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 192. 어찌하여 목만 오셨소
* * *
“흐억...”
언제 잠든 거지?
아니, 정신을 잃은 건가.
모르겠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마치 영혼마저 잡아 뽑힌 것처럼.
‘몇 시간이나 지난 거야.. 아니, 며칠이 지난 거지?’
중간에 아람이까지 깨서, 나와 체셔, 에일라, 아람이 네 명이서 물고 빨았더니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렸다.
‘아람이는..’
물컹거리는 감촉. 나는 지금 아람이의 배를 베고 있었다.
아람이의 뿔을 잡고서 미친 듯이 펠라를 시켰던 것 같은데.. 기억이 거기서 끊겼다.
“큭..”
머리가 조금 지끈거린다. 냉장고에서 냉수라도 꺼내 마시고 싶은데 내 팔을 베고 잠든 체셔와 에일라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체셔..”
“으응?”
내가 부르자 잠결에 대답한 체셔.
순간 피곤할 텐데 괜히 깨우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 아니예요.”
“으응...”
오른팔을 베고 누워 있는 체셔와 왼팔을 차지한 에일라.
잠들어 있는 두 사람 다 얼굴이 반들반들하다.
마치 몸보신이라도 한 것처럼.
‘허어..’
나는 다시 드러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힘들어서 그런다기보다는 개운한 느낌의 한숨이다.
참, 힘든 일도 많았지만 결국은 이렇게 안정을 취한다.
이런 게 인생이 아닐까 싶다. 위기의 순간이 오더라도 이렇게 또 일이 잘 풀리면 쉴 수 있는...
나는 이런 순간들을 위해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 근심걱정 없이 자빠져 누워 내 여자들의 몸이나 쓰다듬는 삶.
그래, 이게 행복이지.
구를 때는 죽어라 구르지만 중간중간 이렇게 쉬어가는 시간이 있어서 다행이다.
만약 밑도 끝도 없이 계속 그냥 앞으로 직진만 했다면 나는 버티지 못했으리라.
아마 여자들과 관계를 맺을 때 악신들이 말을 걸지 않고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이유도, 내 여자들은 공양하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도 전부 그런 거겠지.
악신들도 알고 있는 거다.
나라는 인간은 중간에 이렇게 쉬어 줘야 다시 개처럼 일한다는 사실을.
쉴 수 있는 시간을 줘야 고장 나지 않고 계속 달려 나갈 수 있는 인간임을 악신들도 알고 있는 거지.
정말 나를 도구처럼 사용했다간 금방 망가질 거란 사실을 알고 있는 거야.
“그래서 말인데. 이번엔 진짜 좀 많이 힘들었으니까.. 좀 만 더 쉬고 싶은데요.”
나는 스멀스멀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는 카쉬낙스에게 속삭였다.
[약간의 유예는 남았으니. 마음대로 해라.]
“예. 감사합니다. 카쉬낙스님.”
좀 더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말해본건데 흔쾌히 허락 받았다. 나는 재수가 좋다고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암시장을 나가기 전에 좀 더 자기로 했다.
******
“으음..”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모두 깨어 있었다.
나는 소파로 옮겨져 담요가 덮여 있었고.
아마 쉽사리 깨지 못한 나를 챙겨 준 모양이다.
“일어났어?”
“아, 네.”
소파에 앉아 잠기운을 떨쳐 내고 있자 체셔가 정체불명의 액체가 가득 들어 있는 유리잔을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여기, 이거 한잔 쭉 마셔.”
“이건..”
“직접 만든 피로 회복제. 방금 약초 넣고 갈아서 만든 거니까. 어서 먹어봐.”
“오.. 감사합니다.”
나는 체셔가 건네주는 녹색 액체를 받아 마셨다.
이미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어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우웁..”
너무 방심했던 걸까. 나는 피로 회복제를 모조리 뿜을 뻔했다.
이거 굉장히 쓰다. 몽롱하던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쓰고 진했다. 또한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몸에 열이 살짝 오르며 힘이 샘솟았다.
“이거.. 효과 엄청 나네요.”
“그치? 헤헤.”
체셔는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남은 음료를 마시며 체셔에게 물었다.
