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긴 침묵 끝에 드디어 풀이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단호하고 굳은 표정으로 로빈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제 책임이었군요. 도련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는 외지에서 온 재무관을 유심히 살펴보곤 했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오랫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다 보니 그만 타성에 젖어 방심하고 있었나 봅니다. 제가 단순히 기사단장이면 몰라도 치안대장까지 겸임하고 있는데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니…….”
로빈은 폴의 이야기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긴 영지의 대들보라는 폴이 켄트를 처음부터 믿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계속 유심히 지켜봤겠지. 그러다가 10년이 넘도록 큰 문제가 없는데다가 영지민들과도 친절하게 잘 지내니 안심하게 된 모양이었다.
게다가 폴은 단순히 치안대장이 아니라 기사단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가끔 습격해 오는 마수로부터 영지를 지키기도 해야 했고, 기사들도 훈련시켜야 하는 바쁜 몸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별문제 없는 재무관에게 계속 관심을 두기는 현실적으로 무리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일은 현실적으로 영주인 카인이 신경 써야 할 일이었는데 아무래도 사람 좋기만 한 외조부께서 사람 좋은 척하는 사기꾼 녀석을 너무 믿어버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방금 보인 폴의 태도가 더 인상적이었다. 어린 나이인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자신의 과중한 업무 때문에 현실적으로 신경 쓰기 힘든 일조차 자신의 잘못으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만약 자신이었으면 대번에 불만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사실 공적으로는 군주와 신하의 사이였지만 사적으로는 동무 같은 존재이며, 사석에서는 서로 평대를 하는 두 사람이었으니 그런 불만을 가지기에 충분한 관계였다.
자신과는 도량의 크기가 다른 게 상태창의 성향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 폴은 확실히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었다.
어쨌든 폴의 생각이 바뀐 듯하자 로빈은 재빠르게 달래기 시작했다. 자신은 폴을 비난하거나 그의 잘잘못을 따질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자신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두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고.
“사실 폴 경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조금 어려운 일이죠. 아마 누구라도 그럴 테니까요. 게다가 켄트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게 확정된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조금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저도 제 예상이 틀렸으면 좋겠어요. 그럼 그냥 소소한 해프닝으로 넘어갈 테니까요.”
로빈의 이야기에 폴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조금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어쨌든, 그럼 도련님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로빈은 천천히 자신이 원하는 바를 폴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선 로빈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영지의 재무 장부였다. 사실 폴에게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재무 장부를 수월하게 확보하기 위해서였는데 아무래도 관계자가 아닌 자신이 그 장부를 열람할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영악한 사기꾼은 생각보다 더욱 자신만만하고 영리한 녀석이었나 보다.
“음… 장부는 누구나 열람할 수 있습니다. 재정 집행의 투명함을 위해 켄트가 그렇게 지시해 놓았으니까요.”
장부 조작의 달인답게 켄트는 누구도 자신의 장부에서 문제를 발견하지 못할 거라고 자신하고 있었는지 장부를 당당하게 공개하고 있단다.
로빈은 이 이야기를 듣고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장부를 대놓고 공개하고 있다면 솔직히 장부를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자신이 문제를 발견하기는 불가능할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확인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로빈은 장부의 사본을 가지고 돌아온 폴과 함께 장부를 살펴보았다.
조목조목 사용 명세와 금액이 적힌 장부를 살펴보던 로빈은 역시 자신의 예상대로 전혀 문제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살펴보며 시름하던 로빈은 결국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장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분이 필요하겠네요. 혹시 재무관과 상관없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요?”
복잡한 숫자와는 친하지 않은지 인상을 쓰고 있던 폴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군요. 음……. 지금 당장은 생각나는 사람이 없군요.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이렇게 켄트에 대한 조사나 후속 조치는 훗날로 미뤄지게 되었다.
그렇게 훗날을 기약하고 집무실을 나서는 로빈의 뒷모습을 폴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카인의 어릴 적하고는 완전히 다르군. 좋은 영주님이 되시겠어. 허허.”
