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 166. 혼란스런 상황의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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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동부의 어느 시골 마을.
이곳엔 도심지에서 탈출한 수천 명의 생존자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재앙 초기부터 이 마을에 자리 잡아 생존해 왔다. 사람들은 자의적으로 서로 협력했으며 총화기의 사용이 억제된 이후 체계적으로 역할을 나누어 재앙의 세계를 적응해 왔다.
그들은 적당히 선만 지킨다면 별다른 억압이나 통제 없이 행동할 수 있었고 초기에 유입된 각성자들도 제법 많아 아직 크게 위협받는 일 없이 안전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영위한 평화는 어디까지나 초기에 유입되었던 각성자 닉 덕분이다. 닉이 존재함으로서 그들은 다른 생존자들보다 여유롭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닉이 이곳에 왔기에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여 들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재앙이 시작되고 시간이 점차 지날수록 각성자들의 힘은 더욱 절실해졌고 당연하다는 듯이 힘 있는 이들이 집단의 수뇌부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특히나 운이 좋으며 여러 기연을 얻어온 닉이 자연스레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뭘하든 성공하는 닉은 사람들에게 선망 받아왔다. 무슨 짓을 저지르든 세상이 그의 편이라는 듯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렸기 때문이다. 모두가 닉을 좋아했고, 닉은 그걸 당연하다 여기고 있었다.
닉은 자신이 선택받은 인간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제까지는.
“닉이 돌아왔어... 어? 닉? 닉!”
“뭐야. 이봐! 보석상!! 닉이 왜 움직이지 않는 거지?”
“그, 그건...”
닉은 보석상 에밀리아에게 이끌려 무사히 거점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허나 그의 고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
“니콜라스!!!!”
“이런.. 이게 대체...”
닉의 본명은 니콜라스. 그는 미국 동부에서 가장 거대한 생존자 집단들 중 하나의 수장이자 선신들의 축복받은 구원자였다.
그런 이가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사이에 폐인이 되어 돌아왔으니, 다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다들 비켜봐. 내가 확인하지.”
그때 인파를 가르고선 금발벽안의 덩치 커다란 풋볼 남성 같은 건장한 녀석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허공에서 커다란 책을 한 권 꺼내더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지금 닉은 만티의 서와... 혼란스런 당신이랑 뒤끝없는 한잔? 이것들은 또 뭐야?”
닉의 상태를 ‘간파’해낸 백인 우월주의의 표상과도 같은 생김새의 남성, 마이클은 입맛을 다셨다. 니콜라스의 로그를 읽은 결과 그가 기억을 삭제 당하고 여자가 되어가고 있단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마녀 기생체는 아니고.. 술을 삼켰다는 묘사로 볼 때.. 저주가 담긴 술을 누군가 먹였군. 기억도 비슷한 방식으로 소거된 상태고..’
그는 이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알려야 파장이 가장 적을지 고민했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기억 소거에 여체화 저주를 걸고 거기다 시간 동결까지 먹인 상대... 신들이 말한.. 그 666의 사탄마귀 새끼 밖에 없다...’
그는 닉이 일단 만티의 서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을지 고민했다. 허나 아무런 해결책도 찾아낼 수 없었으니. 이족들의 주술로 이루어진 시간의 동결은 ‘대현자’로서도 쉽사리 풀어낼 수 있는 효과가 아니었다.
그때 닉의 상태를 확인 중이던 백인 여성이 고민에 빠진 대현자를 향해 질문했다.
“만티의 서..? 그게 뭐야. 지금 니콜라스가 읽고 있는 이 이상한 책이야?”
“어. 지금 니콜라스가 읽고 있는 책의 정식 명칭이다. 1만 시간 동안... 니콜라스를 강제로 봉인한다는 내용이군. 봉인에 대한 대가는 이족의 언어 습득... 솔직히 말해서 쓸모없는 효과로 닉을 봉인했다고 밖에 볼 수 없겠어.”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닉에게..”
대현자에게 말을 건 백인 여성은 붉은색 뿔테 안경을 낀 굉장히 너드한 생김새의 여성으로, 그녀가 바로 성녀였다.
그녀는 닉을 되돌리기 위해 온갖 종류의 정화나 해주 스킬을 퍼부으며 만티의 서를 때어내려고 시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인과율의 보호를 받고 있는 '아이템'의 효과는 절대적이다.
아이템에 새겨진 고위이족의 악의적인 주술이 한번 발동한 이상 효과가 다 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카운터 아이템을 찾아내지 않는 한 해제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면 극단적인 방법이 하나 있었는데, 아이템이 지닌 인과율보다 더 많은 양의 인과율을 쏟아 붓는 것도 한 가지 방안이었다. 허나 이를 위해선 신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제기랄...”
