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 198. 나락에서 만나자
* * *
“끄아아아아!!!!!!‘
“조용히 안 해! 셧업!!”
“프, 플리즈! 스탑!!! 저스트 킬 미!!!”
“뭐라고? 그냥 죽이라고? 내가 왜!! 와이!!”
주변은 이미 헬렌이 쏟아 낸 피로 흥건했다. 이미 한참이나 고문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결코 상대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 따위는 이미 진즉에 사라진 상태였다. 헬렌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어깨를 단검에 찔렸을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허나 죽기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며 상처가 치유되는 순간 헬렌은 상대가 고문에 특화된 인간임을 깨달았고 절망했다.
그때부터 무자비한 폭력과 고문 속에서 헬렌은 점차 깎여나갔다. 결국 처음 먹었던 결심은 덧없이 사라졌고 중간부터는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다.
허나 그녀의 처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되돌아온 답변은 묵묵히 살갗을 뜯어내는 조준의 거친 손놀림뿐이었다.
참다못한 헬렌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엘라와 벨라, 체셔를 향해 제발 도와달라고 빌었다.
물론 그녀들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체셔는 암시장을 돌아다니며 이 정도의 고문은 이미 몇 번이나 봐 왔기 때문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고, 엘라와 벨라는 이미 조준의 노예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에게 거역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집단 속의 고요를 느끼며 천천히 부서져 갔다. 몸의 고통과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거란 절망감이 그녀를 빠르게 무너뜨렸다.
그때 시계를 살피던 체셔가 조준의 어깨를 붙잡았다.
“준아. 우리 이제 준비하고 나가야 해.”
“아.. 체셔. 후우.. 미안해요. 너무 흥분했네요.”
체셔에게 사과한 조준은 넝마가 되어 버린 헬렌을 촉수로 들어 올려 양쪽 다리를 뜯어내버렸다.
“끼아아아아!!!!!!”
“어차피 못 걷잖아. 뭐하러 달고 있냐고.”
“끄흐으으윽....”
다리를 잡아 뜯긴 헬렌은 피눈물을 흘렸다.
이쯤 되면 쇼크로 죽었어야 정상이지만 중간에 체셔가 목에 놓은 정체불명의 각성제 때문에 죽지도 못한 채 고통만을 느껴야 했다.
한편 조준은 피눈물을 흘리며 계속해서 죽여 달라고 비는 헬렌의 다리를 대충 치유한 다음 꼬인 골목에 죽어 있던 시체를 한구 끌고 왔다. 그러곤 시체의 다리를 뜯어냈다.
그건 이름 모를 이족의 말발굽 달린 다리였다. 꼭 사티로스의 다리 같았다.
“자, 그럼 슬슬 끝내보자.”
조준은 헬렌을 고문하며 그녀의 다리에 미비하게나마 신경이 남아 있음을 간파했다.
그렇다면 분명 차오르는 살점으로 치유가 가능할 거라 판단했고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헬렌의 등에 손을 올려 차오르는 살점을 사용해 억지로 그녀의 신경을 복구시킨 조준.
그는 헬렌을 업고 다닐 생각 따윈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앙상하게 말라 쓸모없어진 그녀의 다리를 뜯어내고 튼튼한 다리를 새로 달아주기로 한 것이었다.
“장애마저 고쳐주는 주인님이라니. 평생 감사해 해라.”
그는 무릎 꿇은 헬렌의 이마에 지장을 찍으며 웃었다. 그렇게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헬렌은 조준의 노예가 되었다.
조준은 로이를 놓친 것에 대한 분노가 이미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훌륭한 공양물...'
입맛 까다로운 인디크론이 로이의 영혼을 원했기 때문이다. 망가진 누이를 마주해 비명을 지르며 절망해버릴 로이의 영혼을 인디크론이 딱 집어 요구했다.
