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 176. 도처에 깔린 저주
* * *
체셔는 눈을 떴다. 그 즉시 그녀는 주변을 탐색했다.
다행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하경비대는 아직 그들의 침입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직은 안전하다. 아직은.
“윽..”
곧 체셔의 뒤에서 한아람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떨어졌다.
“여긴...”
“쉿. 작게 말해야 해..”
“아.. 네..”
한아람은 체셔의 경고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들어오자마자 들키면 굉장히 힘들어진다. 1층을 넘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랬다간...’
경비는 더욱 삼엄해질 것이고 지하층 공략은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언제가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긴장감 넘치는 지하층이 다시 느슨해지기까지는 굉장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체셔는 무조건 이번 도전으로 영혼조각을 되찾고 싶었다. 그녀가 느끼기에 이번 원정은 마치 세상이 나서서 도와주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디보자...'
그 사이 한아람은 어둠감시 스킬을 발동해 시야를 확보했다. 광원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장소였기 때문에 스킬의 도움이 절실했다. 인위적인 빛을 만들어 냈다간 금방 들킬 테니까.
곧 어둠감시의 효과로 광원이라곤 하나도 없는 어둠 속에서 점차 눈이 익숙해져 갔다.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한아람은 자신이 무한히 이어진 미로의 한복판에 떨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상한 냄새... 이건.. 마기..’
또한 한아람은 미궁의 공기 중에 은은하게 퍼져 있는 마기를 예민하게 감지했다. 마기를 느낀 순간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마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마기를 흡수할 수록 강해지는 데몬 슬레이어 답게 거의 공기청정기나 다름없었다.
체셔는 한아람이 마기를 흡수하기 시작하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기 유저가 아닌 이들은 이곳에 출입하는 것만으로 계속해서 도트 데미지를 받는다. 허나 한아람의 존재덕분에 그럴 일이 없어졌다.
한아람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 이번 원정에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뭐지..?’
어둠감시 스킬의 효과로 인해 어둠을 완전히 꿰뚫어 볼 수 있게 된 한아람. 그녀의 눈엔 나머지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체셔와 지하 1층 내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체셔가 잠시 가방을 뒤지고 있는 사이 미궁을 둘러보던 그녀는 돌을 깎아 만든 어두운 복도에 새겨진 정체 모를 문자를 보았다. 그 문자를 따라가다보니 빼곡히 양각된 벽을 찾을 수 있었다. 한아람은 벽면에 그려진 그림들을 자세히 살펴보려 했다. 이 일련의 행동의 그녀의 의지를 넘어선 일종의 이끌림이었다.
한아람은 애초에 벽에 쓰인 글자를 본 순간부터 말려들었다. 벽면에 새겨진 악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직시하고 말았다.차라리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더라면.. 그편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심장을 꺼내는 인간과.. 숭배 받는... 악마..? 어쩌면.. 신일지도...’
마치 고대문명의 생존자가 목숨을 다 바쳐 새겨둔 듯한 그림과 문자들이 읽히기 시작하자 금방 한아람은 벽에 매료되어 갔다. 벽의 그림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빠져들었다. 함정에.
'좀 더, 좀 더 보고 싶어...'
그녀를 자극한 것은 호기심이었다. 그래, 이건 지적인 탐구였다. 아니, 이건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제물... 숭배... 찬양... 공물... 강림... 왕관?’
그녀가 쓰고 있던 인지저해용 고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아람은 굳건히 들고 있던 대형망치를 바닥에 내려 뒀다. 악마 사냥꾼의 업을 놓아버린 것이다. 격이 다른 악마의 유혹에 한아람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곧 모자이크 처리되지 않은, 도무지 검열되어지지 않는, 알아선 안 되는 사이하고 사특하고 사악한 정보들이 한아람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한아람은 그 과정 속에서 정신이 확장되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마치 축복 같았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한아람은 벽에 빨려 들어가 ‘왕의 처소’로 끌려갈 것이다.
벽에 새겨진 것은 그런 저주였다.
그건 후계자를 위한 왕의 인도였다.
또한 이건 탐욕하는 이들의 욕망이라.
지식의 저주에 빠진 자들에겐 응당 그에 걸맞은 격식이 필요하니.
[그러니 자격을 가진 우자여, 왕관을 쓰라.]
[비록 피로 물들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눈부시니.]
[왕관은 그대를 진리로 인도하리라.]
인간의 탐욕이 왕관을 부른다.
반인반마의 피가 들끓는다.
정당한 승계가 이뤄지리라.
천천히 진리가 낭송된다.
진리는 사랑을 논하니.
한아람은 귀를 열어 진리를 엿들었다.
[차별 없이 타인을 대우하라.]
[평등하게 선행을 베풀어라.]
[그대, 모두를 사랑하라.]
[겸애(??)는 곧 비애(??)일지니.]
[모두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모두를 미워한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니 타인을 원망하고 미워하라.]
한아람은 거대한 이끌림에 몸을 맡길지, 이를 거절하고 인간성을 유지할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욕망에 저항했다.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저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자기파멸적인 욕망을.. 거부하고 저항했다.
