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화 〉 208. 재앙이 도래했다
* * *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아무것도 할 게 없는 나락의 밑바닥. 천적도 포식자도 없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기생인간들은 하릴 없이 땅바닥을 기어 다니며 영광스러운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는 썩은 살코기를 주워 먹었다.
그리 배를 채우고 난 뒤에는 즐겁게 난교를 벌이거나, 아니면 육벽을 찢고 기어들어가 잠에 빠져들었다.
나태하기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나오던 나날들.
그들은 간혹 나락의 밑바닥에 떨어진 이들을 사냥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았다.
정신이 이어져 있기에 모두의 행복은 곧 나의 행복이었고 나의 행복은 곧 모두의 행복이었으니.
정신이 이어지지 않은 존재의 비명과 고통스러운 발버둥은 최고의 자극이었으며, 가장 즐거운 놀이거리였다.
물론 그것도 갖고 놀 수 있는 존재가 들어왔을 때의 이야기지만.
쾅!! 쾅!!!
“끼아아아!!!!!”
그들은 지금 공포에 질려 도망 다니는 중이었다.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버섯 괴물들이 벽에 박혀 있던 기생인간을 끄집어내 찢어 죽였고, 도망치는 기생인간을 붙잡아 짓눌러 으깨버렸다.
벽으로는 숨을 수 없다. 자신들을 늘 따스하게 품어 주던 육벽이 버섯인간들의 손에 무작스럽게 찢어발겨지고 그 안에 숨어 있던 기생인간들은 억지로 끄집어져 처형당한다.
대적하려고 해도 금방 상처를 치료하는 버섯 인간들.
더욱이 거대한 몸뚱이를 무작정 들이밀며 전진하는 버섯 인간들은 감히 기생인간들이 어찔할 수 없는 커다란 벽이었다.
“끼에에에!!!!”
버섯인간들의 활약 덕에 이선재와 이훈이 보았다던 기생인간들의 기분 나쁜 미소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도저히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끼에에에!!!!”
[도망쳐!!!!!]
기생인간들은 소리로 대화하는 능력이 없다. 그저 간략화 된 의미가 담긴 정신파를 내뿜으며 소통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입으론 비명을 지르고 정신파로는 동료들에게 위협을 알렸다.
[살려 줘. 살려 줘. 살려 줘.]
“끼아아아아!!!!”
[죽는다!!! 죽는다!!!!!!]
사방에서 고통에 죽어 가는 동포들의 정신파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살려달라는 정신파와 죽여달라는 정신파가 교차로 들려온다.
절망이 도래했다. 평화롭던 나락에 재앙이 찾아왔다.
죽음이 만연하다. 도망칠 수 있나?
모르겠다. 달려야 한다. 멈춰 서는 순간 죽을 것이다.
[도망!!!! 도망!!!! 도망!!!!!!]
정신없이 뛰고 있던 기생인간 하나가 사방으로 정신파를 내보냈다.
겁에 질린 나머지 미처 도망갈 생각도 못 하고 몸이 굳어 버린 동포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살아야 해. 살려야 해.. 도망가야해...’
단순하지만 명확한 사고의 연속.
사방에서 닥쳐오는 죽음의 향연 속에서 기생인간은 온 힘을 다해 생을 영위하고자 했다.
푸화악!!!
“끄아아아아아!!!!!!”
팔이 뜯겨나간 녀석 하나가 단말마를 내질렀다.
그의 고통스러운 정신파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가며 주변에 있던 다른 기생인간들 또한 환상통을 느꼈다. 약하게나마 공유되어 있던 감각에 그들은 뛰던 중 넘어지거나 앞으로 굴렀고, 그렇게 멈춰 선 이들은 뒤따라오던 포식자들에 의해 생명을 빼앗겼다.
“하아.. 하아... 끼에에...”
기생인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사방이 적들로 가득하다. 또한 죽어 버린 동포들의 비명 소리로 가득했다.
시체가 쌓인다. 적들의 시체도 쌓인다. 허나 줄어드는 것은 자신들뿐.
시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뿌리들이 뻗어 나가 적들의 수가 다시 늘어난다.
시체에 벌레가 알을 까며 새끼벌레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자신들은 줄어들고 있음에도, 적들은 아무리 죽여도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적들이 계속해서 증가한다. 죽어 버린 동포의 생을 빼앗아 수를 늘려간다.
위험하다. 이대로 가다간 멸절하고 말 것이다.
[도움!!]
주저앉았던 기생인간은 다시 일어서서 달렸다.
이대로 다 죽을 수는 없다. 살기 위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방법, 지식, 지혜. 가장 오래된 자...’
기생인간은 이곳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온 자를 찾아갔다.
그가 이곳에서 제일 오랫동안 살아온 이였기에 가장 많은 걸 알고 있었고, 나태한 자신들과는 달리 끝없이 수련하기에 굉장히 지혜로웠다.
