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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가 다운로드 됨-173화 (173/221)

〈 173화 〉 172. 전부 사겠다는 마음

* * *

바텐더 잭슨이 꺼내 든 4개의 술병. 휘황찬란한 술병의 외관과 더불어 찰랑이는 술들이 내 관심을 끌었다.

지난번에 구입했었던 4개의 술들 중 기억 소거제와 성별 전환제는 정말 유용하게 사용했었지. 이번에도 부디 그런 물건들이 나와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우선 나는 피처럼 붉은 와인부터 확인했다. 술병엔 나무뿌리가 뒤엉켜있어 마치 자연에서 방금 따온 열매 같은 느낌이 들었다.

[끝나지 않는 충동: 삭힌 사티로스의 피입니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한잔 가득 양껏 따라 시원하게 복용하십시오. 사티로스의 염원은 여러분을 기적의 세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복용할 경우 육신이 ‘완벽’한 상태가 되며 경이로운 환몽을 꾸게 됩니다. 비약적인 재능의 확장을 느끼십시오. 여러분은 모든 일에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주의. 복용할 경우 다음 3가지 중 하나의 충동에 빠지게 됩니다. 1. 자해충동, 2. 살해충동, 3. 식인충동. 이러한 충동들을 제때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극심한 불안감과 함께 치명적인 수면장애를 겪게 됩니다.]

[가격: 14400C]

“시발.”

이건 복용한 사람의 ‘재능’을 끌어올려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천재로 만들어 주는 술이었다. 허나 그 대신 자기파멸적인 욕구를 느끼게 만드는 저주받은 약물이기도 했다. 복용했다간 끝나지 않는 자살 충동을 느끼거나 살해욕구를 느끼거나 인육섭취를 갈망하게 되는 물건이다.

“존나 위험하네요. 당장 구입하겠습니다.”

“하하하. 위험을 감수할 만하다.. 이건가요?”

“예. 어차피.. 제 노예들은 저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으니까요. 천재를 양산할 수 있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죠.”

“과연. 옳은 생각입니다. 바로 포장해 드리죠.”

1만 코인 이상이라 그런지 바텐더는 조심스럽게 술병을 들어 박스에 포장했다. 그사이 나는 옆에 있던 술을 확인했다.

이번엔 바다를 퍼 올린 것 같은 푸른색의 술이었다. 색깔만 봐선 과거 매점에서 사 먹었던 블루하와이란 이름의 음료가 떠올랐다.

‘색깔 참 예쁘네.’

나는 술의 상세설명을 읽었다. 그사이 끝나지 않는 충동을 포장한 바텐더는 생글생글 웃으며 칵테일을 세잔 만들어 우리 셋에게 한 잔씩 돌렸다. 물론 손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포기를 모르는 잭슨이었다. 한놈만 걸리라는 그 심보가 너무 끈질기다.

[그 여름날: 레몬과 라임의 향이 뒤섞인 혼합주입니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 여름날을 마시고 잠든 이들은 모두 비슷한 꿈을 꾸게 됩니다. 어느 무인도의 모래사장에서 깨어나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꿈입니다. 지친 삶을 잠시 내려놓고 끝없는 행복과 무상의 쾌락이 가득한 해변에서 한가로운 여름을 즐기세요.]

[주의. 행복에 젖어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중독성이 극도로 강합니다.]

[가격: 5000C]

“이건... 흐음..”

'그 여름날'은 잠시 구입을 망설였다.

‘행복한 꿈이라..’

실상 자다가 죽을 때까지 마시고 싶게 만드는 약인데... 자다가 죽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없으므로 과연 이걸 내가 제대로 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죽이려는 놈들은 대부분 나의 원수거나 날 죽이려는 놈들이니까. 편하게 안식을 맞이시켜 줄 생각이 안 든단 말이지. 그렇다고 내가 마시기엔 중독성이 강하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리고.

“일단은.. 구입하겠습니다.”

나는 일단 그 여름날을 구매했다. 이때까지 여러 상품을 접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생존해 오면서 느낀 건데, 뭐든 일단 사두면 나중에 쓸 일이 생기더라. 만약에 쓸 일이 마땅히 안 생기더라도 그다지 비싼 것도 아니니까..