이대로 휘말려 들어가면 파멸뿐임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 파멸마저 너무나 달콤했기에 넘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충동이 자꾸만 일어났다.
“아람아.”
그때, 잠식되어가는 정신을 붙잡아주듯 체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아람은 그게 과연 정말 체셔의 목소리가 맞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물리적인 억압에 그녀는 뒤로 끌어당겨졌을 뿐이다.
쿠당탕!!
“흐읍...!!!!”
“아람아, 괜찮아?”
“어.. 언니.. 언니.. 나..”
체셔는 벽면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던 한아람을 확 끌어당겼다.
조금만 늦었다면 한아람은 죽었을 것이다.
아니, 죽진 않았겠지만..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은 상태가 되었겠지.
그리되었다면 체셔의 영혼탐색이 아니라 한아람 구출 작전이 시작 됐을게 뻔했다. 어쩌면 분노한 장조준에 의해 악마와의 전면전이 시작됐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전에 기분 나쁜 마의 움직임을 눈치챈 체셔가 한아람을 구해 냈다. 한아람은 체셔에게 목숨을 하나 빚졌다.
“우욱...”
“정신 오염일거야. 아람아, 일단 이거 한 알 먹고...”
체셔는 당장 응급조치를 시작했다. 지하층엔 저주가 만연하기에 항상 서로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야 했다.
‘설마... 방금 걸로 들키진 않았겠지..’
제발 그러지 않았기를 체셔는 간절히 빌었다. 만약 네임드 악마에게 존재를 들켰을 경우 앞으로의 계획이 대차게 꼬여 버리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조준이 악마 빙의자들을 도륙 내며 돌아다녔기 때문에 착각하기 쉽겠지만, 악마 빙의자와 실제 악마는 격이 다르다.
네임드 악마 중에서도 넘버링이 높은 녀석들은 체셔도 감당이 안 됐다. 만약 상위 넘버링의 네임드 악마가 출현할 경우... 그야말로 대참사라 할 수 있었다.
“여기, 물.”
“고, 고마워요..”
일단 체셔는 자신에게 행운이 따라주길 기도하며 아람이에게 정신 오염을 완화시킬 알약과 가지고 있던 버섯수를 넘겨줬다. 한아람이 벽에 새겨진 악독한 문자에 홀린 것은 한아람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기에 체셔는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이곳에선 언제 어디서 무슨 저주에 걸릴지 알 수가 없다. 직접 저주를 거는 존재들이 있는가 하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악의 가득한 저주를 덮어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체셔는 아람이가 빠져들 뻔한 벽면의 저주를 그저 운이 조금 나빴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꿀꺽. 꿀꺽...
한아람은 체셔가 건네는 뭔지 모를 알약과 물을 받아마셨다. 물은 버섯 수였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당장 이 씻을 수 없을 정도로 아찔한 갈증을 해소하고 싶었다.
분명 조금만 더 엿볼 수 있었더라면 더 높은 경지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가시질 않았다.
‘이런..’
한아람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생각을 비웠다. 멍해지는 것. 그건 한아람의 주특기였으니. 그녀는 곧, 좀 전에 보고 들었던 모든 걸 묻어 버리고 기억의 저편으로 날려 버렸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파이몬의 왕관은 생각하고 떠올릴수록 더욱 깊은 갈망을 요하기에 차라리 모른 척 잊어버리는 편이 좋았다.
“으엑..!”
“개굴!”
곧 케시아와 케케르도 지하로 떨어졌다. 그녀들도 체셔의 경고에 따라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다 어두운 심해나 우중충한 늪지대에서 살았던 이들이기에 어둠 속에서 금방 적응했다.
이후 조용히 착지한 조준과 에일라까지 모두 모이고 나서야 그들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참고로 한아람은 좀 전의 일을 굳이 조준에게 말하지 않았다. 괜한 걱정을 끼치기 싫었기 때문이다.
체셔는 벽면에 새겨진 문자나 그림은 최대한 보지 말라고 일행들에게 경고했다. 소곤소곤 말하는 체셔의 목소리를 들으며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보자...”
곧 에일라는 일행이 나아갈 방향을 알아내기 위해 품에서 목걸이를 하나 꺼냈다. 그러곤 길게 늘어뜨린 다음 마력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목걸이 끝에 달린 투명한 크리스털이 은은한 빛을 내며 그들이 가야 할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쭉 직진.”
방향을 알아낸 에일라는 얼른 목걸이를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빛을 오래 노출시킬 필요는 없었다. 아직 들키지 않았을 때 최대한 목적지까지 가두는 편이 좋았다.
침묵 속에서 일행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소음을 최대한 억제하며, 간혹 에일라가 방향을 탐지하기 위해 목걸이를 사용할 때 빼곤 아무런 말도 대화도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지독한 어둠을 해치고 침묵을 유지하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2층으로 넘어갈 구멍을 찾을 때까지.. 계속...
그리고 그들의 뒤를 무언가가 스멀스멀 쫓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