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갑자기 번쩍! 하는 순간 로빈은 자신이 죽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벼락에 맞았을 테지. 번개가 아니라면 밤중에 그런 빛줄기가 떨어질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죽는 순간 삶의 주마등이 흘러간다고들 하는데 사실 자신은 그런 주마등을 느낄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절명했다.
물론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고 죽는 건 차라리 행운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삶을 돌아볼 틈도 없었다는 건 왠지 좀 불운했다. 심지어 그의 마지막을 함께한 것은 당황한 듯 놀란 친구 봉구의 얼굴이었다.
마지막 순간을 봉구의 얼빠진 얼굴과 함께하다니.
로빈은 자신이 정말 운이 없는 놈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눈이 떠졌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처음 본 것은 단아하고 우아한 여성이 자신에게 가슴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황당한 일이라 로빈은 자신도 모르게 양팔을 저으며 여자를 밀어버리려 했지만, 자신의 바둥거림은 순식간에 제압(?)당했고 입에 물린 젖꼭지에서 흘러나온 따듯하고 부드러운 액체에 함락당해 마냥 여성의 품 안에서 잠이 들 수밖에 없었다.
단언컨대 지금까지 거칠게만 살아온 로빈의 인생에서 가장 포근하고 안락한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해롱거리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로빈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상황을 직시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 짧은 팔다리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큰 머리.
게다가 주변의 모든 사물이 거대해 보이는 것이 이곳이 거인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면 자신이 작아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젖을 물리는 여성이 있는 것을 볼 때 자신은 아기가 된 것이었다.
자신은 분명 죽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로빈은 이해할 수 없었다.
환생? 아니면 천국?
살아생전 큰 죄를 짓지는 않았으니 이곳이 지옥은 아니리라. 지옥이라면 이렇게 평안한 시간이 이어질 리가 없겠지.
실없는 생각들이 잠시 이어졌지만 로빈은 자신이 다시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전생의 팍팍한 삶을 떠올리면 두고 온 삶에 대한 미련 따위는 전혀 없었지만, 다시 태어난 것이 분명한데 왜 예전의 기억과 인격이 남아있는지는 조금 의문이었다.
사람이 죽고 윤회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면 전생의 기억 따위는 지워지는 것이 정상이 아니던가.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고 확신한 로빈은 지난 며칠간 주변을 살펴보며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했으나 얻은 소득은 거의 없었다. 애초에 아기의 세상은 너무나도 좁았고 마주칠 수 있는 사람의 수도 턱없이 모자랐으니까.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은 이런저런 생각과 사고를 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갓난아이가 하루 대부분을 잠으로 보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로빈은 번번이 자신의 의지를 무너트리는 강렬한 수면욕에 절망하고 있었다.
그래도 소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이 자주 접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보는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방금 자신의 방을 나선 두 여성은 무려 자신의 어머니들이었다.
밝은 갈색 머리에 우아하고 단아한 여성은 자신의 친모 마리아나. 처음 로빈이 눈을 떴을 때 다짜고짜 가슴을 들이밀어 로빈을 멘붕하게 만들었던 그 여성이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붉은 머리에 건강해 보이는 여성은 작은어머니 세릴.
그렇다. 무려 어머니가 둘이다.
아무래도 이곳은 남성이 여러 여성을 부인으로 둘 수 있는, 남성의 사회적 지위가 여성보다 더 높은 곳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만나러 오는 사람이 둘 더 있었는데, 친모 마리아나를 닮은 중년의 남성과 진한 갈색 머리의 정말 준수하게 생긴 호리호리한 남성이었다.
잘생긴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가 분명했다. 볼 때마다 ‘내 아들 로빈’이라고 부르며 자신을 자주 안고 환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중년의 남성은 마리아나의 아버지, 즉 자신의 외할아버지 같았다. 우선 둘의 외모가 많이 닮아있었고 마리아나가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었으니 틀림없었다.
물론 친할아버지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마라아나랑 너무 닮았다.
아버지인 윌리엄과 외할아버지.
불행히도 아직 외할아버지의 이름까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구도 그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를 부르는 호칭은 공통적으로 ‘영주님’이었다.
그렇다. 영주님.
로빈은 자신이 왠지 중세 비슷한 시대에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영지가 있고 영주가 있는 시대라면 중세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중세와 비슷한 시대라고 표현한 것은 중세라고 하기에는 이곳이 좀 이상했기 때문이다.
갓난아기인 로빈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는 너무나도 좁았지만, 그 와중에도 몇 가지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욕실.
중세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최첨단(?)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무려 막대기를 돌리면 마치 수도꼭지 같은 곳에서 따듯한 물이 나왔다.
아마 중세라면 물을 길어다 큰 솥에 담고 불을 떼 끓여야 따듯한 물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게다가 어머니들이 입고 있는 옷들이 드레스로 보이지 않았다. 은근히 노출이 좀 많은 거 같기도 했고.
물론 평상복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가끔 반바지를 입은 작은어머니 세릴의 모습을 보면 이곳은 절대 중세일 수가 없었다.
중세는 아닌데 영주가 있는 곳.
솔직히 로빈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 로빈이 환장하는 건 바로 그런 점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먼저 자신의 이름.
이게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도 로빈의 이름은 로빈이었다. 로빈은 뭔가 짜 맞춘 듯이 자신의 이름이 로빈이라는 것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말과 언어.
처음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지만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이 처음 접하는 세상의 언어를 알고 있을 리가 없는데 어머니와 다른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우연히 이곳의 글을 접하고는 정말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무려 한글과 영어, 한문을 혼용하고 있는 세계였으니 말이다.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글과 영어, 한문을 혼용하는 중세 같지만, 중세 같지 않은 세계.
