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 193. 손님 많은 날
* * *
“젠장..”
암시장의 초입, 꼬인 골목에 몇 명의 미국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닉의 동료들로 암시장의 하수도, 일명 약쟁이 소굴을 찾아 들어온 플레이어들이었다. 정확히는 그곳을 거쳐 도달할 수 있는 '드러그 앤 러쉬가 그들의 목적지였다.
그리고 그들이 드러그 앤 러쉬를 목표로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는 금간 앙크를 얻기 위해서다.
만신전의 영웅이자 구원자인 니콜라스를 다시 깨우기 위해선 나락의 밑바닥으로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금간 앙크가 필요했고 닉의 동료들은 금간 앙크를 찾기 위해 다방면으로 수소문하던 중 악마의 속삭임을 듣게 됐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파이몬이 이들에게 은밀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암시장으로 오라. 타락의 증거를 내가 가지고 있으니.]
파이몬은 이들 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현실에 현현하기 위해선 말도 안 되는 인과율을 감당해야 했고, 그렇게 현현 하더라도 정당한 과정 없이 본인의 인과율을 소모해 억지로 모습을 드러낼 경우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후폭풍을 감당해야 했다.
그렇기에 파이몬은 이들에게 넌지시 암시장으로 오라는 말을 전한 것이다.
이에 현자 마이클의 정보에 의해 암시장 진입법을 알아낸 닉의 동료들은 발 빠르게 모아 뒀던 영약들을 사용해 '생명담보' 업적을 달성했고 암시장에 진입했다.
열쇠 하나로 한 번에 같이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2명.
그들은 암시장의 열쇠를 3개 얻어 총 6명이 진입했다. 2인 1조로 무려 3팀이나 들어갔으니 이들 중 한팀은 무조건 금간 앙크를 구해와주길 기도하며.
그리고 다시 현재.
꼬인 골목에 진입한 3팀 중 한팀인 마크와 리오.
“살벌하군.”
“위험하다더니.. 시작부터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아.”
흑인인 마크와 히스패닉인 리오는 주변을 둘러보며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그들은 앞으로 자신들에게 닥칠 파멸적인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
“그럼 떠나기 전에 싹 둘러보고 가자.”
“예.”
얼추 짐을 다 챙긴 우린 적당히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곧 암시장의 문이 열리는 시간이 됐고 우린 암시장을 벗어나기 전에 밀렵꾼, 마약상, 노예상의 가게를 싹 둘러보기로 했다.
“나는 여기 있을게.”
“나도.”
“응. 그럼 케케르하고 케시아도 여기 남아 있어.”
“예!” “알겠사와요.”
이번엔 굳이 다 같이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을 뿐더러 고글이 깨져서 아람이도 암시장을 돌아다니기 곤란할 테니 그냥 나와 체셔 둘이서만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럼 다녀올게!”
나는 체셔의 손을 잡고서 먹거리 골목으로 이동했다.
먼저 밀렵꾼의 움막부터 들릴 생각이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밀렵꾼은 체셔를 자기 후계자로 삼고 싶어 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날 죽이려할지도...’
조금 떨렸지만 그래도 어쩔 수 있나. 체셔가 그렇게나 나가고 싶어 했는데. 그리고 밀렵꾼이 날 죽이려고 하면 체셔가 말려줄 거다. 그래야만 한다.
“오른쪽? 아니면 왼쪽?”
“음.. 왼쪽이 더 조용해 보이네요.”
“후후. 그럼 왼쪽으로.”
우린 왼쪽 길로 들어섰다.
오른쪽 길은 이족들이 좀 많이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사건이라도 터진 걸까?
모르겠다. 괜히 이족들의 일에 관심 가져 봐야 머리만 아플 뿐이니 신경 끄고 갈 길이나 가자.
그렇게 웅성거리는 이족들의 목소리를 무시하려고 했을 때였다.
“끼아아아아아!!!!! 헬프!!! 헬프 미 플리즈!!!!”
오른쪽 길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뭐지..?”
