨에엑....”
잠에서 막 깨어난 메이링은 어지럼증을 느낀 건지 조모임을 가졌던 방의 한쪽 구석에 대가리를 처박고 토하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역겨워서 가까이 다가가진 못하고 괜히 걱정해주는 척 말을 걸었다. 대답하려면 토를 멈춰야 하니 내 말에 반응하기 위해 토를 그만 쏟아낼까 싶어서.
“야, 괜찮냐?”
“으응... 우욱...”
마녀 기생체의 효과가 상당히 뛰어난 모양이다. 애가 사족을 못 쓴다. 가진 생명력 대부분을 기생체에게 빨아 먹히는 듯했다.
심지어 얼굴형도 엄청 변했다. 몸도 점점 작아지고 있고.. 서서히 귀여운 중국계 미국인 여자로 변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세상에...’
전체적으로 둥글게 변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여성 호르몬제를 과다 투여받은 불균형한 트랜스 젠더 같아서 조금 이상했다. 근육이 쭉쭉 빠지고 몸에 곡선이 늘어난다고 해야 하나. 바이유의 몸이 아닌 메이링의 몸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
한편 닉은 미동도 없이 책만 읽고 있었다. 분명 숨은 쉬고 있다. 허나 책을 읽는 자세 그대로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멈춰버린 닉의 육체에서 유일하게 활발히 움직이는 것은 눈동자였다. 닉의 눈동자가 왔다 갔다 움직이며 만티의 서에 쓰여 있는 지렁이 같은 문자를 읽어냈다.
이제 닉은 먹고 자고 쌀 시간을 모조리 투자해서 1만 시간 동안 미동도 없이 공부만할 수 있으리라. 더욱이 책이 알아서 다음 장으로 펼쳐지기까지 하니 손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겠지.
전국에 있을 고시생들과 고3 학생들이 이런 식으로 공부할 수 있다면 학부모들이 줄을 서지 않았을까.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면서 미동도 없이 24시간 공부만 하는 자식이라니.. 학구열에 미쳐 버린 나태한 부모라면 분명 좋아 죽으리라.
“하하하..”
나는 열심히 만티의 서를 읽고 있는 닉의 머리에 딱밤을 갈겼다. 책을 읽는 동안 실시간으로 여자로 변하는 모습은 제법 신기하고 웃겼으니까 안 때릴 수가 없었다. 다행이 이 정도 공격은 팀킬로 취급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때 방문이 덜컥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건 턱시도를 쫙 빼입은 검은 인간이었다.
흑인이라는 소리가 아니다. 얼굴과 손, 목이 전부 칠흑같이 새까맣다. 오직 얼굴 정중앙에 달려 있는 하얗고 커다란 눈동자 만이 흰색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검은색이었다.
암시장에서나 마주칠 수 있을 법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무사히 생환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전당으로 안내할 안내인, 바울이라고 합니다. 따라오시죠.”
우리를 향해 허리 숙여 정중히 인사하는 바울. 녀석의 절도 있는 인사에 나는 당황스런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 한 사람은 못 움직이는 데 어떡합니까?”
“예?”
나는 책에 빠져 있는 닉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바울은 당황한 듯 방 안으로 들어와 닉에게 다가 갔다.
바울은 만티의 서를 탐독 중인 닉을 보더니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책을 뺏으려고도 해 보고 핑거 스냅으로 주의도 끌어 봤지만 닉은 미동도 없었다.
“자의로 읽기 시작한 겁니까?”
“어.. 예. 뭐 그렇죠?”
“그렇군요. 이 참가자는 저희가 알아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움직일 수 있으신 분들만 저를 따라오시길 바랍니다.”
나와 메이링은 방 밖으로 나갔다. 우리가 빠져나가자 벨 보이 복장을 한 검은 인간들이 방 안으로 들어가 굳어 버린 닉을 들고나왔다.
무슨 엄청난 가치의 조각품을 들고 나오듯이 조심스레 가지고 나온다. 무엇보다 검은 인간이 하나도 아니고 무려 넷이나 더 있었다니...
“자, 여기입니다.”
우리는 무미건조한 복도를 걸어 어느 커다랗고 화려한 방문 앞에 다다랐다. 우리를 안내해 준 바울은 꾸벅 인사를 하더니 안내는 여기까지라며 다시 갈 길을 갔다.
나는 거침없이 전당의 문을 열었다.
수백 개나 되는 의자에 보석상들과 인형들이 빼곡히 앉아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우리를 뒤돌아봤다. 그들은 인형답게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무미건조하게 박수를 쳤다.
짝짝짝짝.
“드디어 오셨군요. 저택의 찬탈자! 가주의 꿈을 이룬 자! 일그러진 역사를 바로잡은 영웅들이 오셨습니다!!”
전당의 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던 커다란 남자가 우리를 환영했다. 그는 우리에게 무대 위로 올라와 달라고 말했다.
