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가 다운로드 됨-166화 (166/221)

〈 166화 〉 165. 집, 스위트 홈

* * *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거점으로 돌아왔다.

거의 나흘을 우중충하고 냄새 나는 썩은 저택에서 보냈더니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는데, 맑은 하늘을 보니 기분이 너무 좋다.

깨끗해진 하늘을 보면 솔직히 인간들이 수십억 쯤 죽은 게 그다지 나쁘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특히나 옆나라에서 미세먼지를 미친듯이 뿜어내던 놈들이 대거 죽어서 그런지 공기도 너무 좋고 자연이 회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늘 참 맑다.'

“으아아!! 얘들아!! 나 왔어!!!”

나는 잡고 있던 보석상의 손을 놓고서 우렁차게 내 여자들을 불렀다. 빌어먹을 닉과 바이유랑 같이 며칠을 보냈더니 정신적으로 너무 피폐해졌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여자를 보고 싶었다.

물론 마지막에 제대로 빅 엿을 먹일 수 있었기 때문에 답답했던 가슴이 좀 풀리긴 했지만... 그래도 당장 내 여자들의 냄새를 맡고 싶다. 사내 새끼는 이제 질린다.

“오!! 형님!! 오셨습니까!!”

그런데 빌어먹을 하진성이 제일 먼저 달려 나왔다. 저 눈치 없는 충신놈. 나는 지금 남자와 대화하기 싫다.

“어. 안녕. 할 일하러가.”

“어, 예. 네.”

하진성은 나의 무표정하고 딱딱한 인사에 얼른 다시 하던 일을 하러 갔다. 괜히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말붙였다가 화를 입기 보단 그냥 조용히 사라지는 편이 이롭다는 사실을 하진성도 알고 있는 거다.

내 밑에서 구르다 보니 절로 나에 대해 잘 알게 된 그였다.

“어? 오빠다!!!”

그때 2층에서 뛰어내려 그대로 내 품에 안겨 오는 화영이. 그래, 이거지. 나는 이런 환영을 원했다.

“화영아!!”

“와!!”

나는 그녀를 껴안고서 빙글빙글 돌았다. 화영이는 내 볼에 마구잡이로 입을 맞췄다.

“어.. 킁킁...”

그러다 그녀는 갑자기 내 옷에 냄새를 맡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음.. 오빠, 일단 씻어야겠다.”

“아, 응.”

저택을 돌아다니며 여러놈들과 싸우다보니 피와 땀, 이족들의 체액이 많이 묻은 상태였다. 나도 굉장히 찝찝했지만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는 저택에서 몸이나 옷을 씻을 방법이 마땅히 없었다. 그렇다 보니 나에게선 냄새가 날 수밖에 없었지.

옷도 제대로 못 갈아입었으니까. 옷에 묻은 피 냄새도 장난 아닐거다.

“그런데 다른 애들은?”

“아, 다들 곧 나올 거 같아. 지금 팔어스랑 훈련중이었거든요.”

“아, 그래?”

“응. 그런데 오빠, 이분은... 그 보석 파시는 분..?”

나는 화영이에게 보석상을 소개했다.

“이름은 에일라. 앞으로 우리와 함께 살게 될 거야.”

집으로 돌아오기 전, 그녀에게 이름을 전해 들었다. 그녀의 이름은 에일라 알레그랑이었다.

“오오...”

화영이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또 여자를 데려와서 그런지 그녀는 얼떨떨한 반응이다. 만약 내가 보석상까지 하렘에 집어넣으면 나를 두고 경쟁해야할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에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준아! 왔구나!!”

“주인!!”

그러던 중 메르와 희선 누나가 팔을 흔들며 달려왔다. 예원이는 옥상에서 헬겐과 함께 고개를 쭉 빼고서 나에게 인사했고 팔어스에게 지옥훈련을 받고 있던 나머지 인원들도 금세 전부 모였다.

나는 그녀들과 잠시 대화를 나누며 간단하게 회포를 풀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저녁을 먹으며 나누기로 한 다음 나는 곧바로 에일라를 헬러스에게 데려갔다.

헬러스가 차지한 과학실에선 여러 약품 냄새와 기름 냄새가 동시에 풍겨 왔다. 교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솥을 국자로 휘젓고 있는 황수민과 뭔지 모를 기계를 드라이버로 조이고 있던 정지연이 있었다.

알시드 윤하준은 입구 앞에 앉아서 열심히 공책에 뭔가를 기록 중이었는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내가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으갹!! 아, 오셨습니까?”

“그래, 나 왔다.”

그제야 공방에 있던 이들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나에게 아는채를 해 왔다.

“언제 왔어요. 전혀 몰랐네요.”

“흐흐. 온 지 얼마 안 됐어. 그런데 팔 안아프냐?”

“뭘요. 거뜬해요.”

황수민은 나와 대화하는 중에도 계속 솥을 휘저었다. 멈추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지연이 너는 뭐 만들어?”

