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 185. 이제 탈출할 시간이다
* * *
지하 4층의 허공이 갈라지며 거미의 앞발이 튀어나왔다.
곧 심연을 뿜어내며 거대한 아라크네가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녀는 등장과 동시에 악마들을 벌레 취급하더니 곧 실을 뿜어내며 그들을 공격했다.
[피해라!! 비발!!! 맞으면 죽는다!!!]
[으, 으아아!!!]
검게 물든 실을 보며 아발람은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저건 맞아선 안 된다고. 아니, 닿아서도 안 된다고 아발람은 생각했다.
그때, 키시리아가 뿜어내는 거미줄을 요리조리 피해다니던 비발이 결국 사방에서 날아드는 거미줄을 피하지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다.
[끄아아아!!!! 아발람!! 도와줘!!! 아발람!!!!!]
거미줄에 걸린 까마귀의 비명소리.
키시리아는 틈을 주지 않고 비발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시끄러운 까마귀로군.]
순식간에 비발이 실에 뒤엉켜 고치가 되었다. 비발은 고치 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미친듯이 발버둥 쳤으나 키시리아의 거미줄은 찢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키시리아는 사로잡은 비발을 아무렇게나 대충 집어던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발람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
아발람의 생각이 맞았다. 키시리아가 뿜어낸 실은 그 자체로 신의 저주나 다름없었다.
만약 아무런 방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키시리아의 거미줄이 몸에 닿는다면 손쓸 도리도 없이 순식간에 엉켜들 것이고, 실이 엉켜들었다간 산 채로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된다.
그래, 심층지주의 실이 몸에 엉켜 버린 시점에서 살아나갈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똑같은 수준의 격을 가진 존재가 와서 구해주거나, 아니면 키시리아가 변덕을 부려 살려주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젠장, 젠장, 젠장!!!!’
아발람은 속으로 처절하게 소리쳤다. 갑작스레 등장한 저 말도 안 되는 괴물의 모습에 그는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꼬여 버린 건지 도무지 아발람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저 괴물이 왜 여기에!!! 설마.. 저 인간들 중에... 컬티스트가 끼어 있었나?’
그제야 컬티스트의 존재를 자각한 아발람.
참고로 아발람은 지하층에 들어온 인원들의 맨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암시장에서부터 조준을 포함한 그의 일행들은 전원 방독면이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저 인간들 중에 조준이 끼여 있음을 몰랐다.
파이몬이 절대 건들지 말고 그냥 무시하라고 경고했던 인간들 중 하나임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조준의 몸에 새겨져 있는 악신의 표식들, 일명 악신의 성흔들도 공허의 신 보타밀리긴 새겨둔 표식에 의해 은밀하게 감춰져 있었기에 멍청한 아발람은 조준에게 악신의 흔적이 있음을 파악할 수도 없었다.
만물의 진실을 꿰뚫어 본다던 악마의 눈도 신의 장막은 들추지 못한 것이다.
거기다 비발과 아발람은 그들의 생김새나 모습을 정확하게 관측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본 것은 조준 일행이 가진 영혼의 빛이었지 형상이 아니었다.
그저 일렁이는 불꽃으로 희미하게나마 그들을 인식한 상태였기에 어떤 놈들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다른 악마들은 죄다 침입자들의 정체를 미리 파악하고서 숨죽인 채 그들이 어서 빨리 지하층을 떠나길 기도하고 있던 시점에서 비발과 아발람만이 멍청하게 난입한 것도 다 그런 이유였다.
애초에 암시장을 돌아다니는 인간은 컬티스트 뿐이라는 파이몬의 경고를 대충 흘러들었던 것이 잘못이긴 하지만...
어쨌든 조준은 존재 자체로 악마들의 억제기가 되고 있었다. 한아람이 마기를 집어삼키며 공기청정기 역할을 했듯이 조준은 존재자체로 악마 기피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 중이었던 것이다.
‘어떡하지.. 이제 나는 어떡해야 하지. 도, 도망가야 하나..? 아니, 도망을 칠 수는 있나?’
오랫동안 외부 활동을 제한 받아왔던 아발람은 악마의 영역에 발을 들인 인간들이라면 죽여도 정당방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정당방위를 변명삼아 죽여 버리려고 했던 인간이 만약 신의 자식 쯤 되는 인물이라면 어떨까. 어떤 느낌일까.
아발람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조, 좆됐다... 파이몬님..!!!’
그는 속으로 주군을 애타게 불렀다. 허나 아무리 불러도 파이몬은 대답이 없었다.
굉장히 바쁜 모양이었다. 아니면 대답조차 해주기 싫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마도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비발과 뒤엉켜 있던 주살짐승은 새롭게 나타난 괴물의 모습에 전율했다.
거대한 거미의 몸통과 마치 신이 직접 조형한 듯이 극도로 아름다운 여인의 상체는 주살짐승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먹어보고.. 싶사와요..’
주살짐승은 입맛을 다셨다.
처음에 악마가 등장했을 때도 그녀는 지금과 비슷한 전율이나 갈망을 느꼈다.
모두가 주살짐승이 겁을 먹고 떨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주살짐승은 겁먹지 않았다. 배고픔을 느꼈을 뿐이다.
이런 비정상적인 식욕은 주살짐승이라는 존재가 가진 본능이자 본연의 능력 때문이었다.
주살짐승은 집어삼킨 대상의 힘을 갈취할 수 있다.
주종관계가 역전되는 순간 케케르를 집어삼키고 그녀가 가지고 있던 주술과 끝나지 않는 충동의 효과를 넘겨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짐승은 본능적으로 강한 존재에게 끌리게 된다.