평소 웬만한 공양물은 맛이 없다며 찡찡 거리는 인디크론이 직접 원한 공물, 이건 귀하다. 안 그래도 이번 지하층 공략으로 인해 인과율을 많이 소모한 그녀에게 보답을 하려 했었다. 그렇기에 이건 아주 좋은 기회였다.
'꼭 나락으로 와라, 로이. 망가진 너의 누이를 보여주마.'
조준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던 헬렌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뒤 체셔의 거점으로 이동했다.
그는 나락에서 마주칠 만신전의 개종자들을 어찌 손봐줄지 고민하며 암시장을 벗어났다.
질 거란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신전의 세력을 확실하게 깎아내릴 기회가 왔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
로이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죽었거나 노예가 됐겠지만 그는 누이의 희생으로 인해 겨우 암시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으아.. 으아아아아!!!!!”
다리가 잘린 로이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그의 우령찬 비명 소리에 암시장 수색대의 귀환을 기다리던 이들이 일제히 달려왔다.
“로이!!! 이런 제기랄!!! 성녀!!! 성녀!! 성녀어어!!!”
뭔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나서는 캠프의 브레인이자 대현자인 백인우월 주의자 마이클은 죽어 가는 로이를 보며 성녀 안나를 불렀다.
“조, 조금만 참아!”
그때마침 소란을 듣고 급하게 달려온 안나는 서둘러 로이의 다리를 치유했고 피를 쏟아 내고 있던 로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이후 로이는 기절했고 마이클은 기절한 로이를 '간파'했다.
“뭐야 이건...”
마이클의 눈에 비친 로이는 이때까지 봤던 그 어떤 저주보다 끔찍한 저주에 걸린 상태였다.
“다들.. 다들 물러서라.”
마이클의 경고에 로이에게서 멀어지는 사람들. 그의 곁에는 오직 성녀인 안나와 마이클 본인만이 남았다.
“왜..? 또 저주야?”
“이건.. 저주라기 보단 일종의 계약에 가깝다. 그것도 악마와의 계약.”
“뭐..?”
“일단 구속시킨 다음.. 깨어나는 대로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물어봐야겠어.”
마이클의 말에 안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곧 몇 명의 거한들이 쓰러져 있던 로이를 구속해 병실로 옮겼다.
******
로이가 기절한지 대략 12시간 후.
병상에 누워 있던 그는 겨우 의식을 되찾았고, 그가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식에 생존자 캠프의 실질적인 관리자라고 할 수 있는 마이클이 병실로 찾아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이클이 대동한 여러 명의 각성자들도 말없이 로이의 주변에 서서 그를 내려다봤다.
로이는 위압적인 분위기에 살짝 기가 눌렸다.
“이봐 로이.”
“아.. 마이클.. 이게 대체 뭡니까. 왜.. 쇠사슬을 제 몸에..”
“너에게서 악마의 징후가 포착됐다. 우린 우리를 지키기 위해 너를 구속시킨 거다. 정당방위라 할 수 있지.”
“자, 잠깐! 그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로이는 갈라진 목으로 어렵사리 항변했다. 그는 현재 악마 추종자로 의심받아 온몸에 쇠사슬이 휘감긴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 이유가 뭔지 제대로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이봐, 에릭슨!”
“예. 이미 발동시킨 상태입니다.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소리치지 좀 마십쇼.”
마이클의 부름에 검은 가면을 쓴 흑인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는 거짓간파를 발동시킨 상태로 로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이클은 분명 백인우월 주의자였지만 그렇다고 능력 있는 이들까지 배척하진 않았다.
그저 개인의 성향일 뿐이었다.
“로이. 에릭슨이 너의 말을 판단할 거다. 이제 거짓말은 안 통한단 거지. 그러니 무조건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마이클의 경고에 로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수천 명이 거주중인 생존자 캠프의 심판관이 나왔단 말은 시시비비를 정확하게 가린 다음 생존자 캠프에 위험이 된다 싶으면 사형시키겠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럼 첫 번째 질문. 어째서 악마와 계약했나.”
