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가 다운로드 됨-196화 (196/221)

〈 196화 〉 195. 굴러 들어온 쌍둥이

* * *

나는 음울해 보이는 밀렵꾼의 뒤를 따라 사육장 내부로 들어갔다.

딸을 웬 생양아치 같은 이교도에게 빼앗겼으니, 참으로 기분이 꿀꿀하고 우울하시겠지.

그래, 이건 일종의 NTL이다.

그야, 나는 밀렵꾼에게서 귀엽고 예쁜데 일도 잘하는 최고의 후계자를 빼앗았으니까. 밀렵꾼이 다 키워둔 걸 내가 홀라당 빼먹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

과연 밀렵꾼은 알까? 체셔가 얼마나 성욕이 활발하며 음탕한지. 모르겠지. 우주가 파괴될 때까지 그는 모를 터다.

‘이제 체셔는 완전히 내거라고!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야! 혹시나 키잡을 노렸다면 당신은 실패했어!’

나는 속으로 그런 되먹지 못한 생각을 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심 밀렵꾼의 협박이나 위협, 경고에 움츠려들었던 게 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투덜거릴 수도 없는 게,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가늠도 안 되는 존재라 괜한 소리를 지껄였다간 끔살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속으로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자, 오늘의 상품이다.”

“오.”

밀렵꾼을 따라 들어간 콘크리트 방엔 돌로 만들어진 단상 위에 놓인 2개의 유리병과 천장에 부착된 새장 하나, 부글거리는 누런 액체가 한가득 들어 있는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딴 놈들은 그럭저럭 평범하게 생겼는데 항아리에서 묘하게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꾸르륵 거리는 액체는 도무지 살펴보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건...”

[산성 슬라임: 고철, 시체, 플라스틱, 핵폐기물 기타 등등. 대부분의 물질을 분해·흡수하는 슬라임입니다. 죽이고 싶은 연적이나 라이벌, 왕좌를 두고 싸울 형제나 자매들을 남몰래 항아리에 밀어 넣으세요. 1시간이면 짜증 나는 놈들을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 버릴 수 있습니다.]

[경고. 피부에 닿지 않게 주의하십시오. 치명적인 독극물입니다. 아무리 씻어도 소용 없습니다.]

[주의. 항아리가 깨질 경우 돌이킬 수 없는 대참사가 일어납니다. 보관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가격: 12000C]

김치냉장고 만한 크기의 항아리 속에 들어 있던 것은 놀랍게도 슬라임이었다. 판타지나 기타 다양한 곳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그 녀석 말이다.

슬라임을 보자 뭐하다 이제 나왔나 싶은 반가움을 느꼈다.

더욱이 가진 효과도 굉장히 심플하고 좋았다.

그냥 뭐든 항아리 안에 집어넣으면 1시간 만에 죄다 분해해서 먹어치운단다.

더구나 핵폐기물까지 처리가 가능하다고 하니 만약 이게 멸망 전에 나왔다면 세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을 것 같다.

‘그런데 경고문이 너무 무서운데..’

문제는 혹여나 항아리가 박살 나거나 실수로 슬라임과 접촉했을 때다.

슬라임과의 접촉이야 노예들 시켜서 쓰레기 버리면 되니까 내가 굳이 슬라임과 접촉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이거 보관 제대로 못 하면 거점이 날아갈지도...'

그래도 뭐든 버릴 수 있다니까 구입할 가치는 충분하다. 대충 손하은과 신의 우상이 있는 학교 지하창고에 박아두면 안전하고 좋겠지.

“흠.. 이거 만능 쓰레기통이네요.”

“그래, 대단한 녀석이지. 심지어 친환경이야.”

밀렵꾼의 말대로 쓰레기를 먹어서 없애버리는 녀석이니 확실히 친환경이 맞다.

‘잠깐.. 먹어서 치운다는 소리는...’

그때 문득 나는 질량보존의 법칙이 떠올랐다.

아무리 신이 있고 뭐든 가능한 세계라고 해도 처먹은 게 완전히 세상에서 소멸하진 않을 것 같은데...

결국 먹어서 치우는 만큼 이 녀석이 증식하거나 늘어날지도 모른단 소리 아닌가?

항아리에서 넘쳐날 정도로 늘어나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다른 곳에 옮겨 담을 수 있는 걸까?

