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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가 다운로드 됨-221화 (221/221)

〈 221화 〉 220. 고문이 통하지 않을 땐

* * *

킬리언 이 녀석 수염도 덥수룩하고 상남자 같이 생겨서 엄청 뚝심있을 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간사하고 대가리가 잘 굴러가는 녀석 같다.

역시 상황 봐가며 행동하는 사냥꾼답게 두뇌 회전이 종교쟁이인 단태보단 훨씬 빠른 모양이다. 로이 녀석이 된통 당하는 꼴을 보곤 가망이 없겠다 싶으니 바로 꼬리를 내린 거겠지.

킬리언은 내가 봤을 때 훌륭한 생존 전문가다. 하지만 단태는 훌륭한 머저리였다.

“뭐, 뭐라!!? 이봐!! 킬리언!! 이건 명백한 배신행위다!!!”

단발머리 단태는 머리를 휘날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킬리언을 향해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마치 자기 형제가 마왕의 부하가 되겠다며 떠나는 장면을 본 용사 같다.

“미안 하지만, 좆까라 단태. 나는 저런 꼴 당하며 억지로 버티기 싫다. 애초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중립. 만귀전에 있을 형제들에겐 미안 하지만.. 고문당하다 굴복할 바에는 그냥 쉽게 가겠다. 자, 어서 낙인을 찍어라, 컬티스트.”

머리를 들이밀며 나를 도발하듯 어서 낙인을 찍으라는 킬리언.. 이런 녀석은 처음이다. 하렘 멤버도 아니면서 스스로 나서 노예가 되기를 자처하다니.

‘이거 킬리언 녀석은 전투력이 떨어져 보여서 대충 고문하다가 카쉬낙스의 먹이로 던져줄 생각이었는데...’

훌륭하다. 킬리언은 공물이 아닌 나의 노예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목숨 앞에서 신념 따위 곧바로 내다 버릴 수 있는 결단력과 숨김없이 살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는 점이 특히 좋았다.

“키, 킬리언!!! 이 개자식!! 안 된다!! 한번 타락하면 결코 다시 이 길로 들어설 수 없어!!”

그때 단태가 몸을 꿈틀거리며 킬리언과 나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뭔가 저지할 수 없는 강한 의지를 느꼈다.

이거 킬리언이 판단력이 좋아 가산점이라면 단태는 이 저돌적인 돌파력 덕에 가산점을 주고 싶다.

당장 고문당하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끝까지 똥고집을 피우며 무작정 이렇게 비빌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사실 메르와 헨리를 상대로 버틴 게 대단해서 어떻게 해서든 동료로 만들고 싶다는 나의 욕망이 단태의 행동을 묵인하게 만들었다.

그가 만약 자기 능력을 증명하지 못했다면 가차 없이 살가죽을 벗긴 다음 카쉬낙스에게 던져 줬을 텐데.. 카쉬낙스에겐 미안하지만 전력증강을 위해 나는 이놈을 동료 삼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단태는 어떻게 해서든 킬리언을 설득시키기 위해 열변을 늘어놓았다.

“이봐!! 킬리언!! 내 눈을 똑바로 마주봐라!! 설마 너도 파멸주의자가 되려는 생각이냐!!! 그 끝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선지자께서 내린 예언을 무시하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알아!!”

“무사할지 어떨지는 나야 모르지. 그리고 무엇보다 너희가 항상 이야기하는 그 ‘선지자’라는 놈의 예언도 나는 사실 의심스럽다. 애초에 선지자라는 놈이 결말을 직접 확인한 것도 아니고.. 불이 꺼질 때까지 억지로 세상을 유지하던, 그전에 파멸시키던.. 이 우주에 정답이 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지 않나.”

“선지자의 계시야말로 정의!! 그게 정답이지 뭐가 정답이란 거냐!! 악신들의 말은 전부 거짓이다!! 사악한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마라!! 킬리언!!”

“아니, 악신들이 우주를 멸망시키려 한다 해서 무작정 악으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히려 악신들이야말로 신도들에게 자비롭지 않나? 별다른 교리도 없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식의 자유방임이니까 말이지. 오히려 나는 악신이야말로.. 인간의 자유에 가장 관대한...”

