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상한 소설 속 로빈-14화 (14/303)

14화

지온이 약의 진위 따위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서둘러 실비아에게 약부터 먹이려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침대에 누워서 몸을 떨고 있는 실비아의 모습을 보니 지온이 이성을 잃을 만도 하다 싶었다.

정말 간발의 차이였다.

약을 겨우 삼킨 실비아는 잠시 후 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열이 심하게 오르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한참을 끙끙거렸는데 로빈도 이런 증상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당황하며 슬쩍 지온을 바라보았다.

지온도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며 실비아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열이 내린 실비아는 한결 편한 표정으로 몸까지 뒤척이며 새근새근 안정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마 병으로 지친 몸을 회복하기 위해 깊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때, 때맞추어 퀘스트 창이 실비아가 살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완료!]

실비아는 세상을 이롭게 할 가능성 한 가지를 품고 있다.

병들어 죽어가는 실비아를 살려라.

보상: 검은 곰 용병단

페널티: 절망

기한: 실비아의 사망

이제 정말 한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다만 퀘스트 창에 보상으로 기록된 저 용병단은 대체 뭔가 싶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였으니 서둘러 지온에게 약을 치기 시작했다.

“음… 우선 고비는 넘긴 거 같네요. 하지만 완전히 거동하기 위해서는 몇 병의 약을 더 먹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가능하면 몇 년은 캔링을 장복해야 한다고 하던데…….”

“그런가요? 그 약은 비싼 거겠죠?”

“아뇨. 뭐, 그렇게 비싸지 않아요. 그러니 약값은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캔링을 장복하기 위해서는 지온 님도 이곳에서 자리 잡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다른 영지에서는 캔링을 구하기가 힘들잖아요. 캔링을 사러 이 외진 영지를 계속 방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렇겠네요. 흠…….”

딸의 무사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지온은 로빈이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내자 조금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수도에서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모르겠지만 지온의 젊은 나이를 생각했을 때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을 가능성이 컸으니 아마 상당한 가격의 캔링을 몇 년이나 장복하는 것은 그로서도 조금 무리가 되는 일일 것이다.

물론 능력 자체는 출중한 인물이니 다른 큰 영지로 나간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많겠지만, 로빈의 말대로 그곳에서 이곳으로 캔링을 구하러 오는 것도 일이었다.

딸의 안위가 달린 일인 만큼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을 써야 할 텐데 그런 사람이 흔하지도 않거니와, 만약 사고라도 터진다면…….

그러니 어떻게든 딸이 다 나을 때까지는 이곳에서 지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 틈을 로빈이 파고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영주 성에서 일하시는 건 어떤가요? 사실 지금 일하고 있는 재무관이 이제 곧 은퇴한다고 하거든요. 원래 하시던 일도 그것이었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오, 그런 일이……. 정말 감사합니다.”

마치 짜 맞춘 듯이 재무관 자리가 빈다는 이야기에 지온은 짐짓 감격한 얼굴로 로빈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긴 자신의 딸아이를 구할 약을 직접 구해다주고 딸을 두고 다른 곳에 일자리를 구하기도 난감한 자신에게 최적의 일자리까지 소개해 주었으니 로빈의 어린 나이와는 상관없이 정말 큰 은인이었다.

그렇게 차기 재무관으로 지온을 확보한 로빈은 처음에 자신이 계획했던 현 재무관 켄트의 비리를 파헤칠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저에게 여유가 생겼고, 이곳에서 뿌리내릴 생각이니 본격적으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장부가 정상적이라도 여러 가지 경로로 세금을 착복할 수 있는 위치가 재무관이니까요.”

켄트와는 어떠한 접점도 없고 전적으로 자신의 편인 지온이다 보니 로빈도 편하게 켄트가 비리를 저지른 거 같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온도 나이는 어리지만 말하는 태도가 의젓한데다 사적으로는 딸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 로빈의 이야기를 허투루 듣지 않았다.

이렇게 재정 관리의 대가 지온이 로빈의 진영에 합류하게 되었다.

지온과 앞으로의 계획을 수립하고 로빈이 그의 숙소를 떠나가기 전. 지온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로빈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도련님. 그 약… 많이 비싼 겁니까?”

“음? 현재의 가격을 말씀하시는 거면……. 솔직히 비싼 약은 아니에요. 다만 구하기 까다로운 재료가 섞여있어서 구하기는 좀 많이 번거롭고요. 그런데 왜요?”

“그 사실…….”