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아서 나를 이 게임에 초대했던 고딕 드레스의 보석상을 찾았다.
빠르게 좌석들을 훑어보자 맨 앞 쪽 좌석에 앉아 열렬히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보석상을 발견했 수 있었다.
다행히 뭔가 함정이나 나쁜 의도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레 전당의 무대로 걸어갔다.
무표정한 인형들의 박수를 받으며 메이링과 닉을 든 벨 보이들은 나를 따라 왔다. 나는 강당의 무대 위로 올라가 거구의 남자 옆에 얌전히 섰다.
“축하합니다. 인형들의 오랜 숙원을 끝내준 귀인이시여.”
“어.. 네.”
나는 거구의 사내가 건네는 축하 인사를 받으며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제 인장반지를 꺼내서 보여주시겠습니까?”
“예.”
나는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내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는 그 자리에서 여러 가지 장비로 반지를 감정하더니 진품이 맞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전당에 앉아 있던 인형들이 열렬히 환호성을 내지르며 우리의 업적을 축하했다. 너무 많은 관심에 나는 살짝 어질어질했다. 그때 남자가 우리에게 말했다.
정확히는 속이 울렁거리는지 반쯤 주저앉아 있는 메이링과 미동도 없이 무대 바닥에 널브러진 채 책을 탐독 중인 닉이 아닌, 가장 멀쩡한 나에게 묻는 것이었다.
“여러분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반지를 경매에 붙이거나 아니면 새로운 주인을 지정해주시거나.”
“어... 경매라뇨?”
“간단히 설명해 드리죠. 반지를 경매에 붙이면 여기 모인 분들이 반지를 두고 경쟁하게 됩니다. 그들은 반지를 얻기 위해 각자의 소중한 것들을 내놓을 것입니다. 어쩌면 본인의 전부를 내줄지도 모르죠. 저희는 그것들의 가치를 환산해 여러분들에게 가장 높은 가격으로 책정된 물건을 건네드리는 겁니다.”
“아하.. 그걸 삼등분해서 나눠가지라는 거군요.”
“맞습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새로운 주인을 선택하시게 되면... 여러분들을 여기로 초대한 보석상들에게 반지를 줄 수 있습니다. 세 명의 보석상이 반지의 소유권을 삼등분 하는 거죠. 그들은 아마 여러분에게 합당한 보상을 할 겁니다. 아닐 수도 있지만요.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딜러의 말이 끝나는 순간 좌석에서 자신을 어필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경매에 붙여!!! 그럼 내가 가진 비공정을 넘겨 주마!!!”
“그래!! 경매에 붙여!!! 원하는 모든 걸 줄 수 있어!!!”
난리가 났다. 보석상이 아닌 인형들마저 손을 들며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반지가 뭐기에 다들 저리도 목매는 걸까.
나는 잠깐 고민했다. 만약 반지를 경매에 붙이면 전당에 모여 있는 인형들 중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한 이에게 반지가 넘어갈 것이다. 그럼 나와 닉, 메이링은 그가 제시한 보상을 넘겨 받고 끝나겠지.
어쩌면 그게 보석상을 우리 거점으로 초대하는 것보다 더 엄청날 지도 모른다.
“이봐! 준!!!”
그때 나는 맨 앞좌석에서 열심히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건 고딕 드레스를 입은 '나의 보석상'이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다른 외침이나 목소리를 전부 무시한 채 나의 보석상을 향해 다가 갔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당신. 열심히 일할 거죠!”
“연중무휴!! 나는 잠도 안자!!”
“하하하! 좋아요.”
나는 딜러에게 말했다.
“새로운 주인을 정하겠습니다. 경매는 됐어요.”
내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전당에서 폭동이라도 일어나는 줄 알았다.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가 난무하며 나를 죽이겠다고 지껄이는 개자식들도 몇 명 있었다.
물론 대부분 바울과 비슷하게 생긴 검은 인간들에 의해 저지 당했지만.
“자네의 선택을 존중하네. 그 선택이 정답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썩 마음에 드는군. 자, 그럼 이쪽으로 어서 빠져나가게나. 고생했네... 컬티스트.”
딜러는 우리를 무대 뒤편으로 내보내줬다. 나와 메이링, 닉은 세 명의 보석상들과 함께 전당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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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지금 비즈니스 룸이라는 장소에 와 있는 상태였다. 원탁이 있고 여섯 개의 의자가 한 쌍 씩 짝지어져 놓여 있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나의 보석상과 함께 앉았고 닉은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보석상 옆에 앉혀져 간호를 받았으며, 메이링은 펑크한 드레스를 입은 보석상에게 구박을 듣고 있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역시 대단해!!”
보석상은 표정 변화 없이 웃음소리만 내며 내 등을 팡팡 쳤다.
“뭐, 쉽던데요.”
