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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7화 (7/303)

7화

* * *

로빈이 다섯 살이 된 그 시기부터 그에게 새로운 일과가 추가되었다.

그건 무려 관저에 출근하는 일.

로빈은 할아버지 카인의 손을 잡고 관저 이곳저곳을 구경한 후 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솔직히 조금 이르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로빈도 내심 더 많은 정보를 원했기에 못 이기는 척 카인의 손을 잡았다. 카인의 복심을 정확히는 몰랐기에 그저 이쪽 세계에서도 조기 교육의 열망은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음… 한가하네. 그래도 영주인데 저래도 되는 건가? 영지가 작아서 그런가?”

하지만 막상 따라나섰지만 특별히 볼만한 것이 없었다. 작은 영지답게 할아버지인 카인이 하는 일은 별로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긴 평소에도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칼같이 퇴근하는 카인이었으니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저렇게 한가하니 더 좀이 쑤셔 빠르게 집으로 돌아오려고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이름: 카인 그레이츠

성향: 낙천. 은둔. 유유자적

타이틀: 없음

다만 자신의 눈에 비친 할아버지의 성향을 미루어볼 때 어쩌면 일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할아버지만이 아니었다. 이 영지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저렇게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향이었다.

이래서야 영지가 돌아가기는 할까? 저런 사람들만이 모여있으니 그건 그거대로 괜찮은 건가?

집무실에서 무려 책을 읽는 할아버지의 옆에 앉은 로빈은 한가한 나머지 이런저런 잡념으로 생각을 이어 나갔다.

특히 바로잡으라는 말도 안 되는 임무를 강제로 부여한 주제에 정작 사람의 능력치는 전혀 알 수 없는 이상한 능력을 준 초월적인 누군가를 씹는 것이 상념의 주를 이루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주인공인 황태자는 회귀하며 ‘꿰뚫어보는 눈’이라는 스킬 비슷한 능력을 갖추게 된다. 예를 들어.

이름: 로빈 그레이츠

능력: 무력 C 지력 C 정신력 B 마나 재능 B

이런 식으로 사람의 능력을 수치로 나타내주는 능력이었는데 이 능력으로 황태자는 많은 인재를 사전에 포섭해 세력을 늘리곤 했다.

이런 생각이 들자 확실히 황태자가 어쨌든 세계를 평화로 이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소설의 끝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뭐, 알아서 잘했겠지.

하지만 로빈의 이런 상념도 집무실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며 끊어지고 말았다.

“영주님, 이번 달 영지 자금 내용입니다.”

“아아, 켄트. 벌써 그렇게 됐나? 한번 보지.”

바로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풍채 좋은 남성이 카인에게 서류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재무관 켄트.

이 영지에서 오랫동안 재무관으로 일한 영지의 핵심 인물이고 항상 사람 좋은 미소로 영지민들과 영주의 신망이 깊은 인물이라고 들었는데, 로빈도 실제로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왠지 기분 좋은 느낌에 그럴 만한 사람이라고 느끼던 로빈은 그의 모습을 살피다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이름: 켄트 시우워

성향: 탐욕. 양두구육. 양면성

타이틀: 이중장부의 달인

이런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두구육이라니, 이거 정확히는 몰라도 인면수심이랑 비슷한 뜻이 아니던가? 게다가 탐욕과 양면성만 보더라도 충분히 성향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저 위용 찬 타이틀을 보라. 무려 이중장부의 달인.

저런 사람이 오랫동안 영지의 재무관이었다니. 영지 상태가 어떨지 안 봐도 뻔한 것이었다.

로빈은 영지에서 달인 타이틀을 가진 또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작은할아버지인 폴.

이름: 폴 닌텐

성향: 충직. 성실. 보좌

타이틀: 검술의 달인

그렇다. 영지의 기사단장이자 영지의 자랑이라는 폴이 바로 검술의 달인이었다.

그 말은 즉, 저 켄트가 이중장부 다루는 솜씨도 한 영지를 풍미할 정도로 정교하다는 뜻일 것이다.

