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렇게 처음 서재를 찾게 된 날, 로빈의 멘탈은 사실상 상당히 무너져 있었다.
지금까지 최대한 다른 아이의 성장 속도에 맞춰 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책을 마구 읽어 나갈 정도였으니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덕분에 로빈은 성장 속도가 조금 빠른 아이에서, 빠르게 글을 깨우친 천재적인 아이라는 원하지 않는 평가를 받고 말았다.
물론 가족들은 단순히 기뻐했을 뿐이었지만 로빈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한숨만 터져 나왔다.
“눈앞에서 공개 플레이(?)하는 장면을 보고 어떻게 안 놀래? 그것도 3P를. 난 무슨 야동인 줄. 하… 이게 다 봉구 때문이야. 이 변태 같은 자식.”
로빈은 자신도 예전에 소설을 보면서 ‘오, 이건 좀 자극적인데?’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은 이미 잊고 있었다.
어쨌든 그날부터 이 세계에 대하여 더 적극적으로 알아보던 로빈은 서재에서 생각보다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오늘은 법 관련 서적인가? 제국법이라… 이거 물건이네. 아무리 영주라도 제국법이 지정하고 있는 내용은 지켜야 한다는 거군.”
이곳은 영주가 있는 중세 같은 세계지만 영주가 절대 권력을 가진 건 아니었다. 전생의 헌법 같은 제국법이 있었고, 그 범위 안에서 영지법을 제정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제국법은 상당히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었지만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역시 귀족이 아무런 근거 없이 평민을 처단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세율의 제한도 있었고.
“하긴 우선 영지법을 영주도 따라야 한다는 것부터가… 나름 법치 국가인가. 게다가 황실이 제국 안정에 기여하는 바가 엄청나네. 은행 관리에 영지전 제한, 위급 시에 중앙 기사단을 파견하는 것도 그렇고. 그러고 보면 황태자도 항상 지방 영지에 중앙 기사단을 내려보내곤 했었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말이야.”
확실히 이곳은 자신의 예상보다 더 발달한 곳이었다.
“그렇겠지? 제국이 건국된 지가 무려 천 년. 괜히 천 년 제국이 아니지. 게다가 건국 당시가 중세였다고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중세에 머물러 있는 건 말도 안 되지. 보아하니 발전 방향은 많이 다른 것 같지만.”
지금까지 여러 서적을 통해 알게 된 생활 수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과학이 아니라 마나와 마법 물품이 발달한 세계이니만큼 전생의 세계와는 발전 방향 자체는 많이 달라 보였지만 상당히 발달한 사회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따듯한 물이 나오는 꼭지라든지 냉장고 비슷한 마법 보존기가 존재하고, 심지어 초오버 테크놀로지 같은 이동 게이트가 있는 세계임에도 인구의 40% 이상이 농업 같은 생산직에 종사하고 있는 것도 특이했다.
“마법사가 있는데… 공돌이 같은 존재인가? 제법 발전된 문물이 있긴 한데 아무나 만들 수 없어서 물량은 적고, 그래서 평민들이 누리는 문명 수준은 조금 낮은 것 같은데?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는 않겠지.”
그 밖에도 로빈이 몰랐던 사실은 한둘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소설의 주 배경이 황실이고, 황족들은 제국법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으니 제국법의 존재를 특별히 언급할 이유가 없었고, 주인공 황태자의 전투나 전쟁, 그리고 정략이 소설의 중심 내용이었으니 일반적인 생활상이 표현된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긴, 이게 무슨 일상물도 아니고…….”
그래도 어쨌든 상당히 잘 짜 맞춘 듯한 세계관이었다. 봉구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말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옥에 티는 있었는데 그건 바로 에티켓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파티에서 상대의 파트너를 칭찬할 때 몸매나 성적 매력에 대한 칭찬은 필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상대를 무시하는 거로 보일 가능성이 크다, 인가? ‘가슴이 아름다운 부인이군요. 침대에서도 항상 즐겁겠어요’, 이건 무슨 성희롱이잖아? 아무 사전 지식 없이 이딴 소리를 들으면 나라도 뚝배기를 후려칠 거 같은데…….”
그런데 소설에서 주인공의 파트너에게 음담패설을 내뱉은 애들은 거의 대부분 골로 갔었다. 그때마다 ‘왜 저 X신이 황태자의 여자한테 저런 희롱을 건네지? 미친 건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곳 에티켓에 따르면 그건 정당한 칭찬인 모양이었다.