난 이어서 다음 술을 확인했다. 그건 우주의 색체를 품은 럼주였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극채색이 오묘하게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빠져들었다. 온종일 술병 안에 들어 있는 술을 쳐다보고 싶을 정도로...

[불친절한 이끌림: 다크 럼입니다. 복용할 경우 여러분은 2가지의 장소 중 한곳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첫 번째, 깨져나간 차원의 버려진 사원. 두 번째, 운항을 멈춘 우주 탐사선. 부디 이곳에서 여러분이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의. 잦은 복용 시 ‘휩쓸리기 쉬운 체질’이 됩니다. 그리될 경우 시도 때도 없이 끌려들어 갈 수 있습니다.]

[가격: 20000C]

이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특이한 효과를 가진 술이었다.

‘타차원으로 전이시킨다니...’

심지어 이동 당하게 되는 장소들도 굉장히 위험해 보였다. 더욱이 휩쓸리기 쉬운 체질이 된다는 주의문은 상당히 날 두렵게 만들었다.

이점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물건이지만...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문구가 상당히 신경 쓰였다. 마치 엄청난 보물이라도 숨겨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국, 나는 눈 꼭 감고 이 필요할지 아닐지도 모를 물건에 2만 코인을 태웠다. 뭐, 노예들이 알아서 벌어 주겠지.

주인 된 입장으로서 코인 소비에 그리 연연하지 말자. 어차피 자고 일어나면 노예들이 알아서 코인 수급해주니까. 나는 그냥 흥청망청 쓰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그럼 이제 마지막 물건이군요.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예.”

나는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술병을 확인했다. 이게 사실 아까부터 가장 눈에 띄었다.

[나 홀로 성간비행: 목 넘김이 좋은 벌꿀주입니다. 네 모금 쯤 되는 양을 연달아 복용할 경우 약 30초 뒤 복용자가 상상하는 장소로 순간 이동 됩니다. 이동 중 피부가 찢기거나 동상에 걸리는 등 다양한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주의. 가고자 하는 장소를 제대로 떠올리지 못할 경우... 우주 어딘가에 있을 ‘그것’들의 둥지로 끌려갑니다.]

[가격: 50000C]

“이건 안살 수가 없는 물건이네요.”

“하하하... 언제 어디서나 탈출 가능한 물건이니까요.”

오만코인짜리 술이라니. 엄청난 가격이다. 허나 그 성능이 너무 엄청나서 구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거라면 전율저택 같은 곳에서도 그냥 혼자 도망칠 수 있다. 남은 놈들이 어찌 되든 상관없이 즉시 탈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물론 양이 좀 심하게 작지만...’

벌꿀주는 소주병만한 병에 들어 있었다. 몇 번 마시면 없어지겠지. 영구히 쓸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단순 도구가 아닌 복용해야만 효력이 있는 술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전부 구입했으니 저희는 이제 가 볼게요.”

“아, 자, 잠시만..!!”

“아뇨!! 안녕히 계세요!!!”

자꾸 끈덕지게 뭔가를 권유하는 바텐더 잭슨. 그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고 질척질척하게 매달리는 타입이었다. 그러므로 우린 빨리 가게에서 나왔다.

이제 갈 곳은 광대새끼가 운영하는 노예상점이다. 위험도로만 따지면 최고로 위험한 장소로 여기서 암시장 지하공략대의 마지막 멤버를 받아들이면 이제 준비는 끝난다.

“저, 저기.. 준아. 저것들..”

“아람아. 그냥 신경 꺼야 해. 괜히 자꾸 쳐다 보면 관심주는 줄 알고 더 가까이 다가오거든. 그럼 진짜 곤란해져.”

“어. 알겠어.”

서커스 장으로 가는 길은 버려진 놀이공원이다. 여기엔 검은 형체들이 일렁이며 돌아다니고 있다. 괜히 쳐다보거나 관심을 가지면 놈들이 해코지를 할 게 분명해서 나는 얼른 아람이 손을 잡아끌었다.

