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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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에니 마을로 향하는 마차 안.
로빈은 허탈하고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마차 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로빈의 호위 격으로 동행한 루이는 그 맞은편에 앉아 평소처럼 무표정하게 주위를 살피고 있었고.
솔직히 로빈은 지금 많이 허탈했다. 자신이 이리저리 알아보고 헛발질하는 동안 정작 중요한 정보는 자신의 어머니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어머니였는데 다양한 영지 처녀들, 주부들과 이어져 있는 어머니의 인적 네트워크에 영지 곳곳의 정보가 전해지고 있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노후세라는 이상한 세금에 대한 불만이 전해지지 않은 건 좀 아이러니하지만.
어쩌면 자신이 너무 자만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른들이 똑똑하다고 우쭈쭈하기만 하니 자신이 정말 천재라도 된 듯 착각한 것은 아닐까?
자신은 그저 판타지 소설을 좀 많이 읽은 그냥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거늘. 이번 일도 애초에 어른들에게 먼저 조언을 구했으면 일이 조금 쉬워지지 않았을까?
어쨌든 어른들은 이곳에서 적어도 수십 년은 살아온 베테랑(?)들이 아닌가. 정작 조언을 구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던 할아버지도 다른 부분에서는 좋은 조언을 해줄 수도 있고.
“나는 무식해. 게다가 피라미라고. 소설 좀 읽고 이쪽 세계에 들어왔다고 뭐라도 된 듯 착각하지 마.”
그렇게 한참 자책과 주제 파악을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솔직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물이라도 된 양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는데, 아마 세계에 영향을 미칠 거라 짐작되는 S급 퀘스트를 받으면서 그랬던 거 같았다. S급 퀘스트라고 하니 뭔가 이 세계에서 중요한 주인공 같은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자신은 애초에 그런 사람이 못 되거늘.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자 비로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제대로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주 성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런 감흥도 잠시, 인적 드문 황량한 풍경이 계속 이어지자 이내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보에니 마을은 먼가요?”
“마차로 네 시간 정도는 걸릴 겁니다. 북쪽 관문 근처에 위치한 마을이니까요. 그나마 영주 성이 영지 북쪽에 치우쳐 있어서 그 정도고 만약 남쪽 끝 마을로 가려면 하루도 넘게 걸립니다.”
“음…….”
이곳 그레이츠 자작령은 인구가 대략 5만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작은 영지인데 땅은 넓고, 그래서 사람들이 드문드문 흩어져서 살고 있었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영주 성이나 그 근처를 제외하면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작은 마을이 분포되어 있단다.
한창 영지가 번성했을 때는 수십만의 영지민들이 살기도 했다는데 영지의 넓이가 이 정도니 충분히 그 인구를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부 끝 마을처럼 영지 성에서 너무 먼 곳에 마을이 있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상관없지만 영지 성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곳에 살아야 안전한 시기가 조만간 도래하니 말이다.
되도록이면 이른 시일 안에 영지민들을 영주 성 근처로 이주시켜야 할 텐데.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황량하고 인적 드문 대지가 계속 펼쳐지자 로빈의 시름도 같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영지가 번성했을 때 닦아놓았는지 길은 번듯하게 잘 뻗어있어 이동에 무리가 없어 다행이었다.
그렇게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보에니 마을 근처에 이르자 멀리 육안으로 북쪽 관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지를 지키는 거대한 관문.
아마 저 관문이 없었으면 그레이츠 영지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 관문이 중요한 것이고. 지금도 저 관문에는 제법 많은 기사가 유사시를 대비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관문을 방문하시겠습니까?”
“아니요. 당장 급한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거 같아요.”
로빈이라고 관문에 대한 호기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실비아의 퀘스트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로빈은 당장 급한 일부터 처리하자는 생각에 미련을 접고 바로 보에니 마을로 향했다.