“설마… 황태자가 이 세계 기준으로는 엄청 또라이인 건가? 그래서 귀족들이 황태자를 싫어했고?”
현대인인 자신의 기준에서는 사이다같이 자기 여자들을 아낀 황태자였지만 이곳의 에티켓을 기준으로 보니 제정신이 아닌 놈처럼 보였다.
로빈은 어쩌면 이런 부분이 봉구의 설정 오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관을 잘 짜놓고 거기에 억지로 19금 설정을 넣다 보니 이런 식으로 충돌이 일어났나? 아니, 그렇게 생각할 게 아닌가? 아… 씨, 복잡해. 봉구 이놈은 X신이야, 천재야?”
짜 맞춘 듯이 정교한 부분이 존재하는 세계관 속에 피어있는 엉뚱한 19금 설정에 로빈은 한숨만 거칠게 내쉬었다.
게다가 이런 문제는 생각보다 중요했다. 자신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풍습이나 문화였으니 말이다. 자신이 중점적으로 익혀야 하는 것도 이런 것이었고. 막말로 저런 사사로운 것으로 결투라도 벌어진다면 그야말로 자신만 바보 되는 거였다.
“어쨌든 제국법도 그렇고, 제국 은행이나 중앙 기사단, 영지전도 그렇고. 이 세계는 황실이 무너지면 개판 되겠군.”
중앙과는 멀리 떨어진 작은 영지에 살고 있지만, 만약 황실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후폭풍이 적지 않아 보였다. 로빈은 이런 부분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내가 어릴 때부터 설칠 수 있는 근거는 있네. 로크리아 대제가 여섯 살 때 즉위했다고? 이 정도면 아동 학대 아니냐? 이 말은 즉, 천재로 인정받으면 그만큼 어른으로 대우받을 순 있다는 건데. 아무리 망한 소설이지만 설정 참…….”
로빈은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책장을 넘겼다. 자신이 원하는 삶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왜 벌써부터 열공 따위를 해야 하는지 한탄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로빈이 서재에서 고민하는 그 시각.
영지의 수장 카인 그레이츠와 사위 윌리엄은 영지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영지의 사정이 점점 안 좋아지는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그래. 특별히 흉년인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
“재무관은 뭐라고 하던가요?”
“모르겠다는군. 당장은 문제가 없지만 이대로 몇 년이 더 지나면 조금 심각할 수도 있겠다는데…….”
“저희가 사치를 하는 것도 아니고 흉년도 아닌데, 사정이 안 좋아진다니 당황스러운 일이네요.”
“뭐… 어떻게 되지 않겠나? 그건 뭐 그렇고…….”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자 둘 다 표정이 누그러지면서 화사하게 변했다.
“역시 자네는 대단하군. 세릴이 임신을 했다네. 내가 사위 하나는 잘 봤어! 끌끌. 결혼한 지 5년도 안 되어서 두 아이를 모두 임신시키다니. 폴도 표현은 안 하지만 많이 기뻐하는 거 같더군.”
카인의 치하에 윌리엄은 쑥스러운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제가 잘할 수 있는 게 그런 것뿐이니까요. 영지에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닐세, 아니야. 자네 덕분에 마리도, 세릴도 저렇게 행복해하지 않나. 게다가 로빈도 저렇게 영민하니…….”
“그러게 말입니다. 저를 닮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아무래도 로빈은 아버님을 닮은 모양입니다. 지금도 책을 보고 있겠죠?”
카인은 로빈이 할아버지인 자신을 닮은 것 같다는 윌리엄의 말에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야. 이 시간에는 항상 서재에서 책을 본다는군. 그 나이에 철자를 뗀 것도 대단한데, 벌써 이런저런 어려운 책도 본다고 하니…….”
“로빈은 아마 좋은 영주가 될 겁니다.”
“그럴 거야. 좀 빠르지만 다섯 살이 넘으면 틈틈이 영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줄까 해. 로크리아 대제께서 여섯 살에 보위에 오르셨다고 했던가? 우리 로빈이 그보다 못할 게 뭔가? 다섯 살부터 간을 보면 적어도 열 살 때는 영지 일도 볼 수 있지 않겠나?”
“그럼요, 그럼요. 그럴 겁니다. 하하하. 그때가 되면 저랑 같이 낚시나 다니시죠. 제가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후후. 낚시, 좋지. 하하하.”
