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 196. 잡히기 전에 나가라
* * *
나의 어눌한 영어실력에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 하는 쌍둥이들. 암시장에 처음 들어온 건지 가면조차 쓰지 않은 두 사람은 굉장히 어리숙해 보였다.
그나마 금발 머리 쪽이 좀 똘똘한 친구인지 다짜고짜 웃으며 다가가는 나를 많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며 경계했고 검은 머리 쪽은 겁에 질린 듯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금발 머리 뒤에 숨었다.
‘흠. 실수했나..?’
저렇게까지 반응들이 안 좋을 줄은 몰랐다. 이거 어쩌면 처음부터 너무 거리감 없이 다가갔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초면에 너무 친절하면 의심스러운 법이니까.
당장 나같아도 이런 장소에서 웃으며 다가오는 놈이 있다면 사기꾼이라고 여길 것 같다.
‘일단은 하수도까진 끌고 가야 하는데..’
일단은 진정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만약 여기서 저 두 사람이 가게 문을 박차고 도망쳐 버리면 잡기가 굉장히 곤란해지니까. 그렇다고 붙잡기 위해 촉수를 쏘아내면 분명 가게가 부숴질 텐데.. 그러면서까지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때 나를 따라 사육장 밖으로 나온 체셔가 얼른 분위기를 풀기 위해 쌍둥이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그나마 여자인 체셔가 대화를 주도하자 겁먹었던 것 같았던 쌍둥이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행이다. 경직되어 있는 분위기가 체셔의 난입으로 조금 안정됐다.
“휴우.”
체셔의 공감적 듣기가 빛을 발한건지 쌍둥이들의 경계심이 점차 풀려갔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전혀 못알아 듣겠지만 일단은 대화가 잘 풀릴 것 같아서 조금 안심이 됐다.
그때 밀렵꾼이 서늘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예?”
“한참 작업치고 있는데.. 그새를 못 참아? 이젠 내 손님마저 빼앗을 생각이냐?”
“예? 아니, 뺏다뇨. 이거 장인어른 비약이 심하시네.”
“뭐? 장인어른? 이 새끼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 근데 당신 내 장인어른 맞는데?”
“이놈이 미쳤나..”
순간 내 얼굴로 날아드는 볼펜. 나는 거의 바닥을 구르며 가까스로 볼펜을 피해냈다.
밀렵꾼은 장난스런 느낌으로 가볍게 던진 걸지 몰라도 만약 방금 볼펜을 피하지 못했다면 분명 치명상이었을 거다.
“휴우. 뭐, 진열대 상품 팔아봐야 푼돈 밖에 안 되긴 하지. 너야말로 주요고객이니... 하필 주요 고객이 후계자랑 놀아날 줄이야...”
한숨을 쉬며 밀렵꾼은 계산대 위에 올려 뒀던 물건들을 주섬주섬 아래로 치웠다. 나는 벌렁이는 심장을 진정시킨 다음 그가 물건을 정리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속으로 한탄했다.
‘아.. 좀만 더 늦게 나올걸..’
그랬으면 저 쌍둥이들이 구입한 물건까지 내가 꿀꺽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생각해도 방금의 행동은 너무 성급했다. 혹여나 물건만 사고 나가 버릴까 봐 마음이 조급했다.
그야, 좀 전에 한 팀 놓쳤으니까. 간발의 차로 노예 삼을 수 있는 놈들을 놓쳐서 그런지 빨리 사로잡고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면 안 되지... 평점심..’
아포칼립스 생존법칙 중 하나, 늘 평정심과 침착함을 유지하라.
이건 방심하면 안 된다는 것과 비슷한 법칙이다. 원래 조급하고 성급한 놈들이 그만큼 더 빨리 죽는 법이니까.
“이봐. 저 둘은 체셔에게 맡겨 두고 우린 하던 거래나 마저 하지.”
“아, 예.”
나는 밀렵꾼을 따라 다시 사육장 내부로 들어갔다.