“이 썩을 이단!!! 이교도!!! 만마전의 쓰레기들을 두둔하다니!! 이미 타락한 말종이었구나!!!! 죽어라!!! 킬리언!!! 차라리 죽어!!! 죽으라고!!! 너희들 다 죽어!! 이 개새끼들아!!!! 죽어서 반성해라!! 죽어서 만신전에 귀의해!!”

“아니, 나는 애초에 중립이었다니까.. 그보다 시끄럽다 단태. 너도 그냥 받아들여라. 그리고 이미 패배한 주제에 그러고 있으니.. 좀 추하다.”

“꺄으으윽!!! 결코!! 절대!!! 나는 굴복하지 않으리라!!! 맞서 싸울 것이다!!!”

“팔다리도 없으면서.. 잘도..”

킬리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열을 올리는 단태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길게 대화해 봤자 이미 종교에 반쯤 세뇌당해 객관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단태와는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파멸은 뭐고 우주의 멸망은 또 무슨 개소리지? 선지자는 또 누군데.. 떡밥이 너무 많잖아.. 어지럽네.’

아니, 나는 사실 그런 뭔가 있어 보이는 것들 보다 우주의 멸망과 지구인의 떼 몰살이 무슨 인과관계가 있는 건지가 더 궁금하다.

그래, 사실 나는 그게 제일 의문이었다. 우주의 멸망이라거나 그런 너무 거시적이고 머리 아픈 일 따위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왜 하필 무대가 지구로 선정되어 팔십억 가까이 되던 지구인들이 떼 몰살 당해야 했는지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다.

‘몇 가지 추측이 머릿속에 떠오르긴 하는데..’

어쩌면 지구는 그저 신들의 의사결정권을 두고 벌어지는 게임판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팔십억이나 되니.. 적당히 죽여서 좀비로 만들고, 대충 난이도를 높이며 한 놈만 남을 때까지 베틀 로얄을 펼치는..

‘어라, 이거.. 정답에 근접한 거 아닐까..?’

지금 딱 돌아가는 상황이 그런 것 같은데... 역시 잘 모르겠다. 뭐가 어찌 되었든 나는 세계가 멸망하고 나서야 여자도 생기고 인생이 풀리기 시작했으니 별로 불평 불만할 생각 따윈 없다.

옆에 끼고 잘 수 있는 여자가 두 자릿수에 도달한 시점에서 인생 성공한 게 아닐까? 거기다 불평불만 하지 않는 노예가 세 자릿수고...

그래, 괜한 떡밥 굴리지 말고 그냥 내 할 일이나 잘하자. 악신들이 우주를 멸망시키든 어쩌든 내가 죽을 때까지 좀 유예 시켜달라고 빌어보지 뭐. 명색이 신인데 그 정도도 못 해줄까.

나는 고개를 저어 잡념을 털어 버리곤 킬리언의 이마에 지장을 찍었다.

­치이익...!

그렇게 킬리언을 노예로 만들자 단태는 미친놈마냥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꺄아아아!!! 지성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노예로 삼다니!! 이 야만적인 거인들 같은 짓을!!! 인간은 자유로워야 한다!!”

일그러진 종교관에 사로잡혀 제일 자유롭지 못해 보이는 단태의 말. 그의 외침에는 지금 현재엔 거의 남지 않은 도덕과 윤리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굉장히 시끄럽다.

무엇보다 단태는 아직 나의 거점을 본 적이 없어서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우리 집 노예들은 이전보다 삶의 질이 높아졌다며 오히려 노예가 됐음을 기뻐한다.

설문조사라도 해 보고 싶은 심정이다. 말 안 듣고 민폐 끼치는 놈들은 죄다 공양해 버렸고 장애인들은 장애 치료해주고, 자기 할 일만 하면 나는 웬만해선 터치하지 않는다.

거기다 주인인 내가 직접 암시장 드나들고, 이벤트 있으면 다 기어들어가서 발품 팔아 거점 먹여 살릴 수 있게끔 제일 열심히 힘쓰고 있는데 마치 내가 엄청 나쁜 놈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거 안 되겠다. 팔다리 다 잘린 상태에서 저 정도의 정신력을 가진 걸 보아하니 단순히 육체의 고통만으로는 굴복시키기 힘들어 보인다. 이거 단태는 정신을 좀 망가뜨릴 필요가 있겠다.

