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화 〉 202. 배신자 쌍둥이
* * *
나는 헬러스와 황수민, 엔지니어 정지연이 있는 과학실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그때 운동장에서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으랴!!”
“더! 칼질은 결국 기세야! 더 크게!”
“우랴앗!!!!”
팔어스와 건장한 남자 각성자들 그리고 아름이와 은지가 그들 사이에 끼어서 수련 중이었다. 칼질이 상당히 매섭다.
더욱이 엄청 집중한 것 같아서 나는 굳이 그녀들에게 아는 척하지 않고 잠시 그들의 훈련을 지켜봤다.
대충 5분 정도 검만 휘두르고 있다. 그리고 중간중간 팔어스가 그들의 동작을 지적하며 자세가 흐트러진 이들의 어깨나 종아리를 나무 쪼가리로 때렸다.
“어..”
그러다 아름이가 한 대 얻어맞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움찔하면서도 아무 반응이 없는 게 자주 얻어맞았던 모양이다.
“흐음...”
뭔가 아름이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화가 났지만.. 그래도 때리고 있는 사람이 강제로 여체화 되어 버린 팔어스라 용서가 된다.
어쨌든 그들의 훈련을 잠시 지켜보던 나는 다시 과학실로 발길을 돌렸다.
과학실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엔지니어 정지연이 뭔가를 뚝딱 거리며 만드는 소리가 들렸다. 터렛이라도 새로 뽑고 있는 걸까?
끼이익.
“어서 오세요...”
문을 열자 솥을 휘젓고 있는 황수민이 보였다. 그녀는 다크서클이 짙어진 눈으로 나를 보며 무감정하게 인사했다.
뭔가 블랙 기업에 착취당하는 회사원 같은 모습이라 조금 안쓰러웠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솥 젓기 쯤이야 거뜬하다면서 열심히 솥을 젓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일주일 사이에 완전히 애가 맛이 가 버렸다.
설마 일주일 동안 계속 솥만 휘젓고 있었던 건가?
“뭐 만들고 있어?”
“성장... 하~암. 촉진제라던데요.”
“그래?”
“네.. 희선 언니가 대량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셔서.. 하~암..”
잠이 와서 미치겠다는 얼굴로 솥을 휘젓고 있다.
평범한 메이지에서 헬러스의 제자가 되어 윗치로 각성한 이후 그녀는 물약 셔틀이 되었다.
헬러스가 온갖 짬을 황수민에게 다 때리고 있는 것 같은데.. 황수민은 때 아닌 대학원생 체험을 하는 중이었다.
뭐, 애초부터 조수로 쓰라고 붙여 준 거니까 그냥 수고하라고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별 수 있나. 교수가 까라면 까야지.
“야, 너는 뭐 하냐?”
“아, 이거.. 드론 만들고 있는데. 보실래요?”
“뭐? 드론?”
나는 정지연이 만들고 있는 새 모양 기계 장치를 살펴봤다.
“이게 뭐야. 어떻게 만든 거야, 이거..”
“스킬에 드론 제작 뜨던데요. 여기 고글 끼면 조종 가능해요.”
“와.. 미쳤네. 대박이다.”
그녀는 전투 스킬이 일절 없다. 전부 제작계열 스킬로 다 찍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시야 공유 고글 제작 스킬과 비행용 드론 제작 스킬로 이런 엄청난 물건을 만들어 냈다.
“부패의 숲 정찰용으로 딱인데.. 이런 거 몇 개나 더 만들 수 있어?”
“이게 만들려면 기판이랑 전선이랑 여러 가지 재료가 엄청 많이 필요한데, 진성 오빠가 사람들 시켜서 대량으로 구비해 뒀어요. 적어도 2개는 더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리고 제작에 걸리는 시간은 한 대 만드는데 대충 3일 정도 걸리고요.”
“오. 시간도 예산도 충분하네. 최대한 뽑아봐.”
“넵.”
정지연도 참 대단한 클래스긴 하다. 엔지니어라 그런지 생각지도 못한 걸 만들어낸다. 더욱이 우리가 효선 여고를 점령하고 주변 건물이나 상가를 죄다 털어 대서 그런지 재료수급이 잘되니 이때까지 못 만들었던 걸 많이 시도해 보는 중인 것 같다.