지온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지온과 실비아가 사고를 당할 당시, 실비아를 호위하고 있던 용병이 있었다. 그리고 어린 실비아가 작은 상처만 입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용병이 목숨을 걸고 실비아를 지켜줬기 때문이란다.

결국 사적으로는 지온의 친구이기도 한 그 용병 역시 실비아처럼 마나 프로즌에 전염된 상황이었다. 그나마 건강 체질이라 아직 거동이 불편한 정도는 아니지만, 점점 더 상태가 악화하고 있었고.

한 작은 용병단의 단장이기도 한 그 친구가 마나 프로즌에 걸리는 바람에 그 용병대도 지금 모두 치료제를 찾아 사방팔방을 헤매고 있단다.

“그러니까… 검은 곰 용병단이라고요?”

“네. 규모는 작지만, 알짜배기 용병단입니다. 그 친구도 용병답지 않게 책임감과 의리가 있는 녀석이고요. 만약 여유가 되신다면…….”

허, 이게 이렇게 되네.

퀘스트가 보상으로 알려준 검은 곰 용병단이 이런 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니.

물론 마수 핵이 조금 아깝긴 했다.

하지만 당장 팔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괜찮은 용병단의 마음을 사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잘 협조해 줘서 마수의 습격을 한 번만 잘 막을 수 있어도 그 마수 핵 가격으로는 충분했으니까.

영지민의 수가 적어 한 명 한 명이 소중한데 인심 좀 쓰지, 뭐.

게다가 지온의 성향을 보니 그 친구의 성격이 어떨지 대충 짐작이 갔다. 물론 지온의 설명도 그러했고. 그러니 퀘스트 보상을 믿고 마음을 좋게 쓰기로 했다.

“네. 좋습니다, 지온 님. 이곳으로 오시라고 하세요. 제가 약을 만들어놓을 테니까요.”

“오… 감사합니다, 도련님.”

결국 검은 곰 용병단까지 부른 로빈은 자신의 목적을 모두 이룬 후 루이와 함께 안락하고 따듯한 자신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터벅터벅 걸어가던 로빈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지 루이를 바라보았다.

“이상하죠, 루이 경. 전 지금 다섯 살이잖아요?”

“그렇죠. 도련님이 영민하시긴 하지만 다섯 살이긴 하죠.”

“그런데… 왜 사람들이 제 말을 잘 들어줄까요? 이상하잖아요? 우리 가족들이나 폴 경은 그렇다 쳐도 지온 님까지 처음부터 제 말을 무시하지 않았거든요.”

솔직히 로빈이 이 일을 시작하면서 가장 걱정한 것은 바로 자신의 나이였다. 만약 이곳이 전생에 자신이 살던 곳이었다면 다섯 살 어린아이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일이 술술 잘 풀렸다.

“음… 아마 그건 지온 님이 황궁에서 일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곳에서 사는 황자님들이나 황궁을 자주 방문하는 고위 귀족의 아이들을 어리다고 무시하다가는 아무리 재무관 보좌라고 해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테니까요. 아마 그래서 아이의 말이라도 귀담아듣는 습관이 붙은 게 아닐까요? 실제로 황자님들은 어리지만, 대단히 영민하시기도 하고요.”

“아… 그건 또 그런가요?”

하긴 우리 황태자 형도 어렸을 때 참 영리했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실제로 일곱 살부터 국정을 도왔다고 했던가? 물론 좀 호구스럽게 착해서 3황자에게 당하긴 했지만.

아마 지금은 황태자가 회귀하기 전이니 한창 호구스럽게 착한 황태자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조금 궁금하긴 하네. 지금의 황태자가 어떨지.”

“네?”

황태자의 회귀는 황태자 기준으로 15세 성인이 된 직후였다. 그리고 자신보다 황태자가 세 살 많으니 대략 7년 정도 남은 상황.

아마 지금 황태자는 황제를 도와 조금씩 국정을 돕고 있을 것이다. 뭐, 어차피 자신이 황태자를 보러 갈 방법은 전혀 없었으니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서 가죠.”

그렇게 다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루이가 조심스럽게 로빈에게 물었다.

“그런데 도련님, 그 검은 심장이란 것이 제법 귀한 것이라는데 차라리 지온 님에게 이야기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아, 귀한 거니까 은혜를 갚으라고요? 에이, 뭐 하러 그래요? 말 안 해도 어느 정도는 알 텐데요. 황도에서도 속수무책인 마나 프로즌의 치료제잖아요. 그게 귀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되죠. 그리고 이곳에서 일하는 것만 해도 은혜를 갚은 거예요. 이런 작은 영지에서 황실 재무관 보좌를 어떻게 써요? 너무 과한 걸 바라는 건 오히려 좋지 않아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캔링을 장복해야 한다는 거짓말을…….”