“뭔가.. 다들 분주해 보이네요?”
“응. 좀 있으면 나갈 테니까. 챙겨 갈 물건들 정리중이야.”
“챙겨 갈 물건이요?”
“응. 이 공간 채로 전부 가지고 나가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까. 필요한 물건들은 최대한 챙겨서 나가야지. 앞으로 암시장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밖에 못 들어올 테니까.”
“아하.”
곧 정들었던 거처를 떠난다는 생각에 조금 울적한 표정으로 방을 둘러보는 체셔.
“정말 지긋지긋했는데. 막상 떠날 때가 되니 뭔가 싱숭생숭하네.”
“흐흐.. 이사할 때 다들 느끼는 감정이죠.”
“그런가? 하하하. 나는 이사는 처음이라서.”
“아, 그렇겠네요. 평생... 암시장에서 살아왔을 테니..”
체셔에게 이곳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첫 집이자 유일한 안식처였을 거다. 그렇다 보니 이사는 이번이 처음인 거겠지.
‘첫 이사라... 나는 어땠었지?’
잘 기억이 안 난다. 기숙사는 집이라기엔 그저 잠시 머물던 장소 같은 느낌이었으니. 그런 의미로다가 내 첫 집, 처음으로 얻은 나만의 공간이라 함은 대학교 3학년 때 얻은 원룸이 아닐까 싶다.
돈도 뭣도 없는 개털이 죽어라 알바해서 겨우 얻었던 굉장히 협소한 자취방.
바퀴와 돈벌레는 거의 그냥 룸메이트 같았던 장소에서 나는 겨우 몸을 우겨넣고 살았던 것 같다.
대학졸업 이후로는 고시원에 처박혀 이리저리 취직한다고 바빴고.
1년 만에 중소기업에 겨우 취직해서 안정적인 월급을 받게 됐을 때야 나는 비로소 겨우 낡디 낡은 복도식 아파트 3층에 자리를 잡아 집세내고 살 수 있게 됐지.
어찌 보면 내 인생도 참 순탄치 않은 인생이었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나서부터 뭘 하든 다 잘 안 풀렸으니까. 하물며 조별 과제 조차도 항상 개쓰레기 같은 놈들만 조원으로 걸려서 장학금 타려고 아득바득 내가 다 했었지.
“우리 잘 살아봐요, 체셔.”
“응. 후후. 준이의 다른 여자 친구? 아내? 아무튼 그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흐흐. 다들 착해서 잘해 줄 거예요.”
“후후. 응. 그럴 것 같아.”
체셔는 씩 웃더니 챙길게 있다며 다시 부엌 쪽으로 갔다. 솔직히 잘 안지내면 안 된다. 체셔가 제일 강한데 감히 누가 개길까.
에일라도 만만찮고. 케시아와 케케르는 뭐.. 그냥 쩌리니까 상관없다. 저 둘은 좋게 쳐줘도 첩과 비슷한 상태니까.
‘다들 잘 지내줘야 할 텐데...’
그래도 조금 걱정이 됐다. 사람이 모이면 다툼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인 법이기에. 그저 나는 다들 평범하게라도 지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애초에 싸울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서로 잘 안 마주 치려는 분위기도 있지만.’
성향이 안 맞는 여자들은 알아서 서로를 피한다. 내가 있을 때야 하하 호호 웃고 있지만 전율저택 때도 그렇고 이번 암시장 지하층 공략 때도 그렇고 나는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으니까.
내가 없을 때는 메르나 희선 누나가 중간에서 조율해주며 최대한 감정 싸움이 나지 않게 해주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럼 슬슬 나도 움직여 볼까.’
나는 남은 음료를 전부 마신 다음 기지개를 켰다. 그러자 짐을 정리하고 있던 아람이가 나에게 가죽 주머니를 건네며 물었다.
“저기, 준. 이거 자꾸 꿈틀거려.”
“응? 아.”
그건 내가 밀렵꾼에게서 구입했던.. 머리통이다.
“그거 이름이 뭐였더라, 헨리의 머리였나?”
“몰라. 이상한 냄새도 나는데... 어쩌지? 버릴까?”