나는 단태의 눈앞에 다가가 인신 공양을 하며 모아 두었던 업을 소모해 혼돈관측을 사용했다. 이건 잘못 쓰면 진짜 그냥 폐인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고문용으로 쓰지 않르려 했던 건데.. 이 정도로 정신력이 뛰어난 놈이라면 버틸 수 있겠지.

­우우웅...

곧 내 손안에 혼돈과 이어진 자그마한 게이트가 생성되며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색체가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 스킬은 막 썼다간 내 정신도 이상해질 것 같기 때문에 최대한 자제하려 했지만 인간을 반쯤 벗어난 초인을 굴복시키기 위해선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자, 이 안을 봐라.”

“자, 잠깐.. 잠깐 이건.. 이 빛은 대체.. 이.. 빛은.. 이상한.. 색깔...”

단태는 빛을 인지한 순간 눈을 감아 피하려 했지만, 그전에 빛에 노출되어 오묘한 색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다른 사람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소리쳤다. 이건 봐서 좋을게 없는 유해한 광선이니까.. 괜히 근처에 있던 체셔나 메르가 노출되지 않기를 바랐다.

곧 단태는 정신을 붕괴시키고 무의식을 휘젓는 혼돈의 빛에 잠식되어 서서히 ‘계몽’당하기 시작했다.

“으에...”

단태가 빛에 노출된 시간은 단 40초. 이 이상 하면 완전히 미쳐 버릴 것 같아서 얼른 스킬을 해제했다.

“봤지?”

“허억... 바, 방금 그건..”

“자꾸 반항하면 저기에 처넣는다. 그럼 아마도 곱게 못 죽을 걸? 아니, 죽을 수가 없을지도. 저 안이 어찌되어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행복할 수도 있어. 어떻게 할래? 들어갈래? 카쉬낙스님 영접하고 싶어?”

신 앞에선 단독자가 되고 싶냐는 나의 험악한 질문에 단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이런 미친.. 그런게... 존재해선 안 돼...”

결국 단태는 눈을 질끈 감고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1분이 채 지나기 전에 말려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 항복... 항복한다.. 저런 곳에 들어가긴.. 싫어...”

그렇게 단태도 노예로 만들 수 있었다. 그의 잘못된 사상까지는 바로잡을 수 없겠지만. 어쨌든 당장은 나에게 굴복했다.

고통을 떠나 혼돈이라는 장소 그 자체에 마음이 꺾여 버린 모양이다. 솔직히 악신의 사도인 내가 봐도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은 빛이니까.

두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데 5분이 채 안 걸렸다. 비교적 빠르게 노예로 만들었으니 이제 잠시 방치해 두었던 로이를 결박하고선 거점으로 향했다.

참고로 인디크론이 원하는 것은 정성스레 만든 '고급요리'다. 그러니 패스트푸드처럼 혼돈관측 스킬로 로이의 정신을 단순히 붕괴시켜선 안된다. 내가 손수 망가뜨려 절망감에 빠뜨릴 필요가 있다. 더욱이 당장 노예로 만들 수 없으니 빠르게 누이와 상봉시켜 정신을 무너뜨린 다음 인디크론에게 바쳐야겠다.

그런 다음엔.. 닉이 떨군 검들을 확인하고, 아란을 복종시킨 다음 닉의 부하들이 자리 잡은 곳을 털어먹으러 가야겠다.

자연스레 황반의 중심부는 나중으로 미뤄졌다. 적들이 버젓이 살아 숨 쉬고 있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으니까.

배후에 적을 놔둔 채로 딴짓을 할 순 없는 법이지. 쓸어버릴 수 있을 때 싸그리 일망타진해야 한다. 어영부영 미루면 언제 뒤치기를 당할지 모르니까.

‘수천 명이나 있다던... 닉의 거점.. 얼마나 맛있을까.’

한 번에 어마어마한 미국인들을 강제 영입할 기회다.

수천 명이라고 하니 대규모 숙청식이라도 하면 어떨까. 반항하는 놈들만 전부 공양해 버리면 카쉬낙스가 배불러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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