“음.. 저쪽은 오늘 도축장, 그러니까 정육점 컨셉이야.”
“예?”
“바로 해체쇼를 한 다음에 그 자리에서 육회나 구이로 내주는 거지.”
“그럼 저 비명 소리는..”
“오늘의 산 제물이겠지..”
“허어..”
들려온 목소리는 걸걸한 남성의 것으로, 원어민 발음인걸 보아하니 암시장에 들어온 미국인 플레이어인 것 같았다.
‘암시장에 들어올 정도면... 목숨을 담보로 영약이나 내단을 최소 2개는 처먹었단 소린데... 설마 닉의 부하나 동료는 아니겠지..?’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 웬만한 플레이어조차 살아남기 버거운 현시점에서 아직 살아남아 암시장에 들어왔을 정도의 베테랑 플레이어.
더욱이 암시장으로 들어오기 위해선 목숨이 담보로 걸린 내단이나 영약을 먹어야 하는데, 그 말은 곧 저 남자가 보부상을 자주 만날 수 있을 정도로 큰 생존자 집단에 속해 있거나 이벤트로 영약이나 내단 아이템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의 모험을 했단 의미였다.
‘설마하니 닉의 부하는 아닐 거고...’
여러모로 상당히 뛰어난 실력을 가졌을 것 같다. 하지만..
‘흠.. 신경 끄자.’
아무리 저놈이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특출난 놈이라고 해도 굳이 이족들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구해 줘야 할 필요성은 못 느끼겠다.
암시장 면책특권을 가진 체셔가 내 옆에 있다지만 저 많은 이족들을 뚫고 들어가는 것부터가 상당히 귀찮은 일이고 구해 내서 노예로 삼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는다.
짐 덩이를 하나 추가하는 느낌이라.
그러니 누가 잡혀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명복을 빈다.
******
리오와 마크는 꼬인 골목을 어렵지 않게 탈출했다. 별다른 위협도 없었고, 꼬인 골목을 돌아다니는 이족들도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덕에 그들은 무사히 먹거리 골목으로 이동했다.
그게 그들의 마지막 행운이었다.
먹거리 골목에 도착한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한창 해체 쇼가 진행 중이던 오른쪽 골목으로 진입했다.
그래, 거기까지도 좋았다. 그대로 그들이 밀렵꾼의 움막을 찾아갔으면 무사히 드러그 앤 러쉬에 도달해 바텐더 잭슨이 건네주는 칵테일 한잔과 함께 파이몬과 접선할 수 있었겠지.
허나 마크와 리오는 암시장에선 절대 해선 안 되는 오지랖을 부리고 말았다.
그들은 해체쇼가 진행되던 골목에서 철창에 갇혀 비명을 지르며 울고 있는 수인 소녀 하나를 발견했다. 조준 같았으면 그냥 지나쳐 갔으리라.
하지만 여자에 미친 새끼들이자 소아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은 수인 소녀를 구출하기 위해 철창을 부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철창이 파괴되는 순간 수인 소녀는 언제 울부짖었냐는 양 마크와 리오에게 속박을 걸어 버린 다음 암시장을 탈출해 버렸고, 속박에 걸린 마크와 리오는 제물을 잃어 분노한 이족들에게 둘러싸이게 됐다.
인간인 그들을 보고도 모른 척 지나가 주었던 이족들의 친절을 마크와 리오가 제 발로 짓밟은 것이다.
이건 이제 어쩔 수 없다. 친절을 짓밟은 불쾌한 인간들은 도망가 버린 먹잇감을 대신해 해체 쇼의 산 제물이 돼야한다.
그게 이족들의 생각이었고, 실로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안 돼. 안 돼! 안 된다고!!!!”
그래, 마크와 리오는 몰랐던 것이다.
이족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그들은 고위이족들을 그저 잡몹 쯤으로 여긴 대가를 치르게 됐다.
둘이서 싸우면 능히 이길 수 있을 거란 자만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오늘 여기서 죽는 것이다.
“마크!! 안 돼! 마크!!”
뿌드드득.