“아, 아니. 일단 그건 나주고 다른 거 챙겨줄래?”
“응. 알겠오.”
나는 아람이에게서 머리통이 들어 있는 가죽 주머니를 건네받았다.
‘나락의 밑바닥에 몸이 버려진 살인청부업자의 머리...’
나는 이걸 구입하고 난 뒤로 단 한 번도 가죽주머니를 열어 보지 않았다.
더구나 아직 죽지 않은 놈이라 대용량 가방에도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암시장 지하층을 공략할 동안 썩지 말라고 냉동고에 넣어 두고 갔었다.
“흐음.”
나는 꿈틀거리며 뭔가 중얼중얼거리는 머리가 어떤 상태일지 궁금해서 가죽 주머니의 입구를 벌렸다.
어차피 인디크론의 계시에 따라 나락의 밑바닥에 있을 조력자를 만나러 가야 한다. 가는 김에 겸사겸사 머리를 되찾아주고 헨리의 충성을 얻으면 되겠지.
“크흠. 냄새.. 시발..”
입구를 열자마자 피비린내가 훅 풍겨 왔다.
또한 까만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머리카락을 붙잡고 그대로 가죽 주머니에서 헨리의 머리를 끄집어냈다.
“우욱..”
잘려 나간 남자의 머리통.
영화 모데카이에 나올 법한 양쪽 끝이 둥글게 말려 있는 콧수염과 서구인 특유의 강해 보이는 인상. 헨리라는 이름에 걸맞게 좀 막돼먹은 생김새다.
심지어 냉동고에 며칠이나 처박혀 있어서 그런지 피가 굳어 살얼음도 껴있어서 뭔가 좀 많이 그로테스크했다.
“저, 저기요?”
“커헉.. 허.. 허억.. 추, 추워. 추워. 추추추추추추워..”
내가 부르자 헨리는 눈을 부릅뜨더니 사시나무 떨듯 이를 맞부딪치며 떨었다.
‘아..’
냉동고에 넣은 건 실책이었던 모양이다.
“저기, 체셔!”
“응?”
조리도구를 잔뜩 챙기고 있던 체셔가 고개만 빼곰 내밀고서 나를 쳐다 봤다. 곧 그녀는 내 손에 들려 있는 머리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준아, 뭐야 그건?”
“아, 이거 그때 움막에서 샀던 머리통인데..”
“아! 그때 그거. 악성재고?”
“예. 악성재고라고 밀렵꾼 아재가 천코인에 팔았던 그거요.”
“아하. 그런데 그게 왜?”
“혹시 난로 같은 거 있을까요? 너무 꽁꽁 얼어서 대화가 안되네요.”
“아, 잠시만.”
곧 체셔가 천장을 열더니 작은 사각형 통을 하나 꺼내 왔다. 지구의 난로와는 좀 다른 생김새였다.
“여기, 전원키면 금방 따뜻해질거야.”
“아, 고마워요.”
“뭘. 헤헤.”
나는 헨리의 대가리를 사각형 난로 앞에 가져다 뒀다.
난로는 전원을 켜자 곧 붉게 물들더니 온기를 방출했다.
“허억. 허어. 흐어억.. 콜록! 쿠허헉..”
점차 헨리의 대가리에 껴있던 얼음이 녹아내리고 그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띠고서 헨리의 머리통과 대화를 시도했다.
나락의 밑바닥에서 가까이 다가오는 놈들을 다 썰어 버리고도 아직 죽지 않은 괴물인데 당연히 친절하게 대해야지.
더욱이 가죽 주머니 안에서는 나를 못 봤으니 내가 냉동고에 처넣은 줄도 모를 거다.
“여, 여긴...”
“정신이 드셨습니까?”
“어.. 너는.. 누구..?”
“얼음 속에서 당신을 꺼내 왔습니다. 조준이라고 합니다.”
“어어.. 나, 나는.. 난 헨리... 성은 버렸으니 그냥 헨리라고 불러 주게.. 콜록! 콜록!!”
기침하며 다 죽어 가는 대갈통.
그게 나락의 망령 헨리 9세와의 첫 만남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