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로빈도 이렇게 지나치게 가족들이 자신을 아끼는 것이 조금은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차피 동생이라도 생긴다면 그 관심이 고스란히 동생에게 넘어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 크게 신경 쓰지는 않고 있었다.
사실 재롱 생활도 3년이라 많이 익숙해지기도 했고 사랑받는 것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으니 오히려 관심이 멀어지면 조금은 서운해질지도 모르겠다.
일이 없는 건지 한가한 건지, 영주로서 업무를 보는 외할아버지 카인을 제외하고 다른 가족들은 지나치게 여유 시간이 많았다.
특히 카인이 영주 저로 돌아온 이후에는 로빈의 시간을 거의 카인이 독차지하기 때문에 카인이 없는 낮에는 어머니인 마리아나와 세릴, 그리고 아버지인 윌리엄이 같이 로빈을 돌보았는데 오늘은 윌리엄이 고집을 부려 로빈을 독점하게 된 것이다.
“오오~ 로빈, 내 보물. 아침은 맛있게 먹었니?”
“네, 아빠. 맛있었떠요. 크림 듬뿍! 생크림 깨이쿠! 냠냠! 또 먹고 싶포요!”
“오~ 그랬니.”
로빈은 자신의 머리를 쓱쓱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는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윌리엄에게 마주 웃으며 속으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혀 짧은 소리와 애교, 재롱.
솔직히 처음에는 로빈도 자기가 이런 것들을 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외모는 아기지만, 실상은 서른 살이 넘는 성인 남성이 아니던가.
지금껏 자신이 본 소설에 의하면 몸이 어려지면 생각도 어려진다는데 어려지기는 개뿔, 처음 재롱을 떨려고 시도했을 때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자신도 모르게 닭살이 돋으며 소름이 끼쳐 참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기브 앤드 테이크라고 생각한 이후부터는 그나마 쉽게 재롱을 부릴 수 있었다.
상대는 사랑과 보살핌을 베풀고, 자신은 재롱으로써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보답한다.
솔직히 개 같은 진상 고객을 상대로도 자연스럽게 웃어야 하는 현대인으로 살아온 내공이 있는데 마음만 먹으면 이 정도 재롱쯤이야.
어쨌든 상대는 자신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내는 새로운 가족들이 아니던가. 자신이 받는 보살핌을 생각하면 그 정도도 해주지 못하는 건 직무 유기였다.
그렇게 지나온 3년의 경험으로 이제는 자연스럽게 혀 짧은 소리를 내며 귀여운 척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로빈의 혀 짧은 소리가 귀여웠는지 한껏 기분이 좋아진 윌리엄은 로빈을 안고 정원수로 다가가 정원수를 다듬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아빠가 젊었을 적엔 말이지…….”
자신도 아직 서른이 안 된 핏덩이 주제에 젊었을 적을 논하는 윌리엄.
그런 점은 조금 웃기지만 그것만 제외한다면 로빈도 아버지 윌리엄의 이야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전혀 마음에 와닿지 않는 제국을 구한 용사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외할아버지 카인의 이야기보다는 어린 시절 여러 나라를 전전했던 아버지 윌리엄의 소소한 모험담이 더 실감 나고 현실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도대체 자신을 희생해 제국을 구한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뭘 배우라는 것인지 카인은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자신도 그런 영웅처럼 세상을 구하고 죽길 바라는 건지 참 어이가 없을 지경.
솔직히 로빈은 그런 거국적 위험이 자신에게 닥치면 누구보다 먼저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그것도 혼자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친한 사람들 모두 데리고 도망칠 각오였다.
“내가 살아야 세상도 의미가 있는 게 아니겠어?”
“응? 뭐라고 했니, 로빈?”
“아뇨, 아뇨. 아니에요, 아빠!”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있던 것이 입으로 튀어나오자 로빈은 살짝 당황하며 얼버무렸다. 다행히 윌리엄도 크게 신경 쓰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웃으며 이야기를 잇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쉰 로빈은 눈앞에서 과거의 모험담을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윌리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자신의 아버지 윌리엄도 참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이 세계에서도 드문 데릴사위로 과감히 취업(?)한 것도 재미있고(알고 보니 이쪽에서도 데릴사위는 드물다고 한다), 그런 주제에 영지를 다스리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도 재미있었다.