보에니 마을은 북쪽 관문 근처에 위치한 제법 큰 마을이었다.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관문 근처에서 약초를 캐거나 관문에서 잡아온 마수들을 처리하는 등 수입원 자체는 확실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영지 차원에서도 이 마을은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채집한 여러 약초가 영지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관문을 지키는 치안대나 기사들도 종종 이곳으로 내려와 마을의 상태를 살펴보곤 했다.
“여기군요.”
얼마 전 몸이 굳는 병에 걸렸다는 아이가 사는 곳은 마을에서도 북쪽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같은 마을이라도 어느 정도의 빈부 격차는 존재했고, 아마 가장 위험한 이곳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분명했다.
그런 외진 곳에 영주의 깃발이 달린 마차가 도착했으니 사람들의 눈이 모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뉘…신지?”
“아, 로빈 그레이츠라고 해요. 이 집의 주인이신가요?”
노파가 잔뜩 굳은 얼굴로 로빈과 루이를 맞이했다.
그리고 로빈이 자신을 소개하자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뒤늦게 로빈의 정체를 눈치챘는지 놀라서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도련님이시군요. 어찌 이런 누추한 곳에…….”
로빈은 웃으며 놀란 노파를 진정시켰다.
“아, 무슨 문제가 있어서 온 건 아니에요. 그냥 개인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실례지만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아. 예, 물론입죠. 누추하긴 하지만 어서 들어오세요.”
노파의 집은 예상대로 허름한 곳이었다. 그리고 여러 가재도구를 살펴봤을 때 노파가 아이 하나와 단둘이 사는 듯했다.
로빈은 천천히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만약 자신에게 도움을 준다면 상당한 보상을 해주겠노라는 말을 덧붙였다.
로빈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은 노파는 보상 따위는 필요 없다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빠짐없이 로빈에게 전해주었다.
노파의 손자 듀발은 이 마을 북쪽 거리에서 골목대장 격인 아이였다. 그리고 항상 무리 지어 놀기를 즐기던 듀발과 친구들의 놀이터는 바로 마을 밖에서 관문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언덕이란다.
평소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마수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기에는 제법 위험한 곳이라 항상 어른들이 주의를 줬음에도 아이들에게는 그런 경고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한다.
항상 몰래 그곳에서 놀았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것도 그들의 방심에 일조했을 것이다.
문제의 그날도 아이들은 신나게 언덕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놀고 있는 언덕을 병에 걸려 쇠약해진 소형 마수가 덮치게 된 것이다.
비록 작지만, 아이들을 찢어발기기에 충분한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소형 마수.
아이들은 마수를 발견하자마자 혼비백산 마을로 도망치기에 이르렀다.
웬일인지 마수의 동작은 굼떴고 이대로 도망친다면 무사히 목숨을 건질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가장 나이가 어린 여자아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그리고 마수가 여자아이를 덮치려는 순간 몸으로 마수를 막은 것이 바로 듀발이었다.
이어 병이 끝자락까지 도달했는지 기력이 거의 없던 마수와 어린아이 듀발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졌고, 듀발은 마수에게 몇 번이나 물리면서도 마수가 여자아이를 덮치지 못하게 온몸으로 버텼다.
이 대치전은 소란을 눈치채고 달려온 마을 자경단이 그 마수의 숨통을 끊을 때까지 계속 그렇게 이어졌다고 한다.
운 좋게도 마수가 지나치게 약해진 상태라 여자아이를 구하고 목숨까지 건지며 해피엔딩으로 끝나는가 싶었던 듀발의 이야기는 다음 날부터 듀발이 시름시름 앓으면서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관문 근처에서만 평생을 살아왔던 듀발의 할머니는 자신의 손자가 앓게 된 이유가 말로만 전해 듣던 마수병 때문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경로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대대로 알려진 처방대로 약을 지어 먹였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그 약이 어떤…….”
“아, 네. 그러니까 검은 심장 한 개와 검은 심장 열 개 무게의 캔링, 그리고 검은 심장 다섯 개 무게의 무라고 뿌리를 같이 다려서…….”
마나 프로즌을 지연시킬 수 있다는 캔링과 피를 맑게 해준다는 무라고 뿌리.
