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화 〉 219. 전투가 끝난 자리 (2)
* * *
“다친 사람들은 버섯돌이들한테 업혀서 빨리 거점으로 돌아가! 아니면 내가 치료해 줄까? 역시 그게 좋을 것 같은데... 하린아. 어때?”
“아, 아니야! 나는 안 다쳤어!! 화, 화영이가 아파보이는데요!!”
“아니거든!! 야! 너 미쳤어? 오빠, 저도 됐어요! 멀쩡해요! 아름이가 아파보이는데..”
“아, 아냐. 메르 언니가 치료해줬어.. 언니들.. 그냥 빨리 가자.”
기겁하며 서둘러 떠나는 여자들. 아직 실종자들의 숲에 들어가서 일본인 사제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을 때는 다들 나의 차오르는 살점의 도움을 받았었다. 메르가 치유스킬을 얻기 전까지는 내가 가진 차오르는 살점이 유일한 치유스킬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다들 차오르는 살점이 얼마나 아픈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저렇게 진절머리를 내며 재빨리 버섯인간의 등에 업혀 거점으로 실려 가는 거겠지.
조금 쓸쓸하다. 예전에는 다들 나에게 치료 받았었는데...
“메르는 다친 데 없어?”
“전혀.”
“아, 그래.. 체셔는 괜찮아요? 팔이 조금 긁힌 것 같은데 제가...”
“아니야! 아무 문제없어!”
“아.. 네...”
혹여나 선신진영의 후발주자들이 나의 목숨을 노릴지도 모른다고 내 옆에 남은 메르와 체셔. 둘 다 나의 차오르는 살점을 거부했다.
멀찍이 떨어진 장소에 대짜로 누워 있던 헨리는 자체 치유력으로 이미 상처가 다 나은 모양이고.
결국, 나의 차오르는 살점은 적들 전용 고문 스킬이 되고 말았다.
“그럼 어디 보자..”
모두에게 퇴짜를 맞은 나는 조금 심통이 난 채로 이번 전투로 얻은 것들을 살펴봤다.
우선 인디크론에게 바치기로 했었던 로이. 반쯤 폐인이 된 헬렌의 남동생으로 이놈은 자기 누나를 되찾기 위해 나를 찾아온 모양이었으나, 결국엔 나에게 붙잡혔다. 이제 철저히 박살 낸 다음 공양할 일만 남았다.
그다음은 킬리언이라는 이름의 야수 사냥꾼. 짐승형 적들에게 특히 강하다는데... 글쎄, 주 무기라 할 수 있는 총을 사용할 수 없게 되니 화영이와 하린이에게 작살나버린 놈이다. NPC치고는 약한 축에 들어가는 게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단태. 이놈은 거인 살해자라는데 하필 상대가 전문적인 청부살인업자인 헨리와 전투에 이골이 난 메르였다. 둘 다 내가 봤을 때 내가 가진 패 중에선 최강 전력이었는데 그런 둘을 상대로 제법 선전한 모양이다. 전투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강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용혈기사라는 놈도 있는 모양인데...’
체셔가 말하길 레이저 게틀링을 그렇게 처맞고도 안 죽는 미친놈은 처음 본다고 했었던가. 에일라가 보석을 물 쓰듯 쏟아부으며 결박중인 상태라고 했다. 뭐, 보석이야 보석상 털면 또 금방 얻을 수 있으니 상관없지만..
‘팔어스의 일검을 받아 낸 괴물... 그리고 아람이를 의식불명 상태로 만든 개자식..’
튼튼하다고 하니 특별히 신경 써서 손봐줘야겠다. 아무리 때려 부숴도 쉽게 죽지 않을 테니까 여러 가지 스킬 실험용 허수아비로 사용해도 될 것 같다.
일단 아란은 에일라가 제대로 결박 중인 것 같으니, 여기 있는 놈들부터 빨리 노예로 만들어 줘야겠다. 당장 아람이와 주하의 의식은 돌아왔지만 상태가 썩 좋지는 않다고 하니 어서 가 봐야지.