맙소사, 영지 한가운데 저런 해충이 떡하니 박혀있었다니. 게다가 평소 사람들이 말하던 켄트의 평판을 생각할 때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켄트와 카인의 대화가 끝나고 그가 집무실 밖으로 나설 때까지 로빈은 혼란함에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게 로빈이 심란한 마음을 달래고 있을 때.

재무관 켄트의 비리를 적발하고 적법한 처벌을 내려라.

보상: ???

페널티: 영지민의 감소(15~30%)

기한: 6개월

이딴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맙소사… 미친 거 아냐?”

하다하다 이젠 퀘스트까지 나타났다. 정말 가지가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인지.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건 퀘스트의 내용이었다.

“퀘스트 인성, 실화냐? 보상은 물음표고 페널티는 저따위라고? 이딴 악성 퀘스트가……. 아니, 그보다 6개월 안에 영지민이 저렇게 많이 빠질 수가 있나? 그것도 한꺼번에?”

로빈은 게임이나 소설에서 퀘스트가 나올 때 그 퀘스트를 위험 방지형과 동기 부여형으로 구별했다.

좋은 보상으로 안 하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것이 동기 부여형이라면, 엄청난 페널티로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 위험 방지형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위험 방지형 퀘스트가 나와서 주인공이 어쩔 수 없이 그걸 수행할 때마다 고구마를 꾸역꾸역 삼키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이런 곳에서 저따위 악성 퀘스트를 받게 되다니.

솔직히 한 영지에서 영지민이 저만큼 빠져나가면 영지에 어떤 문제가 생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아무리 영지민들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저렇게나 빠져나가다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게다가 어이없게도 영지가 망할 수도 있는 엄청난 페널티에 비해서 중요도는 C였다. 모르긴 몰라도 그리 중요한 퀘스트는 아니라는 거겠지. 정말 기가 막힌 일이었다.

“하… 명치 X나 세게 때리고 싶다.”

열불이 끓어올랐지만 아무래도 저 퀘스트를 수행해야 할 거 같았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너무 꺼림칙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영지에 본격적인 위기가 찾아오기 전 영지부터 정비하는 건 그야말로 판타지의 정석. 저 문제 있는 인물을 어떤 식으로든 치울 필요가 있었다.

로빈의 수심과 고민은 깊어만 갔다.

오전 시간 관저 견학을 마친 로빈은 평소처럼 자신의 귀염둥이 동생 세이라를 만나러 갔다.

“빠!!”

이제 겨우겨우 거동이 가능한 세이라는 로빈을 발견하자마자 바둥바둥 달려와 로빈에게 폭 안겨들었다. 아이가 아이를 안은 꼴이라 로빈도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렸지만 소중한 동생을 놓칠 수 없어 안간힘을 다해 겨우 버티고 섰다.

작은어머니의 은은한 붉은색 머릿결과 에메랄드빛 푸른 눈, 그리고 아버지의 수려함을 모두 빼닮은 세이라는 천상의 귀여움을 간직한 채 하루하루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야말로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로빈의 보물이 아닐 수 없었다.

로빈은 세이라를 볼 때마다 이유 모를 뿌듯함과 가슴이 따듯해짐을 느꼈다.

자신이 태어날 때 식구들이 느꼈던 감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그래서 그렇게 자신을 귀여워했나?

요즘 로빈은 자신을 과하게 귀여워했던 가족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자신과 아버지 모두를 ‘빠’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것은 조금 마음에 안 들었다. 자신을 닮았는지(?) 제법 영특하여 이제 어느 정도 단어를 구별할 줄 알던데 왜 이런 건 발전이 없는 건지.

“우리 세이, 오늘은 뭐 하고 놀았어? 엄마하고 놀았어?”

“응. 응!”

머리를 쓰다듬는 로빈의 손길을 느끼며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웃는 세이라. 자신이 묻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고 고개를 끄덕이는 건지.

하지만 로빈은 그런 세이라의 모습이 기분 좋아 같이 마주 웃었다.

