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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가 다운로드 됨-216화 (216/221)

〈 216화 〉 215. 미미르가 없는 지혜의 샘

* * *

도주하던 마이클 일행은 진홍지대를 벗어나 겨우 나락의 유적지 부근에 도달했다.

마이클은 더럽고 역겨운 육벽으로 가득한 곳에서 벗어나 뻥 뚫린 천장과 거대한 기둥들로 가득한 공간에 도착하자 조금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하아.. 하아.. 따돌렸나..?”

“근처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군요. 무사히 따돌린 모양입니다.”

“하.. 그거참 다행입니다. 다들 잠시 숨 좀 돌리죠.”

단태의 확신어린 말에 마이클은 숨을 헐떡이며 유적지에 있던 기둥에 기대 앉았다.

여기까지 쉼 없이 달려서 그런지 땀에 옷이 축축해질 정도로 젖었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붙잡히는 순간 결코 곱게 죽지 못할 거란 사실을 깨달았기에 추적을 뿌리치기 위해 죽을 둥 살 둥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가방을 뒤지던 야수 사냥꾼 킬리언이 낭패를 봤다는 표정으로 마이클을 불렀다.

“이봐, 마이클.”

“예?”

“재료가 다 떨어졌다. 더는 함정도 칠 수 없어.”

“그렇습니까. 하아.. 제기랄.”

그나마 야수 사냥꾼이 도주하며 함정을 수십 개나 깔아 뒀기 때문에 겨우 추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인데..

이제는 모든 재료가 떨어져 더 이상 함정을 만들 수 없다는 킬리언의 말에 마이클은 조금 절망스러웠다. 만약 다시 따라잡힐 경우 누군가를 희생해야 할 상황이 분명 발생할 것 같았다.

마치 용혈기사 아란을 희생시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겨우 도주했듯이 다음번 위기에서도 누군가 남아 일행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야할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게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이클은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만약 마이클이 아란을 버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전원 붙잡혔을 지도 모른다. 그나마 아란이 체셔의 게틀링을 전부 얻어맞으며 시간을 끌어줬기 때문에 그들은 거리를 벌릴 틈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아란이 자의로 체셔의 공격을 전부 얻어맞은 것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론 아란이 적들을 잠시나마 막아준 셈이었으니 마이클은 속으로 아란에게 감사 인사를 보냈다.

‘더럽게 시끄러운 도마뱀 새끼.. 마지막엔 도움이 됐군.. 고맙다..’

짧게나마 아란의 명복을 빌어 준 마이클은 일행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서 재정비하고.. 다시 갑시다. 그리고 카이사르.. 아직 살아 있습니까?”

“으으.. 물론이지. 이따위 상처로 죽을성싶으냐.”

피가 쏟아져 나오던 상처는 안나가 도망치던 와중에 치유술을 써서 겨우 억제했지만, 도주하기 바빠 아직 팔을 완전히 붙이지는 못했다.

“멀쩡한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연세도 있으신 분이 말씀이 없으셔서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흥.. 이따위 칼질 한 방에 죽을 내가 아니야.”

“그럼 안나, 잠시 틈이 생겼으니 그의 팔을 붙여 줘.”

“알겠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카이사르.. 잠시만요.. 마력이 부족해서..”

알렉스와 로이는 카이사르를 적당히 평평한 바닥에 내려 뒀다.

안나는 품에서 은은한 녹색으로 반짝거리는 물약을 꺼냈다.

“조금 따가울 거예요. 카이사르.”

“괜찮아. 천천히 해라.. 난 아직 멀쩡하니까.”

안나는 카이사르의 잘려 나간 팔의 단면에 성수를 뿌렸다. 그러자 거품이 생겨나며 상처 부위에 묻어 있던 이물질들과 병균들이 모조리 정화됐다.

육벽에서 뿜어져 나온 위액과 불순한 핏물을 정화하고 신체결손까지 치료하기엔 마력이 모자라 아이템으로 정화 스킬을 대신했다.

성녀의 치유술은 어떤 면에선 조준의 차오르는 살점보다 앞서 있었으나 마력 소모가 극심했다.

치유대상의 고통을 대가로 마력 소모를 억제시킨 조준의 차오르는 살점과는 달리 성녀의 치유술은 치유대상자에게 한없이 자비로웠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 치유술은 죄다 조준의 차오르는 살점보다 마력 소비가 훨씬 높았다.

“주께서 굽어 살피니. 은혜가 그대를 감싸네.”

소독을 마치고 난 뒤 그녀는 손을 뻗어 스킬을 사용했다. 곧 그녀의 손에서 푸르른 빛이 뿜어져 나와 잘렸던 카이사르의 팔을 다시 붙이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서서히 팔의 감각이 돌아옴을 느끼곤 한숨을 내쉬었다.

“흐우... 망할 놈들...”

카이사르는 다시 달라붙은 팔을 보며 분개했다.

이교도의 종녀에게 속아 환술에 농락당한 걸로도 모자라 수족까지 베였으니 수치스러워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카이사르. 팔은 좀 어떻습니까.”

“잘리기 전보다 더 좋군.”

마이클은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 카이사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쉬고 있는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러던 중 니콜라스를 처다봤다.

‘니콜라스...’

그는 아무런 의지도 없이 한쪽 구석에 앉아 멍하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기억을 잃기 전에는 분명 그 누구보다 강한 의지를 갖춘 남자였는데, 지금은 그저 무기력증에 빠진 머저리가 됐다.

인간 자체가 바뀌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게 단순히 기억을 잃어서인지, 아니면 중성화 수술을 받아 침울해진 고양이마냥 성별이 바뀌어서 성격도 변한 건지 마이클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의 간파안으로도 인간내면의 심리 상태까지는 전부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기억이 돌아와도... 계속 저런 상태라면..’