‘소라는 멀쩡해졌다는 모양이니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고..’
나는 가방에서 의사소통용 물약을 한 병 꺼냈다. 성녀인 안나는 대충 내 말을 알아듣고 어정쩡하게나마 대답할 수 있을 정도의 한국어 실력을 갖췄지만 로이는 아예 나와 대화가 안 통하니까.
그나마 NPC로 분류되는 놈들은 의사소통이 가능해서 다행이었다.
“끄아아아!!!! 내가 네놈에게 항복할 것 같나!!!”
“뭐라는 거야.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웃기는 새끼네.”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로이의 다리를 치료해줬더니 놈은 내가 벌써 고문이라도 시작하는 줄 알고 나를 향해 소리쳤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창백해진 얼굴로 저리 힘차게 항복하지 않는다고 지껄이는 걸 보아하니 이미 내가 노예낙인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이 적들에게 일파만파 퍼진 모양이다.
아마 마이클 그놈이 내 여자들을 간파하며 알아낸 거겠지. 이리 되면 앞으로 마주칠 적들이 잡히기 전에 자살해 버릴 가능성이 월등히 높아졌다.
물론 나에게 잡힌 이상 굴복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만. 이미 숱한 인간들을 굴복시켜본 경험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인간은 고통에 매우, 매우 매우 취약한 생물이다.
단순히 송곳으로 손톱 밑을 찔러 넣는 것만으로 자식새끼마저 팔아먹는 게 인간이다. 인간의 의지는 생각보다 훨씬 나약하고, 쉽게 무너진다.
“항복 안 하면 어쩔 건데. 어쩔 거냐고.”
“끄아아아!!!!! 차, 차라리 죽여!!! 죽이라고!!!!”
그런데 어찌 된게 양쪽 어깨 깊숙이 단검이 꽂혔음에도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며 소리치는 로이.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고통에 그리 많이 노출되지 않아서 그런지 어깨만 칼로 몇 번 그어 줘도 쉽사리 굴복했는데 이 녀석은 제법 반항적이었다.
결국, 나는 주머니에서 송곳과 목공용 조각칼, 망치를 꺼냈다. 또한 하진성이 농약사에서 구해 온 가지치기용 가위와 타카총에 넣어 쓰는 가느다랗고 튼튼한 타카핀도 몇 개 꺼냈다.
내가 여러 명 고문해 봐서 아는데.. 인간은 손가락의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가장 자주 사용하는 신체 부위인 만큼 감각이 예민해서 그런 건지 손가락을 지지고 볶다 보면 대부분은 고통에 못 이겨 실신한다.
이것도 안 통하면 이빨을 뽑은 다음 나사나 못을 잇몸에 처박고 전기로 지지는 방법도 있다. 이걸 쓰면아예 대가리를 처박으며 차라리 죽여 살려달라고 빌 정도다.
하지만 이 방법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까딱 잘못하면 죽여 버릴 위험도 높았고 이렇게 고문할 경우 노예로 삼기 전에 망가지거나 미쳐 버리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침이 묻어서 기분이 더럽다.
“네가 선택한 길이다.”
“자, 잠깐!! 잠깐만!!!”
가볍게 검지에 타카핀을 처박았다. 손톱 틈 사이로 가느다란 철심이 박혀 들어가며 손톱에 피가 고이는 모습이 보였다. 보기만 해도 아플것 같다.
“끄으아아아아아!!!!!!”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검지를 버틴 로이. 좋아, 다음은 중지다.
“그래, 해 보자고.”
푸즈즉..!!
“아아아아!!! 끄아아!!! 악!! 아악!!!”
이번에도 버텼다. 심상찮은 녀석이다. 무의식중에 이 상황이 그만 끝나길 바라고 나에게 항복할 마음이 생길법도 한데..
안 되겠다. 절단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놈의 철심이 박힌 검지 뿌리 부분에 조각칼을 가져다 댄 다음 망치로 내려쳤다.