세이라는 젖먹이 시절에도 그랬지만 이상하게 로빈을 따르는 아이였는데 그 모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어떨 때는 부모인 윌리엄이나 세릴보다 로빈을 더 찾을 지경.

나이 차가 좀 많이 나면 몰라도 아이가 아이를 따르다니, 사실 조금 드문 일이긴 했다. 아마 로빈이 평범한 아이였다면 조금 곤란하기도 했으리라.

하지만 로빈은 평범한 그 나이 대의 아이가 아니었고 자신에게 칭얼대는 동생을 애정으로 보살피고 있었다. 오늘도 자신에게 칭얼대며 안기는 동생을 바라보며 환한 아빠 미소가 절로 배어 나왔으니까.

자신보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 게다가 아빠 미소까지 장착하고.

참 어색한 모습이지만 그 모습이 정겹기 그지없었다. 형제나 자매도 그렇지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남매는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로빈도 전생에서는 치고받고 싸우는 수많은 남매를 보곤 했었고.

아마 서로를 웬수라고 부르던가?

그만큼 소설에서 가끔 나오는 브라콤이나 시스콤 같은 존재는 환상 속의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로빈은 자신과 세이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자못 궁금해졌다.

당연히 현실 속의 남매처럼 서로에게 으르렁거리는 사이가 될는지, 아니면 여기가 소설 속이니 그야말로 어떤 소설 속의 남매처럼 서로 죽고 못 살 정도로 사이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자기 앞에 직면해 있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세이라와 한바탕 놀아주고 다시 홀로 남은 시간.

로빈은 자신 앞에 떨어진 퀘스트에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로빈이 알기로 영주는 모든 관리를 감찰할 권한이 있었다. 그러니 카인에게 켄트의 부정을 알릴 수만 있으면 충분히 감찰하고 심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자신이 아무리 영리한 아이로 알려져 있더라도 겨우 다섯 살에 불과한 어린아이였고 그런 아이가 증거도 없이 재무관의 부정을 주장한다고 해도 영주인 카인이 귀담아들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고 재무관을 의심한다면 영주가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밖에 되지 않으니 그게 차라리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십수 년간 영지를 관리해 온 재무관. 이제 태어난 지 5년밖에 안 된 핏덩이.

분별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두 사람의 의견이 다른 경우 누구를 더 신뢰할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정교한 솜씨로 이중장부를 다루는 전문가였다. 카인이 허수아비도 아닐 텐데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만 봐도 증거를 잡기가 쉽지 않을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로빈 자신이 장부를 들여다봐도 전혀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시대의 장부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장부를 정리한 경험이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다른 소설을 보면 경리로 일했었네, 이곳의 장부는 수준이 낮네, 복식 부기를 전혀 모르고 있는 곳이네… 이러면서 장부를 보고 척척 문제를 해결하지만, 자신은 그냥 몸을 움직여 돈을 벌었던 소설 독자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커. 후……. 이 일을 어쩌면 좋을지.”

하지만 이대로 그냥 포기하고 시간만 낭비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로빈은 어쨌든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우선 사람들에게 켄트에 대한 정보를 얻고 추후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퀘스트 창의 설명을 보면 켄트의 부정을 거의 모르고 있다고 하지만 거의 모른다는 뜻은 누군가는 안다는 의미였고, 그 누군가가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로빈은 자신 말고 누군가가 켄트의 부정을 알고 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 * *

하지만 예상대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로빈이 은근슬쩍 영주 저의 하인이나 하녀들에게 켄트에 관하여 물을 때면 다들 좋은 소리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켄트 님이요? 항상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는 분이죠.”

“영지 내에서 켄트 님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걸요?”

“지금까지 그분이 화를 내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거 같아요.”

“세금이 점점 늘어나는 건 사실이지만, 영지가 어려우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그게 켄트 님 잘못은 아니니까요.”

“영지가 어려울 땐 영지민이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야죠. 지금까지 항상 그렇게 위기를 극복해 나갔으니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믿습니다.”

“노후세는 조금 거북하지만… 그래도 뜻은 좋은데다가 영지에서 내라는 세금을 내지 않을 순 없으니…….”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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