처음 로빈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할 때는 조금 뜨끔하기도 했다. 치안대장인 자신이 주군을 제외한 누군가를 완전히 믿고 있는 것은 로빈의 지적대로 자신의 잘못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부정을 저질렀든지 아니든지, 그건 둘째 문제였고 자신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당연했으니 말이다. 이 문제에서 자신의 업무가 과중하다는 것은 어떠한 핑계도 될 수 없었다.
물론 그도 켄트가 정말로 부정을 저질렀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저 로빈이 귀여워 어느 정도 호응하는 모습을 보였을 뿐이었으니까.
영지에서 퇴임한다는 시기가 다가올수록 영지 재정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만한 정황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봐온 켄트의 모습을 믿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런데도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로빈이 영지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만약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난다고 해도 이 일로 얻을 것이 많아 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매사에 조금 건성인 카인과 너무나 다른 모습이 사실 신기하기도 했다.
“그러니… 우선 도련님이 원하는 것을 빠르게 대령해 드려야겠군. 재미있겠어.”
카인은 서둘러 치안청으로 돌아가 한가로운 병사들에게 영지 내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수소문해 오라고 지시했다. 영지에는 켄트와 친분 있는 자들이 많으니 혹시 외부인 중에 그런 능력을 갖춘 이가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한편 폴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로빈은 심각했다. 그는 폴이 장부를 볼 만한 사람을 알아오기 전까지 마냥 기다리기보다 자기대로 뭐라도 알아볼 생각이었다.
우선 로빈이 결정한 일은 영지 주요 인물들의 성향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었다. 특히 재무부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영지의 중심인 기사들이 그 첫 번째 대상이었다.
작은 영지답게 그레이츠 자작령의 재무부에서 일하는 사람은 재무관인 켄트와 그를 보좌하는 보좌관 둘뿐이었다.
그리고 보좌관 둘은 켄트의 지시대로 서류를 작성하고 잡무를 보는 잡일꾼에 불과했다. 게다가 성향 창을 살펴보아도 특별히 거짓말을 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쫄보(?)라고 해야 할까? 거짓말을 하면 금방 얼굴에 드러날 거 같은 전형적인 그레이츠 영지민 같은 사람들이었다.
로빈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사람에게 슬쩍 다가가 이것저것 물어보았는데 자신의 의문을 어린아이다운 호기심으로 생각했는지 웃으며 가감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아마 어린아이의 귀여움에 대한 호감과 차기 영주감이라는 로빈에게 조금 점수를 따고 싶은 마음마저 포함된 듯한 과한 친절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빈이 둘의 이야기에서 얻게 된 것은 이 둘도 켄트의 인품에 속은 자들이며 둘 다 영지 재정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지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래도 이 둘 다 로빈이 확신하고 있는 켄트의 비리에 연루될 가능성은 없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기사단.
기사단은 영지 무력의 꽃이며 끝이었다.
그런 만큼 불순 종자(?)가 기사단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에 로빈은 눈에 불을 켜고 기사들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했다. 만약 켄트처럼 자신의 욕심을 숨기고 나쁜 마음을 먹는 자가 있다면 여지없이 적발할 생각으로 말이다.
하지만 기사들은 너무나도 깨끗했다.
“폴 경이… 완전 자기 같은 애들만 기사로 뽑아놨군.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하나같이 충성이나 책임감을 기본으로 탑재한 기사들을 바라보자니 솔직히 로빈도 가슴이 뿌듯할 정도였다.
워낙 실전이 빈번하고 훈련조차 철저하기 때문에 수는 적지만 전력만은 수위권이라고 폴이 자부하더니 그 말이 정확한 것 같았다. 기량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정신 무장만은 철저했으니 말이다.
정신 무장이 철저하니 훈련도 충실히 받았을 테고 실전을 거치면서 실력도 늘었음은 자명하지 않겠는가.
로빈은 든든한 기사들의 모습에 켄트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가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흠… 나쁜 짓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데…….”