“신들은 아무 말씀도 없으신가?”
“오라클! 오라클은 어디 있지?”
이윽고 닉 앞에 모인 이들이 닉을 제외하고선 가장 신들과 소통이 잘되는 오라클을 찾았다.
그리고 그들이 한창 오라클을 찾고 있었을 때, 오라클은 이미 질서를 관장하는 자 케포누스의 계시를 받고 있었다.
“아.. 아아...”
오라클의 눈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접신 상태에서 그녀의 손은 멈추지 않았으니. 그녀의 오른손은 내려오는 계시를 받아 적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나.. 나락.. 나락의... 밑바닥... 금간.. 앙크..”
그녀는 신의 계시를 적었다. 만티의 서는 선신들이 해결할 방법을 찾아 준다고 했다. 허나 이미 완전히 복용해 버린 기억 소거제의 효과까지 지우려면 너무 막대한 양의 인과율을 소모해야 했다. 이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한 행동이었고 그렇기에 선신들은 기억을 잃은 닉이 아닌 그의 동료들에게 닉의 기억을 되돌릴 방법을 알려주기로 했다.
그런 이유로 선신들은 오라클에게 나락의 밑바닥에 닉의 봉인된 기억을 되찾을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계시를 내렸다.
“금간.. 앙크를 구해야 해..”
이제 그녀는 닉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리고 계시에서 나온 금간 앙크는 조준 또한 가지고 있는 물건이다.
아마 닉의 동료들과 조준은 나락의 밑바닥에서 마주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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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시장으로 들어가기 전, 조준은 팔어스의 면담 요청에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
“그러니까 스킬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말이지?”
“그렇소. 이곳에서 며칠 사람들을 가르쳐본 결과, 이곳의 사람들은 그, ‘스킬’이란 것에 너무 의존하는 경향이 크오.”
팔어스의 말은 이러했다.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는 각성자들은 대부분 이미 몸속의 마력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수준들이다.
허나 대부분의 각성자들이 그런 마력을 자체적으로 다루려하기 보단 그냥 쉽고 간편한 스킬을 사용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팔어스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킬을 사용하긴 하되 그것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는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가 보기엔 쉽고 편한 것에 의존해 본인의 전투방식을 찾지 못하고 헛수고하는 이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스킬은 그저 도구에 불과하오. 수련하지 않아도 당장 바로 쓸 수 있는 초상능력이니 다들 스킬만 주구장천 사용하고 있었지만... 적절하지 못한 스킬 사용은 마력의 손실밖에 되지 않소. 언제까지고 서로 스킬만 쏘아대고 눌 수는 없는 노릇 아니오.”
팔어스는 아름이는 물론이고 어느 순간부터 수련에 동참하게 된 아람이와 은지, 하린이를 비롯해 근접전투를 담당하는 이들과 수차례 싸워 본 결과 아주 합당한 결론을 내렸다.
그녀들을 굴려야한다. 메르를 제외하고 팔어스의 눈에 만족스러운 인물이 없었다. 팔어스는 그녀들을 철저히 굴리고 싶었다. 아주 그냥 자면서도 사람을 썰 수 있는 정신나간 살인병기로 만들 때까지. 그래서 팔어스는 지금 그녀들의 실질적인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조준에게 허락을 받기 위해 찾아온 상태였다.
“물론 그 정도의 초상능력을 현실에서 다루기 위해선.. 수십 년 동안 수행해도 모자랄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고 있소만... 너무 의존만 해선 답이 없을 것 같소. 그러니 내말은...”
“흐음.. 그만.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슨 말인지 대충 알겠어. 그러니까 스킬을 매개체로 삼아서... 자신만의 전투 스타일을 더욱 확고히 해야 한다는 거잖아. 한마디로 굴리고 싶다, 이거지?”
“그게.. 맞소. 전투 중에 생각 없이 스킬만 쓰는 인간이 너무 많아서 하는 말이외다. 그저.. 가진 능력들이 너무 아깝게 보여서...”
조준을 비롯한 법사 계열의 각성자들은 스킬에 의존하는 게 맞다. 허나 팔어스의 말대로 근접전투를 주력으로 삼는 이들은 좋은 클래스를 가지고 있더라도 자칫 기량 싸움에서 밀려 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팔어스는 그게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모든 각성자들이 메르헤레처럼 별다른 스킬 사용 없이도 강해지길 바라고 있었다.
비루한 몸뚱이를 가지고 정상에 오른 팔어스. 그는 힘을 가지고도 제대로 못 쓰는 인간들을 보고 있을 때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그래, 일단은 알겠어. 어차피 그런 부분을 보완해주는 게 너의 역할이었으니까. 믿고 맡길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봐.”