게다가 수도에서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어머니를 노래 한 방에 꼬신 것도 흥미로운데, 요즘도 틈만 나면 번화가로 내려가 선술집에서 노래를 부른다니 참 자유로운 영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저 빛나는 외모로 항상 두 어머니를 해롱해롱하게 만드니 어쩌면 윌리엄의 삶이야말로 로빈이 추구하는 안빈낙도의 궁극일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권리도 없지만 그런 만큼 짊어질 책임도 없어 보이고, 먹고살 걱정마저 없는 그야말로 꿀 빠는 인생이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저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나?”
확실히 추구하는 바도, 성향도 꽤나 비슷해 보이는 게 그럴듯한 가정이었다.
로빈은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겨 헤실헤실 웃으며 윌리엄을 불렀다.
“아빠, 외할부지는 지금 일하고 있는데, 왜 아빠는 일 안 해?”
윌리엄은 천진난만한 아들의 물음에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으며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들, 그건 말이야. 흠흠. 사실, 이 아버지는 로빈을 가진 거로 할 일을 다 한 거지. 그럼, 그렇고말고. 로빈도 아마 어른이 되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거야.”
“아…….”
어른은 개뿔. 로빈은 지금 이 순간 윌리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직 한창때로 정정한 외할아버지.
그리고 빠르게 생산(?)한 후계자.
윌리엄은 자신이 영주 직을 이어받지 않고 카인에게서 바로 로빈으로 영주 직을 넘겨줄 생각인 거였다. 그러니 당연히 윌리엄 본인이 영주의 업무를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이고.
이게 윌리엄의 생각인지, 카인의 생각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젊은 윌리엄이 집에서 정원수나 다듬고 있는 걸 보면 어쨌든 서로 간에 합의는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당당하게 한량 선언이라니.
로빈은 정말 윌리엄이 부러웠다.
인생은 저렇게 살아야 하거늘.
물론 이곳이 거지 같은 봉구의 소설 속이고, 앞으로의 흐름을 생각하면 자신이 빠르게 영지 일에 관여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은 바람직했지만, 그건 그거고 부러운 건 부러운 거였다.
그렇게 윌리엄을 마음속 깊이 부러워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짧고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에 단단하게 갑주로 무장을 한 남성 하나가 다가왔다.
로빈도 알고 있는 남성이었다. 바로 자신의 작은어머니 되는 세릴의 아버지이자, 젊은 시절부터 외할아버지 카인을 섬겨온 폴 경이었기 때문이다.
풀 네임 폴 린텐.
그레이츠 영지의 기사단장이자 최고의 무인이라는 폴 경은 영지의 자랑이자 자존심이란다. 게다가 성품도 곧고 진중한 태도로 인망이 깊었으니 로빈도 요주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로빈도 가끔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는데 두 번째 부인의 아버지라는 타이틀 때문에 은근히 경계했지만, 항상 자신을 너무나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바람에 지금은 경계심이 완전히 누그러진 상황이었다.
혹시 작은어머니가 아들이라도 낳는다면 상황이 달라지려나.
하지만 왠지 그렇게 된다고 해도 폴 경이 변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로빈의 느낌이긴 했지만 말이다.
“작은 가주님, 영주님이 찾으십니다.”
“아… 아버님이요? 흠… 알겠습니다. 로빈, 이 아버지는 이제 가봐야 할 거 같네.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나누자.”
“네. 아빠. 쪼심해서 다녀오떼요.”
폴 경의 이야기에 입맛을 다신 윌리엄은 아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로빈을 잠시 응시하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별을 고했다.
“가시죠, 작은 가주님. 모시겠습니다. 그럼 도련님도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척, 하고 인사하고 떠나는 풀 경에게 로빈도 배꼽 인사로 응수했다.
하지만 사적으로는 사위이기도 한 윌리엄이나, 사적으로 외손주뻘인 로빈에게도 깍듯하고 정중하게 높임말을 사용하는 폴 경의 모습을 보면 그의 성품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정중한 태도의 근거는 분명 외할아버지 카인에 대한 충성일 테지. 둘도 물론 사적으로는 친구이기도 했지만.
저 앞으로 사라지는 둘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로빈은 만약 폴 경의 저런 태도가 가식이라면 심각한 인간 불신에 빠질 거 같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다음 일정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로빈의 다음 일정은 서재를 방문해 독서를 하는 것이었다.