뚜둑!!
“억....!!!!!!!!”
침을 질질 흘리며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하는 로이.
[상대가 당신에게 굴복했습니다.]
“항복했네?”
“으.. 으윽.. 으으아으.. 끄아아!!!!”
오른손 검지가 떨어져 나가자 놈은 나에게 굴복했다. 나는 곧바로 놈의 이마에 지장을 찍었다. 그런데...
[이미 주인이 있는 영혼입니다.]
“뭐야. 이거.”
몇 번 더 시도해 봤음에도 통하지 않았다.
“하.. 이 씹새끼 악마랑 계약했구나.”
“끄흐읍...”
“아, 짜증 나네.”
가만 보니 헬렌이 말했었던 것 같기도하고.. 다른 놈들에 대한 정보가 훨씬 중요했기 때문에 놈이 파이몬과 계약을 맺었단 사실을 잊고 있었다.
‘파이몬... 열 번 찢어 죽여도 모자랄 개놈..’
로이를 이용해 그 악마 새끼를 끌어낼 방법이 없을까. 그 새끼 때문에 짜증 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대로 그냥 넘어가면 사사건건 내 앞길을 방해할 것 같다.
혹여나 파이몬의 보복이 두렵지 않느냐고 물어본다면 좆이나 까잡수라고 말해주고 싶다. 애초부터 나는 악마 새끼들과는 척을 진 상태다. 그리고 내 빽이 악신들인데 악마 따위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
‘인디크론에게 이 새끼를 공양해 보면 방법이 나올지도...’
어쨌든 당장은 악마와 계약한 녀석이라 노예로 만들 수 없었다. 물론 이제는 악마 빙의자들을 노예로 만들 방법이 있긴 하지만...
‘알시드 유충을 집어넣은 다음 뇌를 파먹게 만들고 로이라는 인격체를 말살한 뒤 그 자리를 계승한 알시드 성체를 노예로 만들면 되긴 하지..’
뭐, 그전에 그냥 인디크론에게 공양해 버릴 생각이다. 이놈은 살려 둘 생각은 없다. 스킬이 특이한 것 같긴 한데 보아하니 스킬 한번 쓰고 마력이 다 떨어져 버린 조루새끼다.
스킬 하나 쓰고 방전되어 버릴 정도면 마력 스탯이 답도 없을 만큼 엄청 딸리거나 스킬의 효율이 개구대기란 소리니 가치가 없는 매물이다.
거기다 악마와 계약한 놈들은 악신들도 맛없다고 받지 않는데 이놈이 누이를 보고 절망할게 기대된다며 특별히 받아주는 거라 인디크론이 먹어 주신다고 할 때 바쳐야 한다.
그러니 나는 놈을 먹기 좋게 정성껏 포장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공을 들이기 전에 킬리언과 단태부터 노예로 만들어야겠다. 로이는 숙성시켜야 하니까.
“어이. 너희들.”
나는 잘려나간 손가락을 붙들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로이를 잠시 방치해 두곤 우리를 노려보고 있던 킬리언과 단태에게 다가 갔다.
“미친놈...”
“나는 위대한 케포누스님의 전사!!! 사악한 거인을 죽인 자!! 단태다!!! 결코 너 같은 악인에게 굴복하지 않으리라..!!!”
킬리언은 침을 꿀꺽 삼키며 욕을 내뱉었고 단태는 자기암시라도 걸듯이 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의지를 다졌다.
이거 쉽지 않겠는걸.
나는 가지치기용 가위를 딸깍 거리며 사람이 가장 심한 충격을 느낀다는 45도 각도로 고개를 기울이고서 눈을 번뜩이며 놈들에게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아니, 기다려라. 나는 굴복하겠다. 항복. 내가졌다.”
[상대가 당신에게 굴복했습니다.]
킬리언은 내가 협박하려 하자마자 곧바로 나에게 굴복했다.
‘이 새끼.. 뭐지..’
상당히 간사한 녀석 같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