그자는 가면을 뒤집어써 얼굴을 가린 존재로, 자신들과는 달리 팔이 세 쌍이나 난 귀인이었으니.
기생인간은 참회 중이던 나락의 구도자를 찾아갔다.
[도, 도움!!! 도움!!!]
기생인간은 처절하게 빌었다. 살려달라고. 제발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갇힌 둥지가 열려 푸른빛의 짐승들이 기어 나왔을 때 자신들을 구원해준 것처럼, 이번에도 손을 뻗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허나 돌아온 대답은 굉장히 무감정한 것이었으니.
세 쌍의 팔로 가장 오래된 자가 고했다.
[너희에게 알려줄 것 따윈 없다. 받아들이라. 새로운 시대를.]
“흐아아아...”
구도자의 대답에 기생인간은 맥이 빠진 듯 숨을 내뱉으며 주저앉았다.
그는 뭐라 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꼈다. 동포들의 죽음에 분노할 수조차 없었다.
절망스러움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샤사삿.
우어어...
그때 그의 귓가에 벌레들이 바삐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망자들이 내뿜는 기분 나쁜 신음 소리도 들려왔다.
“으아.. 으에으...”
기생인간은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감싸 안았다.
한쪽 복도를 검게 물들인 칠흑바퀴들이 도망치는 기생인간들을 씹어 삼키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또한 반대쪽 복도에선 살점이 떨어져 나간 뼈다귀들이 기생목에 지배당해 산자를 찾고 있었다.
“아아아..!”
도망가야하지만 도망갈 곳이 없다.
결국 그는 눈을 꼭 감았다.
내면으로 도망치기 위해.
“아..?”
그런데 어째서인지 놈들은 구도자가 있는 방의 입구를 넘지 못했다.
마치 결계라도 펼쳐져 있는 것처럼 그들은 입구에 몰려들었으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기생인간을 노려봤다.
[무엇? 무엇??]
당황한 기생인간이 상황을 파악하려 할 때, 벌레들이 홍해가 갈라지듯 양옆으로 비껴서며 이때껏 보았던 녀석들 중 가장 커다란 벌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샤샷...”
칠흑바퀴는 구도자를 확인했다.
그녀는 주인이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고 했었던 존재의 위치를 확인한 다음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벌레들이 떠나간다. 그와 동시에 구도자를 확인한 기생목들 또한 다시 뒤로 물러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아아...”
기생인간은 가까스로 살아남았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어째선지 저들이 이 방에는 들어오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여기!! 여기다!!! 다들 여기!!!]
기생인간은 아직 살아남아 있을 동포들을 향해 정신파를 내뿜었다. 이곳으로 오라고, 그래야 살 수 있다고.
그의 정신파를 들은 이들이 하나둘 구도자가 참회중인 방으로 모여 들었고, 방은 일종의 안전구역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쯤 나락의 밑바닥에 새로운 이들이 들어왔다.
그건 기생인간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 줄 재앙의 사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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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웩.. 냄새..”
“아름아 괜찮니?”
“아, 아뇨.. 아니, 오빠랑 언니들은 어떻게 그렇게 멀쩡해요?”
한아름은 나락에 도착하자마자 역한 썩은 내에 몇 번이나 헛구역질했다.
그건 다른 방문객들도 마찬가지였고, 다들 정신이 나갈 정도의 악취 때문에 정신을 못 차렸다.
“나야 뭐..”
허나 조준을 비롯해 체셔나 메르, 에일라와 한아람은 비교적 멀쩡했다.
그들은 이미 암시장에서 이와 비슷한 수준의 냄새를 견뎌 낸 이들이었기에 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허어...”
한아름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이 조준을 올려다 봤다.
아마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보편적인 인간들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에.
“허어.. 생각보다 그 버섯인간들의 성능이 대단한 모양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이 정도로 싹 정리해 둘 줄은 몰랐는데..”
조준은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헨리의 감탄에 똑같이 감탄하며 나락의 밑바닥을 둘러봤다.
이선재와 이훈의 말대로 사방이 검붉은 내장과 살덩이들로 가득했다.
또한 벽면 곳곳에서 누런 위액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으며, 어떤 곳에선 다져진 살덩이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진짜 꼭 내장 같네...’
정말 말도 안 되게 거대한 짐승의 내장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얼추 정리는 다 된 것 같고...”
조준은 정확히 48분 만에 이곳으로 들어왔다.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나락에서는 이미 이틀이 지난 상황이었다.
그 덕에 진홍지대를 돌아다니던 기생인간들은 떼 몰살당해 있었고 곳곳엔 전투의 흔적만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게 버섯인간들이 처음에 몇 마리를 죽이자 뒤따라온 칠흑바퀴가 시체에 알을 낳았고, 칠흑바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할 때쯤 기생목이 벌레가 먹다 남긴 시체에 들러붙어 다시 수를 늘려 나갔다.
기생인간들 처지에선 말도 안 되는 일이 연달아 벌어진 것이다.