로빈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도저히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로빈이 고민하는 사이에 사람들이 로빈의 방에 들어섰다.
어머니 둘, 그리고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였다.
그리고 이내 어화둥둥 자신을 안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로빈은 끝내 생각하기를 포기하게 되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렇게 자신을 좋아해 주는 가족이 생겼으니 아무려면 어떠냐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어이없게도 자신이 쳐다보기만 해도 까르르, 어르며 즐거워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전생에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고생만 했는데 이번 생의 자신은 왠지 좀 가진 것이 많아 보인다는 거였다.
영주라고 불리는 외할아버지부터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방, 그리고 메이드가 있는 저택.
아직 어떻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전생보다 훨씬 나은 것만은 분명했다.
어쩌면 이번 생에서는 편안한 곳에 짱 박혀 꿀 빠는 그런 여유 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들처럼 아리따운 아내를 둘 정도만 두고 말이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자신에게도 그런 봄날이 찾아오는가. 대박 미남인 아버지와 우아한 어머니의 유전자를 이었으니 외모도 제법 준수할 테니 꿈만은 아닐 것이다.
로빈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도도한 듯 시크하게 가족들에게 손짓했다. 아기가 된 자신에게 어른들이 바라는 것은 잘 먹고 잘 크는 것과 가끔 재롱을 떠는 것뿐이었지만, 아무래도 아직 그런 재롱을 떠는 것은 무리였고 최선을 다한 것이 이 정도였다.
특히 영주라는 외할아버지에게는 더욱 잘 보일 필요가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이곳의 실세는 그분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로빈의 손끝은 외할아버지 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어쨌거나 로빈의 새로운 인생은 햇살이 가득할 듯 보였다.
* * *
아기의 삶은 지루하고 따분했다.
하루 종일 자고 먹고 싸고 하는 것밖에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보통의 아기라면 당연히 이런 생각을 하지도 못했겠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성인의 사고력을 가진 로빈이다 보니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말을 내뱉는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 어른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두렵기도 했고, 혹시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하며 무의미한 기대를 하는 것은 더욱더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중간만 가는 게 최고라는데, 괜히 부모들이 자신의 능력 이상의 기대를 하면 서로 피곤하지 않겠는가?
그건 절대 로빈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로빈은 그저 다른 아기들처럼 먹고 자고 싸고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성을 가진 로빈에게 기저귀를 가는 일은 자못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로빈은 그저 눈을 감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료하게 보내는 로빈에게 그래도 즐거운 시간이 있었으니 바로 영주님인 외할아버지가 자신을 품에 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는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는 과정인 모양이었는데 주제도 중구난방에 별별 이야기가 다 튀어나왔지만 그래도 로빈은 이 이야기들을 들으며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조금씩 학습해 가고 있었다.
로빈은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법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성이 왠지 위대해 보이는 ‘그레이츠’라는 사실.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이름이 카인이라는 것.
또한 이곳이 아주 외진 시골 영지라는 이야기까지.
그 밖에도 흥미로운 사실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 윌리엄이 데릴사위라는 것이었다.
딸 하나뿐인 외할아버지는 자신의 딸이자 로빈의 어머니인 마리아나가 다른 나라의 귀족 자제라는 윌리엄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크게 반대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어차피 데릴사위를 들여야 하는 상황에서 번듯한 사위를 볼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 기준을 많이 낮추고 계셨던 것.
하지만 사윗감이라는 윌리엄은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더 훤칠하고 마음이 따듯한 남자라 자신의 마음에도 들었다고 한다. 어차피 시골 영지를 다스리는 것에 큰 역량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고 자신의 딸인 마리아나를 아껴주기만 하면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대충 들어보니 아버지인 윌리엄은 허우대만 멀쩡하고 이름뿐인 귀족 자제인 모양인데 성품만 보고 결혼을 허락하다니 외할아버지가 은근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자신이었으면 그렇게 쉽게 이 결혼을 허락하진 못했을 것 같다. 게다가 데릴사위인데 두 번째 부인을 두는 것을 허락한 것도 조금 놀라웠다.
심지어 한없이 밝은 모습의 아버지를 보면 딱히 처가살이하는 것에 대한 압박 같은 것도 없어 보였으니 여러모로 신기했다.
아무래도 이곳의 문화가 전생에 자신이 살던 곳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전생에서는 처가살이야말로 정말 인간이 할 것이 못 된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오늘, 외할아버지 카인은 로빈에게 자신들이 사는 제국의 시작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카인은 로빈을 안고 마치 동화책을 읽어주듯 다정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평소에도 귀여운 로빈인데 자신이 이야기할 때면 귀를 쫑긋 세우며 경청하는 것이 너무 앙증맞아 카인은 하루 중에 이 시간을 가장 기다리고 있었다.
특별한 능력도 없어 보이고 일에도 서툴지만, 마음만은 따듯하며 탁월한 미모(?)를 갖춘 사위와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아이 사이에서 태어난 로빈은 그야말로 자신의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그런 로빈을 독차지하는 이 시간이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 카인은 로빈에게 제국의 건국자인 초대 황제와 제국의 기틀을 다진 두 번째 황제 사이에서 있었던 야사를 이야기해 주기로 했다.
“트와이드 제국의 초대 황제 카이사르 대제께서는 신의 의지를 받들어 제국을 건국하셨다고 해. …(중략)… 이렇게 결국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트와이드 제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지.”
카인이 맛깔나게 이야기를 이었지만 로빈의 사고는 이미 처음 부분에서 멈춰 버린 지 오래였다.
더럽게 넓어 보이는(Too wide) 제국의 이름과 초대 황제 카이사르.
왠지 너무나도 익숙했으니까.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트와이드 제국은 자신의 친구이자 인기 없는 웹 소설 작가인 봉구의 소설에 등장하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