나쁜 짓을 하려면 정말 부지런해야 한다. 누구도 모르게 은밀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재무부에서 상주해야 하는 재무관 켄트는 행동의 제약이 심한 편이니 모든 일을 홀로 처리했을 것 같지는 않았고 누군가는 동조했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철저한 켄트가 자신의 모든 걸 공유한 사람이 있을 거 같진 않지만 적어도 몰래 지시한 일들을 처리할 만한 수족은 있을 만도 한데.
“그렇다면 남은 건 아무래도 치안대인가.”
영지의 기사단을 군인이라고 한다면 치안대는 경찰과 같은 자들이었다. 물론 완전히 같다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굳이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숫자가 적은 기사단에 비해 치안대는 그래도 수가 제법 된다니 그중에 몇은 켄트에게 포섭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정신 무장이 확실한 기사단보다는 치안대가 포섭하기 쉬웠으리라.
“음…….”
이름: 로어
성향: 탐욕. 허세
타이틀: 없음
이름: 타레
성향: 이기적. 출세 지향적
타이틀: 없음
이름: 히두라스
성향: 도벽. 양아치
타이틀: 없음
로빈은 치안대에서 조금 특별한 세 명을 찾아낼 수 있었다.
성향 창은 많은 것을 알려주지만 모든 것을 알려주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저 성향만으로 그들이 켄트의 수족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평범한 사람들보다 그럴 가능성이 큰 것만은 사실이었다.
솔직히 다른 자들은 대부분 평범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저들만 저렇게 두드러지는(?) 악당 꿈나무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니 로빈으로서는 저들을 의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런 증거도, 근거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빈은 그저 저들의 이름과 모습을 머릿속에 새겨놓고는 영주 저로 향했다. 그런 로빈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는 한숨이 튀어나왔다.
“하… 이건 뭐…….”
문득 다섯 살밖에 안 된 자신이 뭐라도 해보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어이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러나 싶기도 했다. 자신이 원하는 인생은 왠지 이런 게 아닌 거 같은데…….
“무슨 일이십니까, 도련님?”
로빈이 한숨을 쉬자 호위로 따라나선 루이 경이 진중한 태도로 정중하게 물었다.
이름: 루이 닌텐
성향: 고지식. 충절. 성실
타이틀: 체술의 수제
여러 가지 업무로 바쁜 폴이 로빈에게 붙여준 호위 기사 루이는 무려 폴의 장남이었다. 성향도 왠지 폴과 빼닮은 이 남자는 폴처럼 진중한 남자였는데, 사실 사적으로는 로빈의 작은외삼촌이라는 뜻이었다.
성격답게 로빈이 온종일 나다닐 때도 옆에서 보조하기만 했는데 그가 한숨을 몰아쉬자 무슨 문제가 있나 물어 본 것이다.
“아니에요, 루이 경. 그냥 세상이 역시 만만하지 않은 거 같아서요.”
“…그렇군요.”
다섯 살 아이의 기가 막힌 세상 타령에도 루이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지는 법은 없었다. 다만 대답에 조금 뜸을 들였을 뿐이었다.
루이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터덜터덜 돌아가는 로빈을 뒤따르고 있었다.
그렇게 로빈이 혼자서 관저와 영지를 탐방하고 있을 때 영주 저에서도 사뭇 진지한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로빈이 고민했던 영지의 재정 문제에 대한 회의였다.
“음… 정말 이대로라면 곤란하겠군.”
“그렇군요. 겨울이 오면 영지민들의 식량 사정도 문제가 되겠고, 아니 그전에 마수들이 식량을 찾아 내려오는 것도 문제군요.”
“이러다가 만약 흉년이라도 닥친다면…….”
영주인 카인과 그 사위 윌리엄, 그리고 평소에는 느긋하던 마리아나까지 한마디 보태자 모인 가족들 모두 표정이 어두워졌다.
잠시 그렇게 불안한 소리가 한동안 이어지자 카인이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족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비밀 창고를 열어야겠어.”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