“흐음. 저쪽인가. 일단 소라가 사제들이랑 여기 정화하고. 에일라는 결계좀 쳐주세요.”
“알겠습니다, 오라버니. 깨끗이 정리할게요!!”
“맡겨둬.”
입구를 미리 치워둬야 보급을 원활히 받을 수 있었기에 조준은 일행들에게 입구부근을 미리 정리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곤 위상지정 나침반으로 자신들이 떨어진 입구의 위치를 각인시켰다.
“그러면... 일단은 다들 여기서 대기하고, 지원조만 나랑 같이 움직이자.”
“네! 아싸! 오빠랑 같이 간다!! 화영아, 하이 파이브!”
“오예! 윽.. 은지 언니.. 손에 이상한 거 묻었어.”
“뭐? 으아악. 기분 나빠.. 소라야.. 정화 좀..”
“네, 언니.”
조준은 나락에서도 발랄한 이은지와 강화영만을 데리고서 칠흑바퀴가 부르는 곳으로 향했다.
입구부근은 칠흑바퀴에 의해 맵핑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였다. 가장 중요한 탈출구의 위치와 구도자가 있는 방의 위치도 전부 밝혀졌다.
‘칠흑바퀴 녀석.. 일을 너무 잘해...’
칠흑바퀴는 벌레가 되기 전엔 아퀴나스라는 마법사였다. 그렇다 보니 지능이 대단히 높았고, 주인이 원하는바를 정확히 캐치해냈다.
‘상이라도 주고 싶은데... 뭘 좋아할지를 모르니..’
이때까지 칠흑바퀴를 투입했을 때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조준은 칠흑 바퀴에게 뭐라도 특별한 상을 하나 주고 싶었다.
문제는 바퀴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른다는 것.
[꽤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아, 인디크론님..’
조준이 칠흑바퀴에게 뭘 줘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자, 인디크론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칠흑바퀴가 죽인 만큼 인과율을 회복한 그녀는 다시 자신의 사도에게 말을 걸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
[칠흑바퀴의 능력을 더 강화시켜 주마.]
‘예? 그런 게 가능합니까?’
[애초에 인간이었던 자. 심연의 끝자락을 방황하다 나에게 거두어져 개화했으니. 더 큰 힘을 부여하는 것 또한 나의 권능으로 가능하다.]
‘아...’
인디크론은 들어도 따라 할 수 없는 신언을 중얼거렸다.
[이제 됐다. 그놈의 능력이 점 더 강화되었으리라.]
‘가, 감사합니다..’
조준은 다시 떠나가는 인디크론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힘의 강화..? 일단은 구도자부터 만나고 나서 확인하자...’
조준은 도대체 칠흑바퀴가 어찌 변했을지 상상하려다 고개를 저었다. 어찌 변하든 끔찍한 외모는 바뀌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어.. 뭐야.”
구도자가 있다는 방으로 다가가자 기생인간들 수백 마리가 모여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들은 절망스런 얼굴로 겁에 질린 채 조준을 올려다 봤다.
그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허어... 웬일로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지...?”
이 모든 게 악신들의 수작임을 깨달은 그는 허공에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곤 촉수를 뻗어 두려움에 떨고 있던 기생인간들을 다섯 마리 끄집어냈다.
“끼에에에...”
살려달라는 듯이 울부짖는 기생인간들.
힘은 각성자보다 높았다. 신체 능력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다.
허나 어째선지 그들은 싸울 생각을 못 했다.
‘이틀 동안 뭘 봤기에... 하긴.. 칠흑바퀴가 좀 쩔긴 하지..’
조준은 그리 생각하며 끄집어낸 이들의 목을 의식용 단검으로 베어냈다.
“바칩니다.”
그들의 누런 핏물이 바닥을 적시고, 구도자가 있던 방안에서 흐느끼며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펴졌다.
동시에 굴복했다는 메시지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정신이 이어져 있다더니.. 고통도 공유하는 건가?’
조준은 미소 지으며 연달아 기생인간들을 바쳤다.
한 놈 한 놈 고통스럽게 죽일 때마다 비명이 커져간다.
[오랜만에 맛보는 진미로군.]
그때 인디크론이 조준을 치하했다. 절망에 몸부림치며, 죽어 가는 동료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기생인간들의 비명 소리에 그녀는 만족했다.
[훌륭하다.]
카쉬낙스 또한 만족스러운 웃음소리를 들려 줬다. 기생인간을 씹어 삼키는 소리와 함께.
‘버섯인간을 바쳤을 때보다 악신들의 반응이 좋네...’
조준은 미소 지으며 악신들의 칭찬에 쑥스러워했다. 근래 제대로 된 공양물을 바치지 못해 늘 미안 해 하던 찰나 좋은 사료를 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서른 마리 정도의 기생인간을 공양한 다음 조준은 나머지 놈들을 끌고 나와 이마에 노예낙인을 찍기 시작했다.
나락에 인간농장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