“그건 금간 앙크를 넘겨받는 조건이었습니다!”
“조건? 앙크를 넘겨 주는 조건으로 우리 캠프에 자기 하수인을 넣으려고 했단 말인가?”
“예. 그게 그 악마의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니콜라스가 속한 만신전에 의탁하고 싶다고 했어요. 아, 그래. 거기에 있던 머리 두 개 달린 이상한 녀석이 그랬습니다. 분명.. 파이몬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엄청 강한 악마였다고요! 그가 우리 편이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어차피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묵비권을 행사했다간 입을 열 때까지 고문당할 위험이 너무 컸다. 그렇기에 로이는 진실만을 말했다. 특히 강한 악마가 같은 편이 되고자했음을 어필하며 최대한 살아보려 발악했다.
“그래? 파이몬이라.. 흠. 에릭슨. 저 말이 사실인가?”
“예. 전부 사실입니다.”
“악마가 무슨 수작질을 부릴까 걱정했는데... 수작질이 아니라 동료가 되고 싶다니. 웃기는 소리군. 그래. 잘 알겠다, 로이. 그런데 금간 앙크는 어디있나? 인벤토리?”
마이클은 악마가 강하든 말든 관심도 없었다. 그저 금간 앙크를 제대로 가져온 건지 그것만이 궁금했을 뿐이다.
마이클의 차가운 눈빛에 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인벤토리에 금간 앙크가 들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옆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던 에릭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 말도 사실입니다.”
“다행히 앙크는 구해 온 모양이군. 로이, 당장 앙크를 꺼내라. 앙크를 우리에게 넘겨 주고 그만 임무를 완수하는 거다.”
“자, 잠깐!”
“뭐냐, 로이. 설마.. 주기 싫은 건 아니겠지? 설마 징벌방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거냐? 그럼 하루 만에 앙크를 토해내게 될걸?”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앙크를 넘겨 주면.. 당신들은 나를 죽일 생각 아닙니까!!”
로이의 판단은 정확했다. 굳이 악마의 하수인을 그들이 살려 둘 리가 없었다.
“마이클.. 저와 약속하십시오. 저를 죽이지 않겠다고! 아니, 애초에 우리가 들어가겠다고 해서 들어간 것도 아니었잖아!! 은근한 압박이 있었단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사실상 누님 능력 믿고 억지로 집어 넣은 거잖아!! 마이클!! 대답해!! 나는 여기서 죽을 수 없단 말이다!! 그 새끼에게서 누님을 구해야 해!!”
“잠깐. 그 새끼? 지하경비대인가 뭔가 하는 놈들을 말하는 건가? 헬렌은.. 죽은게 아니었나?”
"아니야!! 아니에요!! 살아있어요!! 컬티스트가 끌고 갔다고요!"
“뭐? 컬티스트? 그놈도.. 거기 있었다고?”
“예!!파이몬이 그랬습니다!!컬티스트가 너희를 쫓고 있다고!! 결국 그 새끼는 우리를 따라잡았고, 그 미친 이단자 놈이 누님을 잡아갔단 말입니다!!제가 똑똑히 봤습니다!! 제 다리를 씹어 먹은 그림자 덩어리도 그 개새끼 스킬이었다고요!!”
로이는 다크서클이 진하게 드리워진 얼굴로 마이클에게 소리쳤다. 마이클은 컬티스트란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했다. 또한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좆 같은 자식이 또...’
전율저택에서 닉이 당한 것도 컬티스트의 계략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컬티스트가 나타나 방해했다는 소식에 마이클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 개자식은 어딜 가나 있군. 혼자 만국유람이라도 다니는 건가? 하아... 에릭슨.”
“전부 사실입니다. 지금 로이는 오직 사실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말할 생각 자체가 없어 보이는군요.”