'정찰용 드론에.. 지난번 스포츠 센터에서 잡은 야수조련사 녀석까지 데려가면 부패의 숲 탐색이 훨씬 더 빨라지겠네.'
거기다 충사 길잡이들까지 구했으니 완벽하다. 때가 되면 누스의 팔찌만 에일라에게 받으면 된다.
나는 물약 노예인 황수민과 제 꿈을 펼치는 중인 정지연을 격려해준 다음 괜히 알시드 감염체인 윤하준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려 준 뒤 과학실에 딸린 과학 준비실로 들어갔다.
과학 준비실은 헬레스가 연구하고 작업하는 개인작업실이다.
“아, 오셨군요. 뭘 좀 쓰고 있느라.”
내가 왔음에도 자기 할 일을 한다는 것은 다른 노예들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지만 헬러스는 예외다. 그는 자신의 가치를 확실하게 입증했다.
그렇기에 나는 이례적으로 그를 나의 부하가 아닌 동료로 취급해주기로 했다. 물론 노예낙인은 지워 줄 수 없지만.
어쨌든 과학준비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헬러스와 그의 뒤편 탁자에 올려져 있는 만들다 만 듯한 생김새의 인형을 볼 수 있었다.
아마 저기에 영혼을 옮기려는 거겠지. 에일라도 돌아왔으니 다시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랜만이네.”
“예, 오셨단 이야기를 어제 듣긴 했는데.. 진성이가 내일 찾아가보라 해서. 허허.”
어제는 거의 도착하자마자 그녀들에게 끌려가 무한사정 당했기 때문에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어도 만나러 올 수가 없었으리라.
보아하니 하진성이 교장실 입구에 보초까지 세워둬서 아무도 교장실에 출입할 수 없었던 모양이기도하고.
“그래서 직접 찾아왔어. 영감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예?”
“잠시만.”
나는 밀렵꾼의 배달 시스템으로 과학실에 산성 슬라임을 소환했다. 1만 코인을 대가로 배달을 해주는 서비스는 너무 좋은 것 같다.
“이건... 흐음.. 특이한 냄새.. 슬라임이군요. 옛날에는 왕국 하수도에서 자주 봤었죠. 오호라.. 황색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헬러스는 슬라임을 보자마자 굉장히 흥미로워했다. 엄청난 관심을 보인다.
“대박이지? 죄다 녹여 버린데.”
“허어.. 대단하군요. 뭐든 녹여 버리는 슬라임을 품은 항아리라. 항아리에 특수 처리가 되어 있네요.”
헬러스는 슬라임보다 세상 모든 걸 녹인다는 슬라임 조차 녹이지 못한 항아리를 더욱 흥미로워했다.
사실 나도 그게 조금 흥미롭긴 했다. 뭐든 녹이는 생물조차 녹이지 못한 항아리.. 이거 어쩌면 슬라임보다 항아리가 더 가치가 높고 대단할지도 모른다. 뭐든 담을 수 있다는 의미니까.
“응?”
그때 과학실의 문이 열리며 에일라가 들어왔다. 그녀는 어제 난교파티에서 제외당해 뜬 눈으로 내가 착정당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뭐랄까, 내가 새디스트 역할이면 에일라가 마조히즘 역할인데.. 그런 그녀에게 어제 여자들 손에 붙들려 착정당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그런지 조금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어.. 에일라.. 안녕?”
“그, 그래. 응. 안녕.”
에일라도 괜히 어색해 한다. 이거 안 되겠다. 나중에 따로 불러내서 기강을 잡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건 뭐야?”
그때 슬라임에 흥미를 보이는 에일라. 그녀는 내가 이걸 구입할 때 체셔의 거점에 있었기 때문에 오늘 처음 봤을 것이다.
“뭐든지 녹여 버리는 슬라임이요. 대박이죠?”
“허어.. 뭐든지 녹이는 슬라임을 품은 항아리라.. 대단한 항아리네.”
아니, 헬러스도 그렇고 에일라도 그렇고. 장인들은 왜이리 항아리에 집착하는 걸까. 내가 보기엔 슬라임이 더 대단한 것 같은데...
“이봐, 영감. 이거.. 뭔지 알아보겠나?”
“예? 새겨진 표식 말입니까, 에일라 양.”