“끄아아!! 으아아아!!! 도와줘!! 제발 좀 도와줘!!! 으아아아!!!!”
그게 마크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곡도를 든 촉수 덩어리가 마크를 붙잡아 올린 다음 팔과 다리를 꺾고 그의 배를 갈랐다.
복근이 찢겨지며 내장이 흘러내렸다.
이족들은 흘러내리는 자신의 내장을 보며 죽어 가는 마크를 비웃었다.
곧 이족들은 바닥에 널부러진 마크에게 다가가 흘러내리는 내장과 피를 음미하며 즐겼다.
다음 차례인 리오는 돼지가 도축당하듯, 아니 그보다 더 야만적으로 도축되어 먹히기 시작한 마크를 보며 눈물 콧물, 오줌까지 지렸다.
리오는 빌었다.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이족들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다.
허나 이미 선을 넘어 버린 그가 살아서 암시장을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했다. 리오 또한 마크 처럼 끔찍한 방식으로 살해 당했다.
그리고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또 다른 두 사람.
“벨라.. 구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미 늦었어. 저 머저리 등신들.. 뭐 한다고 괜히 나대서는.. 엘라, 우린 반대쪽 길로 가자. 여긴 광기에 휩싸였어. 괜히 휘말려들면 곤란해질 거야. 빨리 빠져나가자.”
“응... 알겠어.”
백인 쌍둥이 자매인 벨라와 엘라. 두 여자는 뜯어먹히기 시작한 리오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조준과 체셔가 진입한 골목으로 갔다.
애초에 그녀들은 마크와 리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생존자 캠프 내에서도 소문이 별로 좋지 않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주로 혼자 있는 여자를 손대려 했다는 식의 소문이었다.
어찌보면 리오와 마크는 벌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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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튀김이 컨셉인가 보네요.”
“응응. 기름 냄새 엄청난다. 그치?”
“그러게요. 빨리 빠져 나가요.”
나와 체셔가 진입한 왼쪽 골목은 가게들마다 뭔가를 튀기고 있었다. 뭘 튀기고 있는 건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다. 확인해 봐야 속만 안 좋아질뿐이라 그냥 빠르게 통과하는 편이 좋다.
옷에 기름 냄새도 배는 것 같고.
지이잉. 지이잉.
“응?”
“체셔, 알람 맞춰뒀어요?”
“아, 아닌데. 이거...”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자 체셔의 품에서 진동음이 들렸다. 곧 그녀는 품에서 작은 단말을 꺼냈다.
그건 호출기였다.
암시장에서 1만 코인 이상 썼을 때 상인이 주는 물건으로, 가이드인 체셔를 부를 수 있는 호출기다. 이게 지금 울리고 있단 말은...
“준아 혹시 지금 호출기 누르고 있어?”
“아니요.”
“그럼...”
“누군가 체셔를 부르고 있나 본데요. 위치가 어디예요?”
“밀렵꾼의 움막이네.”
“우리 빨리 가 봐요.”
누군가 1만 코인 이상 물건을 구입한 뒤에 체셔를 부르고 있다.
‘뭔가 이상한데... 조금 전에도 오른쪽 골목에 분명 미국인 방문자가 있었어... 그리고 우리보다 앞서서 여기에 도착한 방문자가 있다니.. 평소와 달리 암시장의 방문객이 너무 많군.’
오늘따라 뭔가 어수선하다. 그래, 평소의 암시장과는 묘하게 어딘가 달랐다.
‘무슨 일이지.. 월요일이 되고 뭔가 특이한 이벤트라도 시작된 건가...?’
나는 그런 추측을 했다. 뭔가 이벤트가 시작됐고 영약이나 내단이 확 풀려 버린 거지. 그걸 복용한 놈들이 ‘생명담보’ 업적을 달성하고 도박마의 블랙 칩을 손에 넣어 암시장에 들어온 게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따라 출입이 많은 것도 이해되는 부분이다.
어쨌든 체셔와 나는 자경대에게 걸리지 않을 만한 속도로 반쯤 뛰듯 밀렵꾼의 움막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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