무심코 먹이로 인식하게 된다. 침을 뚝뚝 흘리며 잡아먹고 싶다고 생각해 버리게 된다.
새의 모습을 한 악마, 비발의 공격을 받아 넘기면서도 주살짐승은 비발을 먹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비발을 죽이고 그의 새대가리를 집어삼킨 후 허공에 떠서 상황을 지켜보던 아발람도 먹을 생각이었다.
나아가 주인인 조준을 씹어먹고서 그의 힘을 빼앗을 망상까지 하고 있었다.
허나 심층지주를 목도한 순간, 그녀의 모든 계획이 무의식의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주살짐승은 지금 간절히 키시리아의 살점을 원했다. 침을 질질 흘리며 굶주림을 느꼈다.
‘저걸 먹으면... 본녀는 분명 말도 안 되는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시와요.. 와아...’
주살짐승은 키시리아에게 겁 없이 덤벼들었다.
[꺼져라.]
투과과광!!!!!
허나 닿을 수 조차 없었다. 주살짐승은 자신이 무엇에 얻어맞은 건지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키시리아의 앞발 휘두르기에 스친 것 만으로 수십 미터를 날아가 처박혔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위치가 조준이 서 있던 곳 바로 앞이었다.
“어.. 어어...?”
주살짐승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조준과 눈이 마주쳤다.
“바, 반갑사와요....”
곧바로 조준은 늪지의 귀곡도를 뽑아 들었다.
******
키시리아가 본격적으로 악마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악마들은 키시리아의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중이었고 체셔가 말한 상왕은 아직 등장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 키시리아는 내가 휘말려들까 봐 전력을 내지 않고 있어... 빨리 주위에서 사라져 주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 거야.’
나와 소환수인 키시리아는 영혼으로 묶여 있는 관계다. 그렇다 보니 그녀가 느끼는 감정의 일부를 나도 느끼게 되는데, 지금 키시리아는 우리를 굉장히 성가셔 하고 있었다.
우리가 너무 약하다 보니 조금만 잘못해도 휘말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억지로 힘 조절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키시리아가 더 편하게 악마들을 찢어발길 수 있도록 빨리 여기서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다.
“에일라. 이 틈에 빨리 결계 풀고 체셔 영혼이나 찾읍시다.”
“어..? 어. 그, 그래. 어. 우와. 어.”
에일라는 악마들을 농락중인 키시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인형이라 표정을 지을 수 없는 에일라지만.. 지금은 왠지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허어...”
아람이는 키시리아가 뿜어내는 포식자의 위압감에 질려 버린 건지 굉장히 차분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악마를 모두 죽여야 한다느니, 사악한 놈들은 모조리 처단해야 한다느니, 미쳐 버린 분조장의 모습을 보여 주던 아람이였지만, 지금은 진정한 강자의 등장에 완전히 기가 죽어 버렸다.
나는 어딘가 시무룩해 보이는 아람이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괜찮아, 아람아. 너는 충분히 너의 역할을 해주고 있어. 그러니까 너무 기죽지 말고, 이제 체셔의 영혼 조각 찾아서 빨리 여길 나가자.”
“으응.. 그래. 그러자. 빨리 벗어나자. 나, 이제 좀 무서워.”
아람이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선 내 뒤를 따랐다.
그런 와중에 케시아는 그냥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린 건지 실실 웃기 시작했고. 체셔 또한 이젠 한시름 놓았다며 웃음꽃이 피었다.
절망 속에서 죽어갈 줄 알았던 우리는 커다란 거미여왕의 등장에 다시 영혼 조각을 탐색할 수 있었다.
“찾았다!!!”
“오오!!”
체셔의 영혼 조각은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수정구 안에 들어 있었다.
나는 대용량 가방에서 영혼 추출기를 꺼내 수정구에 처박았다. 그러자 수정구가 깨져나가며 안에 들어 있던 체셔의 영혼 조각이 추출기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런데 아까 상왕이 나온다고 했잖아요.”
“응. 그렇지?”
“그런데.. 그놈은 언제 나오는 건가요?”
“그러니까. 나도 그게 의문이야.. 저 두 놈이 나왔다는 건.. 상왕 파이몬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의미인데.. 왜 안 나타나는 거지?”
체셔도 그것까진 알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냥 안 나온 김에 계속 안 나왔으면 좋겠다.
“그럼 이제 3층으로 돌아가면 되죠?”
“맞아. 우리가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면...”
그때 무언가 나의 발치로 날아들었다.
쾅!!!
“으악!! 이번엔 또 뭐야!!”
“어? 준아.. 이건..”
내 바로 앞에 처박힌 놈은 피떡이 되어 널브러진 주살짐승이었다.
놈은 바들바들 떨며 나를 올려다 봤다.
“바, 반갑사와요....”
그러곤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온다. 뭐지? 살려달라는 어필인가?
“뭐? 반가워? 이새끼가...”
나는 피떡이 되어 버린 주살짐승을 본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놈 때문에 사라져 버린 나의 20만 코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 피 같은 코인... 절대 포기 못 해..’
아직 상왕이 나타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키시리아도 악마 두 마리를 상대로 여유롭게 싸우고 있는 중이고, 창고지기들은 다 도주했다.
그렇다면.. 잠깐 짬을 내서 이 개구리 새끼를 굴복시켜 노예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허리춤에 있던 칼을 뽑아 들었다.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어? 나도 보고 싶었다. 이 개좆 같은 새끼야.”
그리고 그대로 주살짐승의 가슴팍에 검을 처박았다.
“끄아아아!!!!”
감미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악마들의 비명과 주살짐승의 비명이 묘하게 뭉쳐져 화음을 이루었다.
잃었던 만큼 되찾을 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