대충 알 만한 약재의 이름이 이어졌지만 로빈도 검은 심장이 무엇인지는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검은 심장이요? 그건 뭔가요?”
“네? 아… 그 마수 큰 놈을 잡으면 종종 찾을 수 있는 검은 구슬 같은 건데…….”
맙소사, 마수 핵. 마나 프로즌을 치료하는 가장 중요한 재료는 마수 핵이었던 것이다.
마나 제어 물약의 주원료인 마수 핵이 마나가 굳어버리는 마나 프로즌에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니.
로빈이 당황하는 사이에도 노파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 검은 심장이 요즘에는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 저도 조상들이 고이 모셔놓은 검은 심장을 쓴 거라서요.”
검은 심장을 구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 노파에게 로빈은 그저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하하. 그렇군요. 저, 그런데… 그래서 그 약을 먹고 듀발은 완쾌되었나요?”
로빈의 질문에 노파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원래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2~4병 정도는 먹어야 완전히 다 낫는답니다. 가난한 살림에 용병을 고용할 수도 없고, 검은 심장을 더 구할 수가 없으니……. 듀발은 그저 목숨을 구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요.”
“그렇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제가 보답을 드리고 싶은데요.”
“아이고,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겨울마다 영주님이 보내주시는 식량으로 겨울을 나는데 제가 무슨 보상을 바라면 천벌 받습니다요.”
사람 좋은 영주인 카인은 겨울마다 영지 내 가난한 영지민을 대상으로 어느 정도 식량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이 노파도 그 대상 중 하나라고 한다.
어쩐지 처음 마주칠 때부터 반응이 심상치 않더라니.
결국 로빈은 더 이상 보답에 대하여 언급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베푼 선정이 이런 식으로라도 보답받았다는 사실과 영주에게 감사하며 사는 노파를 보니 로빈도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치료약의 재료와 제조 방법, 깔끔하게 2~4병 정도는 먹어야 완쾌된다는 정보까지 확보한 로빈은 노파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그녀의 집을 나섰다.
그리고 로빈이 마차에 타려는 그때 한 남자아이가 다리를 절며 노파의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노파의 손자 듀발인 거 같았다.
“아무래도 저 아이인 모양이군요. 목숨은 구했지만, 다리를 절게 된 모양입니다.”
“그렇네요. 흠…….”
“용기 있는 아이인데 아깝게 되었습니다.”
천생 기사인 루이는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 동네 아이들을 구하려고 했던 듀발의 용기에 큰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원래 자신의 의견을 쉽게 말하는 사람이 아닌데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걸 보니 말이다.
하지만 로빈이 보기에 듀발의 행동은 지나친 객기였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남을 구한다라.
과연 자신도 그럴 수 있을까?
만약 세이라가 위험에 처해있다면…….
로빈은 자신도 어떻게 행동할지 확신할 수 없어 고개를 저으며 마차에 탑승해 빠르게 영주 성으로 향했다.
영주 성에 도착한 로빈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바로 할아버지를 졸라 구슬을 여러 개 가져온 후 하녀들을 시켜 제조법대로 물약을 제조한 것이다.
다행히 조금 엉뚱한 요구임에도 하녀들은 아무런 의문 없이 자신의 지시대로 빠르게 움직였다. 물론 제법 가격이 나가는 캔링과 무라고 뿌리는 어머니가 지원해 주셨다.
로빈은 영주 일가라지만 그렇게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 로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분위기로 흔쾌히 지원해 준 어머니에게도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3일이 지나고 완성된 물약을 든 로빈이 보무도 당당하게 지온이 묵고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제 겨우 한고비 넘길 수 있겠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말이다.
“이게… 치료약이라고요?”
“네. 어서 실비아에게 먹이세요.”
지온은 흔들리는 눈으로 로빈이 내민 조그마한 약병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헐레벌떡 약병을 들고 실비아의 방으로 달려갔다.
로빈이 치료약을 찾아 동분서주하는 사이 실비아의 병세는 생각보다 많이 악화하였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허약 체질이라 캔링 정도로는 오래 버티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