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상한 소설 속 로빈-10화 (10/303)

10화

“비밀 창고요?”

“아… 그 선대부터 내려오는 애장품 창고 말씀이시군요. 가문의 직계만 들어갈 수 있다는.”

“언니, 그런 창고가 있었어요?”

그레이츠 가문의 직계가 아니다 보니 창고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세릴과 윌리엄은 그런 창고가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뭐… 창고라고 해도 사실 별것 없지. 그래도 찾아보면 값이 나가는 물건이 좀 있을 거야. 아무래도 골동품은 제법 많으니까. 가문의 역사가 그래도 제법 되니까.”

“과연…….”

카인의 이야기에 윌리엄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긴 했다. 제국의 역사와 명맥을 같이한 가문이었으니까.

1대 자작이 가지고 있던 손수건이라고 해도 지금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골동품일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런 물건이 아직까지 제대로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은 적었지만.

“그래도 너무 기대하지는 말게. 아무래도 금전적 가치보다는 개인적인 추억이 깃든 물건들이 대부분이거든. 어쨌든 조만간 한번 들어가서 확인을 해봐야겠어. 영지가 위태로우니 조상님들도 이해하실 거다.”

근엄한 어조로 말하는 카인의 이야기를 끝으로 가족들은 잠시 각자 자신들만의 생각에 빠져들어 갔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로빈이 안 보이네요. 요 녀석은 어디서, 뭘 하는 거죠?”

하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영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하는 것도 잠시 가문의 창고를 열겠다는 것으로 마무리된 이야기는 바로 요즘 바쁘게 나다니는 로빈에 대한 것으로 넘어갔다. 심각한 이야기는 길게 끌고 싶지 않다는 듯한 상쾌한 화제 전환이었다.

“허허. 그 녀석, 요즘 영지에 관심이 많은지 여기저기 쏘다닌다고 하는구나. 루이가 온종일 그 녀석만 따라다닌다고 해.”

“헤… 아버님이 관저에 데리고 간 후부터 그렇단 거죠?”

“그러게나 말이다. 그 녀석, 어쩌면 천생 영주감일지도 모르겠어.”

“오… 그건 정말 반가운 말이네요.”

“그러고 보면 로빈은 참 의젓해요. 처음에 세이가 태어났을 때는 조금 걱정했거든요. 아무래도 로빈보다는 갓 태어난 세이에게 더 관심을 기울여야 했으니까요.”

“하긴, 나도 그래.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오히려 내가 서운하더라고.”

그렇게 로빈에 대한 이야기가 한참 이어지고.

“속상해요. 세이가 저보다 로빈을 더 따르는 거 같아서요. 저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요?”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냥 그 아이들이 사이가 좋은 거지.”

“세릴뿐만 아니라 저도 마찬가지군요. 이거, 아빠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하긴, 그러고 보면 저도 그런 거 같아요. 저를 따르지 않는 건 아닌데 로빈과 비교하기에는 좀…….”

“가끔 그렇게 남매간에 우애가 좋은 아이들이 있긴 하지.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커서 꼭…….”

“뭐, 불가능은 아닌데…….”

“나쁘지 않은데요. 음…….”

이렇게 한참이나 아이들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이어졌다. 카인이 처음에 가족들을 모은 이유는 이게 아니었는데 결국 화기애애한 티타임이 이어진 셈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이 시간이 카인의 업무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 그 누구도 의아해하지 않고 있었다.

* * *

로빈이 폴을 만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드디어 폴에게 응답이 왔다.

무려 수도, 그것도 황실에서 재무관 보좌로 일하던 인재가 이곳 그레이츠 영지를 요양 목적으로 방문했다는 소식이었다.

재무관 보좌라면 차기 재무관 재목으로 상당히 유능하고 전도유망한 사람일 텐데 무슨 이유로 이런 시골구석을 방문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로빈의 입장에서는 큰 호재였다.

로빈은 어떻게든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루이와 함께 그가 묶고 있다는 거처로 서둘러 찾아갔다.

“네? 영지의 도련님이요? 그런 분이 왜 저를…….”