“그래.. 로이, 컬티스트의 얼굴도 봤다고 했나?”
“어, 아니 그게.. 얼굴은 가면을 쓰고 있어서 못 봤지만, 그래도 목소리와 체형은 똑똑히 기억합니다. 놈이 쓰던 스킬도 봤어요. 어.. 그리고 놈의 동료로 보이는 여자도 파악했고. 그, 그래. 저는 놈을 보면 바로 컬티스트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죽이지 마세요.”
로이는 컬티스트를 찾아낼 수 있음을 어필했다. 마이클은 그의 처절한 발악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컬티스트 덕에 목숨을 건졌군. 그래,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묻지. 이미 진즉에 4시간이 지났으니 다들 죽었을 거로 생각했지만.. 컬티스트가 거기 있었다니, 헬렌 말고도 몇 명 놈에게 붙잡혔을 수도 있겠어. 로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냐. 다들 죽은 건가? 아니면 배신자가 따로 있는 거냐.”
“마크와 리오는 죽었는지 어찌 됐는지 못 봤기 때문에 잘 모르겠고... 쌍둥이는 확실하게 우리를 배신했습니다. 뭐로 두 사람을 현혹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예 주인님이라고 부르더군요.”
로이의 대답에 분위기는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마이클은 이를 갈며 엘라와 벨라 자매에게 분노를 터트렸다.
“주인님이라고..? 빌어먹을 암살자년들.. 기껏 받아줬더니 배신이나 할 줄이야 후우.”
마이클은 스킬을 사용해 허공에서 양피지로 된 문서를 꺼냈다.
“로이. 일단 네가 캠프에 위해를 가하거나, 나를 죽이려 하거나, 기타 배신행위를 하지 않을 경우 악마와 계약했다는 이유만으로는 너를 죽이지 않겠다. 약속하지.이 약속이 부당하게 깨질 경우 나는 20레벨을 다운시킨다. 됐나? 이제 앙크를 내놔.”
“예, 예..”
양피지에 마이클의 이름이 기입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로이는 앙크를 꺼내 그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앙크를 넘겨받은 마이클은 연신 마른세수를 하다가 로이를 병실에 남겨둔 채 밖으로 나왔다.
“에릭슨. 담배 있나?”
“예. 여기.”
“하아.. 제기랄. 여섯 명이 들어갔는데.. 나온 건 고작 한 명. 그마저도 악마와 계약한 상태고.. 둘은 확정적인 배신에.. 여섯 명 중 제일 중요한 인물인 헬렌은 붙잡혀 갔고. 후우.”
마이클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질렀다.
“닉 시발새끼. 깨어나면 가만두지 않겠어.”
마이클은 앙크를 성녀에게 넘겨 줬다. 앙크가 검게 변해 나락의 문이 열릴 때까지 계속 스킬을 사용하라고 전해 둔 다음 그는 나락의 밑바닥으로 들어갈 사람을 지원받기 시작했다.
‘끌려간 헬렌을 비롯해 엘라와 벨라 마저 우리를 배신했으니.. 우리가 나락으로 간다는 정보도 이미 전해졌을 거야. 하지만 과연 그 새끼가 앙크를 가지고 있을까? 우리가 이렇게 개지랄 떨어가며 겨우 얻은 물건인데...’
마이클은 컬티스트가 금간 앙크를 가지고 있지 않기를 바랐다.
“아니야. 안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만약 없다고 해도 다른 방법을 찾아내서 분명 나락으로 올 거야.”
허나 전율전택과 암시장의 경험을 통해 마이클은 상대가 무조건 나락까지 쫓아올 것이라 확신했다.
그의 확신은 정확했다. 이미 암시장에서 빠져나간 조준은 나락으로 들어갈 준비를 시작했으니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락으로 가야겠군...”
마이클은 그런 혼잣말을 하며 자신도 나락으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컬티스트를 죽이기 위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