윌리엄과 죽이 맞은 카인은 벌써부터 그날이 기대되는지 허허,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변방 구석의 그레이츠 자작가.
이 가문은 로빈이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이름 없는 가문은 아니었다. 제국 천 년 동안 그 자리를 직계 혈통으로 지켜온 몇 안 되는 귀족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황실조차 300여 년 전에 방계 혈통으로 넘어간 제국에서 직계 혈통 그대로 이어온 가문은 제국 내 수많은 가문 중에서도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물론 가진 게 그 혈통뿐이란 것은 조금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대신 혈통과 전통성만큼은 어떤 가문에 비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 무시할 수 없는 가문임은 틀림없었다.
아마 로빈이 이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했겠지만, 제국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생각보다 큰 의미가 있었다.
그 예로 변방의 작은 자작가 주제에 항상 황궁 신년 행사가 있을 때마다 꾸준히 초대가 오고 있었는데, 이 초대장을 받은 가문 중에 백작가 이하의 가문은 그레이츠 자작가 외에는 없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초대를 영지 사정이 급박하다는 표면적인 이유와 황도까지 가기 귀찮다는 사실적인 이유로 번번이 카인이 고사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 그레이츠 자작가에 오랜 전통 아닌 전통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영주 지위를 이른 시기에 넘긴다는 것이었다.
원체 귀찮은 것을 싫어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사랑하는 가풍 때문이었는데, 사실 현재 가주로 있는 카인도 15세라는 이른 나이에 영주 지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니 만약 마리아나가 아들이었으면 이미 영주 직위를 넘기고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인은 한 여성만 지나치게 사랑해 두 번째 부인을 두지 않았고 그 사랑하는 부인이 딸 하나를 남기고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사위를 볼 때까지 영주 직위를 지켜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그렇게 마리아나가 성장해 사윗감을 데려왔을 때는 이제야 행복 시작이라고 즐거워했던 카인.
하지만 그 사위마저 왠지 그레이츠 가문에 맞춘 듯 딱 어울리는 남성이었고, 카인은 영주 직을 넘겨주기 애매한 사위를 대신해 아직까지 귀찮은 영주 직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레이츠 가문이 좀 유유자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책임감도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영주가 될 자질이 전혀 없는 윌리엄에게 영주 자리를 떠넘기고 영지를 나 몰라라 할 순 없었던 것이다.
카인 입장에서는 그런 윌리엄이 마음에 안 찰 만도 한데 마리아나가 깊이 사랑한다는 이유로 두말없이 윌리엄을 사위로 맞이했으니 그런 면만 봐도 그레이츠 가문의 성향이 어떤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어쨌든 그렇게 난감한 상황에 부닥친 카인에게 한 줄의 빛줄기가 내비치고 있었으니 그건 바로 집안의 귀염둥이로 사랑받는 로빈이었다.
이 범상치 않은 손자가 이른 나이에 말문이 트이더니 이제는 어린 나이에 서재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려오는 것이다. 게다가 가끔 대화할 때마다 그 영리함이 직접 느껴질 정도였으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정말 그레이츠 가문 사람답지 않은 부지런하고 영리한 모습에 카인은 가슴이 설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로빈이 성인이 될 때까지 이 거추장스러운 영주 자리를 지켜야 할 줄 알았는데(특히 윌리엄과 마리아나의 성격을 생각했을 때 부지런하고 영리한 손자는 기대하지도 않았음) 이렇게 효성이 지극한 손자일 줄이야.
그래서 카인은 결심했다. 무조건 최대한 이른 시간에 로빈에게 영주 직을 물려주고 자신도 조상들처럼 낚시하거나 텃밭에서 소일거리나 하면서 한가롭게 살겠다고 말이다.
이렇게 로빈은 자신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이른 나이에 영주 직위를 이어받을 상황에 처해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레이츠 가문은 그야말로 로빈의 성격에 딱 맞는 가문이었다.
구석에 꼭꼭 숨어 꿀 빠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로빈, 그리고 영주 직위를 빨리 넘겨주고 유유자적 살고 싶어 하는 그레이츠.
누가 봐도 로빈은 그레이츠 가문과 최고의 싱크로율을 자랑했다.
만약 로빈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할지, 아니면 귀찮은 영주 직위는 최대한 미루고 싶어 할지 의문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오늘도 로빈은 가족들의 기대를 가득 품고 부지런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물론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기함을 하고 놀라겠지만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