괜히 정체불명의 남자가 옆에 끼어 있는 것보다 여자들끼리 대화하게 내버려 두는 편이 좀 더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나갈 수 있겠지.
나는 유리병 속의 풍뎅이 인간들을 다시 살펴봤다.
‘일단 화려한 금색 풍뎅이부터...’
[충사들의 여왕: 부패한 숲의 생존자들 중 하나입니다. 모든 충사들에게서 맹목적인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드루이드의 시조, 누스가 창조한 생명체입니다. 여왕개체이기 때문에 나무에 기생해 충사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주의. 만귀전 진영의 플레이어만이 충사들의 여왕과 계약할 수 있습니다.]
[가격: 50000C]
‘흐음. 드루이드의 시초, 누스라.. 또 나왔군.’
도대체 누스가 뭐 하는 작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아포칼립스 생존기 전반에 걸쳐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녀석이다. 대충 드루이드의 시조격인 모양인데..
아마 만귀전 진영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부패한 숲이라.. 희선 누나 전용 퀘스트와 연관이 있는 놈이군..’
더욱이 부패한 숲에 대한 새로운 떡밥도 튀어나왔다.
부패한 숲은 지난번 희선 누나가 '견습 숲지기'라는 업적을 달성했을 때 존재가 알려진 장소로, 누스의 목걸이와 생화반지가 만나자 나타났던 드루이드 전용 퀘스트가 이뤄지는 장소였다.
참고로 퀘스트의 내용은 부패한 숲으로 들어간 다음 모종의 방법으로 숲을 정화하고 사슴왕의 왕관을 찬탈하라는 것이었다.
허나 아직 누스의 삼신기 중 하나인 누스의 팔찌를 에일라에게서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영원히 들어갈 일이 없는 장소라 여기고 있었다. 전율저택의 공략 보상으로 받았어야 했지만... 받았다간 그대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이쯤 되면 숲에 들어가라는 명령 같은데..’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누스 떡밥, 거기다 하필이면 여기서 숲과 연관된 놈들이 튀어나왔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찝찝했다.
마치 조만간에 나를 부패한 숲으로 집어넣겠다는 경고 같아서. 아직은 가기 싫은데...
“젠장...”
어쩌면 세계수 새끼의 계략일지도 모른다. 만귀전의 영웅 클래스인 드루이드가 나의 노예니까 이참에 나를 부패한 숲으로 보내서 죽여 버리고 영웅 유닛을 가로채가려는 속셈일지도 모르지.
물론 쉽사리 죽어 줄 생각 따윈 전혀 없다. 사슴왕의 왕관만 쏙 빼먹고 나올 거다. 분명 나와 나의 동료들이라면 먹튀쯤이야 쉽게 할 수 있겠지.
나는 그런 밝은 미래를 꿈꾸며 황금 풍뎅이 옆에 있던 검은 풍뎅이도 살펴봤다.
[충사여왕의 수호자: 부패한 숲의 생존자들 중 하나입니다. 충사여왕을 지키던 흑기사였습니다. 충사여왕이 생산한 특이 개체입니다.]
[경고. 작다고 무시할 경우 곧바로 적대관계가 됩니다.]
[주의. 오직 충사여왕의 명령만을 듣습니다.]
[가격: 20000C]
이 새낀 별거 없고 그냥 충사여왕의 따까리였던 모양이다.
어쨌든 두 녀석 전부 구매해야겠다. 부패한 숲으로 들어갔을 때 길잡이가 되어 줄 지도 모르니까.
이쯤에서 길잡이를 얻어두면 나중에 팔찌가 나왔을 때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감 넘치게 숲으로 들어갈 수 있겠지.
“이것들 2개 다 살게요.”
“알겠네.”
나는 유리병에서 아우성치는 충사들을 구매했다.
