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 204. 나락의 입구
* * *
침대에 누워 있던 닉. 그녀가 들고 있던 만티의 서가 순식간에 불타 사라졌다.
원래는 1년 정도 굳어 버린 채로 책의 지식을 주입받았어야 했지만 선신들의 도움으로 시간이 빠르게 감겼고, 그 결과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책의 지식을 모두 주입받은 닉은 만티의 속박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허나 사라진 기억과 여체화 되어 버린 몸은 돌아오지 않았다. 거기까진 선신들이 돕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신들은 만티의 서를 해제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 이상으로 인과율을 소모해 닉을 살리는 것은 손해라고 판단했다.
차라리 오라클을 통해 닉을 죽여 버리고 그가 가진 세이비어의 자리에 다른 이를 앉히는 게 나을 정도로.
“커헉... 여긴..”
어쨌든 닉은 여체화된 것에 더해 기억까지 잃은 상태로 깨어났다. 자기 이름 석 자와 성별말고는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은 누구인지,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닉은 두려웠다. 마치 영화속의 기억을 잃은 주인공들 처럼 닉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몸을 떨며 도움을 요청했다.
“저, 저기.. 아무도 없나요...”
닉은 자신의 목소리가 가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닉은 흠칫 놀라며 자신의 작고 여린 손을 내려다 봤다. 그러곤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이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는 아랫도리를 살펴보는 순간 이제 더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됐다.
“없어.. 워, 원래 없었나? 아니.. 내가 여자였던가? 니콜라스가 여자 이름이었나?”
모르겠다.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가빠지며 알 수 없는 위화감에 몸이 굳어갔다.
그렇게 두려움에 질린 닉이 비명을 지르려는 그때, 문이 덜컥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어.. 누, 누구세요..”
“하아. 드디어 깨어났군.”
그건 마이클이었다. 그는 깨어난 닉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꿀밤을 때렸다.
“아얏...!”
“이 빌어먹을 새끼야.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개고생을.. 후우... 됐다. 어차피 기억도 못할 거고. 이름은 기억나냐?”
“네..? 네.. 니, 니콜라스요..”
“그래, 맞다. 니콜라스. 지금,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 안나겠지. 나도 그렇고 여기가 어딘지도 그렇고.”
“네.. 마, 맞아요..”
“후우... 일단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좀비는 아나?”
마이클은 그대로 의자를 가져와 앉은 채 닉에게 현재 상황과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서 설명했다.
닉은 마이클의 말을 들으며 도대체 이 정신 나간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했다.
자신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잃었을지언정 상식적은 부분은 기억하고 있었다. 팀킬 패널티를 두려워한 조준이 숨 쉬는 방법을 까먹을 때까지 기억 소거제를 먹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닉은 마이클이 하는 말이 허무맹랑하게 들렸다. 좀비가 나타났고, 신들이 있으며, 너는 선택 받은 용사였는데 악당에 의해 기억을 잃었다는 말은 쉬이 믿기 어려웠다.
“저, 저기.. 죄송한데.. 믿기 너무 힘든데... 좀비라뇨..”
“그래. 표정이 안 믿는 거 같더라. 따라와.”
결국 직접 보여 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한 마이클은 닉에게 직접 보여줬다. 망가진 미국의 현 상황과 생존자 캠프에서 배를 곪고 있는 사람들,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바리케이드 너머의 좀비들까지.
“저, 전부..”
“진실이다. 넌 이곳의 리더였어. 멍청하지만 정의롭고 자비로운 리더였지... 사람들은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머리는 좀 멍청해도 민심은 잘 챙겼으니..”
“저, 저는.. 잘.. 모르겠어요..”
닉은 마이클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그런 성격이 맞았는지 의심스러웠다. 이런 큰 곳의 리더였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기억이 사라지고 성별이 바뀌며 그의 인격은 이전과는 달리 뒤틀려 버렸기 때문이다.
뭐든 할 수 있다는 마인드가 사라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무기력증이 자리 잡았다. 또한 정의로움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졸렬함이 가득 찼다.
닉은 겁쟁이가 되었다. 기억이 사라지고 성별까지 바뀌며 그는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마이클은 간파했다.
‘역시.. 기억을 되찾게 해야 해...’
마이클은 중압갑에 인상을 찌푸린 닉을 보며 생각했다.
이런 소심하고 답이 없는 리더 따위는 필요 없다고.
멍청해도 이전의 닉이 몇 배나 더 나았으니. 서둘러 나락으로 가야 했다.
******
“누님...”
로이는 헬렌의 사진을 보며 이를 갈았다.
파이몬과의 계약으로 어릿광대가 된 그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릿광대는 짐꾼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클래스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잘려 나갔던 다리마저 생존자 캠프에 있던 용혈기사 아란의 도움으로 새로 얻을 수 있었기에 로이는 더 이상 자신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자만심에 빠졌다.
‘기필코 잡아 죽여주마...’
그렇게 로이가 혼자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있을 때 마이클의 집무실에 에릭슨이 찾아왔다.
“마이클. 다됐습니다. 앙크가 터지기 직전입니다.”
“그래? 바로 가자.”
마이클은 에릭슨의 보고를 듣자마자 사제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갔다. 그곳에는 수십 명의 사제들과 성녀가 아우성을 치며 폭주하려는 뭔가를 틀어막고 있었다.
“마, 마이클!! 이거 어떡합니까!?”
“마이클!! 봉인이 터질 것 같아!!”
그곳에는 터지기 직전의 금간 앙크가 허공에 둥둥 떠올라 검은색의 뇌전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제들은 기도중인 성녀를 보필해 어떻게 해서든 터지기 일보 직전인 앙크를 억누르기 위해 진땀을 빼고 있었다.