그때, 앞장서서 걷고 있던 체셔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흐음.. 이거.. 이상한데...”

“예?”

“뭔가.. 내부구조가 완전히 바뀌었어. 준아.. 우리 길을 잃은 것 같댜.”

체셔의 폭탄 발언에 나는 그만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기, 길을 잃었다뇨..?”

“그게... 아마 그 광대새끼가 뭔 수를 쓴 것 같아. 우릴 엿먹을 작정인 모양인데...”

“아니, 그 미친 새끼는 갑자기.. 아.”

가만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 팔어스를 1만 코인 최저가로 구입하며 우린 놈을 진탕 놀려 먹었었다. 그때 광대가 굉장히 분노했었던 것 같은데.. 설마 그때의 일을 아직 꿍해 있을 줄이야. 찌질한 놈..

“아니 그 새끼.. 악성재고만 보여 준다고 해 놓고. 재고고 뭐고 그냥 아예 가게를 이전 시켰네요?”

“그러게 말이야. 어지간히도 우리가 싫어졌나 봐.”

“저, 저기.. 준아. 무슨 일인데?”

불안 해하는 아람이. 나는 그녀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허어... 좆됐네?”

“어. 완전.”

“그럼 이제 어떻게 해? 그냥 돌아가야 하나?”

아람이의 물음에 오기가 생긴 건지 체셔가 얼른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지. 이대로는 못 가. 찾아내기만 하면 돼. 나만 믿고 따라와라. 내가 가이드 경력이 얼만데. 그냥은 못 가지.”

“역시.. 믿음직해요.”

“체셔 언니... 멋져요.”

“후후후...”

우리가 응원하자 힘차게 서커스장을 찾기 시작한 체셔.

우린 이후 약 2시간 동안 서커스장을 찾아다녔다. 만약 내가 4시간 밖에 없었다면 중간쯤에 그냥 포기하고 돌아갔겠지만 어차피 꼬인 골목에서 밖으로 빠져나갈 문을 찾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시간을 지체해도 크게 상관없었다.

더구나 여기가 마지막 행선지이기도하고. 중앙광장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 에일라가 조금 걱정이지만 암시장 베테랑인 그녀가 아마 우리보다 편하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찾았다!! 이 망할 자식아!!!”

드디어 찾아낸 서커스 장. 한창 관객석을 닦고 있던 광대는 우리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나를 손가락질 했다.

“아, 아니!! 뭐냐!! 너희 이제 나갈 시간이잖아!! 뭔데!! 왜 온 거냐!!”

놈은 우리가 시간만 지체하다가 돌아갈 거라고 예상했는지 서커스 장을 치우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난입하자 굉장히 당황한 모습으로 소리쳤다. 역시나 길을 배배 꼬아 놓고서 우리가 오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체셔는 놈을 한껏 비웃으며 손님으로서의 정당한 요구를 최대한 재수 없게 했다.

“됐고! 시간 없으니까 빨리 상품이나 꺼내 와라!!”

“끄으윽... 이 질긴 놈들... 꾸역꾸역 기어 들어와선... 조금 있으면 문 닫을 시간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묻닫기 전에 빨리빨리 움직여!! 느려터진 굼벵이놈아!!”

“끄르륵...!”

광대는 분해 죽겠다는 듯 인상을 한껏 찌푸리더니 우리를 지하창고로 안내했다.

“아람아, 철창 가까이 가면 안 돼.”

“응. 알고 있어.”

우리는 든든한 체셔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거의 동네 양아치 형이 내 편인 느낌이다. 아까도 먹거리 골목에서 재수 없는 도넛 가게 주인의 머리를 터트려 버리더니. 여러모로 참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다.

곧 노예창고의 안쪽 끝에 도달한 광대는 4명이 아닌 9명의 노예를 보여줬다.

“자, 봐라. 안 팔리는 놈들만 잔뜩 이니까. 아무거나 골라가!”

“오.. 진짜.. 재고들이네요...”

나는 그만 감탄하고 말았다.

노예상이 꺼내온 놈들은 전부 내가 구입하길 포기했던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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