읽는 책도 다양했다. 로빈은 이곳 서재의 모든 서책을 다 통달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래서 로빈은 가족들에게 재롱부리는 시간을 제외하고 모든 시간을 독서에 투자하고 있었다.
솔직히 로빈이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판타지 배경인 소설의 내용은 거기서 거기였고, 수많은 소설을 섭렵한 자신이 적응하고 사는 것에 큰 문제가 있을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로빈은 이곳을 조금 무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봉구를 무시하고 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 녀석 머리에서 나온 세계 따위 뻔하지.
이런 생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러니 전생에서도 책이나 공부와는 담을 쌓았던 로빈이 따로 책을 보며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신봉구, 이 정도로 골 때리는 놈이었을 줄이야.”
로빈은 충격적인 그날을 회상하며 혀를 차면서 책장을 넘겼다.
그날은 로빈이 처음으로 방을 나서던 날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걸음을 옮긴 로빈은 기쁜 마음에 자랑스럽게 문을 밀고 방을 나섰다.
로빈의 방은 작은 울음소리가 나도 바로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항상 열려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핏덩이에 불과한 로빈도 자력으로 방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자력으로는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거실.
그곳에서 로빈이 본 것은 어이없게도 부모님이 뜨겁게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었다.
한낮에, 그것도 거실에서 하녀들이 부지런히 자기 일을 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낯 뜨거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을 본 로빈이 받은 충격은 결코 작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충격으로 다가온 건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다는 듯 자기 일만 하는 하녀들.
심지어 외할아버지는 지나가며 그 모습을 보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원, 녀석들도. 자네는 마리 말고 세릴에게 더 집중해야 하는 거 아닌가? 세릴이 로빈을 많이 부러워하던데. 폴도 좀 그런 거 같고.”
그리고 이어진 부모님의 반응도 가관이었다.
“네. 그래야죠, 아버님.”
“호호. 세릴도 금방 올 거예요, 아버지. 전 그러니까… 애피타이저? 메인 요리는 세릴이죠.”
이렇게 넉살을 떨고 있는데 작은어머니 세릴이 급하게 와서는.
“앗, 언니! 반칙이에요. 오늘은 제 차례잖아욧!”
“먼저 먹는 게 임자라잖니. 어서 오렴.”
“힝, 너무해요. 그럼 저도!!”
그렇게 등장한 작은어머니 세릴이 합류해서 다 같이…….
그리고 그 모습을 잠시 흐뭇하게 지켜보시던 외할아버지는.
“흠……. 둘째를 기대할 만하겠군.”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자리를 비키셨다.
그런 일련의 모습을 지켜본 로빈은 당연히 멘탈 붕괴에 휘말렸다.
상황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가장 큰 것은 그냥 아는 것과 눈으로 보고 겪는 것에 대한 괴리감이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을 읽어본 이상 저런 장면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봉구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극남성향의 19금 판타지 소설이었다. 그렇다 보니 다양하게 서비스(?) 신이 등장했는데, 그중 주인공인 황태자가 측근들과 전략 회의를 하면서 첫째 부인인 레니아 공녀에게 봉사(?)받는 내용이 있었다.
대놓고 봉사받는 주인공과 그 장면을 보고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측근들.
그 모습을 보면 이 세계에서 대놓고 성관계나 유사 성행위를 하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예상했어야 했다. 적어도 이곳이 그 소설 속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이제 이곳에서 살아가야 할 로빈은 말이다.
그런데 로빈은 큰 충격을 받았다.
로빈이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저 장면이 아니라 저 장면을 보고 충격받은 자신이었다. 아직까지 예전의 삶과 상식에 자신이 지배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으니까.
어쨌든 그런 일을 눈앞에서 겪은 로빈은 고민 끝에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가볍게 보고 넘어갔던 서비스 신을 현실에서 눈으로 확인했을 때 느낀 충격.
그리고 자신이 상식이라고 생각한 것이 이곳에서는 상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우려.
거기에 자신이 알고 있던 이 소설의 내용은 실제 이 세계의 일부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예상.
그런 모든 것들이 로빈을 서재로 이끌었다. 자신의 사고방식을 이 세계에 맞춰야 한다는 그런 생존 본능으로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