“꺄아악!!”
“끄억!!”
그때 검은 뇌전에 휘말린 사제 몇 명이 뒤로 튕겨 나가며 검게 타버렸다. 죽진 않았지만 다시 일어날 수도 없어 보였다.
“일단 다들 뒤로 물러서!”
마이클은 억제하려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제들을 뒤로 물렸다. 끝까지 앙크를 붙들고 있던 성녀마저 뒤로 빠지자 앙크는 허공에서 격렬하게 흔들리며 어둠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푸스스스...
‘미친...’
극도로 농축된 어둠이 바닥을 뚫고 맨홀 3배 크기의 구멍을 만들었다. 갑작스레 땅이 꺼지며 싱크홀이 발생하자 주변에서 구경 중이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마이클.. 보여?”
“보인다.. 저건.. 구멍인가?”
“저게 입구인가 봐. 나락의 입구..”
“멋모르고 근처에 있었다면 분명 휘말려서 끌려들어 갔을 거다.”
“그러게...”
나락의 입구가 생겨났다. 입장 제한 따위는 없는 게이트가 생겨난 것이다.
“이 너머에.. 닉을 구할 방법이 있다는 거군.”
“오라클을 부를까? 새로운 계시를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겠지. 나락의 밑바닥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테니.. 신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곧 그들은 나락의 밑바닥 어딘가에 있을 ‘지혜의 샘물’을 찾으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곳에 닉을 집어넣으면 사라진 기억이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
“이게 나락의 입구구나.”
며칠간 일본인 사제들이 금간 앙크를 검게 물들였고 드디어 나락과 이어진 문이 생겨났다. 장소는 학교 뒤편 분리수거장이다.
적당히 음침한 장소에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는 크고 검은 구멍이 생겨 있느니 조금 음침하고 기괴해서 무서운 분위기가 조성됐다.
소름끼치니까 일단은 바로 들어가지 말고 내부가 어떤 상태인지 노예들로 조사를 시켜봐야 할 것 같다.
“야, 진성아.”
“예.”
“이훈이랑 이선재. 걔네들 불러서 선봉으로 집어넣자.”
“예, 알겠습니다. 야! 거기! 이훈이랑 이선재 데려와!”
“예!! 알겠습니다!!”
바닥에 생긴 이 커다란 구멍이 어디로 이어져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미리 노예를 들여보내 건너편의 상태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괜히 첫 빠따로 들어갔다가 끔살 당하면 안 되니까.’
방심할 수야 없지.
원래 찻길도 신호 바뀌고 바로 건너는 것보다 잠시 기다렸다가 자동차가 다 멈췄을 때 건너는 편이 훨씬 안전하다. 그러니 적당히 실력 있는 마검사인 이선재와 영혼을 배가 터질 정도로 처먹은 이훈을 집어넣고 반응을 확인해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히익..”
은하와 함께 밤에 산책을 다닌다는 이유로 나에게 여체화 되어 버린 이훈이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저놈에게 분명 여자 이름을 붙여 준 것 같은데... 이유정이었나? 잘 기억이 안 나서 그냥 이훈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야, 겁먹지 말고 빨리 몸 풀고 들어갈 준비해.”
“아, 아니.. 이게 뭡니까.. 대체.. 이 구멍은..”
이훈이 여전히 겁에 질려 있는 동안 이선재는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이선재 이 새끼는 진심 공략조인지 뭔지를 이끌던 놈인데 지금은 내 노예가 돼서 이렇게 안정성 검사 용 모르모트로 쓰이게 됐다.
첫 만남이 폭주한 듀라한을 우리에게 던져 주고 도망갔던 거라서 그런지 기회만 생기면 괴롭히고 싶은 녀석이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훈, 정신 차려라. 사내새끼가 울지 말고.”
“으윽... 야, 이 시발새끼야.. 나 이제 여자라고.. 눈물이 많아진 걸 나보고 어쩌라고..”
“크흠. 미안.”
여전히 싱크홀 같은 입구로 뛰어들기를 거부하는 이훈.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뛰어내릴 준비를 하는 이선재.
나는 녀석들에게 당부했다.
“들어가서 뭐가 있는지 대충 확인하고. 나올 수 있으면 바로 나와. 죽을 것 같아도 바로 나오고. 아니, 그냥 5분 안에 나와. 안 나오면 죽은 걸로 알겠다.”
“예, 아, 알겠습니다.. 후우.. 후우...”
애써 침착한 척 하던 이선재는 뛰어내리기 직전이 되자 역시 두려워졌는지 심호흡을 했다.
하긴, 정체불명의 검은 구멍으로 뛰어내리라는 명령은 나 같아도 무서울 것 같았다.
“그럼”
“으아악! 가, 간다!!”
이선제와 이훈은 기합을 내지르며 구멍으로 뛰어내렸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마치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먼지 마냥 엄청난 속도로 빨려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허어...”
빨려 들어가는 모습만 보면 꼭 믹서기에 갈려 나가는 것 같아서 들어가기가 두려워진다.
‘이거.. 안전한 거 맞나..?’
만약 5분 안에 이훈과 이선재가 빠져나오지 않는다면.. 이건 문제가 있는 거다.
그렇게 약 3분 정도 지났을 무렵 이선재와 이훈이 나락의 밑바닥에서 다시 빠져나왔다.
“허어. 허어.. 허어.. 시, 시발.. 허어억...”
“그, 그만. 그만.. 사, 살려주세여...”
두 사람 다 겁에 질려 있었다.
도대체.. 저 아래에서 뭘 보고 온 거지?
"야. 너희들.. 대체 뭘 본 거야.."
"어, 얼굴..."
얼굴...?
"무수한 사람들의 얼굴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