여왕 수호자는 과연 길잡이 이상으로 쓸모가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충사여왕은 쓸모가 많아 보였다. 거점에 가자마자 희선 누나와 계약 시킨 다음에 나무 하나 내주면 알아서 개체 수를 늘리겠지. 날개달린 자그마한 충사들은 전령으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알시드에 버섯인간, 지난번에 샀던 시체 기생목도 모자라서 이젠 충사들까지 생기면..’
계속해서 거점을 지킬 놈들이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대부분이 인간이 아니다.
‘무슨 마왕성도 아니고.’
난 속으로 웃으며 마지막 물건을 확인했다.
그건 새장에 갇혀 있는 돌멩이였다.
'돌멩이? 새장에 왜 돌멩이가...'
[광맥 씨앗: 땅속으로 파고들어가려고 하는 씨앗입니다. 땅속으로 파고들어갔을 경우 주변 일대의 수분을 모조리 흡수하며 일정영역을 광맥으로 만듭니다. 다양한 종류의 광물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가격: 24000C]
“이것도 구입하겠습니다.”
다양한 광물이라는 건 금이나 뭐 그런 것도 다 포함되는 걸까? 일대의 수분을 모조리 흡수한다는 점이 좀 마음에 걸리지만 위치만 잘 잡으면 되겠지.
‘두더지 인간을 구매했다면 엄청 유용했겠는데..’
아쉽게도 지난번 두더지 인간은 나에게 구입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어 노예상의 채찍질에 죽었었다. 그때 두더지 인간 대신 케케르를 구입했었지.
뭐, 꼭 두더지 인간이 아니더라도 광질할 노예는 충분하다.
“준아! 거래 끝났어?”
“아, 체셔. 방금 막 다 샀어요.”
마침 오늘의 추천메뉴를 전부 구입했을 때 체셔가 나를 찾았다.
쌍둥이 자매와 원만히 대화가 끝난 모양이었다.
“둘 다 뭐래요?”
“우리한테 도움을 받고 싶데.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데? 후후후...”
“흐흐흐.. 뭐든 지요?”
“응. 뭐든지. 이 둘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말 모르는 모양이야.”
나와 체셔는 서로를 마주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과연 저 쌍둥이들은 정말로 뭐든지 할 수 있을까?
“그럼 가 보겠습니다.”
“또 와라. 체셔 꼭 데리고서.”
“예!”
우리는 밀렵꾼과 인사를 나누고선 쌍둥이 자매를 데리고 마약상이 있을 약쟁이들의 소굴로 갔다.
그녀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우리를 따라왔다. 밖으로 내보내 주겠다는 체셔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 그럼.”
약쟁이들의 소굴에 도착한 나는 손가락을 풀었다. 이제 더는 참을 필요 없다.
난 곧바로 쌍둥이 자매에게 촉수를 발출했다.
“끼아아!!! 베, 벨라!! 헬프!!”
“엘라!! 헤이!! 플리즈 돈 킬 어스!!”
비명을 지르며 발악하는 쌍둥이들.
나는 그들을 더욱더 강하게 몸을 졸랐다. 그러자 검은 머리쪽이 먼저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구걸했고 곧 내 눈앞에 엘라가 굴복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나는 곧장 엘라를 바닥에 떨군 다음 그녀의 이마에 지장을 찍었다.
“야. 배신금지. 팀킬금지. 자해금지. 언더스탠드? 이해했으면 고개 끄덕여.”
“예, 예스.. 플리즈..”
기본 명령을 내린 다음, 나는 굴복한 엘라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엘라를 인질로 삼아 금발 머리를 굴복 시킬 생각이다.
쌍둥이 자매의 목에 칼이 들이밀어지자 더욱더 앙칼진 목소리로 고함치며 발악하는 금발 머리.
“체셔. 저년보고 빨리 항복하라고 전해 줘요.”
“응. 잠시만.”
곧이어 금발 머리, 벨라에게 체셔가 뭐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금발 머리는 몇번이나 플리즈 거리며 살려달라고 빌었고 결국 엘라의 목에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리자 드디어 금발머리, 벨라가 나에게 굴복했다.