“어.. 터렛 수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고생해라.”

“예..”

“그런데 영감은?”

“아, 뒤뜰에 심어둔 마력초 캐러 갔어요. 엇갈린 듯?”

“그래?”

나중에 와야하나...

그때 헬러스가 복도에서 나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오오.. 오셨군요.”

“그래, 다녀왔어. 여기, 에일라도 데려왔지.”

“오오오!! 어서 오게나!”

“반갑군, 영감.”

“환영하네, 에일라양.”

에일라와 헬러스는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물론 그전에 헬러스는 손에 묻은 흙을 옷에 대충 닦아 털어내야 했다. 나는 에일라와 인사를 마친 헬러스에게 저택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보여줬다.

“저기, 이거 봐. 내가 이런 것도 가져 왔는데 말이야...”

“오.. 이번엔 또 뭘 가져 오셨을지 궁금하군요...”

기대에 찬 표정의 헬러스. 가방에서 영혼추출기를 꺼내 헬러스에게 건넸다.

“이건...”

“영혼추출기야. 영혼을 뽑아낼 수 있다더군. 그리고 다시 주입할 수도 있고. 어때?”

“허어어억!!!! 이, 이런 귀물을 어떻게!!??”

“그거 구한다고 죽을 뻔했다.”

“이, 이건.. 도대체...”

헬러스는 영혼추출기를 무슨 애인이라도 어루만지듯 조심스레 다뤘다. 나는 거의 기절하기 직전인 헬러스에게 가주의 방에서 서리해온 여러 서류들과 연구실적들도 전부 꺼내 넘겨 줬다.

“어.. 이건 처음 보는 문자인데...”

“내가 읽을 수 있어. 어디 보자...”

보석상은 헬러스에게 서류에 적힌 내용을 대략 읽어줬다. 그러자 헬러스는 놀라움을 넘어 경악스러워했다.

“이, 이걸 이런 식으로 풀어낸 사람이 있다니.. 조금만 보완한다면... 허어..”

“대박이지.”

“정말 대박입니다!! 제가 조금만 젊었어도.. 얼싸 안고 춤이라도 췄을 텐데.. 아쉽군요.”

“흐흐흐.”

헬러스의 눈이 광기로 물들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뭔가 만들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해 보였다.

“그럼 잘해봐.”

“물론입니다..!! 아, 흑각룡의 뇌로 물약을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결과물이 엄청 뛰어나진 않아도 쓸 만한 수준은 됩니다. 챙겨 가시지요.”

“좋지.”

나는 헬러스에게 검은 물약을 한 병 넘겨받았다.

[흑각룡의 뇌청: 용의 뇌를 정제해 만든 영약입니다. 복용 시 마력이 100 증가합니다. 뛰어난 장인이 만들었기에 부작용이 없습니다.]

“오...! 부작용이 없는 영약.. 이건 귀하지.”

“허허.. 좀 더 효과를 끌어올리고 싶었지만..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고마워, 헬러스. 잘 마시마.”

나는 헬러스에게 칭찬해준 다음 공방을 빠져나왔다. 에일라는 공방은 너무 소란스럽다고 옆에 있는 미술실에 자리 잡았다. 짐을 풀고 자리를 깔아야 한다며 혼자 있고 싶다고 해서 두고 나왔다.

이후 나는 정말 오랜만에 샤워했다. 오랫동안 감지 못해 떡진 머리에 샴푸를 반쯤 들이붓듯이 붓고서 거품을 잔뜩 냈다. 씻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심지어 뽀송뽀송한 옷으로 환복까지 마치니 새몸을 얻은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옷을 갈아입을 수 있어서 굉장히 좋았다.

“하아.. 개운하네.”

“오빠!”

“은지야. 훈련 열심히 했다면서. 팔어스가 그러던데 엄청 빨리 실력이 붙는다고.”

아까 그녀들과 인사를 나눌 때 팔어스가 나에게 살짝 알려 줬다.

“헤헤.. 노력 좀 했죠.”

나는 은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굳이 클래스를 바꿀 필요가 없는 그녀는 팔어스의 정식 제자가 된 건 아니지만 훈련 받는 아름이 옆에서 간간이 대련을 하며 실력을 키웠다.

원래는 암살자로 성장 중이었지만 직업이 바뀌고 도깨비왕의 검을 얻은 이후 이젠 대검도 쓸 수 있게 연습해 둬야하는 상태라서 적극적으로 수련에 임했다고 한다.

“좋아, 좋아. 잘했어.”

은지를 마구잡이로 칭찬하며 복도를 걷고 있으니 아람이가 나를 불렀다.

“준!저녁 먹어!”

“어! 알겠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저택에선 삼시새끼 거의 라면만 부숴 먹었던 것 같다. 끓여먹기 조차 귀찮았고 딴놈들에게 나눠 주기는 더 싫어서 물과 함께 딱딱한 라면만 씹어 삼켰었지.