마이클은 지금의 노력들이 전부 수포로 돌아갈까 두려웠다. 성검을 뽑을 수 있게 됐을 때조차 저런 상태라면 진지하게 마이클의 살해를 염두 해 봐야 했다.

‘문제는... 777이라는 행운..’

그게 가장 큰 문제다.

전 세계를 통틀어 777이라는 말도 안 되는 행운을 가진 인간은 니콜라스가 유일하다.

조준이 공허의 신 보타밀리가 저지른 반칙으로 인해 666의 행운을 인위적으로 가지게 된 인간이라면, 니콜라스는 천성적으로 엄청난 행운을 타고난 인간이었다.

한 마디로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운이 극도로 좋았던 것이다.

애초에 그가 구원자이자 만신전의 총애받는 세이비어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타고난 행운 덕이지 다른 게 아니었다. 선신들은 그의 인성이나 재능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저 인과율을 소모할 필요도 없이 처음부터 행운이 높았기 때문에 그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런데 만약 니콜라스가 회생불가 판정을 받고 새로운 세이비어를 뽑아야 한다면..

‘그만한 행운을 가진 존재를 찾는 건 불가능 하겠지.. 그러니 인위적으로 만들어야할 테고.. 그러기 위해선 말도 안 되는 인과율이 소모될 거야..’

그것은 장기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만신전의 약화로 이어진다. 심하면 만마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져 버릴 수도 있단 말이었다.

허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선신들은 니콜라스를 죽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정말 뒤가 없는 치킨레이스가 시작될 가능성이 높았다.

재앙의 난이도가 더욱 높아지고... 정말 단 한명만이 살아남을 때까지 세상이 파멸로 물드는 것이다. 그리 되면 살아남은 인간들에겐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을게 분명했다. 그건 마이클이 바라는 결말이 아니다.

‘어렵군..’

마이클은 이마를 문질렀다.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기에 닉에 대해서만큼은 선뜻 어찌할지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꼬이게 만드는 컬티스트가 원망스러웠다.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니콜라스는 탄탄대로를 걸으며 사람들을 구하고 구해 낸 사람만큼 강해지는 특성을 이용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후의 1인으로 선별될 만큼의 공적을 쌓았을 것이다.

허나 존재할 리 없었던 행운 666의 소유자가 등장하며 모든 게 망가져 버렸다. 선신들의 미래시가 박살 났으며 상황은 꼬일 대로 꼬여 손쓸 도리도 없이 말려들어가 버렸다.

‘차라리 행운을 나에게 이양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마이클은 차라리 자신이 저런 행운을 타고 났더라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건 멍청하게 컬티스트에게 농락 당한 닉에 대한 불만이자 짜증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마이클은 행운 문제만 아니라면 그냥 니콜라스를 죽이고 싶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운명을 빼앗아 자신이 컬티스트의 대적자가 되고 싶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평생 가만히 있어도 일이 알아서 잘 풀리는 삶을 살면 인간이 저렇게 타인을 쉽게 믿고 등신 같은 행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걸까 싶기도 했다.

마이클은 만약 정말로 닉 처럼 행운으로 가득한 인생을 살았다면 자신 또한 저렇게 천하태평한 인간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 생각하자 행운이 무작정 높다고 해서 장땡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슬슬 다시 움직입시다.”

마이클은 고개를 저어 잡념을 털어냈다.

5분 정도 휴식을 취했으니 슬슬 다시 움직일 때가 됐기 때문이다.

일행들은 야수 사냥꾼의 길 안내를 받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만약 그대로 계속 나아갔다면 조준일행과 마주쳐 닉의 기억은 되찾지도 못한 채 결전을 벌였으리라.

허나 777의 행운이 오랜만에 효과를 발휘했다.

“어.. 저기...”

“저거구나.. 저기야. 저기.. 샘물이 있다...”

그들은 마침내 지혜의 샘물을 발견했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물웅덩이는 지혜의 샘물이 맞았다.

“겨우.. 왔군..”

“빨리 먹어라 닉.. 이걸 먹고.. 기억을 되찾는 거야.”

“어.. 알겠어.”

마이클은 그나마 샘물을 빨리 찾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샘물의 부작용... 지혜를 주는 대신 오른쪽 눈을 대가로 받아 간다...’

마이클은 닉에게 구태여 샘물의 부작용까진 알려주지 않았다. 지금처럼 나약해진 닉이라면 눈이 뽑힌다는 말에 겁을 먹고 시간을 지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닉은 서둘러 안나가 건네준 컵으로 지혜의 샘물을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들이마셨다.

그가 샘물을 들이킬 수록 샘물은 빛을 잃어갔고 이내 완전히 검게 물들어 버렸다. 지혜의 샘물은 모든 힘을 상실했다.

“어.. 으으윽... 아, 아파아아!!!”

마침내 니콜라스의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오른쪽 눈이 터지더니 그 자리를 푸른빛이 차지했다. 이제 그는 두 번 다시 오른쪽 눈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마, 마이클... 닉이..”

“샘물의 대가다. 어쩔 수 없어.”

“아..”

안나는 피가 흘러내리는 닉의 눈 밑을 수건으로 닦아 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닉은 밀려 들어오는 기억의 홍수에 빠져 잠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닉은 잃어 버렸던 자신의 기억들과 더불어 샘물이 품고 있던 지식마저 흡수 중이었다.

“이.. 이건... 이 기억들은.. 내게 아닌데.. 아.. 아아.”

횡설수설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보고 있는 닉. 마이클은 슬슬 초조함을 느끼며 도망칠 준비를 했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빨리 갇힌 둥지로 들어가 숨어들어야 했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이 개새끼들!!!”

그건 분노한 컬티스트의 외침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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