이걸로 백마 쌍둥이가 나의 노예가 됐다.
이후 체셔를 통역으로 세워두고서 두 여자에게 궁금한 점을 질문했다. 가령 어떻게 들어왔냐거나 밖에 무슨 일이 있기에 사람이 이리 많은 거냐는 등의 질문이었다.
그렇게 그녀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엄청난 정보를 듣게 됐다.
“뭐? 닉? 니콜라스?”
쌍둥이의 입으로 만신전 진영의 영웅인 닉의 이름이 언급된 것이다.
애초에 쌍둥이들은 닉의 동료였다.
심지어 여섯명이나 들어와 있단다.
'2인 1조로 구성된 여섯 명의 동료들... 아직 한 팀 더 남았다. 아까 체셔를 부르던 놈들이구나..!'
암시장에 들어왔다는 세팀 중 하나인 마크와 리오는 아까 먹거리 골목에서 죽었고 쌍둥이 듀오는 내가 사로잡았다.
그 말은 아까 체셔를 호출하던 헬렌과 로이라는 녀석들이 여기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다.
‘금간 앙크를 얻게 둬선 안 돼...!’
나는 드러그 앤 러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놈들이 금간 앙크를 얻어 밖으로 빠져나가기 전에 먼저 잡아 죽여야 한다.
******
몇분 전 하수도로 날려 보내진 헬렌과 로이.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공간 이동에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여긴 또 어디야.”
“흐음.. 누나. 우리 좆 된 거 같은데... 그냥 가이드 기다리자니까.”
로이의 투덜거림에 헬렌은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우리 계속 가이드 기다리고 있었으면 거기서 죽었어. 무조건 도망가는 게 맞았다고.”
“으응. 알겠어. 미안해.”
“후우.. 일단 여기 계속 있어 봤자 좋은 일은 안 일어날 것 같으니까, 어디로든 움직이자.”
“누나. 그것도 위기감지야?”
“아니. 그거 자주 못 쓰는 거 알잖아.”
“그럼 그냥 감이네?”
“야, 로이. 나 못 믿어? 내 직감 덕에 몇 번이나 살아남아 놓고?”
“그건 그렇지. 미안.”
“자꾸 사과만 하지 말고 알겠으면 빨리 움직여!”
“으응.”
로이는 헬렌을 고쳐 안은 다음 한쪽으로 방향을 잡고서 반쯤 뛰듯이 걸었다.
“냄새나고.. 좀 불결하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생긴 괴물들은 안 돌아다녀서 좋네.”
“응. 머리도 별로 안 아픈 것 같아.”
아직 약쟁이들이 모여 사는 판자촌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태평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약에 쩔어 죽어 가는 이들이 가득한 약쟁이들의 소굴로 들어섰다.
“야아악.. 약.. 약 좀 줘. 뭐든 좋아.. 제발..!”
“저리 꺼져!”
“로이! 저기! 네온싸인!”
“어?”
“뛰어!! 빨리! 더 몰려오기 전에!”
뉴 페이스를 보자마자 반쯤 달려들 듯이 다가오는 약쟁이들. 로이는 다가오는 약쟁이들이 약하단 사실을 깨닫곤 무작정 잡아 패고 있었다.
그때 헬렌이 최종 목적지라 할 수 있는 드러그 앤 러쉬를 발견했다. 곧이어 로이는 전력으로 달렸다. 더 많은 약쟁이들이 몰려들기 전에 가게에 들어가기 위해.
“하아.. 하아... 도착했다...”
숨을 헐떡이는 로이는 마약상의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주저앉아 숨을 골랐고 그의 품에 안겨 있던 헬렌은 머리 둘 달린 바텐더와 검은 면사포를 뒤집어쓴 채 와인을 마시고 있는 악마를 쳐다 봤다.
[제대로 찾아왔군.]
왕관을 쓴 악마, 파이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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