그마저도 없었던 초반의 바이유는 배가 고픈지 내가 먹고 있던 라면을 뚫어져라 쳐다봤었다. 나중에 그가 죽은 플레이어들 가방을 습득하기 전까진 계속 그런 상태였었지. 나중에 기억을 잃고 메이링이 되고 나서는 내가 놈에게 나의 동료였다고 거짓말 한 게 마음에 걸려서 식량을 공유했지만 그때도 결국엔 익히지 않은 면이 주식이었다..

아무튼, 나는 오랜만에 먹는 따뜻한 밥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그녀들에게 알려 줬다. 그러자 열심히 밥을 먹던 소라가 나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그 만신전? 거기 망했습니까?”

“음.. 망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타격이 클 거야.”

“오오.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소라 너.. 한국어 엄청 늘었네?”

“하하하. 저 열심히 배웠습니다.”

소라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답했다. 내가 없는 동안 한국어 회화를 엄청 열심히 한 모양이었다.

“내가 일대일로 가르쳤다.”

메르가 뿌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없는 며칠 동안 나나세는 24시간 메르의 잔소리에 시달리며 집중 교육을 받은 모양이었다.

메르는 전직 천사라서 그런지 굉장히 다재다능했는데 특히 인간의 언어를 죄다 꿰고 있어서 그런지 이렇게 속성 과외가 가능했다.

"아람이는 별일 없었어?"

"음.. 나도 가끔 수련했어. 별 일은 없었네."

"하린이는?"

"저는 뒷산으로 헬러스 영감 데리고 몇번 돌아다녔어요. 늙어서 힘들데요."

"늙긴 했지. 예원이는?"

"저는 헬겐이 돌봤어요. 요즘 마력을 너무 많이 먹어서.. 거의 밥주고 쉬고 밥주고 쉬었어요."

"아유. 고생했겠네. 수고했어."

아람이와 하린이, 예원이는 별다른 사건 없이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 모양이었다. 희선 누나와 주하는 밭을 간다고 열심히 노력한 모양이고. 주하는 전투직이면서 싸움보다는 농사에 더 관심을 보인다.

“은하 너는.”

“내요?”

“어. 너는 뭐 했는데.”

“어... 내는 그, 이훈? 그 아저씨랑 귀신 사냥했습네.. 니다.”

본인 스스로가 자처해서 북한 사투리를 교정 중인 은하는 오히려 사투리가 뒤섞인 요상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훈이랑 귀신사냥?”

“예. 저나 그 사람이나 식성이 비슷해서.”

포제션 워리어인 이훈도 귀신을 먹어야 강해지고 커스 돌인 은하도 귀신이나 괴이를 먹어야 고독을 만들거나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으니. 두 사람은 어느 의미로 잘 맞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훈과 은하는 둘이 합을 맞춰 밤이면 밤마다 귀신 사냥을 다닌 모양이었다. 신의 우상이 있는 학교엔 귀신이 다가오지 못하니까 외부에서 사냥다닌 거겠지.

‘허어.. 이훈 이 새끼.. 조만간 진솔한 대화를 나눠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남은 밥을 싹싹 긁어먹었다. 희생룡 꼬리 소금구이는 제법 맛이 좋았다. 이후 나는 잠시 소화 좀 시킬겸 혼자서 해가 지고 있는 학교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아...”

학교의 풍경이 내려다 보였다. 열심히 움직이는 노예들과 과일이 주렁주렁 열린 나무들을 보고 있으니 뿌듯함에 몸이 떨렸다.

‘많은 걸 얻었구나..’

초반에 죽어라 구르며 열심히 운영한 결과 이젠 식량도 자체 생산 가능하고, 물도 마음껏 쓸 수 있으며, 제한 적이긴 하지만 발전기 돌려서 전기 사용도 가능하다. 여긴 이제 아포칼립스에 있어선 가히 천국과 같은 곳이 되었다.

심지어 나를 위해 일해 줄 노예들이 몇백 명이나 있으니 그야말로 파라다이스다. 이대로 유지만 잘하면 된다. 나는 암시장을 갈 수 있으니 계속 이득을 챙기며... 스노우 볼 만 잘 굴리면 닉이든 뭐든 나를 건들 수 없으리라. 솔직히 닉은 좀 실망스러웠다. 이젠 777이 별로 안 무섭다.

‘버섯도 슬슬 키우긴 해야 하는데...’

일단은 내일 암시장에 들어가야 하니 그것부터 모두에게 제대로 알려야겠다. 이번엔 일을 해결해도 일주일간은 무조건 돌아오지 못할 테니까. 만약 타이밍이 나쁘면 이주이상 걸릴지도 모르고.

‘암시장의 지하...’

악마에게서 체셔의 영혼을 돌려 받아야 한다.

무사히 돌려 받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