“하하하!! 조준! 넌 정말 타고 난 사기꾼이야. 너를 선택하길 정말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과찬이십니다.”
나는 보속상의 칭찬에 멋쩍게 웃으며 코끝을 쓱 문질렀다. 그러자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보석상이 빽 소리를 질렀다.
“지금 웃음이 나오나요!? 젠장!! 당신...!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예요!!”
“아. 예, 뭐. 그러시겠죠. 뉘예.”
“끄아아아!!!”
히스테리를 부리는 순백의 드레스. 나는 좆도 아닌 년의 히스테리까지 받아주는 스윗남이 아니므로 그녀의 말을 전부 깔끔하게 무시했다. 꼬우면 덤비겠지. 못 덤비는 걸 보아하니 저 녀석 좆밥이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번엔 펑크한 드레스의 보석상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컬티스트. 혹시... 이 녀석을 되돌릴 방법.. 없나?”
“예? 남자로 되돌리는 방법이요? 그건 좀..”
“아니.. 기억을 되찾을 방법 말이야.”
“어... 그건 저도 정말 잘 모르겠는데요.”
“하아.. 그렇군... 메이링!! 이 멍청한 녀석아!!”
다시 메이링을 구박하는 펑크 드레스. 정말 난장판이 따로 없다.
“그런데 저희 언제까지 여기 있나요?”
“어... 아마 반지를 세 조각으로 나눌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야.”
“아하. 그런데 아까 보니까 다들 반지 때문에 미치던데.. 이게 대체 뭐기에 다들 그런 반응입니까.”
“음.. 가주의 인장반지가 있다면... 그의 손에서 탄생한 인형들을 통제할 수 있거든. 그의 손에서 탄생한 인형들이 반지를 얻을 경우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고.”
“허어.. 만약 제가 그 반지를 꿀꺽 했다면.. 보석상들이 전부 제 부하가 되는 겁니까?”
“그건 아냐. 명령할 수 있을 정도의 격이 없다면, 가지고 있어 봤자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지.”
“그렇군요..”
“후후후... 어쨌든 인장반지를 손에 넣었으니.. 이제 나는 자유야. 내 운명이나 사명, 숙명 따위 다 집어치우고 자유의 몸이 됐어. 네 덕이야.. 고마워 조준.”
보석상은 팔짱을 끼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문질렀다.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기회다 싶어 조금 민감할지도 모르는 문제에 대해 질문했다.
“그런데.. 그 마지막에 가주의 딸이 된 인형... 그건 누굽니까? 보석상들 중에 있나요?”
“응? 오리지널?”
“예. 가주의 딸에 영혼이 들어간.. 오리지널이요.”
“그녀는... 없어졌어.”
“예?”
“사라져 버렸지.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 가주에게 인형 제작법을 배운 그녀는.. 우리와 같은 ‘자매’들이나 여러 작품을 잔뜩 만든 다음 여러 차원에 우리를 뿔뿔이 흩어놓고는 자취를 감췄어. 우리가 완전한 자의식을 가지게 된 이후, 다시 저택을 찾으려고 했을 땐... 저택은 무슨 이유에선지 공허의 경계에 방치되어 있더군. 일련의 과정이나 이유, 원인은 몰라. 그저 결과만이 남았을 뿐이야.”
“허어... 그럼.. 제가 한 일이.. 실제 과거의 역사에 영향을 미쳤고.. 저택의 시간대는 루프하고 있는 중이며.. 어 또...”
“그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니까 그냥 다 잊어버려! 그런 것보다 이제 우리가 한솥밥을 먹게 됐다는 게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지!! 지금은 그저 서로를 축하하자고! 나는 자유의 몸이 됐고! 너는 개쩌는 나를 얻었으니까!!”
“어. 흐흐흐.. 그러죠. 그런데 뭔가 엄청 밝아 지셨네요?”
“물론이지! 오늘은 기쁜 날이니까!”
곧 우리가 있던 방에 바울이 들어와 조각난 반지를 세 명의 인형들에게 건네줬다. 반지를 건네 받은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문앞에 섰다.
“기필코.. 이 일은 잊지 않을 거예요.”
순백의 보석상은 그 말을 남기곤 닉을 끌고 사라졌다. 언젠가 다시 만날 것 같은데.. 그때는 내 손으로 박살내주지.
“어.. 다, 다음에 다시 만나자..”
메이링은 기약 없는 재회를 자기 혼자 멋대로 약속하곤 펑크 드레스의 보석상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메이링은.. 그냥 이대로 영원히 안녕이기를 바란다...
“그럼 우리도 가 볼까.”
“예. 오랜만에 집이네요.”
마지막으로 우리는 문을 넘어갔다. 나의 손을 툭툭 치는 보석상의 손을 꽉 붙잡고서.
드디어 집에 간다. 나의 여자들이 가득한... 젖과 꿀이 넘쳐흐르는 나의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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