“헤헤. 그래도 조금 불안하긴 하더라고요. 실비아가 나았다고 홀랑 떠나버리면 곤란하잖아요. 적어도 그 정도 족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마나 프로즌에서 회복되어도 마나가 조금 불안정하긴 할 테니 제 말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죠.”

루이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로빈이 쿨한 건지, 사악한 건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 루이 경. 이거 받아요.”

“이게…….”

“치료제 두 병이에요. 이걸 그때 그 노파에게 가져다주세요. 대가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건 좀 그렇잖아요? 주고받는 건 확실해야죠. 아마 지금 그 노파에게 손자를 회복시켜 줄 이 약보다 더 간절한 건 없을 거예요.”

“아…….”

“그리고 원래 진심으로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 가치가 있는 법이에요.”

로빈은 그때 자신의 할아버지가 베푼 선정에 깊이 감사하던 노파를 생각하며 작게 웃음 지었다.

당장 큰 산을 하나 넘은 로빈은 자신의 방에서 상태창을 바라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S급 퀘스트 추가 보상. 타이틀 창 업데이트]라는 문구가 깜빡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구난방에 서로 우위조차 전혀 알 수 없어 만든 사람을 욕할 수밖에 없었던 정보 창이 어떤 식으로 변했는지 로빈도 궁금할 지경이었다.

“업데이트라더니 변한 게……. 개뿔도 없네. 아, 이건가?”

타이틀 창에 나타난 등급 표시가 바로 유일하게 변한 점이었다.

무언가 변했다는 걸 알게 된 로빈은 그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온 집 안을 돌아다니며 가족들의 타이틀을 살펴보았다.

“살림꾼(C), 이건 커먼인가? 그리고 와… 불세출의 예술가(L), 이거 설마… 레전드냐? 대박.”

가족들은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아 확정 지을 수 없지만 어쨌든 나름 등급이 매겨지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관저에 나가거나 다양한 사람들을 확인해 보면 조금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이거보다 성향 창이 좀 정리되었으면 좋겠는데. 이건 원래 이런 건가? 무슨 성향이 동사, 명사, 형용사에다가 사자성어까지 섞여있어? 봉구야, 설마 네 지식수준으로 표현되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 응?”

어쨌든 타이틀 창이 좀 더 많은 정보를 준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었다. 항상 대가니 수제니 달인이니 하며 어느 것이 좀 더 뛰어난 타이틀인지 종잡을 수 없었는데 대략의 윤곽은 확인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건 뭐, 이제 됐고. 이제 진짜 중요한 건 켄트의 비리를 찾아내는 거네. 지온,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국민연금 비슷한 이상한 세금 걷는 켄트에게 정의의 죽창을 그냥…….”

그렇게 로빈이 행복한 상상을 이어가고 있을 때 루이는 자신의 아버지 폴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보고하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됐다고? 허허. 영리한 분인 건 알았지만…….”

폴은 턱을 쓰다듬으며 웃음 짓다가 루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떠냐? 진짜 켄트가 비리를 저질렀을 거 같으냐?”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다만…….”

“다만?”

“도련님이 쓸데없는 행동을 할 거 같진 않습니다. 영리하시지만 왠지 좀 게으른 면도 있으셔서 불필요한 행동은 안 하실 거 같으니까요.”

“그래? 하긴 원래 부지런한 집안은 아니지. 그럼 좀 더 지켜보자꾸나. 그리고 그 듀발? 그 아이를 한번 떠보거라.”

“떠보다니요?”

“도련님도 이제 시동이나 종자를 거둘 때가 되지 않았느냐. 도련님에게 큰 은혜를 입은데다가 성품도 괜찮은 거 같으니 잘만 가르치면 도련님을 잘 보필할 거 같구나. 무예는 억지로라도 가르치면 되는 거고. 어린 나이에 마수에게 달려들 정도로 강단 있는 아이이니 사실 자질도 나쁠 거 같지는 않구나.”

“네. 아버님.”

폴은 처음에는 그냥 가볍게 생각했던 로빈의 말이 상황이 진행될수록 이상하게 흘러감을 느꼈다. 생각보다 로빈이 더 진지해 보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로빈의 말대로 자신 또한 이 일에 좀 더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0