“고맙소이다. 좀 더 과격한 훈련시켜도 될 것 같아 다행이구려.”
이로써 아름이와 은지를 비롯한 근접전투 계열의 클래스를 가진 여자들은 지옥 훈련이 예정되었다. 조준이 암시장으로 내려가 있는 동안 그녀들은 팔어스의 정신 나간 수행에 끌려 다니며 지옥의 주를 보내게 될 터였다.
“좋아. 그럼 할 이야기도 거의 다 끝났고...”
조준은 팔어스를 내보내곤 이훈을 불러냈다.
곧 어수룩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교장실로 들어온 이훈.
“어.. 저기. 저를 부르셨다던데...”
그는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최근에 조준의 관심 밖에서 제멋대로 귀신 사냥을 다녔던 것 때문에 그가 화가 났나 싶었다.
“그래. 너 요즘에 밤마다 밖에 나간다며.”
이훈은 역시나 올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준이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밤마다 몰래 학교 밖으로 빠져나간다면 적과 내통 중이라고 의심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 저, 그게. 사실 제가 강해지려면.. 영혼을 섭취해야 하는데..”
“그런데 은하도 같이 간다지?”
“예? 아. 그 북한 여자... 예. 나갈 때마다 거의... 같이..”
조준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혹시 이은하에게 관심이 있나?”
“아이고! 아뇨!! 형님의 여자를.. 제가 감히... 어찌 건드립니까.”
“그래?”
“예! 전혀! 저어언혀! 관심 없습니다. 그냥 귀신사냥 다닐 때 같이 다니는 사이일 뿐입니다.”
“흐음... 같이 다니는 사이? 흐으음... 너. 팔어스가 왜 여자로 변했는지.. 알아?”
“예? 어.. 무슨 희귀하고 이상한 병 때문이라던데...”
조준은 작은 유리병을 꺼내 이훈 앞에서 찰랑찰랑 흔들었다.
“이거 때문이야.”
“예..?”
“이걸 먹여서 그렇다고.”
“어.. 그, 그럼.. 형님이..”
“그래. 내가 팔어스를 여자로 만들었다. 내 여자를 가르친다는데.. 남자면 괜히 불안 하잖아. 팔어스가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해도... 혹여나. 정말 만에 하나라도 내 여자가 딴 남자에게 한눈팔면.. 그건 아니잖아. 안 되는 일이라고. 나는 그런 가능성이 1퍼센트라도 있길 원하지 않아. 내가 없는 동안.. 딴 놈과 눈을 마주칠 걸 상상하니.. 속이 뒤틀린다고. 알아? 훈아. 알아듣겠냐고.”
“어.. 혀, 형님!!! 제발!!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두, 두 번 다시는 이은하에게 다가가지 않겠습니다!!”
“아니야. 기다려 봐, 훈아. 멋대로 이야기 끝내지 말고..”
이훈은 목이 바짝 타들어갔다.
눈앞의 상대는 광인이다. NTR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아직 아무 죄없는 남성의 성정체성을 마음대로 바꿔 버리려는 광인.
“후우.. 은하는 말이지. 딱히 여기에 정붙일 게 없는 모양이야. 하나뿐인 언니는 매일 노동의 즐거움을 알아가며 밭이나 갈고 있고. 믿었던 남자인 나는 계속 밖으로만 나돌고 있으니... 분명 혼자 붕 떠서 외로울 것 같아. 친구가 필요해. 은하는.”
“혀, 형님..”
“그러니까 네가 은하의 친구가 되어 줘야겠어. 은하가 그러더라. 제법 말이 잘 통하는 남조선 동지라고. 하하하...”
이훈은 조준의 말에 다가올 운명을 직감했다.
자기 여자와 같이 있는 남자를 병적으로 거부하는 조준.
동시에 남자인 자신에게 이은하의 친구가 되어 주라는 조준.
그리고 여자들과 자주 만나게 될 팔어스를 여자로 만들어 버린 조준.
“아아..”
이훈은 절망했다. 그의 유일한 낙은 바로 주말 마다 노예 복지 차원에서 한 번씩 주어지는 섹스타임이었는데. 그마저 빼앗기게 생겼으니.
조준은 절망한 이훈에게 조용히 ‘혼란스런 당신’이 들어 있는 유리병을 건넸다.
“마셔.”
“형님.”
“그거 마시고. 이제 앞으로 오빠라고 불러.”
“형님. 제발..”
“안 돼. 빨리 마셔!!!”
조준의 명령에 이훈은 눈물을 흘리며 유리병을 건네받았다. 주인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니. 그는 밀려오는 고통에 더는 조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흐윽....”
꿀꺽.
그건 참, 목 넘김이 좋은 위스키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