이름: 지온 루페시

성향: 섬세함. 중용. 의리

타이틀: 재정 관리의 대가

피곤하고 창백한 얼굴의 30대의 남성. 지온을 살펴본 로빈은 속으로 쾌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딱 봐도 그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느낌이 확 오는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대가’ 타이틀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알던 달인 타이틀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역시 큰물에서 놀던 사람이란 걸까?

하지만 요양을 왔다는 말이 사실인지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도 로빈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일도 별로 없는 그레이츠 영지다. 저런 인재가 이곳에서 일하는 건 전혀 무리가 가는 게 아닐 것이다.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기 합리화마저 미친 상태였다.

로빈은 지온에게 이 영지의 좋은 점을 먼저 피력했다.

“확실히 생각보다 더 괜찮은 곳이더군요. 한가하기도 하고 넉넉하진 않은 거 같은데 이상하게 인심도 좋은 거 같고. 이런 곳에서 산다면 평안하긴 하겠어요. 물론 그런 이유로 여길 찾은 건 아니지만…….”

지온도 다행히 이곳이 마음에 들긴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로빈은 어느 정도 말이 돌고 조금 친해졌다고 느끼자마자 은근슬쩍 챙겨온 영지의 재무 장부의 사본을 지온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아… 그, 사실 제가 좀 자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헤헤, 죄송하지만 혹시 이 장부에 이상한 점은 없나요?”

“아아, 장부 점검이군요. 흠……. 뭐, 좋습니다. 그렇게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니까요. 마침 조금 심심하기도 했고.”

딱히 까칠한 사람은 아닌지 지온은 선선히 로빈이 내민 장부를 살펴보았다. 왠지 어린아이가 들고 온 장부가 어떤 녀석인지 조금 궁금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지온은 고개를 저으며 로빈에게 장부를 내밀었다.

“음… 장부 자체를 봤을 때는 특별히 문제를 발견하긴 어렵군요.”

“아, 그런가요?”

역시 켄트의 이중장부는 만만한 놈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장부 자체는 문제가 없고 자금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무슨 수작이 들어간 게 아닐까?

로빈은 눈앞이 더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지나치게 실망하는 듯 보이자 그 모습이 조금 귀여웠는지 지온은 작게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실망하는 모습을 보니, 무슨 비리가 있을 거로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사실 장부가 정상적으로 보인다고 비리가 아닌 건 아닙니다. 현실적인 조사를 추가한다면 정확한 사실을 파악할 수 있을 테고요.”

“오… 그런가요?”

그 이야기는 마치 자신이 작정하고 조사하면 충분히 찾을 수 있다는 말 같지 않은가.

로빈의 얼굴이 희망으로 조금 밝아졌다.

그런 로빈의 모습에 작게 쓴웃음을 지은 지온은 고개를 저으며 로빈의 희망을 꺾어버렸다.

“하지만 제가 지금 그런 일을 할 여유가 없군요. 이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온이 거절하는 중, 방문이 열리면서 한 소녀가 힘든 발걸음을 옮기며 지온에게 다가왔다.

“아빠… 누구?”

나이는 로빈의 또래쯤 되었을까? 고운 은빛으로 물든 머리에 눈초리가 살짝 내려와 온순해 보이는 소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지온을 불렀다.

그녀가 지온을 부르는 호칭을 보니 지온의 딸이 분명해 보였는데 왠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이 많이 아파 보였다.

설마 요양 중이라는 것이 본인이 아니고 딸의 이야기였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로빈처럼 어린아이가 내민 장부를 별다른 불만 없이 검토해 준 지온의 마음이 조금 이해가 갔다. 아마 같은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자상함이었을 것이다.

“안녕~”

로빈은 딸과 아빠의 모습을 보자마자 이번 타깃(?)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저 여자아이가 키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귀엽다는 사실을 이용해 평소보다 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일종의 미남계? 자신의 귀여움을 120% 증가시킨 필살 미소였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영지와 생존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게 무엇일까?

그런 로빈의 노력이 무의미하진 않았는지 귀여운 소녀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빈도 같이 소녀를 바라보고 눈을 마주친 바로 그때.

실비아는 세상을 이롭게 할 가능성 한 가지를 품고 있다.

병들어 죽어가는 실비아를 살려라.

보상: ???

페널티: 절망

기한: 실비아의 사망

첫 번째 퀘스트도 전혀 해결하지 못했는데 무려 다른 퀘스트가 나오고 말았다.