만약 이 항아리가 특수 처리된 항아리라 이 항아리만이 슬라임에 의해 부식되지 않는 거라면.. 그렇다면 다른 곳에 옮겨 담을 수도 없다는 의미일 텐데.

“저.. 너무 많이 먹으면 항아리 밖으로 튀어나온 다거나, 아니면 자가 증식한다거나 하진 않겠죠?”

“뭐? 바보인가? 먹은 만큼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건 당연한 상식이야. 체셔, 이런 녀석한테 반한 거냐?”

밀렵꾼의 말에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금 자기 딸 데려간다고 나에게 폭탄을 팔려고 했던 건가?

멋도 모르고 사갔다가 슬라임이 항아리에서 넘쳐날 정도로 늘어났다면, 그리하여 거점이 초토화되고 계속해서 늘어난 슬라임이 결국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증식해 지구를 뒤덮었다면...

좀비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괴물이 됐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럼 이 새끼 결국엔 항아리에서 넘쳐날 거란 소리 아닙니까. 그걸 어떻게 감당합니까. 다른 곳에 옮겨 담아야 하나요? 아니, 그런 식으로 계속 늘어나면 결국 못쓸텐데..”

“뭐, 너무 걱정하지 마라. 다 방법이 있으니까.”

“예?”

“대충 통풍 잘되는 곳에 꺼내두면 알아서 기화시킨 노폐물을 뿜어내고 크기 조절을 하는 녀석이야. 이거 이래 보여도 철저하게 사육된 상태야. 항아리만 부서지지 않으면 결코 밖으로 나오려하지 않아. 먹이를 받아먹는 것에 완전히 중독된 거지.”

밀렵꾼의 설명에 나는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항아리 관리만 잘하면 아무 문제 없단다.

“이봐, 컬티스트. 슬라임은 생각보다 지능이 훨씬 높아. 어쩌면... 이 녀석이 사육된 게 아니라, 이 녀석에게 먹이를 주도록 지성체가 사육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아무튼 살 거야 말 거야.”

“흐음.. 일단 구입하겠습니다. 그리 비싼것도 아니고.”

무한 쓰레기통은 하나쯤 장만해 두는 게 좋다.

현재 내 거점에는 수백 명이 넘게 살고 있는데 그들이 하루에 한 번씩만 똥을 싼다고 쳐도 언젠간 하수도가 막힐 거고 똥물이 역류하겠지. 인프라가 박살난 세계니까.

아무튼 그런 설명하기도 엿 같은 자질구레한 생활 오폐수나 쓰레기들을 전부 처리할 방안이 생긴 거니 무조건 사가야 한다.

나는 슬라임을 거점에서 택배로 받기로 한 다음 나머지 물건들을 살펴봤다.

‘이것들은 벌레인가?’

석관 위에 올려져 있는 유리병에는 각각 색깔이 다른 벌레들이 들어 있었다. 한쪽은 황금빛 풍뎅이였고 다른 하나는 새까만 풍뎅이였다. 중요한 건 이 새끼들이 벌레가 아니란 사실이디.

이것들 벌레 같이 생긴... 지성체였다. 심지어 나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유리병 속에서 뭐라고 떠들어 대는지 자세히 들어 보니...

­당장 나를 꺼내라!! 감히 본녀를 이런 곳에 가둬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어림도 없지!!!

­이보시게! 당장 여왕 폐하와 나를 이곳에서 꺼내주시게! 아니면 꿀이라도 좀 주던지!!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고함치는 여왕과 흑기사 같은 벌레인간들. 굉장히 특이하다. 지난번에 구입했던 자위하는 요정만큼이나 획기적인 놈들이었다.

‘헬러스 가져다줘야지.’

헬러스 영감에게 가져다주면 알아서 분석한 다음 쓰임새를 찾아내겠지. 웬만한 건 전부 시약재료로 여기는 미친 연금술사니까.

나는 헬레스에게서 신기한 물약을 받아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싱글벙글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당장 구입할 생각으로 여왕과 흑기사의 가격을 확인하려고 할 때였다.

­펄럭.

밀렵꾼의 움막 입구에 쳐진 거적때기를 제치고서 누군가 가게 안에 들어왔다.

“뭐야?”

“손님이 두 팀이나?”

“허어. 별일이군.”

우리 셋은 동시에 문이 열린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두 명의 외국인 여성이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쌍둥이?’