“응. 항아리에 새겨진 술식. 이거.. 해독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흐음. 과연. 종이에 옮겨 적어보죠.”
에일라와 헬러스는 완전히 항아리에 푹 빠져 버렸다. 슬라임은 오히려 뒷전이다.
‘장인들의 정신세계.. 조금 이해하기 어려울 지도...’
내가 약간 멍청하게 서 있었더니 에일라가 웃으며 설명해줬다.
“후후.. 뭐든 담을 수 있는 이 항아리에 새겨진 술식을 베낄 수 있다면.. 슬라임을 옮겨 담아서 증식시킬 수 있을 테니 중요한 거야.”
“예? 증식이요? 그거 안 된다던데..”
“처음부터 불가능을 상정해 두면 사고가 제한되는 법이야.”
웃으며 내 팔을 쓰다듬어 주는 에일라.
나는 그녀가 만져주니 일단 기분이 좋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헬러스와 에일라 두 사람 모두 우리 거점 최고의 장인들이니 뭔가 해낼 수 있겠지.
그때쯤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 용어들로 대화하기 시작해서 조용히 두 사람이 의논할 수 있게끔 내버려둔 다음 준비실에서 빠져나왔다.
원래 공돌이들이 진지하게 뭔가 해 보려할 때는 방해하지 않는 게 좋다. 정말 엄청난 뭔가를 만들어 낼 수도 있으니까.
“그럼 대충 할 것도 다 했고...”
충사여왕이나 충사 흑기사는 헬러스에게 보여주려고 했지만 드루이드인 희선 누나에게 넘겨주는 게 더 낫다 싶어서 아까 누나한테 줬다. 그럼 이제는...
‘엘라와 벨라에게 가야겠군.’
나는 교장실에 있는 대용량 가방에서 헬러스가 만들어 준 의사소통용 물약을 챙겨 들고서 엘라와 벨라가 있는 교실로 갔다.
두 사람 다 니콜라스의 거점 출신이다. 물어볼게 잔뜩 있다.
드르륵.
“히익...!!”
“퍼킹 코리안..”
교실에는 엘라와 벨라가 앉아서 허겁지겁 밥을 퍼먹고 있었다. 배가 고팠는지 정신 없이 퍼먹고 있다가 내가 들어오자 화들짝 놀란다.
그런데.. 퍼킹 코리안?
“야, 방금 욕한 새끼 누구야.”
아니, 다짜고짜 욕부터 박아버릴 줄이야. 제정신인가?
이거 좀 이상하다. 어제 그 생존자들도 그렇고. 내가 좀 만만하게 생겼나? 아닌데, 내 얼굴 못 알아 보게끔 반지 끼고 다니는데... 그냥 저 두 사람이 기가 센 거겠지.
꿀꺽. 꿀꺽.
나는 일단 의사소통용 물약을 마셨다. 이제 말이 통할 거다.
“내가 궁금한 게 좀 있는데 말이야...”
내가 말을 걸자 경악한 듯 두 눈을 크게 뜨는 쌍둥이들. 저 여자들의 귀엔 나의 말이 엄청 유창한 영어로 들리겠지. 한국어만 쓰던 인간이 갑자기 네이티브 발음으로 영어를 구사하니 놀랄만도 했다.
“너희 쪽 전력 다 불어. 닉이나 놈의 동료들에 대해 아는 대로 다 말해주면 앞으로 너희의 대우가 달라질 거다.”
“정말...?”
“그래. 정말이다. 고급 정보일수록 너희는 우대 받을 거고. 만약 별로 알고 있는 게 없으면.. 흠... 어떤 벌을 줄까...”
“아, 알고 있는 거 전부 이야기할게. 니콜라스의 스킬이나 기분 나쁜 안경잡이 마이클의 스킬도 알고 있는 대로 다 말하고 또 성녀에 대해서도...”
“마이클은 또 누구야.”
“아, 있어. 안경낀 기분 나쁜 새끼.”
금발 머리가 재잘재잘 정보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거 듣는 걸로는 다 못 외운다. 어딘가 메모해야한다.
“잠깐만. 거기! 아무나 와봐! 종이랑 볼펜 가지고와!”
나는 노예를 시켜 볼펜과 수첩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이걸로 메모 좀 해야겠다.
닉과 그 잔당들을 썰어 죽일 정보들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