로빈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퀘스트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한 후에는 예전 퀘스트를 욕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감히 그 정도 퀘스트를 인성질이라고 비하했다니. 정말 자신은 세상을 모르는 녀석이었다.

자, 이 퀘스트를 보라.

보상도 페널티도 내용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단어들의 향연이었다.

세상을 이롭게 할 가능성? 보상은 ???, 게다가 페널티는 절망이다.

도대체 이게 뭔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게다가 중요도는 무려 S. 중요도 C급 퀘스트의 페널티가 영지를 뒤흔들 정도인데 과연 S급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일까? 제국, 어쩌면 세계? 모르긴 몰라도 보통이 아님은 틀림없었다.

게다가 C급 퀘스트 다음으로 S급 퀘스트를 던지다니.

만약 이 퀘스트를 만든 자에게 인성이란 게 존재한다면 그건 아마 인간쓰레기나 핵폐기물급 양아치가 분명했다.

수행하기는 개빡빡한데, 뭔가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찜찜함이 로빈의 뇌리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렇게 찰나의 시간에 수많은 생각을 거친 로빈은 애써 침착하게 자신을 바라보며 얼굴을 붉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제 딸 실비아입니다. 이곳에 온 것은 실비아와 요양하기 위해 온 것이고요. 그러니 제가 그 장부의 허실을 파악할 시간은 없을 거 같군요.”

자신의 딸이 아파서 온 요양에서 남의 집(?) 장부를 살필 여유가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

로빈도 이 부분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퀘스트가 뜨지 않았으면 그냥 알겠다고 하고 실비아의 쾌유를 바란 후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딴 퀘스트를 받은 이상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사라졌다.

게다가 저 여자아이.

이름: 실비아 루페시

성향: ???

타이틀: 연금 꿈나무. 신의 경지에 달한 이해력

딱 봐도 엄청난 거물이다.

타이틀의 경중은 사실 아직 로빈도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다만 그 어감을 느낄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로빈이 본 사람 중에 가장 특별한 타이틀을 달고 있던 사람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 윌리엄이었다.

이름: 윌리엄 그레이츠

성향: 낙천적. 호인. 가정적

타이틀: 불세출의 예술가

무려 불세출의 예술가의 타이틀을 달고 계셨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 실비아라는 귀여운 아이는 윌리엄 이상으로 보였다.

성향 창의 물음표는 간혹 어린아이를 볼 때면 보이던 장면이었다. 아무래도 성격이나 성향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뜻인 듯했다. 아직 어린 세이라도 성향 창이 비어있던 걸 보면 분명했다.

그리고 나이가 어리다 보니 타이틀의 방향도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아직 기량이 만개한 것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저 아이가 연금술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면 과연 저 타이틀이 어떻게 변할까?

신의 연금술사? 신의 경지에 달한 연금술? 연금의 신? 아마 이런 비슷한 타이틀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저 타이틀을 보니 살벌한 퀘스트 내용도 약간은 이해가 갔다. 저 아이가 살게 되면 이룩할 무수한 업적을 예견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솔직히 이곳에 온 게 조금 후회가 되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니까.

단순히 중요도 C급 퀘스트를 해결하는 것도 벅찬데 S급이라니,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모르면 몰라도 알았는데 저 아이를 그냥 내버려둘 순 없었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좋은 재무관과 영지의 앞날을 책임져줄지도 모르는 인재를 모두 얻을 수 있지 않은가?

작은 영지라고 인재가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살기 위해선 더 많이 필요했다.

어찌 되었든 오늘 이 방문이 로빈의 앞날에 큰 파문을 남길지도 모르는 중요한 만남이라는 건 분명했다.

* * *

첫날의 충격적인 만남 이후로도 로빈은 꾸준히 지온을 방문해 두 부녀와 친분을 쌓았다.

아무리 요양 차 방문한 것이라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자리를 잡은 지온과 실비아는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고, 안면을 튼 로빈이 자주 방문하는 것을 은근히 반겼다.

특히 지온은 무언가를 찾아 자주 자리를 비웠는데 그 시간에 로빈이 실비아와 놀아주는 것에 크게 감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픈 딸아이를 홀로 두고 자리를 비우는 것이 많이 신경 쓰이긴 한 모양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