생긴 게 비슷하다. 아니, 거의 똑같다. 그런데 머리색 만큼은 확연히 달랐다.

한쪽은 백금발이었고 한쪽은 흑발이었다. 쌍둥이라 얼굴은 똑같이 생겼는데 머리색만 다르니 좀 신기했다.

‘아까 체셔를 호출했던 놈들... 일리는 없지.’

암시장의 공간은 꼬여 있어서 ‘출입구’나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다른 장소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아마 우리가 놓친 놈들은 이미 약쟁이들이 있는 하수도나 광대가 있는 버려진 놀이공원으로 갔을 거다.

그리고 체셔를 불렀던 놈들이 전이 됐을 하수도나 놀이공원, 두 장소 모두 먹거리 골목만큼이나 위험한데다가 거기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 마약상과 노예상은 밀렵꾼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악의적인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내가 이렇게 여유롭게 물건이나 살펴보고 있었던 거다. 그 놈들이야알아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어찌 됐든 지금 가게에 들어온 이들은 뉴 페이스였다.

“일단 알아서 물건 살피고 있어라. 나는 저 손님들 접대 좀 할 테니까.”

“아, 예.”

밀렵꾼은 나와 체셔만 남겨둔 채로 미닫이 문을 닫고서 밖으로 나갔다. 새로운 손님들을 응접하려는 모양이었다.

“체셔. 오늘 좀 이상하죠?”

“응.. 평소보다 암시장에 들어온 ‘인간’ 손님이 너무 많은 것 같아. 한둘도 아니고...”

나와 체셔는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정말 일이 터진 것 같다. 암시장 개방 이벤트라도 열린 걸까?

만약 여기가 밀렵꾼의 가게가 아니었다면 자초지종을 설명하라며 무작정 사로잡은 다음 노예낙인부터 찍었겠지만...

‘괜히 소란 피웠다가 영구추방 당할지도 모르지..’

안 그래도 체셔가 암시장을 나간다는 소식에 우울한 밀렵꾼이 어떤 페널티를 부과할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좀 얌전히 상황을 지켜봐야겠다.

“엿들어 볼까요?”

“그럴까?”

나와 체셔는 미닫이문에 귀를 대고서 새롭게 나타난 두 외국인과 밀렵꾼의 대화를 엿들었다.

“헤, 헬로?”

“익스큐즈 미, 썰.”

영어로 대화하는 쌍둥이와 밀렵꾼. 간단한 단어는 대강 알아듣지만 완전 원어민 발음이라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상세한 정보까진 알아내기 어려웠다.

만약 지금, 이상하리만치 언어능력이 좋은 요정의 물약을 복용했다면 저들의 대화를 전부 다 알아들을 수 있었겠지만..

‘가방에 넣어 두곤 안 가져 왔단 말이지..’

헬러스가 만든 의사소통의 물약은 지금 체셔의 거점에 있다. 쓸 일이 없을 거로 생각해서 대부분의 짐은 체셔의 거점에 두고 온 상태였기 때문이다.

“체셔, 저 여자들 지금 뭐라는 건지 전혀 못 알아듣겠는데... 체셔는 알아듣겠어요?”

“흐음.. 도움을 청하고 있네? 그리고 준이 너랑 나를 찾고 있어.”

“예?”

“밖으로 나갈 방법을 알고 싶다네. 우리가 자기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아저씨는 알아서 길을 찾아보라고 대답중이고.”

체셔의 설명에 의하면 두 여자는 밀렵꾼에게 암시장의 탈출법을 물어본 다음 똑바로 알려주지 않자 우리를 만나게 해 달라고 떼쓰는 중이라고 했다.

아마도 우리에게 도움을 청해 여기서 빠져나갈 궁리를 한 모양인데..

‘지금 꾀어서 하수도까지 끌고 간 다음에.. 노예로 만들면 되겠군.’

하수도에는 암시장을 순찰하는 자경대도 없고 마음껏 스킬을 써도 된다. 그러니 거기까지 데려간 다음 노예로 만들어야겠다. 그러곤 왜 이렇게 외국인 방문객이 많은 건지 자초지종을 물어보면 되겠다.

무엇보다 밀렵꾼은 안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했지만 내 눈에 띄인 노예를 놓칠 수는 없지.

나는 미닫이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헬로? 아임 준. 웨얼 알 유 프롬?”

어정쩡한 영어 회화를 시도하며.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